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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하는 태도로

[무엇을, 어떻게, 왜] 김재훈 X 성수연

성수연

제233호

2023.05.11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독자 여러분, 여러분의 손에 가장 많이 닿았던 것은 무엇인가요? 저는 가끔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볼 때, 저 손에 가장 많이 닿았던 것은 피아노일까 궁금해지곤 했어요. 가장 많이 다룬 것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면, 예술가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작업을 할까요?
창작자 김재훈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 이 대화는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차용하여 기록하였고, 이는 공연 <김재훈의 P.N.O>에 대한 오마주입니다.

서주

성수연
안녕하세요(웃음). 작업실로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재훈
안녕하세요(웃음). 작업실에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수연
올해 초에 창작산실에서 공연하신 <김재훈의 P.N.O>, 정말 잘 보았습니다. 공연을 보고 김재훈 님에 대해 궁금했어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시고, 연극에서 음악감독도 하시고,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의 멤버이시기도 하잖아요. 어떤 생각들로 인해 다양한 작업을 하게 되신 건지, 작업하면서 또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궁금하여 대화를 청했습니다. 공연 <김재훈의 P.N.O>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고요.

제시부
- 1주제: 김재훈의 피아노

김재훈
저는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지만 특출한 재능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손이 큰 것도 아니고 해서 피아노를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어요. 그냥 음악을 하고 싶어 하는 동네 애였는데(웃음), 운이 좋게도 좋은 선생님들을 만나기도 했고, 스스로 즐겁게 연습하고 연주하는 방법은 알았던 것 같아요. 정통 클래식만 연습하지 않았고, 문구점에서 파는 500원짜리 노란 피스 악보, 혹시 기억나세요?
성수연
(웃음) 기억나죠. 아직도 집에 많아요.
김재훈
그런 악보를 연주하기도 했고, 친구들 앞에서 <피구왕 통키> 주제곡을 연주하고, 그것을 다시 새드 버전으로 연주하기도 했고.
성수연
(웃음) 와, 그런 친구 정말 좋았어요.
김재훈
(웃음) 맞아요. 친구들이 “재훈아, 너는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니? 너무 재미있다” 그러면서 좋아해줬어요. 그래서 저도 자꾸 ‘이렇게 하면 재미있어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연주하고 연습했어요.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내가 관심 있는 친구가 나한테 한 번 더 관심을 주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고요(웃음). 그런 재미로 연주를 하니까 피아노가 늘 저와 꼭 붙어 있었던 것 같아요. ‘아, 오늘 시험도 잘 못 봤는데, 피아노나 한 곡 쳐야겠다’ 하면서 <피구왕 통키> 새드 버전을 치고(웃음). 그러다가 음악대학에 진학해 서양 음악을 전공하게 됐는데, 당시엔 학교가 제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음악, 이상적인 환경과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지금의 이야기, 지금 내 주변의 이야기를 좀 더 하고 싶은데, 왜 계속 수백 년 전의 생각들을 따라 하려고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친구와 함께 홍대 앞으로 갔던 것이 제가 음악을, 제 음악을 시작했던 계기가 되었어요.

