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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변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무엇을, 어떻게, 왜] 권은혜 X 성수연

성수연

제240호

2023.08.24

[무엇을, 어떻게, 왜]는 배우이자 창작자인 성수연이 진행하는 대화입니다.
동시대 창작자들이 무엇에 주목하고, 어떻게 작업하며, 그 일을 왜 하는지 들어봅니다.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이 여름을 어떻게 보내고 계실지 궁금하네요.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제가 오랫동안 알던 그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여러모로 애쓰며 지내고 있답니다. 세계에 대한 생각이 바뀔 때마다 연극에 대한 생각 또한 바뀌지 않을 수 없는데, 배우들은 자신의 변하는 생각들을 어떻게 다루며 살고 있을까요? 그 생각들을 연기에 어떻게 적용하고 있을까요? 배우 권은혜 님과 대화를 나눈 기록입니다.

성수연
안녕하세요(웃음).
권은혜
안녕하세요(웃음).
성수연
올해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지요. 어떤 작품들을 하셨고, 또 계획하고 계시나요?
권은혜
연극을 시작한 후, 올해 가장 작품을 많이 하는 것 같아요. <몬순>, <너의 왼손이 나의 왼손과 그의 왼손을 잡을 때>(이하 <왼손>), 낭독공연 <옷장에 구더기>, <오르막길의 평화맨션>, <러브 앤 인포메이션>, 그리고 12월에는 전쟁에 관한 리서치를 하면서 워크숍 공연을 합니다. 열심히 사네. 너무 열심히 살아(웃음).
성수연
권은혜 배우님이 여러 비인간 역할을 많이 하셨다고 들어서 그에 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어요. 최근에 <왼손>에서 로봇 역할도 하셨고요. 사진작가님 계실 때 우리 로봇 포즈로 사진 한 번 찍어볼까요(웃음)?
권은혜
좋아요, 좋아요. 저 배우님이 하신 <액트리스원: 국민로봇배우 1호>를 정말 재미있게 봤거든요.

권은혜와 성수연, 로봇 포즈로 사진을 찍는다. 공간이 조용해진다.

권은혜
로봇 포즈를 취하면 말이 없어지는 것이 재밌네요(웃음).
배우 성수연과 배우 권은혜가 책상을 마주 놓고 앉은 채 고개를 틀어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두 배우 모두 양팔의 팔꿈치를 구부리고 몸통에서 팔을 뗀 자세다. 
            배우 권은혜는 입을 살짝 벌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으며, 배우 성수연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배우 권은혜가 오른팔은 위쪽으로 90도, 왼팔은 몸 앞쪽으로 90도 꺾은 자세로 정면을 바라본다.
배우 성수연이 오른팔은 위쪽으로 90도, 왼팔은 몸 앞쪽으로 90도 꺾은 자세로 고개를 살짝 틀어 아래쪽을 바라본다.
성수연
(웃음). 오랜만에 하려니 쑥스럽네요. <왼손>에서 배우님이 하신 로봇 연기를 정말 재미있게 봤어요. 특히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노쇠한 로봇이 큰 나무와 부딪히는 장면이요. 부딪혔을 때의 모양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왜 배로 부딪히는 선택을 하셨나요?
권은혜
제가 실제로 안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소리가 잘 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했어요. 연습할 때 바닥으로 확 떨어져보기도 했고, 머리까지 부딪혀보기도 했어요. 여러 방법으로 해봤는데 배랑 가슴으로 부딪히는 것이 좋겠더라고요. 의상에 달린 단추 덕에 부딪히는 소리는 잘 나고, 저의 몸은 안전하고요.
성수연
몸이 휘어있는 모양이 굉장히 멋졌어요. 이야기를 나눠보니 더 흥미롭네요. 배우가 안전하기 위해서 선택한 모양인데, 보는 사람에게는 굉장히 위태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던 것 같아서요. 사람의 배와 가슴 쪽엔 주요 장기들이 있어서 그런지 그쪽을 확 열어서 어딘가에 부딪히는 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냥 보는 것뿐인데도 내 배를 확 웅크리게 되는 감각을 느꼈거든요. 휘어있는 모양 자체도 위태로웠고요.
