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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서들_사이의 일.wav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 송섬별 X 목소

목소, 송섬별

제238호

2023.07.27

[이 편지는 연극에서 시작되어]는 두 편지글로 이루어진 대화입니다.
사운드 디자이너 목소가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 그리고 그 누군가로부터 도착한 답장을 함께 싣습니다.

기사의 제목인 “***_***.wav”는 두 필자가 제목으로 선택한 말들을 나란히 놓고, 사운드 파일의 확장자를 붙인 형태입니다. 서로는 서로가 어떤 말들을 선택했는지 모르고, 기사의 제목은 편집부가 그 말들을 수신할 때 완성됩니다.

번역가 송섬별 님, 나의 벗 별에게

오랜만에, 어쩌면 처음으로 씁니다. 우리는 자주 서로의 독자이자 관객이었겠지만, 일에 대한 내밀한 사정은 늘 응원과 염려에 밀려 드러날 곳을 찾지 못했지. 최근 지난 작업을 돌아보다 문득 하나의 언어가 다른 것으로 몸을 바꾸는 과정에 골몰하게 되면서 별을 떠올렸고, 번역의 문제들에 대해 차근히 대화를 나누고 싶어져 말을 건네 보아.
소리라는 매체를 다루고는 있지만 또한 오랫동안 글의 주변을 서성였던 탓인지 나의 사운드 디자인이라는 것은 대체로 대본에 기대어 있어. 쓰이고 또 비워진 단어와 행간에 귀를 기울여 청각적인 단서를 집어내는 과정이라고 거칠게 표현해 볼 수도 있겠다. 나는 나의 작업을 결국 일종의 번역이자 비유라 생각해. 그 이유는 나에게 그것이 일차적으로 언어와 언어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일 거야. 대본을 읽으며 나는, 소리보다 먼저 소리의 언어를 상상해. 날 포함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직 소리에 대한 표현을 많이 갖지 못했지. 딩동, 쏴아아, 똑똑, 슝, 우르릉 쾅쾅… 의성어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매질의 진동을 다른 표현들로 살피고는 해. 다양한 명사와 형용사, 그리고 동사들을 경유해 소리의 상이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말의 몸을 갖게 되면, 그제야 그것은 나에게 청각적인 것으로 감각된다. 그럼 나는 그 소리를 눈앞에 불러내 공기의 진동을 더듬으며 빛깔이나 질감을 떠올리고 리듬을 가늠해. 줄곧 만질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던 손가락은 이제 다른 것을 건드리고 있어.
“시를 쓰는 건 / 내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 내 손가락, 내 몸에서 가장 멀리 뻗어나와 있다. 나무를 봐. 몸통에서 가장 멀리 있는 가지처럼, 나는 건드린다, 고요한 밤의 숨결, 흘러가는 물소리를, 불타는 다른 나무의 뜨거움을.” 1)

<로드킬 인 더 씨어터>의 영문 자막 감수를 위해 별이 명동예술극장을 찾았을 때, 모니터에 건조하게 떠올랐다 사라지는 영문 자막을 리허설 내내 바라보던 뒷모습이 생각나. 그 동그란 집중 안의 마음을 궁금해하며 편지를 쓰고 싶다고 구체적으로 생각한 건, 배리어프리 또는 배리어컨셔스를 고민하는 프로덕션에서 한글 자막을 제공하기 위해 내가 만든 소리를 다시 언어로 옮겨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내가 어느 공연에서 “느리고 거칠지만 무겁지 않게 반짝이는 소리”를 만들었다면, 앞선 표현을 그대로 자막으로 옮길 수 있을까. 경유지의 언어가 공연의 맥락에 닿을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소리에 대한 유의미한 정보로서 작동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은 나에게 오랜 숙제로 남아 있어. 소리와 문자 언어라는 상이한 매체 간의 번역은 결코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때 번역은 무엇이 될 수 있고, 무엇이 되어야 할까.

연극 <앨리스 인 베드>(2022, 국립극단) 테마. “흐릿한 음과 선명한 발자국 소리가 교차되는 음악”
(사운드 디자인: 목소 / 한글자막 번역: 이효진)

뒤늦게 품고 또 꺼내 보는 이러한 생각들에 대해, 별이 무어든 경험과 의견을 나누어 준다면 기쁠 것 같아. 어쩌면 대부분이 언어와 언어 사이의 번역에서도 단지 양상을 달리해 빈번히 벌어지는 국면일 수도 있겠지. 별이 수행하는 번역에서는, 출발어가 번역가를 거쳐 도착어로 옮겨질 때 번역가와 언어 양쪽 모두에게 어떠한 일들이 주로 일어나는지 알고 싶어.
덧붙이자면 연극 텍스트를 옮길 때 소설이나 시의 경우와는 다른 지점에서 접근하는 부분이 있는지, 희곡과 공연 자막의 번역을 둘러싼 많은 물음표를 쉬이 사라지지 않는 마지막 음처럼 뒤로 늘어뜨린 채 글을 맺으려고 해.
후두둑 쏟아지다가도 금세 밝아지는 여름, 몸과 마음 성히 유쾌한 나날 보내길 바라며.