- 2주제: 김재훈의 P.N.O

성수연
피아노를 해체하여 새로운 악기 P.N.O를 만드셨지요. 어떤 생각을 하며 만드셨는지 궁금해요.
김재훈
저만의 악기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내내 했어요. 물론 저만의 악기는 피아노였어요.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런 무대들은 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고, 홍대는 피아노가 있을 곳이 아니었어요. 작은 공연장에서는 관객을 한 명이라도 더 앉히는 것이 중요한데 피아노는 부피가 크잖아요. 관리도 어렵고요. 키보드로 건반을 연주할 때면 아쉬웠어요. 또 점점 제 곡도 쓰고 앙상블 곡도 쓰면서 피아노를 연주할 일이 많아졌는데, 제가 그토록 거부하려고 했었던 서양 전통음악을 흉내 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리고 다들 기존 악기를 연주하거나, 무대에 맥북을 들고 나가 소리를 내거나 둘 중 하나를 하고 있었는데, 좀 더 제 소리를 낼 수 있는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러다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은 연극 <휴먼 푸가> 작업이었어요. 지금은 문을 닫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했는데, 제가 점유할 수 있는 공간이 작았어요. 딱 그랜드 피아노 한 대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피아노 건반만으로는 인간의 고통을 표현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들었어요. 그래서 프리페어드 피아노 기법을 시도하게 됐어요. 그 과정에서 프리페어드 기법을 잘 수행해낼 수 있는 구조의 악기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거고요.
검은색 바닥의 무대 위에 세 개의 악기가 놓여 있고, 흰색 상의에 검은색 바지, 흰색 신발 차림의 세 퍼포머가 악기를 연주하는 옆모습이 보인다. 악기와 퍼포머들이 번갈아 나란히 있는 모양새다. 악기들은 공연을 위해 업라이트 피아노를 해체해서 다시 만든 것으로, 김재훈이 직접 이름을 붙였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퍼포머는 선 자세로 ‘엘리펀트 첼로’를 연주한다. 다른 두 퍼포머는 ‘핸드 스탠딩 라이언’을 사이에 두고, 양쪽에서 연주한다. 가운데 있는 퍼포머는 서 있고, 가장 왼쪽에 있는 퍼포머는 그를 마주 보고 쪼그려 앉은 자세다. 그 옆쪽으로 ‘터틀 체어’가 놓여 있다. 가운데 있는 퍼포머가 김재훈이다. 악기에 대한 설명은 기사 본문에서 이어진다.
<김재훈의 P.N.O> 공연 사진. 김재훈컴퍼니 제공 ⓒ웨이브필름
성수연
프리페어드 기법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분들도 많으실 것 같은데 설명을 해주신다면?
김재훈
말 그대로 준비된, 미리 만들어진 음색들을 낸다고 해서 프리페어드(prepared) 피아노 기법이라고 해요. 예를 들면 천, 나뭇조각, 너트, 볼트 등 여러 가지 사물들을 피아노 내부의 어떤 음향 구조에 끼워 넣거나 설치하거나 굴려놓거나 삽입을 해서 피아노가 원래 내는 음색이 아닌 다른 음색을 내게 하는 것이죠.
<휴먼 푸가>를 할 때, 저는 피아노 내부의 물성들이 직접적으로 내는 소리를 원했어요. 잘 조율된 열두 음의 건반만으로는 고통의 신음 소리, 함성 소리, 강한 쇠의 소리 같은 것들을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오랫동안 피아노 내부에서 씨름하며 소리를 만들었어요. 그런데 연주할 때 허리가 너무 아픈 거예요(웃음). 피아노는 앉아서 연주하도록 설계된 악기이지, 안에 들어가서 뜯으라고 만든 악기가 아니니까요. 공연 내내 프리페어드 기법을 잘 수행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저만의 악기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구체화되더라고요. 그러다 좋은 기회를 통해 뉴욕에 리서치를 하러 다녀왔어요. 메트로폴리탄에 있는 인류 최초의 피아노를 보기도 했고, 모마에서 정말 크게 펼쳐놓은, 확장된 시각작품들을 보기도 하면서 ‘새로운 피아노로 피아노를 확장해야겠다’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사실 피아노는 요즘 처량한 신세잖아요. 당근마켓에 5만 원, 무료 나눔으로 올라오기도 하고요. 주거형태가 많이 바뀌면서 층간 소음 문제로 피아노의 입지도 많이 바뀌었어요. 저는 피아노의 대이동이라고 생각하는데.
성수연
피아노의 대이동.
김재훈
우리나라에서 생산된 피아노들이 중국으로 많이 가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엔 영창, 삼익뿐 아니라 아리랑, 대우 등 군소브랜드 피아노들도 많았어요. 그때 여러 브랜드에서 기술을 익히셨던 분들이 많으니까 지금도 피아노를 고치실 수 있는 분들이 버려지는 피아노들을 수거하고, 고쳐서 중국에 파시는 거예요. 중국은 피아노 시장이 더 커지고 있거든요. 우리나라는 피아노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이지만, 층간소음 걱정 없이 방음장치까지 다 해놓고 취미 피아노를 할 수 있을 만큼 소득 수준이 높은 분들은 일본 브랜드를 구입하시는 경우가 많아요. 일본의 야마하, 가와이 피아노들은 한국으로 오고, 한국의 피아노들은 중국으로 가고. 이러한 피아노의 이동 흐름이 좀 보이더라고요.
이 피아노의 대이동 흐름, 저의 성장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피아노, 미국에서 본 좋은 작품들, 최초의 피아노, 한국 사회에 대한 저의 생각 등을, 저만의 악기를 만들고 싶었던 욕망과 잘 엮어서 생각하면 한 편의 공연을 잘 만들어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1주제 반복: 김재훈과 관객들의 피아노