권은혜
그렇게 보여서 다행이네요.
성수연
재미있었어요. 많은 상상을 하게 됐고요. 그러고 보니 <왼손>을 제외하면, 올해 하시는 작품들에서는 전부 인간 역할을 맡으셨네요. 소감이 어떠신가요(웃음)?
권은혜
연극을 시작한 후, 한 해에 작품을 이렇게 많이 하는 것도 처음이지만 일상적인 차원에 있는 인간 역할을 이렇게 많이 한 것도 처음이에요(웃음). 사람들과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역할. 농담이지만 ‘이렇게 편할 수가 있나’ 싶기도 했어요(웃음). 제 생활과 맞닿은, 일상에서 하던 고민들을 적용할 수 있으니까요. 예를 들어 <몬순>의 ‘홀키’는 그냥 ‘권은혜’로서 해도 되는 느낌이어서 좋았어요. 그렇지만 오히려 비인간 역할을 연기할 때와는 다른 고민을 더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고요.
성수연
<몬순>에서 배우님이 맡으신 ‘홀키’는 주된 서사를 가진 인물들의 주변에 있는 것 같아 보여도, 그 인물만의 서사를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생각하고, 직접 드러나지 않는 그의 서사가 매 장면에 굉장히 풍성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비인간 역할을 연기할 때와는 다른 고민을 더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어요.
권은혜
비인간 역할을 연기할 땐, 일상에서의 권은혜가 갖고 있는 가치관과는 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거든요. 다른 관점으로 생각해서 쌓은 가치관을 기반으로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살아있는 인간 역할을 할 땐,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는 친숙한 캐릭터를 연기한다고 생각하니 편한 부분도 있는 반면, 오히려 전사를 비롯한 인물의 여러 부분을 더 많이 쌓아야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어떤 직업을 가졌는지, 그래서 어떤 책들을 접하는지, 그로 인해 어떤 생각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그에 따라 어떤 말투나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비인간 역할을 연기할 때보다는 일상적인 부분을 훨씬 촘촘하게 잡아야 한다고 느껴요. 그렇다고 우리가 비인간 역할을 할 때 촘촘하지 않게 하는 것은 아니잖아요.
성수연
맞아요.
권은혜
조금 다른 층위에서 디테일을 생각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은 인물들의 일상이 드러나는 사실적인 작품이에요. 그래서 일상적인 층위에서의 디테일을 생각해요. 인물의 말투, 인물이 입는 옷 같은 것들까지도요. 나와 인물의 차이점을 생각해보기도 하고요. 반면 <엔젤스 인 아메리카>라는 연극에서 ‘천사’ 역할을 맡았을 때는 또 다르게 접근했어요. 저는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어요. 제가 천사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여러 이미지, 그러니까 하얀 날개, 후광, 인자할 것 같은 느낌 등은 분명히 어떤 매체들에서 본 것이겠지요. 그런 이미지에 반하는 느낌의 ‘천사’를 그려내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하긴 했어요. 지금 <오르막길의 평화맨션>에서와는 다른 방식으로 인물에 접근했어요. 인물의 외형이나 성격을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계속 생각했어요.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인물이었거든요. 그 많은 말 중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를 촘촘하게 생각하는 것이 제 숙제라고 느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며 접근하던 중, 제가 말을 쏟아내는 방식을 보고 의상 디자이너님께서 찢어지고 더럽혀진 의상을 주셨어요. 분장 디자이너님께서는 짙은 눈화장, 바래고 헝클어진 하얀 머리를 디자인해주셨고요. 그렇게 외형이 조금씩 구체화되더라고요.
성수연
재미있어요. 저도 비인간 역할들을 연기할 때 하던 여러 고민이 있거든요. 사실 인간 역할이라고 해도 작품의 형식이나 내용에 따라 인물에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지듯이, 비인간 역할을 할 때도 매번 접근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매번 다른 촘촘함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해요. 저는 이번에 ‘꿀벌’을 연기하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무엇을 근거로 촘촘함을 쌓아야 하는지 여러 각도에서 고민했거든요. 한 가지 방식으로만은 연기할 수 없다는 생각도 했고요.