2023년 7월, 목소 우정인 드림





벗이자 동료 목소에게

응, 모든 스태프가 피로한 어깨를 간신히 가눈 채, 그럼에도 꿋꿋이 고개를 쳐들고, 공연 전 마지막 작업에 열중하던 <로드킬 인 더 씨어터> 리허설이 나도 기억나. 고된 작업으로 단단하게 뭉쳐 있던 목소의 뒷목도. 이 공연을 영문으로 옮기는 일은 공연이 아닌 다른 매체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여러 자원을, 또 어려움을 동반하는 작업이었던 것도 기억나.
소리의 언어를 상상해 단서를 찾는다는 목소의 말은 정말로 일종의 번역에 관한 말처럼 들린다. 10년쯤 작업을 해 오면서, 번역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대체로 출발어로 짜여진 글을 도착어로도 ‘말이 되도록 make sense’ 만든다는 재미없고 원론적인 대답을 하지만, 실은 대부분의 작업에서 나는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수많은 단서들로만 가득한 이 글을 어떻게 해야 덜 훼손할 수 있을지, 번역이라는 문턱을 넘어서도 원문의 단서 중 대부분을 독자―관객의 손에 가져다줄 수 있는지를 붙들고 끙끙거리는 것 같아. 마침내 그것들을 조합해 말이 되게 만드는 것들은 아마 내가 아닌 그들의 몫일 거야.
어떤 연습실에 있더라도, 나는 그곳에 모인 사람 중 연극 제작의 원리를 가장 잘 모르는 사람일 거야. 나는 연극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 일을 하다가 짬이 날 때 연극을 보러 가는 사람이니까. 객석에 앉아 무대를 바라보는 일에 익숙하고, 또 그것을 참 좋아하는 사람이지. 그런데 내가 관객이라는 사실은 언제나 도움이 돼. 나처럼 객석에 앉은 사람이 공연의 흐름을 해치지 않고 읽어내릴 수 있는 자막은 어느 정도까지일지, 어떤 말들을 더욱 꽉 붙들고 싶을지, 때로 나는 누구의 개입 없이 뜨겁고 줄줄 흘러내리는, 말이 되지 않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어쩔 줄 모르고 싶기도 해. 그런 게 어떤 말일까, 나는 주로 그런 것들에 대한 크고 작은 판단과 선택을 하고, 실패하고, 그러면서 작업하고 있어.

극장 객석 앞에 설치된 자막용 모니터. 흑백사진이다. 검은 바탕의 화면에 흰색으로 “Roadkill in the Theater”라고 쓰여 있다. 모니터 위쪽으로 스피커가 매달려 있으며, 
                화면에는 밝은 조명 세 개가 반사되어 빛난다.

배리어프리 공연을 완성하기 위한 여러 방면의 노력들은 이런 선택을 돕거나 혼란에 빠뜨리기도 해. <로드킬 인 더 씨어터>는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공연이었지. ‘비둘기가 날아간다’라는 대사를 ‘fly’라는, 너무나 재미없지만 자막 스크린의 공간을 알뜰히 쓸 수 있는 동사로 이미 번역해둔 뒤 마지막 리허설을 보았어. 날아가는 비둘기에 대한 수어통역사의 언어는 날개처럼 두 손을 파닥파닥 움직이며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더라. 그제야 나는 날아가는 비둘기를 말할 수 있는 다른 동사들을 상상할 수 있었지. 떨고, 솟구치고, 헤매는 말들. 아마 나는 무대의 빛과 움직임과 소리의 언어를 때늦게 입력한 뒤에야 실패를 깨닫고, 다시 시도하고, 부족한 어휘를 채우고, 또 내놓으면서, 새로운 단서들을 만져보게 될 거야.
목소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 요즘 우리는 배리어프리 공연을 고민하고는 해. “느리고 거칠지만 무겁지 않게 반짝이는 소리”. 감각의 장벽들을 용해시키기 위해 소리를 움직임으로, 때로는 진술로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목소는 어떤 고민을, 또 어떤 풀이를 떠올렸을까? 10년쯤 전, 막 번역 일을 시작한 내가 허둥지둥 목소가 처음 사운드 디자인을 맡았던 공연을 보겠다며 대학로로 달려갔을 때가 떠올라. 그날 매표소 앞에서 만났던 우리에 비해, 지금의 우리는 좀 더 ‘말이 되는’ 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안 되는 그대로 보여주려 다른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때늦은 답장을 마무리하고 있는 지금은 일제히 우는 매미 소리가 창 너머에서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별안간 뜨겁게 번뜩이면서 온몸을 휩싸는, 아마도 말이 되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은 이런 소리를 옮기는 것은 너의 일일까, 아니면 나의? 어느 쪽이 되었건, 우리가 엇비슷한 고민과 단서들을 손에 쥐고 나란히 머뭇거린다는 데 안도하면서, 답장 기다릴게.

2023년 7월, 너의 별




[사진·사운드: 필자 제공]

  1. 진은영, 「긴 손가락의 詩」,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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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

목소
듣기의 연습을 통해 ‘들리는 것’과 ‘듣는 것’에 대한 질문을 수행 중이다. <앨리스 인 베드>, <홍평국전>, <우리는 농담이(아니)야>, <스푸트니크> 등에 사운드 디자인으로 참여했다.
인스타그램 @morceauxx

송섬별

송섬별
자주 읽고 쓰고 옮기는 관객. 『자미』 등의 책을 옮겼고 <로드킬 인 더 씨어터>, <퇴장하는 등장> 등의 공연을 영문으로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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