성수연
저는 <김재훈의 P.N.O>를 보면서 피아노라는 악기가 시대를 말하기에 정말 좋은 사물, 혹은 개념이라고 생각했어요. 피아노를 통해 시대의 변화가 보이니까 재미있더라고요. 공연을 보고 피아노를 다시 치고 싶어서 동네에 있는 피아노 학원 한 군데에 전화를 해보았는데, 성인 레슨이 없었어요. 초등학생 때처럼 피아노 가방 들고 매일 학원에 가서 한 시간씩 치는, 그런 생활을 해보고 싶었는데(웃음). 본가에 피아노가 있지만 층간소음이 걱정돼요. 그 집에 초등학생 때부터 살았는데, 그땐 마음 놓고 쳤었거든요. 다른 집에서 들리는 피아노 소리가 싫지도 않았었고요. 집집마다 울리던 소나티네 1번(웃음). 끝까지 들어본 기억은 없지만(웃음).
김재훈
(웃음) 층간소음을 참아줄 수 있었던 공동체의 시대였지요. 공동육아의 느낌이 있는 시대이기도 했고요. 저희 어머니도 항상 누군가의 집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시면서, “쟤가 저 부분 늘 틀리더니 이제야 다음으로 넘어갔네”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웃음). 그런데 요즘은 피아노를 치는 일로 싸움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인식들이 많이 바뀌어서요.
성수연
맞아요. 공연을 보며, 어떤 면에서는 지금보다 좀 더 너그러웠던 때의 감각이 기억나더라고요. 아마 많은 관객분들이 재훈 님의 피아노 이야기를 통해 본인이 살아온 시간 또한 떠올렸을 것 같아요. 예전에는 대부분의 어린이들이 피아노를 배웠잖아요. 제 주변에도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피아노를 배우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누구나 바이엘은 떼는 느낌.
김재훈
필수 교양 같은 공통의 악기. 누가 “나 체르니 40” 이러면 “우와!” 하면서 감탄하고(웃음).
성수연
공연에 피아노 학원 장면도 있었잖아요. 피아노 한 대 있는 작은 방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선생님이 그려주신 동그라미 표시에 체크하고(웃음). 볼펜으로 탁탁 박자를 맞추시다가 틀리면…
김재훈
손목을 탁 치시고(웃음).
성수연
맞아요(웃음). 답답해서 쿵쾅쿵쾅 치면 작은 창문으로 지켜보시던 선생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시며 “수연이 피아노 치기 싫으니?” 하시고.
김재훈
배우님은 정말 피아노에 대한 찐득한 기억들을 갖고 계시는군요(웃음). 마지막 코다 장면에 저와 동료들이 많은 분들께 부탁드려서 받은, 어린 시절에 피아노 치는 사진들이 쭉 나오잖아요. 그 장면에서 우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해요. 관객들을 울게 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많은 분들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정서가 있었던 것 같아요. 요즘은 그때처럼 피아노를 많이 배우지는 않는대요. 그래서 이 공연이 저보다 훨씬 젊은 분들께는 공감을 못 받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성수연
어떤 식으로든 누구에게나 다가가지 않았을까요? 공연에 아주 오래전 피아노의 이야기도 나오잖아요. 저도 제가 태어나기 이전의 피아노를 떠올리게 되기도 했어요. 저희 엄마는 고향이 부산이신데, 한국전쟁 이전에 태어나셨어요. 서울에서 피난 온 음대생 언니가 치던 피아노 소리가 너무 좋아서, 매일같이 숨어서 그 연주를 듣곤 하셨다는 거예요. 음악을 정말 좋아하세요. 그래서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엄마 덕에 뒤늦게나마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어요. 대단한 재능은 없었지만 피아노 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고,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제 피아노를 갖게 됐어요. 그날은 제 인생에서 여러모로 아주 중요한 날이었기 때문에 저는 아직도 그 피아노를 갖고 있어요. 누가 달라고 해도 주지 않았고, 어머니께서도 자리 차지하니까 이제는 버리자고 하셨지만 절대 보낼 수 없더라고요.
김재훈
피아노를 운반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머니들께서 피아노를 팔거나 버리려고 운반사를 부르셨다가 막상 가져가려고 하시면, 죄송하지만 출장비를 드릴 테니 그냥 가시라고, 내가 칠 줄은 모르지만 내 딸이, 내 아들이 치는 소리를 너무 좋아했는데 보내려니까 안 되겠다고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대요. 피아노는 단순히 악기나 가구가 아니라 어떤 기억의 덩어리인 것 같아요. 배우님, 휴지 좀 드릴까요?
성수연
(눈물)(웃음) 괜찮습니다. 제 피아노에는 누르면 나오지 않는 건반이 두 개 있어요. 조율사 선생님을 한 번 모셔야 하는데 “얘는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 보내시죠.” 하는 소리를 들을까 봐 무서워서 모시지 못하고 있어요.
배우 성수연. 가슴께까지 오는 긴 머리에 푸른색 셔츠와 하늘색 청바지를 입었다. 검은색 소파에 앉아 무릎에는 태블릿 PC를 올려놓고 있다. 오른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는 모습이다. 소파 옆 탁자에, 코끼리 조각상과 나무줄기를 엮어 만든 갓이 씌워진 스탠드, 길고 얇은 잎이 빽빽하게 자란 화분이 있다.
김재훈
그래도 금손을 가진 선생님들께서 한 번 봐주시면 확실히 좋아질 거예요. 피아노가 손이 많이 가죠.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줘야 수명이 늘어나요. 피아노에는 확실히 수명이 있어요. 한 대의 업라이트 피아노는 한 사람의 음악가를 청년까지 키워주고 은퇴하여 버려진다는 말이 있어요. 그랜드 피아노는 더 길게, 거장이 될 때까지 버텨준다는 말이 있고요. 피아노들에는 기대수명이 있어요. 슬프지만 개와 고양이에게 어느 정도 기대할 수 있는 수명이 있는 것처럼요.
성수연
공연 중 영상에 나왔던, 피아노들이 떠나거나 폐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울컥했어요.
김재훈
수거된 피아노들이 모여 있는 장소는 마치 피아노의 공동묘지 같았어요. 사랑받다가 버려진 것들을 보는 일은, 그게 아무리 무생물이어도 슬픈 일이더라고요. 배우님의 피아노에도 그런 이야기들이 있듯, 피아노들이 갖고 있는 이야기들이 각각 다 다르잖아요. 이 피아노는 어디서 태어나서 어디로 갔다가 어디로 가서 버려지는가. 그것들을 한번 추적해보고 싶었어요. 우리는 무대 위 피아니스트만 보지만 조율사, 운반사, 또 판매하고 수거하시는 분들이 없으면 피아노 공연은 할 수 없으니까요. 그분들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어서 취재했던 것이 공연에 도움이 많이 되기도 했고, 정말 좋았어요.
공연 중 영상에 나왔던 장소는 폐기될 피아노 수거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어요. 원래는 굼벵이 양식을 하는 곳이었다고 해요. 그 비닐하우스 안에 최악의 상태에 있는 피아노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함께 촬영을 가셨던 감독님에게도 저에게도 정말 몸으로 느껴지는 슬픔이 있었어요. ‘얘네들은 차게 식었구나. 손길을 받지 못해서’. 그곳에서 피아노 두 대를 데려왔어요.
그곳을 운영하시는 선생님과 대화를 하면서, 버려지거나 고쳐지는 피아노들에 대한 이야기를 공연으로 만들고자 하고, 선생님의 이야기도 공연에 담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냐며 부끄러워하셨어요. 그래도 이런 공연은 여태껏 없었고, 이런 피아노들이 무대에 올라가서 소리를 내게 될 거라고 말씀드리니까 당장 가져가서 잘 써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피아노 두 대를 운반비만 부담하고 받아왔어요. 그 피아노들이 P.N.O가 되었고요.
성수연
여기에 있는 이 피아노는 어떤 피아노인가요?
김재훈
이 피아노는 70년대생으로 저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요. 굉장히 잘 만들어진 피아노예요. 폐기를 위해 수거된 피아노가 있는 곳이 아닌, 피아노의 대이동이라는 흐름 속에서 중국 수출을 위해 수거된 피아노들이 있는 곳에서 데려왔어요. 보통 피아노는 저음부를 쳐보면 상태를 빨리 알 수 있는데, 굉장히 좋은 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이미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된 피아노였지만, 마치 운명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노력 끝에 제가 데려올 수 있었어요.
성수연
와, 야마하네요. 정말 피아노의 대이동이네요.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가 중국으로 가려고 했는데, 이 장소로 오게 되었네요.