권은혜
저는 연극이 시대의 흐름을 탄다고 생각해요. 최근엔 어떤 소수성, 테크놀로지 등이 주요하게 말해지고 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정보가 너무 많은 시대이고, 너무 많은 표현이 있고, 어떤 기준점들도 너무 많아서 오히려 많은 것들이 모호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다양한 가치관과 생각들이 혼합된 때를 살고 있기 때문에, 저는 무언가가 딱 하나의 관점으로 이야기되는 일은 위험하다고도 생각해요. 4, 5년 전만 해도 저는 연극을 할 때, 주제 하나를 뽑아서 그것을 위해 달려가는 방식의 작업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어떤 스토리 하나를 뽑아내서 그걸 미는 것이 과연 맞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요. 제가 관객으로 연극을 볼 때도 그래요. 어떤 연극에, 한 가지 방식으로 딱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나열되어 있어도 그중에서 나에게 닿는 생각들을 쏙쏙 가지고 나올 수 있거든요. 저는 그런 공연이 좋아요. 나 동시대를 살고 있나(웃음)? 그래서 배우님이 하신 연극 <B BE BEE>도 정말 좋았어요.
성수연
감사합니다(웃음). 딱 하나로 정해지는 것이 위험한 것 같고, 그것을 미는 것이 맞는지 고민하신다는 부분이 흥미롭네요.
권은혜
맞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서는 결국 하나를 선택해서 밀어 보는 순간이 있겠지만, 그것을 찾는 동안에는 제 생각이 맞는지 계속 고민하려고 애써요. 저는 이런 생각을 일상생활에서도 많이 해요. 제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요. 그래서 사람들과 대화를 많이 하려고 노력해요. 사람들이 제 생각과는 다른,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궁금해요. 특히 공연을 할 땐 같은 작품을 놓고서도 참여자들이 각기 다른 생각들을 하잖아요. 그 부분이 궁금해서 사람들의 생각을 끄집어내서 들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고요.
배우 권은혜. 검은색에 갈색이 섞인 숏컷으로, 이마를 덮는 앞쪽 머리에 풍성한 컬이 들어가 있다. 
            빨간색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으며, 티셔츠 사이로 목둘레를 느슨하게 감은 은색 목걸이가 보인다. 
            오른쪽 귀에 크기와 굵기가 다른 세 개의 은색 링 귀걸이를 하고 있다.
성수연
동감하게 되네요. 그런 고민들을 걸고서, 최근엔 연기라는 행위의 어떤 측면에 관심을 갖고 계시나요?
권은혜
예전에는 저 자신을 위해서 연기했어요. 제가 재미있으려고, 제가 경험하기 위해서 연기를 한 것 같아요. 물론 지금도 그런 부분이 있지만, 요즘엔 제 공연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더 많이 해요.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이 일은 결국 타인에게 보여지는 일이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요. 며칠 전에 혜화동을 지나가는데, 갑자기 어떤 분이 “은혜 배우님 아니세요?” 하고 말을 거셨어요. 알고 보니 제가 했던 어떤 공연을 굉장히 잘 봐주셨던 관객분이셨어요. 또 공연을 보러 가서 줄을 서 있을 때 어떤 분이 “은혜 배우님 아니세요?” 하고 인사를 하시는 경우도 있어요. 얼마 전에 작은 수업을 하나 진행했는데, 어떤 분이 수업 끝난 후에 찾아와서 “배우님께서 하신 그 작품을 보고, 연기를 다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라고 말씀해주시기도 했어요. 이런 말들을 들으면, ‘나는 나를 위해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잘해야 할 다른 이유들이 어느덧 더 생겨났구나’ 하는 생각이 조금씩 들어요. 되도록 좋은 선택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고요. 수연 배우님은 요즘 배우로서 어떤 것에 관심을 갖고 계시나요?
