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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인물, 다른 질감

[색色다른시선] 희곡 <파우스트> vs 연극 <우어파우스트>

이경미_연극평론가

웹진 26호

2013.06.20

이미 잘 알겠지만 파우스트는 괴테가 창조한 인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서유럽의 민담이나 문학 속에 자리를 잡고 살던 인물이다. 15세기가 끝나며 16세기가 시작되는 어느 무렵까지 마술사로, 연금술사로 살면서 신학이나 자연철학,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기이한 행동을 빌어 자기 욕망들을 거푸 표출했던지라 세간의 남다른 ...

  • 이미 잘 알겠지만 파우스트는 괴테가 창조한 인물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서유럽의 민담이나 문학 속에 자리를 잡고 살던 인물이다. 15세기가 끝나며 16세기가 시작되는 어느 무렵까지 마술사로, 연금술사로 살면서 신학이나 자연철학, 의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그는 기이한 행동을 빌어 자기 욕망들을 거푸 표출했던지라 세간의 남다른 이목을 끌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우스트가 죽고 난 뒤 사람들은 그가 자기 욕망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것이라 생각했고, 이것이 북부독일을 비롯해 서유럽의 민담이나 전설 안으로 녹아들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기독교적 세계관을 절대적인 삶의 거울로 여겼던 사람들로서는 이 파우스트를 절대 긍정적인 인물로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지적인 호기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신의 영역까지 넘보면서 이를 위해 급기야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으니, 당시 사람들에게 파우스트의 파멸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
크리스토퍼 말로우 저, 박우수 역

그러나 시대가 바뀐다는 것은 세계를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파우스트는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제 파우스트는 감히 신의 영역을 넘보는 불경스럽고 사악한 인물이 아니라, 우주의 한계를 넘어서는 진리에 까지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근대적 인간상으로 태어난다. 대표적인 것이 크리스토퍼 말로우의 <포스터스 박사의 비극>(1604)이다. 이 작품에서 파우스트는 확고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현세의 모든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하는 르네상스적 인간이다. 물론 그는 예전처럼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괴테를 만난 파우스트는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는가.

괴테의 파우스트 초판본
괴테의 파우스트 초판본(1808년)


고전주의적 숭고함으로 끝내 구원받다

<파우스트>의 비극 제 1부는 평생에 걸쳐 우주의 본질과 창조의 원리를 밝혀내기 위해 모든 학문을 섭렵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적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며 세상에 마지막 고별을 고하는 파우스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멀리서 새벽 종소리와 함께 예수의 부활을 알리는 천사들의 합창소리가 들려오고, 순간 파우스트는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잠시 다시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는다. 하지만 그는 산책길에 삽살개로 변장해 따라온 메피스토로부터 원하는 모든 것을 남김없이 충족시켜주겠다는 유혹을 받는다. 이에 파우스트는 자신이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칠 수 있는 순간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내세에는 메피스토가 자신의 영혼을 가져가도 좋다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해서 진리 앞에 좌절된 한 학자가 악마의 힘을 빌려 세상의 온갖 향락을 체험하는 기나긴 여정이 시작된다. 그 시간의 폭은 1부와 2부를 모두 아울러 자그마치 삼천년이나 된다.

1부에서 파우스트가 학문에 대한 절망을 보상받기 위해 무턱대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학자이자, 관능적 쾌락에 빠져 한 여인을 무참히 파멸시키는 학자였다면, 2부에서는 그 고통스런 기억을 깨끗이 잊고 새로운 인물로 태어난다. 이후 거대한 세계,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으로의 여정이 다시 시작되고, 파우스트는 헬레나의 고전적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하지만 이 모든 향락마저 비극으로 끝났을 때, 파우스트는 비로소 인류를 위한 새로운 책임을 느끼게 된다. 파우스트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어느 날 내면으로부터 퍼져오는 정신의 아름다움 속에서 비로소 그는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라고 외친다. 이렇게 해서 애초 악마와 맺었던 계약은 메피스토의 승리로 끝이 났고, 파우스트의 긴 여정도 끝이 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성모에 의해 천국으로 인도된다. 이 마지막 장면에서 천사들은 이렇게 외친다.

파우스트 텍스트

우어파우스트
연극 <우어파우스트>
11.09.03~10.03 명동예술극장
  • 현대의 우울과 절망 속에서 결국 길을 잃다

    2011년 다비드 뵈쉬David Bosch, 독일 연극연출가가 명동극장의 무대 위로 소환한 것은 희곡 <파우스트> 비극 1, 2부의 초고 격이라 할 수 있는 괴테의 <우어파우스트>URFAUST다. 이 <우어파우스트>에는 고전주의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훗날의 작품과 달리, 합리주의에 맞서 거침없이 감정을 발산하던 슈투룸 운트 드랑Strum und Drang, 즉 질풍노도 시기 괴테의 모습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래서 첫 장면부터 원작 속 파우스트는 후일 새롭게 태어날 파우스트와 달리 이렇게 탄식하며 주체할 수 없이 자기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열정과 그럴수록 깊어가는 인간의 한계에 대해 절망한다. “나는 불쌍한 바보처럼 그냥 그렇게 서 있네. 공부 시작 이전보다 아무 것도 현명해진 것이 없네.”

    젊은 괴테는 주인공의 이런 격정을 관능적이고 치명적인 사랑으로 풀어낸다. 그 과정에서 젊은 여인 그레트헨을 향한 파우스트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과 유혹, 그리고 배반의 과정이 도드라지면서 매우 힘찬 언어로 표현된다. 작품 전체의 구성을 놓고 보더라도 작가는 매끄러운 사건의 진행보다는 순간순간 파우스트와 젊은 처녀(그레트헨) 사이에서 끓어오르는 격정적 감정들에 더 비중을 맞추고 있다. 인물들은 제한되어 있고, 장면의 나열 또한 에피소트에 가깝다. 그 과정에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열망하는 노학자 파우스트와 관능의 세계에 빠져 오입대장처럼 행동하는 파우스트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우스트의 모습은 불같이 이글거리고, 그럴수록 그레트헨의 비극은 더없이 강렬하다.