- 2주제 반복: 김재훈과 동료들의 P.N.O

성수연
악기들을 자세히 봐도 될까요?
김재훈
네. 이것이 버려진 영창 피아노로 만든 업라이트 p.n.o1) 입니다. 제 브랜드를 붙였어요(웃음).
성수연
이 악기 연주하시는 장면 정말 멋있었어요. 악기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주세요.
김재훈
우리가 지금 시대에, 버려진 피아노로 새로운 P.N.O라는 악기를 만들려면 무엇을 근거로 만들어야 할지 훌륭한 동료들과 토론을 많이 했어요. 이 공연은 ‘피아노는 반주악기이자, 합주악기이자, 사람들이 모이는 어떤 공간이다’라고 생각하며 만든 공연이에요. 저는 조성진, 임윤찬과 같은 초일류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정말 정말 사랑해요.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제 주변에도 많이 있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피아니스트들도 생각하게 돼요. 피아노가 자꾸 버려지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많이 쳐야 하는데, 이 일을 통해 초일류가 되거나 유명해지는 사람들은 극소수이고, 이런 구조 안에서 갈 곳이 없어지는 사람들도 있거든요. 그래서 새로운 P.N.O를 만들면서 이 악기는 반주악기, 합주악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달려서 무조건 우승해야 하는 그런 악기가 아니라, 사람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는 악기여야 한다고. 어린 시절에 제 동생은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동생이 ‘마법의 성’ 멜로디를 연주하기 시작하면 제가 피아노로 반주를 넣다가 갑자기 코믹하게 바꾸며 놀던 기억이 있어요.
성수연
‘피구왕 통키’는 새드 버전으로, ‘마법의 성’은 코믹 버전으로.
김재훈
네. 동생이 “오빠, 뭐야!” 그러고(웃음). 가끔 제가 ‘섬집 아기’를 치면 저쪽에서 듣고 계시던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어요. 목소리가 꽤 고우세요. 저는 가정에 있는 피아노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반주를 하고, 합주를 하고. 그래서 보시는 것처럼 한 대의 피아노를 분리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들었어요. 피아노는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단순히 악기인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플랫폼이라고 주장한 것이죠. 2층짜리 구조물이었던 그랜드 P.N.O를 무대에 세움으로써 그 생각을 더 구현했어요. 관객과의 대화 때, 어떤 분께서 ‘저 구조물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린다’고 하셨을 때, 일단 층간 소음만은 없는 곳이라고 말씀드리기도 했어요(웃음). 층간 소음을 참아줄 수 있었던 공동체의 시대를 그리며,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연주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서의 악기를 만들고 싶었어요.
또 한 가지, 백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예전에는 백건을 코끼리의 상아로 만들었대요. 한때는 상아가 없는 코끼리가 우세종이 될 정도로, 많은 코끼리들을 상아 때문에 죽였다고 해요. 그래서 업라이트 p.n.o를 구성하는 악기들 중 하나로는 코끼리의 고통을 말하고 싶었어요. 아까 말씀드렸던 프리페어드 기법을 사용해서요. 모든 악기가 다 프리페어드 기법을 수행하기 좋은 형태로 만들어져 있지만, 이 악기는 특히 코끼리의 울음소리를 잘 표현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어요. 이렇게 스피커를 연결해서 들으면,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소리가 나요.
성수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까 악기의 모양에서도 코끼리가 연상돼요.
현악기 ‘엘리펀트 첼로’와 연주하고 있는 김재훈의 손이 보인다. ‘엘리펀트 첼로’는 납작한 나무판에 두 개의 줄이 나란히 길게 당겨져 있고, 그 위에는 오른쪽 위에서 왼쪽 아래로 스프링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두 개의 줄은 피아노 내부에 있던 금속으로 된 줄이다. 김재훈은 한 손으로 줄을 누르고, 다른 손에 활을 들고 줄을 켜 소리를 내고 있다.
현악기 ‘엘리펀트 첼로’의 옆모습과 악기를 다루는 김재훈의 손이 보인다. 옆에서 본 ‘엘리펀트 첼로’는 납작한 나무판 양쪽 끝에 금속으로 된 기다란 막대 두 개가 세로로 고정되어 있고, 그 끝에 스프링이 연결되어 있는 모양이다. 이 나무판은 피아노 몸체의 뚜껑 부분에 붙어 있다.
김재훈
그래서 ‘엘리펀트 첼로’라고 이름 붙였어요. 그리고 여기 보이는 이것은 ‘핸드 스탠딩 라이언’, 물구나무선 사자입니다. 피아노 다리의 이 문양은 제가 어릴 때 치던 피아노에도 있었는데, 사실 동물을 박물하는 장식이잖아요. 그런 문화를 비판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거꾸로 세웠어요. 공연 때는 이 위에 피아노에서 떼어낸 흑건들을 달아놨었는데, 여기에서 백건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말이기도 했어요.
성수연
정말 멋진 주장이고 선언이었네요.
김재훈
거꾸로 연주하게 만들어 놓은 것도 일종의 반항이었어요(웃음). 코끼리들의 고통, 박물된 동물들… 이런 식으로 서양음악사에 누적되어 있는 잘못된 선택들을 거슬러 올라가고 싶다는 생각으로요.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연주할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아서, 프리페어드 기법을 수행하기에 용이해요. <휴먼 푸가> 때, 허리가 아팠던 것이 이런 결과로 나왔네요(웃음).
성수연
(웃음) 저 한 번 눌러봐도 돼요?
김재훈
그럼요.
성수연
(눌러본다) 우와. 이런 소리가 나다니. 프리페어드 기법이 이런 것이군요.
건반악기 ‘핸드 스탠딩 라이온’과 그것을 눌러 소리를 내 보고 있는 성수연의 옆모습이 보인다. ‘핸드 스탠딩 라이온’은 내부의 모습이 보이도록 분리된 피아노가 거꾸로 놓인 모양이다. 악기 윗부분에는 동물의 다리 모양으로 조각된 피아노 다리가 거꾸로 서 있고, 전면부에는 여러 개의 금속 줄들과 나무 해머들이 드러나 있다. 빽빽한 금속 줄 사이사이에 프리페어드 기법을 위한 나사, 스폰지 등이 설치되어 있다. 연주자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손가락으로 나무 해머를 건드려 연주하도록 설계된 악기다. 성수연 또한 아래에서 위로 건반을 누르고 있다.
김재훈
네. 각도를 틀어보기도 하고, 여러 물질들을 넣어보기도 하면서 원하는 소리를 만들어내는 거죠. 소리 하나하나 모두 피아노가 낼 수 없을 것 같은 소리들이 나게 만들었어요.
성수연
실제로 보니까 쉽게 이해가 되네요.
김재훈
마지막으로 이 악기는 우리가 재미있는 상상을 하며 만든 악기예요. 처음 한반도에 피아노와 피아노 의자가 세트로 도착했을 때, 어쩌면 사람들이 이 의자 또한 악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봤어요. 양현모 타악기 연주자가, 어쩌면 사람들이 다듬이 두드리듯 두드리며 소리를 내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이디어를 냈고, 그래서 이 악기의 연주 장면을 만들었어요(웃음). 여기에 있는 거북이 등껍질 모양처럼 갈라진 부분은 음정을 구분하는 기능을 해요. 이런 식으로 음정을 만드는 아프리카 타악기가 있어요.
한 대의 피아노가 거북이 의자, 코끼리 첼로, 물구나무선 사자, 이렇게 세 개로 분리되었어요. 세 동물이 변신 합체 로봇처럼 각자도, 함께도 연주할 수 있게끔. 타악기, 현악기, 건반악기 이렇게 세 악기가 모여서 업라이트 p.n.o가 된 것이죠.
타악기 ‘터틀 체어’와 그 위에 올려둔 김재훈의 손이 보인다. ‘터틀 체어’는 등받이 없는 피아노 의자 윗부분에 가로로 세 개, 세로로 두 개의 홈이 패인 모양이다. 가로로 패인 홈의 양쪽 끝에는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다.
성수연
그 연주 장면, 정말 정말 좋았어요. 다시 듣고 싶어요.
김재훈
음원으로 나와 있습니다(웃음).
성수연
독주 악기라고 생각했던 한 악기가 분리되어 합주 악기가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멋진데, 각각의 악기에 담겨 있는 생각들이 정말 멋져요. 연주를 통해, 공연의 흐름을 통해 그 생각들이 다 전달되었고요.
김재훈
저도 돌이켜보면 좋은 과정을 거친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저만의 생각이 아니라 여러 훌륭한 동료들의 의견들이 반영이 됐고요.