성수연
최근엔 ‘일단 시도하고, 실패를 통해 발견하는 것들에 대해 마음을 더 열어두자’ 정도를 생각하는 것 같아요. 저는 연기의 여러 측면에 흥미를 갖고, 방법을 찾고, 다시 무너뜨리는 일을 늘 하고 있어요. 생각이 자주 달라지고요. 배우님의 말씀과도 통하는 부분인 것 같은데, 연기를 할 땐 매번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이 없는 것 같다고도 생각하고 있고요. 최근에 작품을 할 땐, 그 이전의 저였다면 하지 않았을 여러 선택을 해보았고, 그로 인해 발견한 것들이 또 있어요. 실패의 순간들 또한 그저 실패의 순간이 아닌, 직조하기에 따라 배역의 여러 맥락을 드러낼 수 있는 순간이 되기도 한다는 것도 더 체감했고요.
권은혜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은 계속 달라지는 것 같아요. 몇 년 전에 먹지 않던 음식도 지금은 먹는데요, 뭐. 갑작스럽게 변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성수연
배우들은 배역에 접근하는 자신만의 방법론을 갖고 있거나, 매번 인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자신만의 습관을 갖고 있기도 하잖아요. 배우님은 어떤 편이세요?
권은혜
자신만의 방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좀 부러워하는 것 같아요. 아니, 신기해한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저도 이미 갖고 있는데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저는 제가 주변 환경의 영향을 잘 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권황소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어떤 점에서는 꺾지 않는 고집이 있긴 하지만, 제가 좋다고 느끼는 것들의 영향을 잘 받으려고 노력해요. 그러다 보니 매 공연마다 접근 방식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도서관에 가서 많은 레퍼런스를 읽으며 나에게 와닿는 감각적인 부분들을 찾아내기도 하고, 또 어떤 공연을 할 땐 영상을 많이 보기도 했고요. 어떤 비인간 역할을 연기할 땐, ‘동물의 왕국’을 계속 보기도 했어요. 특정 배우를 레퍼런스로 삼아서, 그 배우의 연기를 다 찾아본 적도 있고요. 인터뷰 영상까지도 다 찾아봤어요. 그런 식으로 어떤 실마리 하나를 잡아서 영감을 확장하는 것 같아요. 매번 달라요. 누군가의 말이 실마리가 될 때도 있고,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서 우연히 발견한 글귀가 실마리가 될 때도 있고요.
성수연
굉장히 재미있네요. 저도 매번 달라지는 편인데, 어떨 때는 힘들어요. ‘경력은 쌓여만 가는데, 왜 매번 처음 하는 것 같지?’ 싶고(웃음).
권은혜
(웃음) 재밌기도 하지 않으세요?
성수연
맞아요. 또 한 편으로는 ‘나는 매번 처음 하는 것 같지만, 내 몸 어딘가에는 무엇인가가 조금씩은 쌓이고 있겠지, 감각이 되어 남고 있겠지’라고 믿어보기도 하고요.
매번 적용할 수 있는 연기법은 없더라도, 자신만의 훈련법을 가진 경우는 꽤 있던데 배우님은 어떠세요? 배우로서 몸과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거나 발전시키기 위한 훈련일 수도 있겠고, 넓게는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배우로서의 자신과 연결시키려는 훈련일 수도 있겠고요. 아까 잠깐 말씀하신, ‘내 생각이 맞는지 계속 고민하려고 애쓴다’ 또한 배우님의 훈련이라는 생각도 들거든요.
권은혜
맞아요. 또 하나 제가 노력하는 부분은 ‘편한 환경 만들기’예요.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 또한 편한 환경에서 작업할 때 아이디어가 잘 나오거든요. 그래서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요. 저는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과 편해지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데, 보통 공연을 할 때 길어봐야 세 달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내잖아요. 사람마다 친해지거나 편해지는 속도가 다른데, 친해질 만하면 끝나는 것이 매번 아쉬웠어요. 그래서 제가 찾은 방법은 ‘헛소리하기’예요(웃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저는 사실 제가 편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하는 말들이 헛소리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동료들에게 ‘나는 당신들이 편안하게 많은 이야기를 해도 되는 사람이다’라고 알리는 일이기도 하고요. 그게 저만의 훈련의 첫 단계인 것 같아요. 편안한 환경 만들기. 그걸 위해 헛소리하기(웃음). 수평적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중간에서 노력하는 일도 좋아하는 편이고요.
