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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_기억에 귀 기울이며.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이예지 X 목소

목소, 이예지

제235호

2023.06.15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이예지 님에게

우리가 서계동 1번지의 붉은색 건물에서 처음 만났던 그 여름으로부터 벌써 오 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저는 지금 그곳에서 봄볕을 맞으며 <영지>의 첫 공연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란한 두 개의 극장들과 처음 연을 맺은 것은 <고등어>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후로 몇 편의 청소년극을 비롯해 여러 공연에 참여하며 매년 이곳을 오갔습니다. 그러나 서계동의 계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간은 역시 우리가 함께했던 2018년 여름일 것입니다.
그해 국립극단 어린이청소년극연구소에서 기획한 ‘청소년예술가탐색전’에서 예지 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저는 <듣는 시간, 들리는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9명의 청소년 창작자와 사운드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공간이 가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만들어보겠다는 단순한 의도에서 비롯된 이름이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때 우린 더 넓은 의미의 공간을 만들었고, 함께 듣는 시간과 서로 듣는 시간을 또한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소리를 둘러싼 주의 깊고 다정한 노력들 가운데 우리 안에서 ‘듣기’라는 개념이 점차 확장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지 님을 비롯해 함께했던 청소년 창작자 분들이 들려주었던 소리들도 모두 생생하게 생각이 납니다. 특히 네 편의 소설과 희곡을 각각 소리로 표현했던 작업은 재현에서 벗어난 놀라운 창작이자 번역이었습니다. 그리고 한때 기무사 수송대였던 국립극단의 건물들, 내무반과 차고, 정비고 등을 청각적으로 상상했던 것 또한 저에게 다양한 심상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언제나 소리를 만들어 들려주어야 하는 입장으로서, 타인이 만든 소리 자체에 오롯이 집중했던 소중한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 여름은 우리에게 “소리의 뼈”를 응시하는 수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탐색전의 과정이 예지 님에게는 어떠한 여음으로 남아있을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2018 국립극단 ‘청소년예술가탐색전’ <듣는 시간, 들리는 공간> 워크숍에서 참가자 이예지, 정재학이 함께 만든 사운드. 일상의 소음들이 들린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에 새소리가 들리고, 허밍으로 <You are my sunshine>을 부르는 여성의 음성이 이어서 나온다. 그리고 기차가 도착하는 소리, 급작스럽게 유리로 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리면, 잠깐의 정적 후에 고음의 현이 마찰되는 날카로운 소리, 자동차 시동 소리가 차례로 나오고, 높고 가는 벨소리가 주욱 이어진다.

붉은색 건물들에 저는 추억이 많습니다. 사운드 디자이너로 참여한 이력 외에도 <듣는 시간, 들리는 공간>을 통해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처음으로 쇼케이스 연출을 맡기도 했고, 그보다 이르게는 2011년 국가 고문 피해자인 故김태룡 선생님이 출연하셨던 임민욱 작가의 <불의 절벽 2>에서 앞마당을 내달려 가로지르는 액션 연기를 시도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올해는 세 편의 공연에 참여하면서 봄 한 철을 꼬박 서계동에서 보냈습니다. 짐짓 바쁘다 투덜거렸지만 몇 달간의 정겨운 환대가 실은 매우 감사했고, 두 극장의 마지막 계절을 함께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십여 년의 시간 동안, 저는 이 공간에 저의 개인적인 역사를 남몰래 쌓기도 했습니다. 다루기 힘든 문제들과 맞닥뜨렸을 때도, 누군가와 영영 이별을 했을 때도, 앞마당과 등나무 그늘에서 많은 생각과 감정을 쌓고 또 흘려보냈습니다. 붉은색 건물과는 대조적으로 파란 하늘을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다른 극장에서라면 조금 어려웠을 일이지만, 이곳에서만큼은 곳곳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어두운 극장을 벗어나 햇볕에 마음을 널어 말리기도 했습니다. 눈을 감으니 지난 시간 이곳에서 만들고 또 마주쳤던 모든 소리들이 사방에서 쏟아집니다.

정사각형의 화면 안에, 왼쪽 아래 꼭짓점으로부터 윗면의 중앙을 조금 빗겨 난 지점까지, 명확하게 경계가 나뉘어 두 가지 다른 색이 채워져 있다. 한쪽에는 새빨간색이, 다른 한쪽에는 미세한 그라데이션의 하늘색이 보인다. 국립극단의 극장 처마 아래서 하늘을 올려다본 사진이다.

<영지>와 <보존과학자>를 끝으로 이 건물들은 허물어집니다. 그러한 까닭에 서계동 1번지의 역사를 돌아보았던 워크숍의 나날이 더욱 떠올랐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기억의 거처는 이윽고 개인에게 이전될 것입니다. 자료집을 들추다 예지 님이 탐색전을 ‘여름’이라고 표현하신 글을 보았습니다. 저에게도 그 여름의 빛이 여전히 푸릅니다. 그리고 예지 님에게 이 공간은 어떤 장면들로 기억될지,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도 그치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1981년까진 기무사 수송대 정비고였고 2023년 6월까진 소극장판으로 불릴 극장에서, 씁니다.