전개부(자유로운 변형들)
- 전개부1: 음악하는 사람의 연극, 연극하는 사람의 음악

성수연
클래식으로 음악을 시작하셨지만 지금은 연극작업도 하시고, 밴드활동도 하시는데, ‘불나방스타소시지클럽’의 멤버이기도 하시지요.
김재훈
진작에 없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된 밴드에요(웃음). 리더분이 아주 현명하셔서, 서로 간에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아직도 해체하지 않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아주 가끔씩 모여 공연을 하지만, 계속 음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료들이지요.
성수연
그 밴드는 어떻게 시작하시게 되었나요?
김재훈
아까 제가 음대를 다니다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에 홍대 앞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아, 그런데 나중에 생각하니까 의미가 있더라고요(웃음). 확실히 자기 공연을 해보고, 자기 공연의 얕음을 느끼고 나서 학교로 돌아가 다시 수업을 들어보면 당시엔 중요하게 느끼지 못했던 것들의 깊이를 느끼게 되기도 하더라고요.
어쨌든 홍대 앞에 갔고, 정말 작은 클럽에 갔어요. ‘헤비메탈을 하고 나서 바흐를 연주하는 희한한 공간이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간 건데, 저는 그 공간을 참 좋아했어요.
성수연
살롱 바다비 맞지요? 저도 한 때 공연 보러 자주 갔어요.
김재훈
와! 정말요? 바다비 아시는 분들 많지 않던데. 거기 있던 피아노도 제가 기부한 것이었어요. 정말 좋아하는 공간이었는데, 젠트리피케이션이 참 속상하죠. 그 공간에서 참 많이 배웠어요. 예를 들면 저는 당시 실수에 익숙하지 않았어요. 클래식은 사실 실수가 잘 용납되지 않는 분야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대에서 실수를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태도로 어떤 말을 하고자 하는지가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때 만난 동료들과 밴드를 하게 된 것인데, 처음엔 ‘돈 주고 음악 배운 애는 안 쓴다’고 얘기해서 정말 웃겼어요. 물론 농담이었고요. 당시엔 거기 피아노가 없었으니까 피아노 대신 멜로디언을 불게 됐어요. 나름 제가 할 수 있는 건반악기를 재미있게 연주했었다고 생각해요. 콧수염을 붙이고 선글라스를 끼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것도 좋았고요(웃음).
만약 홍대 앞에 가지 않았더라면, 저는 아직도 공허한 메아리와 같은 음악 작품들을 쓰거나, 혹은 아예 음악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 아티스트들을 보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제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깰 수 있었어요. 음악이 이야기해야 할 많은 것들이 있다는 점을 홍대에서 배웠어요.
성수연
살롱 바다비에서 한창 공연을 많이 볼 때, 저는 무대 위에서 배우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 고민하던 시기였어요. 재훈 님이 클래식을 전공하신 것처럼, 저도 학교에서 클래식, 그러니까 고전을 많이 다뤘고, 전통적인 방식의 드라마 연극에서의 인물연기를 주로 배웠거든요. 그런데 졸업 이후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하면서 드라마 연극이 아닌 연극에서 대체 배우는 무엇을 붙잡고 연기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됐어요. 그러다 문득 악기 연주자들의 상태를 눈여겨보게 되었어요. 특히 살롱 바다비에서는 연주자들을 정말 눈앞에서 볼 수 있잖아요.
김재훈
(웃음) 네. 그렇죠.
성수연
그때 어떤 연주자들의 상태가 바로 제가 지향하는 어떤 연기의 상태인 것 같다고 생각했었어요. 나의 집중을 내 안이 아니라 내 밖으로 보내고, 내가 만나는 것들에 집중하고, 내가 다루는 것들에 집중하고, 감정보다는 정확한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감정이 발생하거나 사라질 자리를 열어두는 일. 이런 일들이 바로 연주자들이 악기에게 하고 있는 일처럼 보이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어요. 내 악기, 내가 내고 있는 소리, 다른 사람이 내고 있는 소리, 전체의 흐름 등 외부의 다양한 대상들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기술을 수행하는. 어떤 연주자들은 기도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명상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김재훈
악기 연주라는 것은 누적된 시간이 만들어내는 신체 동작들이잖아요. 악기 연주를 연기라고 말해본다면, 그게 어떤 연기일지는 모르겠지만,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배우 자신에게 최적화된 움직임이 발휘되고, 완전히 물아일체가 되기도 하는, 그런 연기인 것 같아요. 그래서 가끔 음악 공연에 연주 행위 외에 다른 것들이 왜 필요하냐고 하시는 보수적인 선생님들의 말씀도 저는 이해가 돼요. 연주 행위 자체에 사실 볼 것들이 이미 정말 많거든요.
성수연
맞아요. <김재훈의 P.N.O>에서 P.N.O를 연주하실 때, 재훈 님께서 연주하시는 그 상태, 연주 행위 자체를 보는 것이 정말 즐거웠어요. 오랜만에 살롱 바다비에서 봤던, 특정 악기를 아주 오랫동안 다뤄온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특별한 순간을 봤어요. 저도 배우로서 마치 음악을 하듯 연기하고 싶은데 뭘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을지(웃음).