성수연
와, 굉장히 멋져요. 연기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하는 것 자체를, 정확하게 ‘배우로서의 연기 연습’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계신 거네요. 그 과정에서 결국 동료들과의 관계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요.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배우가 가진 태도들이 그저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배우로서의 노력과 훈련의 일환이라는 점이, 그것을 연습 자체로 생각하신다는 점이 굉장히 감동적이에요.
권은혜
지금은 그런 일이 편해졌어요. 그렇지만 초반에는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이 맞아요. 저는 워낙 경직되어 있던 사람이었고, 이를 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거든요. 예전에는 사람들이 저를 굉장히 딱딱한 사람으로 봤어요. 첫인상은 오래가는 편이잖아요. 그걸 깨기까지가 힘들었어요. 그래서 아마도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던 것 같아요. 지금도 여전히 그렇고요.
성수연
배우님의 그런 편안한 태도가 굉장히 부러워요. 저는 편안하기 위한 노력을 열심히 하다가도 작품을 하다 보면 점점 눈빛이 이상해지곤 하거든요. 매드 싸이언티스트 같다는 소리를 들을 때도 있고(웃음).
배우 성수연. 팔꿈치를 넘어가는 긴 머리를 풀어 늘어뜨리고 있다. 반소매의 청색 남방을 입고 있으며, 살짝 웃는 얼굴이다.
권은혜
저는 또 그런 모습을 부러워하기도 해요. 저한테는 별로 없는 면이어서요(웃음).
성수연
팀 내에서 하시는 그런 노력들이 피곤하거나 스트레스가 될 때는 없으세요? 안전조력자 역할도 하셨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권은혜
그런 역할을 맡는 것이 제 성향에 잘 맞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아무리 저에게 많은 말들을 털어놓아도, 어떤 순간 제 그릇이 넘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어도, 자고 일어나면 바로 괜찮아져요(웃음).
성수연
평소에 어떤 고민이 많아질 때, 혹은 연기가 힘들 때 스트레스를 해소하거나 휴식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을 하세요?
권은혜
작품을 대하는 방식처럼 그때그때 달라요. 완전히 정적으로 쉴 때도 있고, 완전히 역동적으로 움직일 때도 있어요. 정적으로 쉴 땐 편안하게 느껴지는 커다란 소파가 있는 카페에 앉아서 오랫동안 유튜브를 보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가만히 뒹굴기도 해요. 역동적으로 움직일 땐 딱 하루 쉬는 날에 5, 6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밀린 일들을 하고요. 꼭 만나야 하는데 못 만나고 있던 사람을 만난다거나, 구제숍에 들른다거나, 나간 김에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을 간다거나. 찾아뵙지 못했던 선생님을 찾아뵙기도 하고요.
성수연
쉬는 날을 그렇게 보내고 나면 더 피곤해지지 않으세요?
권은혜
제 일상은 보통 연습하는 시간이 거의 다인데, 연습 전후로는 조금 정적인 시간을 갖거든요. 그러다 보니 쉬는 날이 생기면 여러 일을 하기 위해 역동적으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도 해요. 저는 연습을 할 때 에너지가 돌기 시작하면 한없이 도는 스타일이라, 쉬는 날에도 사실 특정 시간엔 제 바이오리듬이 연습 때처럼 돌고 있는 것이 느껴져요. 그래서 결국 밖에 나가게 되고요(웃음).
성수연
와, 정말 대단한 에너지입니다(웃음).
권은혜
친구가 “너 그래도 괜찮냐?”고 물어봤어요(웃음). 스쿠터를 타고 하루에 홍대, 성수동, 잠실, 혜화, 연희동을 다 다녀온 적도 있거든요. 그러고 보니 스쿠터를 운전할 때 쉬는 기분을 느끼네요. 생각도 정리되고, 새로운 영감도 떠오르고요. 저녁노을을 보거나 바람을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는 것 같아요.