    우어파우스트
    연극 <우어파우스트>의 한 장면. 메피스토 역의 이남희와 파우스트 역의 정보석
연출 다비드 뵈시
<우어파우스트>연출 다비드 뵈시
[출처] 연합뉴스 2011년 8월 11일
  • 다비드 뵈쉬의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에 통달했으면서도 우주의 섭리만은 이해할 수 없어 절망하는 노학자가 아니라, 지독한 권태와 불안, 절망에 허우적대는 오늘날의 40대 중년남자다. 소매가 접힌 꼬깃꼬깃한 와이셔츠에 헐렁하게 넥타이를 풀어 맨 이 파우스트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들을 허공으로 내던지며 극도의 피로감과 무기력을 호소한다. 그리고 목에 걸린 넥타이 끈에 차라리 목을 매달고 싶은 강한 욕구를 느끼는 그에게서 어떤 주체의식도, 삶에 대한 열망도 찾아볼 수 없이 그저 건조한 우울만이 가득 배어난다. 파우스트의 이 우울은 팔코Falko Herold가 디자인한 거친 무대로 고스란히 공간화 된다. 무대 왼편 끄트머리에 작게 들어앉은 그레트헨의 거실을 제외하면 무대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또 텅 비어있다. 가파르게 경사진 절벽처럼 버티고 서있는 무대 뒷벽은 무대공간을 차라리 깊은 수렁 내지 협곡과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낸다. 삶의 무게에 지칠 대로 지친 파우스트는 그 뒷벽을 뛰어오르지 못한다. 그가 이 세계로부터 벗어날 길은 근본적으로 없다.

    그 벽 위에 설 수 있는 자, 즉 다른 세계로 나가는 통로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신과 메피스토, 그리고 한 사람 더 말하자면 그레트헨의 남동생 발렌틴뿐이다. 그러나 휠체어에 앉은 신은 그 스스로는 혼자 설 수 없는 불구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는 지금 이곳의 일에 전혀 관심이 없다. 아니 세상에 대한 기억 자체를 이미 잃어버린 치매노인이 되어있다. 상황이 이럴수록 메피스토가 뿜어내는 힘은 더 위압적이다. 모든 것은 파멸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 그는 때로는 무대 뒷벽 위에서, 때로는 무대공간을 종횡으로 누비면서 신을, 파우스트, 그리고 이 세계를 끊임없이 조롱하고 능멸한다.

    연극에서도 최대의 희생자는 역시 그레트헨이다. 연극 속 그녀는 권태에 빠져 허우적대며 탈출구를 찾는 파우스트가 탐하는 절대 순수의 처녀지다. 뵈쉬가 그레트헨의 공간을 무대 위에서 유일하게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무엇보다 따스한 조명 아래 놓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레트헨은 아름답고 순수하면서 동시에 유아적이고 거친 원시성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거칠지만 젊고, 힘이 있다. 이 유일한 순수의 처녀지를 지키는 것은 발렌틴이다. 원작과 달리 다비드 뵈쉬는 발렌틴을 매우 적극적인, 그러니까 치매에 걸린 신이나 사악한 메피스토와는 전혀 다른, ‘힘’을 상징하는 인물로 무대 위에 세운다. 사방에 음습한 죄와 탐욕의 기운을 잘 알고 있는 그는 그레트헨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연출이 그에게 야구글러브와 야구방망이를 들려주었던 것은 발렌틴의 젊음을, 그 안에 있는 힘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발렌틴은 이 젊은 힘을 제대로 발산하지 못한다. 누이에 대한 염려와 사랑은 아이러니하게도 집착으로, 심지어 근친상간이라는 욕망으로 비틀어진다. 연출이 이런 그의 모습을 마리의 외도를 알고 분노하는 보이첵의 모습과 오버랩 시킨 것은 그 때문이다.


    우어파우스트
    (왼쪽) 사랑에 삶에 대하여 절규하는 그레트헨 (오른쪽) 죽은 그레트헨과 신
    [출처] 오마이뉴스 2011년 9월 16일


    정신착란 상태에서 파우스트와 도망치기를 거절하고 사형을 기다리는 원작의 그레트헨과 달리, 연극 속 그레트헨은 파우스트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나 파우스트는 그녀를 구하기 위해 달려갔음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 그레트헨이 내민 손을 잡아주지 못한다(어쩌면 잡아주지 않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메피스토에 의해 질질 끌려 나가는 파우스트를 대신해 그레트헨의 손을 잡아준 것은 신이다. 하지만 신은 그녀에게 아무런 구원도, 위안도 되지 않는다. “노력하는 한 인간은 구원받는다”라는 유명한 <파우스트>의 신에 대한 확신은 21세기 우리의 우울한 자화상인 뵈쉬의 무대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대신 한 가지 물음이 던져진다. ‘도대체 우리가 원하는 것은 뭘까? 세상이 뭘 더 원할까?’ 무대 위로 하나 가득 떨어지던 흰 종이들은 그렇게 출구 없는 세계 속에서 출구를 찾으며 아우성치다 사그라지는 우리 안의 공허와 우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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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이경미 연극평론가

한편의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 극장, 저 극장을 기웃댄다.
'잘 만든' 연극 보다는 꿈틀대는 파동이 느껴지는 연극을 좋아한다.
http://blog.naver.com/puru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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