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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동안의_다정함으로.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최승미 X 목소

목소, 최승미

제232호

2023.04.27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배우 최승미 님에게

낯선 지면에 누구나 읽을 수 있는 글을 쓴다는 것의 긴장을 오래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처음으로 길게 말을 건네는 이를 향한 편지라니, 좀처럼 문을 열기가 어려워 몇 시간이나 빈 화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승미 님의 얼굴과 목소리를, 단정한 표정을 떠올리는 것부터 차근히 시작해 봅니다.
승미 님을 소개받으면서 덧붙여 들었던 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랫동안 연극 활동을 쉬셨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서신 교환을 청하며 문득 그 기간을 물었을 때 승미 님은 2013년 12월이 마지막 공연이었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처음 연극의 사운드 디자인을 맡았던 것은 그보다 전이지만, 저는 2014년을 사운드 디자이너가 저의 직업이 되리라 불현 예감했던 해로 기억합니다. 그 후로 서로 다른 곳에서 보내온 십 년의 시간에 대해 잠시 생각합니다.
저에게 지난 십 년은 너무 빠르게 흘렀습니다. 공연 단위로 마디를 나누어 매번 다른 온도와 관점들로 동시대의 낮과 밤을 살았고, 극장의 안과 밖을 걸었습니다. 대본 너머의 사람들을 좇아서 저 또한 뜨거워지기도 했고 한없이 낮아지거나 때로는 막막해지기도 했습니다. 밀도 높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과 분리된 생활은 한없이 희박했습니다. 그럼에도 삼십 대란 으레 그런 것이리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걷다 보니 가끔은 어디인지 모를 곳에 저 자신을 남겨두기도 했습니다. 실은 지금도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일과 생활의 경계를 더듬어 솔기처럼 쓸어내리며 탐색하는 중입니다. 짧은 망설임 후 서신을 쓰겠다고 수락한 것도 어쩌면 그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릅니다. 동료의 얼굴을 그리며 차분한 목소리로 그의 여정에 대해 묻고 싶었습니다. 어느 길을 거쳐 우리가 잠시 함께 존재하는 여기에 왔으며 이윽고 어디로 향하고 싶은지, 멀리 있던 마음들이 오래된 안부처럼 궁금해졌습니다.
올해 초 무대에선 처음으로 승미 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사석에서 늘 보여주셨던 미소가 물러난 자리에 대사가 새겨졌고, 정확하고 경쾌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연극을 늦게 만난 탓에 승미 님의 공연을 이전에는 보지 못했기에, 그 힘이 어디에서 비롯되어 무엇과 만나고 부딪혀 왔는지 승미 님의 지난 여정에 대해 조심스레 질문을 건네 봅니다.

검은 블랙박스 무대를 향해 책상이 놓여있고, 책상 위에는 멀티탭과 태블릿, 하얀 텀블러와 노트북, 패드 컨트롤러가 놓여 있다. 각각에 연결된 전선들이 어지러이 늘어뜨려져 있다. 책상 너머로 빈 의자들이 놓인 무대가 보이고, 두 명의 배우가 사진의 좌우에 앉아 보면대를 보며 연기를 하고 있다.

연극을 시작하기 전 제가 가장 오래 했던 것은 랩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한없이 확장되거나 압축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이 소중했기에, 무대 뒤에 머무르는 것이 처음에는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녹진한 어둠 속에 몸을 감추고 숨죽인 채 배우와 동료 스태프의 호흡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제가 오랫동안 몰두했던 사랑의 일들과 다르지 않음을 곧 느꼈습니다.
십 년 전 저를 연극의 복판으로 인도한 친구는 글을 쓰다 만났습니다. 그의 소설이 너무 훌륭했기에 왜 소설을 쓰는 대신 연극을 선택했는지 대뜸 물었을 때 그는 “외로워서”라고 짧게 답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랩을 비롯한 저의 모든 걸음 또한 외로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극장에 머물며 저는 더 이상 전처럼 끝까지 외롭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마주 보아야 할 여러 삶의 얼굴들이 그곳에 있었고, 동료들과 그 의무를 나눠짐으로써 함께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한 2014년, 저는 극장을 생각하며 “서로 다른, 태어나려는 말들 가운데 우리가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썼습니다. 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마음은 유효한 것 같습니다. 느슨한 연결 속에서 우리가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승미 님과 제가 만나 어떤 말들을 함께 엮게 될지, 찾아올 이후의 시간을 기다려 봅니다.
봄볕이 눈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는 계절입니다. 어디서든, 곧 뵙겠습니다.