성수연
스쿠터를 운전해본 적은 없지만, 어떤 느낌인지 알 것도 같아요.
권은혜
그리고 저는 좋아하는 사람들과 스몰 토크를 나누는 것도 굉장히 좋아해요. 그래서 지금 대화 나누는 것도 좋고요. 저는 “I”라서 3명이 넘게 있는 자리는 좀 힘들긴 해요(웃음). 생각이 잘 맞는 사람들과 대화 나누면 정말 재미있잖아요. 서로의 작업에 도움을 되는 이야기를 주고받기도 하고요. 상대의 이야기를 통해 또 제가 하게 되는 생각을 길게 늘어뜨려서 이야기해보고, 적어두기도 하고. 그런 시간을 통해 다시 회복하는 것 같아요. 사실 쉴 때는 연기 이야기 안 하고 싶긴 한데, 요즘은 사람들을 만나면 계속 연기 이야기를 해요. 정신을 차리고 보면 맡은 캐릭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고요(웃음). ‘연기’가 요즘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요.
성수연
좋은 깨달음의 시간이네요.
권은혜
열심히 해야겠다. 열심히 하고 있어요(웃음).
성수연
배우님은 정말 멋있다고 생각해요. 특정한 젠더로 읽히지 않고, 건강하고, 에너지 넘치는 배우님만의 멋짐이 배우님의 몸과 마음과 생각에 다 드러나는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실 테고요.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멋있으셨어요? 멋있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뭔가요(웃음)?
권은혜
쑥스럽네요(웃음). 아니에요. 이런 질문도 좋아요. 멋있음이라… 저는 멋있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성수연
그렇군요!
권은혜
“나는 멋있다. 나는 멋있지!” 뭐 이런 것이 아니고(웃음), 어릴 때부터 누가 저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면, ‘멋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대답했어요. 멋있게 늙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요. 그래서 평소에 사람을 만날 때도, 혹은 영상을 볼 때도 제가 멋있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주의 깊게 보려고 하는 것 같아요. ‘저 사람은 왜 멋있을까?’, ‘저 선배는 왜 저렇게 재미있을까?’, ‘저 선생님은 왜 이렇게 멋있게 늙었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 관찰해요. 그런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생각 자체가 멋있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자기 말이 다 맞는 것이 아니라는 태도를 갖고 있다거나, 외적으로든 내적으로든 자기 자신을 부단히 가꾼다거나, 필요한 말을 상대에게 해주지만 듣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태도를 진심으로 갖고 있다거나. 그런 사람들을 볼 땐 저도 닮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런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성수연
어린 시절에 되고 싶다고 말했던 ‘멋있는 사람’의 상은 무엇이었나요?
권은혜
어렸을 때를 물어보시는 거잖아요, 그렇지요(웃음)? 어렸을 때는, 옷을 잘 입는다거나(웃음), 그 당시의 제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옷을 60대, 70대에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되고 싶었어요. 저는 사람들이 평소에 입는 옷, 헤어 스타일링 등에 많은 생각이 담겨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사람의 가치관까지도요.
배우 권은혜가 오른손을 곧게 펴서 책상을 짚은 채 웃는 얼굴로 이야기하고 있다.
성수연
저의 경우엔 저의 스타일링에 제 생각이 딱히 담겨있지 않은 것 같은데요(웃음). 아, 담겨 있는 것일까요? ‘내가 평소에 어떻게 보이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권은혜
맞아요. 어쩌면 그것도 배우님의 가치관이겠지요? 저는 제가 원하는 방식으로 저를 꾸미는 일을, 제가 좋아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거든요. 꼭 사회 안에서 흔하게 통하는 기준이 아니어도, 제가 보기에 제가 멋있을 때, 제가 보기에 제 머리가 예쁠 때, 제가 보기에 제 옷이 조금 쿨해 보일 때 저는 기분이 좋아요.