2023년 5월, 목소 우정인 드림





목소 님께

처음 편지의 작성을 부탁받았을 때의 떨림과 설렘이 기억납니다. 2018년의 여름을 이토록 깊숙하게 들여다볼 일이 생길 줄은 몰랐습니다. 미숙하고 어린, 불완전하던 어린 날의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 제 습성이었습니다. 머릿속의 추억들을 하나하나 꺼내어 말려보는 감각이 생경합니다. 그럼에도 그때의 경험들이 제 안에 살아남아서 아직까지도 양분으로서 쓰여나가고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해 여름 서계동에서 진행했던 ‘청소년예술가탐색전’은 제게 나름의 큰 도전이자 변화였습니다.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를 처음으로 벗어나 완전히 낯선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기까지 꽤 많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중학교에서의 일과를 마치고 홀로 서울역으로 향하던 길에서의 낯선 감각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처음 가보는 서울역은 복닥거렸고,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드는 번잡함이 가득했습니다. 그 길을 지나오면 현실감이 무뎌질 정도로 쨍한 빨간색의 건물이 저를 반겼습니다. 반복되는 학교의 일상과는 또 다른, 별천지 같은 세계로 매주 모험을 떠나는 기분으로 국립극단 소극장 판의 빨간 건물들을 찾아갔습니다.
<듣는 시간, 들리는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진행되었던 워크숍은 제게 처음으로 사운드라는 연극적 장치와 마주하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사운드 작업을 통해 만난 낯선 소리들은 현실의 삶에서 경험해보지 못했던 추상적인 감각들을 건드렸습니다. 국립극단의 푸르던 하늘, 눈에 보이는 빨간 건물들, 견고한 실제와 현실을 사운드로 변환하는 작업은 소리와 추상화가 가진 힘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청각이라는 2차 감각은 시각을 초월하는 생경한 감각들을 일깨웠습니다. 돌이켜보니 그해 여름 워크숍은 기분 좋은 낯섦의 감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처음, 생경함, 낯섦의 감각은 어린 날들의 특권인 것 같습니다. 목소 님과 함께가 아니었다면 그런 값진 경험들을 갖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문득 그때가 그리워집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기하게도 공연과 워크숍의 장면들 하나하나가 파노라마나 사진 앨범처럼 떠오릅니다. 공연 소품이던 줄넘기 줄을 꼭 부여잡고 무대 뒤에서 대기하던 순간. 타닥타닥 공연장을 채우던 줄넘기 소리. 빨간 의자들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조명을 받던 순간. 건물 옥상에서 내려다본 여름의 탁 트인 국립극단. 조명 아래서 낭독하던 직접 쓴 시 구절. 다 같이 연습실에 둘러앉아 서로가 만든 소리를 나누던 일. 빨간 철문 뒤에서 포그와 함께 호흡했던 순간. 그리고 이상하게도 무엇보다 기억에 남는 수영장 씬. 네모나고 푸른 조명 안에서 정말 물고기가 된 것처럼 느리게 헤엄치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렇게 고대하던 공연의 시연이 중간에 멈추게 된 것이, 2018년의 여름을 다시 되돌아보지 않게 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돌아보니 여름만큼 뜨겁고 생생했던 우리의 공연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계절이 끝났다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습니다. 그때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습니다. 이 또한 어린 날의 미숙함이 아닐는지요. 자신의 속살을 천천히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실감 납니다. 5번의 여름을 거쳐 저도 많이 변했습니다.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이 떠 있고, 온통 초록 잎이 무성한 나무들과 연못이 보인다. 연못 중앙의 나무들과 주변 나무들이 물에 비쳐 연못 또한 초록빛으로 빛난다.

목소 님께 전화를 받았을 때 두 편의 공연을 남겨두고 건물들이 허물어지게 되었다는 말을 들었었지요. 물리적인 공간이 사라진다는 말에 비물리적 기억들이 더 선명해진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다시 서울역 그 길이 가고 싶어집니다. 지금 다시 찾은 극장은 어떤 모습이고 또 어떤 감각들을 되살려낼지 궁금해하면서 이만 줄입니다.

6월의 초입에서, 이예지 드림




[사진·사운드: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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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이예지

이예지
<보이스 퍼포먼스 독>, <듣는 시간, 들리는 공간>, <마사지사> 등의 공연에 출연해왔다. ‘소통’의 힘을 아는 연극인이, 그리고 사람이 되기를 희망하며 20대의 시간을 보내고자 한다.
인스타그램 @_foresigh_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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