김재훈이 현악기 ‘엘리펀트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김재훈은 밝은 갈색의 짧은 머리에, 검은색 셔츠를 입고, 양 손목에 금속으로 된 팔찌를 하고 있다. 그 앞쪽에 있는 ‘엘리펀트 첼로’는 납작한 나무판 위에 두 개의 긴 줄이 가로로 길게 연결되어 있는 악기다. 김재훈은 왼손으로 줄을 누르고, 오른손에는 활을 들고 줄을 켜는 자세다.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김재훈의 뒤쪽으로 여러 대의 피아노가 보인다.
김재훈컴퍼니 제공 ⓒ웨이브필름
김재훈
이미 잘하고 계신 것 같은데요. 예전에 배우님이 하신 연극 <나와 세일러문의 지하철 여행>을 봤어요. 한국과 홍콩과 일본의 배우들이, 어떻게 보면 각각 다른 악기들이 만나서 앙상블을 이루며 다양한 방식으로 연주를 한다고 생각했어요. 연극은 소재와 형식을 바꿔가면서 매번 다른 방법론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자유롭게 느껴졌어요. 그 공연을 보고 행복한 마음으로 남산길을 걸어 내려오며, 꼭 저 극장에서 저런 작업 한 번 올려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남산예술센터라는 극장도 정말 좋았거든요. 거의 곧바로 <휴먼 푸가>를 하면서 들어가게 되었지요. 결국 제가 극장 문을 닫고 나온 마지막 배우가 되었지만요.
성수연
<휴먼 푸가>를 비롯한 연극작업은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되셨나요?
김재훈
아르코에서 주관하는 기획자 프로그램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만난 기획자님 덕에 ‘공연창작집단 뛰다’의 작품들에 음악감독으로 참여하며, 연극작업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그 기획자 프로그램에서 저의 프로젝트를 실행하며 배운 것들도 이후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고요.
성수연
어떤 프로젝트를 하셨나요?
김재훈
<첩첩산중>이라는 레지던시 프로젝트였어요. 저는 산을 굉장히 좋아해요. 여러 산들을 타면서, 산과 아트 프로젝트를 결합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만든 프로젝트인데, 평창 올림픽이라는 메가 이벤트와 연결이 되었고, 15개국 20명의 아티스트를 초청해서 레지던시를 진행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죠. 그 프로젝트를 하며 정말 많이 배웠어요. 몽골에서 온 마두금 연주자, 이스라엘에서 온 재즈 베이시스트, 아르헨티나에서 온 탱고 기타리스트, 한국의 피리 연주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합주를 하는 쇼케이스 공연을 할 일이 있었는데, 최대한 미니멀해져야 다 같이 연주를 할 수 있더라고요. 앙상블이 복잡해져 버리면 각자의 음률들이 다 달라서 섞일 수가 없는 거예요. 마치 댄스플로우를 깔 듯, 제가 단순하고 미니멀한 구조만 써서 내놓았더니 다들 멋있게 들어올 수 있는 판이 열렸어요.
성수연
멋진 이야기네요.
김재훈
그전에는 선율을 쓸 때도 후크처럼 확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선율들을 쓰고, ‘음악으로 잘 되고 싶어’라는 욕심이 꽁꽁 숨겨져 있는 선율들을 썼던 것 같은데(웃음), 그렇게 하지 않아야 좀 더 넓게 좀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것을 만들려는 마음을 비워내니 더 많은 이야기가 들어온 거죠. 연극에서 음악 작업을 하면서도 많이 배웠어요. ‘더 비워야 된다, 나 자신을 더 없애야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더 뛰어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공연창작집단 뛰다’에서는 배우들과 연습도 많이 하고 즉흥도 많이 하는데, 즉흥을 할 때 보니 제가 음으로 화려한 춤을 출수록 손해더라고요. 더 내려놓고 더 단순하게 할 때 더 멋있다는 것을 배웠어요.
그 시기에 제 이름으로 낸 1집의 제목을 <ACCOMPANIMENT>라고 붙였어요. 피아노 독주 앨범인데, 앨범의 제목은 ‘반주’라는 뜻이잖아요. ‘옆에 있는 소리들에 반주하는 태도로 음악을 만들어 갈게요’라는 다짐 같은 제목이었어요.
성수연
옆에 있는 것들에 반주하는 태도로 음악을 만들어 간다, 정말 아름다운 생각이에요.
저는 사실 합주욕이 있어요(웃음). 악기 하나 잘 다루게 되어 누군가와 합주하고 싶은 욕망. 잘하든 못하든 합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이 있는 것 같아요. 연기를 할 때도 ‘앙상블’에 정확히 포커스를 맞추어 이야기하거나 움직이는 순간을 좋아해요. 합주욕이죠(웃음). 재훈 님의 표현을 빌려오자면 옆에 있는 것들에 반주하는 태도로 연기하는 것이요. 현실적으로 그것이 늘 잘 될 수는 없지만요.
김재훈
그게 어려운 작품도 있겠지만, 가능한 작품도 있을 것 같아요. 가능하지 않을까요?
성수연
네. 가능할 것 같아요. 힘내보겠습니다(웃음). 저는 가끔 연기할 때, 제가 실연하고 있는 부분을 악보라고 생각하면서 얘기할 때가 있어요. ‘이 연기를 악보로 그려본다면’, ‘이 부분을 악보라고 생각해본다면’이라는 표현도 많이 썼고요. 한 번은 오선지를 사서 악보를 그려보다가 포기했어요(웃음). 라벨의 ‘볼레로’를 좋아해서, 그런 형식의 장면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김재훈
정말 재미있는데요. 저는 지금 어떻게 그려야 할지 아이디어가 생각났어요. 제가 나중에 몇 가지 방법들을 말씀드려 볼게요. 한 시간이면 끝나요.