성수연
갑자기 재밌는 질문이 생각났어요. 권은혜 배우님이 생각하는 ‘멋있음’에 대한 정의의 변천사가 궁금해요(웃음). 어린 시절의 권은혜는 그때 멋있다고 느끼는 옷을 나이 들어서도 입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생각했다면, 그다음엔 어떤 것들을 멋있다고 생각했는지,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시는지요.
권은혜
옷에 대한 생각은 사실 20대 중반까지도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 생각만 했던 것은 아니겠지만요. 그다음에는 ‘낭만이 있는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묵묵하고 진지해도 낭만이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다음엔 ‘쿨해 보이는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매사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은 사람. 매사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 사람. 이 모든 ‘멋있음’에 대한 정의들이 다음 정의로 인해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계속 추가되고 있어요(웃음). 그렇게 더해져 오다가 최근에는, 흔한 말이지만, ‘일에 몰두해 있는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해요. 혹은 ‘자기 소신이 뚜렷하게 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이요. 열려 있고, 유연한 사람. 그리고 제 평생을 관통해온 가장 중요한 ‘멋있음’의 정의는 ‘유쾌함’이에요. ‘유쾌한 사람’. 제가 연기를 할 때도 그런 생각이 반영되는 것 같고요. 저는 유쾌하게 살고 싶고, 어떤 이야기를 위트 있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좋아요. 그런 게 멋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으면서도 언제든지 진지해질 수 있는 사람.
성수연
재밌네요. 대체 언제부터 멋있으셨냐고, 농담처럼 질문을 했는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권은혜
배우님은 어떤 사람을 멋있다고 생각하세요?
성수연
저도 생각이 계속 바뀌는데, 요즘은 ‘다정함’을 멋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건 굉장히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사소한 다정함이 어떤 상황에 있는 존재들을 구원하기도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런 멋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권은혜
좋은 생각을 하고 계시네요.
성수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오늘 배우님과 함께 관련된 여러 대화를 나누니 굉장히 좋네요. 매 작업마다 그 작업에 맞는 방식의 촘촘함을 찾기 위해 매번 새로운 실마리를 찾으려 하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갖지 않으려고 하는 배우님의 생각은, 제가 하던 생각과도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더 즐거웠고요. 올해 배우님께서 참여하셨던 <몬순>과 <왼손>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권은혜
<몬순>과 <왼손>은 두 작품 모두 ‘지금’이 아닌 그 이후의 물음들을 위한 연극이었어요. 우리는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어떠한 생각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지.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지 않을 때, 비로소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와 더불어 나로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되기도 했고요.
성수연
굉장히 멋있는 생각이네요. 저 또한 비인간 존재들을 연기하며, 혹은 연극을 오랫동안 해오며 갖게 된 여러 질문들의 모양을 바꿔 나가고 있는데, 앞으로도 가끔 서로의 변화하는 생각들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배우님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갑작스럽게 변하는 일은 드물겠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할 테니까요(웃음).
권은혜
좋습니다(웃음).
성수연
오늘 정말 ‘멋있는’ 이야기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질문 주고받기와 함께 대화를 마무리하면 어떨까 합니다.
권은혜
감사합니다.
배우 권은혜와 배우 성수연이 마주 앉은 옆모습이 보인다. 
            배우 권은혜가 장난스럽게 웃고 있고, 배우 성수연은 크게 웃고 있는 모습이다.

권은혜와 성수연, 서로를 바라본다. 공간이 조용해진다.

성수연
너는 요즘 주로 무슨 생각을 구체적으로 많이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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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혜
넌 하루를 어떻게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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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을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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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혜
너의 인생에서 가장 영향을 끼쳤던 질문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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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의 인생에 가장 영향을 미친 사건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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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혜
너를 제외한 타인만을 위해 했던,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너의 말이나 행동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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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는 너의 다정함이 너의 연기에 드러난다는 것을 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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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혜
스스로에게 가장 되뇌듯 많이 하는 말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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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
너는 어떤 때에 니가 여기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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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은혜
너는 어떤 것을 볼 때 아름답다고 느껴?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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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수연(파이리)

성수연(파이리) 본지 편집위원
배우, 창작자. 다양한 형태의 연극작업을 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sooyeon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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