2023년 4월, 목소 우정인 드림





목소 우정인 님께

정성스럽게 고른 언어들로 가득한 목소 님의 편지에 며칠 동안이나 마음이 설렜습니다. 한 자 한 자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 내려가는 동안 목소 님과의 깊은 연결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 저에게 편지를 보내주셔서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아홉 살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는 거실 테이블에 홀로 앉아 지난 십 년의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그 시간의 무게가 가슴에 묵직하게 내려앉습니다.
출산 직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죽음에 살갗을 쓸리고 돌아와 지난한 회복의 시간을 보내며 줄곧 육아에 매진했습니다. 대체로 절절하게 사랑스럽지만 종종 공포의 대상이기도 했던 아기를 끌어안은 채, 지독한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벌판을 지나왔고, 한밤중의 강도가 급습하듯 들이닥치던 고약한 통증들로 신음했던 날들은 이제 추억이 됐습니다. 감히 목소 님의 편지글을 빌려 표현하자면, ‘눈부시게 약동하는 생명체를 좇아서 저 또한 뜨거워지기도 했고 한없이 낮아지거나 때로는 막막해지기도 했던’ 그런 시간이었습니다. 덧붙여, 가장 고통스러웠지만 그보다 더 무수히 찬란했던 날들로 기억합니다.

밝은 햇볕이 비추는 날, 노란 유채꽃이 가득 피어있는 꽃밭에 나무 벤치가 하나 놓여있다. 벤치에는 배우 최승미가 생후 10개월 된 아기를 허벅지 위에 두 손으로 안고 있다. 최승미와 아이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져있다.

폐허 속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줬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던진 질문이었습니다.
“삶에서 진짜로 소중한 게 뭐지?” 지난 십 년은 줄곧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나가는 여정이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질문이 꽤나 거창한 것 같지만 그 답은 오히려 너무나 사소하고 단순해서 마치 가까이 두고도 찾지 못하는 물건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전까지 저는 저 멀리 환영처럼 일렁이는 허황된 무언가를 잡으려 방황하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살아왔던 것 같습니다. 죽음과 대면한 이후에야 비로소 거추장스러운 짐들을 내려놓고, 어쩌면 예상보다 훨씬 짧을 수도 있는 이생에서 어떤 내가 되고 싶은지, 무엇을 이루고 싶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좋은 엄마’이기 이전에 ‘건강한 인간’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심리 상담을 받으며 해묵은 트라우마와 작별하고, 요가심신치료, 컬러테라피, 아로마테라피 등을 배우면서 누군가의 아픔을 다독여 줄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수년간 끈질기게 들러붙어 있던 통증이 잦아들고,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무렵, 다시 연극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아기를 등에 업고 서성이던 수많은 밤 동안 아마도 불가능할 거라 체념하며 꼭꼭 숨겨두었던 가장 오랜 꿈이 고개를 들었고, 용기 내어 두드린 문 안쪽으로부터 귀한 환대를 받았을 때, 살아서 숨을 쉬고 있어 참 감사하다고 느꼈습니다.
목소 님을 연극의 복판으로 인도한 친구분과 저의 용기를 첫 번째로 받아줬던 사람은 동인인 듯합니다. 그분은 ‘연극은 고통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글을 썼습니다. 그 한 줄이 참 많이 아팠던 지난 시절을 위로해 주는 것 같아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올 초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새롭게 만난 동료들과 실로 오래간만에 작업을 하면서 여러 가지 강렬한 감정들의 부침을 경험했습니다. 스스로를 채근하고 타이르는 가운데 좌절의 그림자도 방문했었지만 다정한 동료들의 ‘들여다봄’ 덕분에 저는 조금 덜 외롭고, 많이 감사한 마음으로 완주할 수 있었습니다. 부디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십 대에 다시 만난 세계는 반갑기보다는 낯설고, 설렘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그럼에도 마음이 흐뭇한 건 역시 새롭게 연이 닿은 목소 님과 이렇게 정다운 편지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편지를 읽고 쓰는 내내 따뜻했습니다. 고맙습니다. 평안하세요.

2023년 4월, 배우 최승미 드림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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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최승미

최승미
2008년 연극 <발자국 안에서>로 데뷔.
이십 대엔 어금니 꽉 깨물고 치열하게 방황, 삼십 대엔 불현듯 방문했던 죽음과 대면하고 매 순간 갱생 당하는 육아의 나날을 보냈습니다.
2023년 마흔, 배우로 복귀. 찰나의 생을 더불어 기쁘게 살아갈 방법에 대해 모색합니다.
인스타그램 @sngmee_kik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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