- 전개부2: 피아노 연주

성수연, 쿨라우 소나티네 op.20. No.1 첫 6마디를 연주한다.

김재훈, 뒷부분을 이어서 연주한다.

성수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No.16 첫 4마디를 연주한다.

이어서 류이치 사카모토 ‘Merry Christmas Mr. Lawrence’ 첫 4마디를 연주한다.

김재훈, 박수.

김재훈, 김재훈 ‘36’ 전 곡을 연주한다. (전 곡 듣기)

성수연, 큰 박수와 환호.

김재훈의 곡 ‘36’을 들을 수 있는 유튜브 페이지의 큐알코드
다음은 김재훈이 직접 쓴 곡 소개다. “곡의 템포는 아주 느리지만 규칙적인 4/4박자로 진행된다. 아주 천천히 걷는 사람의 걸음걸이 속도와 비슷하다. 곡의 조성은 단조이지만 의지가 담긴 듯한 반복적인 음정 연주로 인해 슬픔보다는 결연함이 느껴진다. 초반부에 연주되기 시작하는 하나 또는 두 개의 음정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하는 눈송이를 묘사하는 것 같다. 어느샌가 숨겨져 있던 선율이 드러나고 장식적인 음정들이 추가되면서 세상이 하얗게 바뀌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감정을 묘사한다. 그 감정과 별개로 멈출 기미 없는 폭설처럼 계속해서 규칙적으로 연주되어온 음정들은 어느새 매우 두터운 화음으로 거대해져 있다. 피아노의 최저음부가 큰 음량으로 연주되며 결연한 감정이 고조된다. 이어 사람이 폭설 속으로 사라지는 것처럼 감정적인 선율은 마무리되고 다시 규칙적인 화음이 반복되며 곡은 종료된다”.

재현부
- 1주제: 김재훈의 피아노- 36

성수연
이런 멋진 연주를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니. 숨소리도 음악의 일부 같았어요.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이 곡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김재훈
제가 층간 소음에 한이 맺혀서,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지하 작업실을 얻었어요. 춥고 난로도 없었지만, 피아노를 밤늦게까지 원 없이 크게 칠 수 있었던 것이 좋았어요. 그런데 사람이 지하에 너무 오래 있으면 아프잖아요. 밤인지 낮인지 시간 감각도 없어지고요. 어느 날 몸살 기운이 있어서 작업실에서 앓다가 간신히 밖에 나갔는데, 하얗게 폭설이 내리고 있었어요. 정말 아름다웠어요. 뭔가 가슴이 이렇게, 서럽기도 하고, 이 아름다운 풍경을 말하고 싶고, 제 상황을 말하고 싶고, 울컥하고. 그 길로 작업실로 내려가서 막 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쓴 ‘폭설’이라는 곡을 레코딩해서 앨범으로 발표까지 했는데, 너무 아쉬웠어요. 그 뭔가 애타는, 애타는 감정이 표현이 잘 안 된 것 같았어요. 그 후 13년 동안 이 곡을 편곡했어요. 앨범 낸 후에도 몇 번을 다시 편곡하고, 군대에서 제설 작업 지휘하면서도 다시 쳐보고. 악보 에디션이 몇십 개가 있어요.
원래는 이런 버전이었어요. (연주) 이런 식으로 폭설을 표현했어요. (연주) 그러다가 아까 말씀드렸던 첩첩산중 프로젝트도 하고, P.N.O 작업도 준비하면서 어떻게 하면 더 버리고 비워낼 수 있을지를 계속 고민하다 보니, 오히려 아주 큰 눈덩이가 만들어지더라고요. 맨 처음 버전에서는 눈송이들을 다 표현하고, 눈송이들을 진짜 굴리듯이 다 굴려서 표현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왜 이렇게 눈덩이가 안 만들어지나 싶은 거예요. 그런 표현들을 다 버리고, 제가 눈덩이를 굴려 온 과정을 쌓듯 천천히 음을 쌓아가니까 (연주) 큰 눈덩이를 만들 수 있었어요. 비워놓고 시작해야 저의 진짜 이야기들이 다 들어오게 되더라고요.
성수연
비워놓고 시작해야 진짜 이야기가 들어온다.
김재훈
13년 동안 편곡한 곡이니 제목을 ‘13’이라고 붙인 후, 마무리를 짓기로 결심하고 마지막 편곡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게 웬걸, 13년을 붙들고 있던 것이 2주 만에 끝나더라고요. 비워놓고 시작하니까 작업이 정말 잘 되고, 하고 싶은 이야기도 다 들어갔어요. 결국 36세에 완성했다는 의미에서 ‘36’이라고 제목을 붙였어요. 그리고 저음부 건반이 더 있는 뵈젠도르퍼 피아노가 있는 스튜디오를 찾아서 녹음했어요. 곡 말미에 아주 둔중한 꿍 소리가 나는데 지금 이 피아노로는 할 수가 없어요. 그 꿍 소리를 꼭 내고 싶었어요. 거의 음정처럼 느껴지지도 않는 저음인데, 그 음을 꼭 내고 싶었거든요.
성수연
13년 동안 편곡했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편곡의 방향이 재훈 님의 삶에 따른 생각의 변화를 닮아 왔다는 사실도 아름답네요. 곡 자체도 정말 아름답고요.
김재훈
이 곡은 저에게 애틋해요. 제 청년기 내내 저에게 붙어서 함께 살았던 곡이에요. 수없이 많이 편곡했거든요. 쇼팽 스타일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또 다른 스타일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대체 이 곡의 끝은 어디인가 싶었어요. 녹음한 버전도 꽤 많아요. 제 스타일이나 생각의 변화를 들어볼 수 있으니 저도 재미있더라고요. 너무 듣기 싫기도 하고(웃음). “뭐야, 이건 너무 빠르잖아”, “이때는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스타가 되고 싶었던 거야?” (웃음).

- 2주제: 김재훈의 P.N.O- 에 대한, 와 함께

성수연
<김재훈의 P.N.O>의 부제가 ‘철과 나무, 연쇄와 해체의 소나타’이고 공연의 구조도 음악의 소나타 형식을 차용하여 만드셨지요.
김재훈
저는 ‘과거로부터 유일하게 가져올 수 있는 위대한 유산은 형식’이라는 말을 굉장히 좋아해요. 존 케이지가 한 말이에요. 저는 앞으로도 공연을 계속 만들게 된다면 이렇게 음악 형식을 빌려서 만들어보고 싶어요. 단단한 구조의 공연에서, 한 곡 안에 제 이야기를 잘 담아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거든요. 론도 형식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계속 반복되니까요. 아까 배우님이 말씀하신 볼레로 형식도 재미있을 것 같고요.
성수연
이번엔 왜 소나타였는지 궁금합니다.
김재훈
아까 배우님도 잠깐 치셨지만, 우리가 어린 시절에 소나타를 많이 치기도 하고, 사람들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이야기의 원형이 사실 소나타 구조라고 생각해요. 집을 떠났다가 여러 경험을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종의 영웅서사 구조거든요. 제시했다가 발전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구조. 저는 그것을 살짝 비틀어서, 피아노로 시작했다가, 피아노의 시간 여행을 했다가, 다시 피아노가 아닌 P.N.O로 돌아오게 되는 형식을 해보고자 했어요.
성수연
다음 작업은 어떤 형식일지 궁금해요. 다음 작업도 계획하고 계시지요?
김재훈
네. 아시아문화전당의 레시던시 작업을 해요. 이번에는 제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미 주어진 이야기들 중 제가 선택을 해서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제가 꼭 다뤄보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어서 선택했어요. 아마 11월쯤 하게 될 것 같아요.
성수연
음악 자체를 이야기하는 공연은 더 하실 계획이 없으세요?
김재훈
사실 <김재훈의 P.N.O>에 제가 음악을 해왔던 이야기를 많이 넣어서, 후련한 느낌이에요. ‘나는 이 정도로 피아노를 사랑했어요’라고, 제가 가지고 있는 악기와 음악에 대한 이야기는 다 한 것 같아요. 전에는 피아노만 바라보면, 마음 한쪽에 업라이트 피아니스트에 대한 이야기, 반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올라왔거든요. 그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나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들을 하고 싶어요. 피아노와 P.N.O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으니, 이제 피아노와 P.N.O와 함께 다른 이야기를 재밌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코다 - 질문 주고받기

성수연
피아노와 P.N.O와 함께 다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너는 지금 비워져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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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언제가 네 마지막 여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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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네가 최근에 가장 반주를 하고 싶었던 순간은 어떤 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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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나는 외우는 것을 잘 못하는데, 잘 외우기 위해서 어떤 방법을 써? 아주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라든지, 제주도 방언처럼 어려운 말을 해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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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수연
네가 태어나서 피아노로 가장 많이 연주한 다른 사람의 곡은 어떤 곡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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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신이 있다고 믿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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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의 음악에 맞춰 춤춰본 적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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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훈
언제 가장 포기하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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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혹시 슬램덩크 주제가도 새드 버전으로 쳐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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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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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훈
할머니가 돼도 무대에 오를 거지?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1. 공연 제목과 김재훈이 만든 악기 전반, 그리고 그랜드 P.N.O를 칭할 때는 알파벳 대문자를 사용했고, 업라이트 p.n.o를 가리킬 때는 알파벳 소문자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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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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