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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만 다른 이야기, 작은 차이가 빚어낸 묘미

[색色다른시선] 소설 「파리대왕」 vs 연극 <파리대왕>

이은경 _ 연극평론가

웹진 29호

2013.08.01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시대에 장르 간 호환은 이미 일상이다. 특히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은 요즈음 연극계의 트렌드라고 해도 되겠다. 최근의 공연만 일견해도 <죄와 벌> <해변의 카프카> <순이삼촌> <손님> <완득이> <노인과 바다>...

  •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의 시대에 장르 간 호환은 이미 일상이다. 특히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공연은 요즈음 연극계의 트렌드라고 해도 되겠다. 최근의 공연만 일견해도 <죄와 벌> <해변의 카프카> <순이삼촌> <손님> <완득이> <노인과 바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 등 쉽게 꼽을 수 있다. 극단 하땅세의 <파리대왕>(2013)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한 작품으로 전작 <천하제일 남가이>(2012)에 이어 소설을 무대화한 두 번째 작품이다.


    인간본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 vs 폭력적 현실에 대한 비판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파리대왕」(1954)은 윌리엄 골딩의 대표작으로 인간의 본질적 가치관의 충돌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미 피터 브룩(1963), 해리 훅(1992)에 의해 동명의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고, 미국의 인기드라마 <로스트Lost>의 원작이기도 하다. 고전소설 「산호섬」「15소년 표류기」「보물섬」의 흔적이 느껴지는 「파리대왕」은 모험?성장소설의 형식을 차용하고 있지만 인간성의 종말을 예언하는 비극적인 우화소설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작가의 생생한 전쟁체험을 바탕에 깔고 있어 자신이 목도한 인간의 폭력성과 광기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 제목인 ‘파리대왕(베엘제붑)’의 원래 의미는 ‘악마’에서 유래했고, 죽은 암퇘지의 머리에 몰려든 파리 떼를 상징하는 것에서도 결말은 예정되어 있다.

    파리대왕
    (왼쪽) 소설「파리대왕」윌리엄 골딩 저 |유종호 역 |민음사 |1999.02.28 [출처] 네이버 책
    (오른쪽) 영화「파리대왕」의 한장면, 감독 해리 훅 |1992.12.12 개봉 [출처] 네이버 영화

    핵전쟁을 피해 안전한 공간으로 후송되던 한 무리의 영국소년들이 비행기의 격추로 태평양의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소년들은 구조를 위해 오두막을 짓고 봉화를 올리자는 랄프와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자는 잭을 중심으로 분열한다. 이성과 본능, 문명과 야만, 도덕적 선과 폭력적 악, 민주주의와 전체주의로 상징되는 두 인물의 대립은 주변인물을 통해서 확대된다. 랄프의 조력자 피기는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문명의 상징인 ‘불’을 피우는 매개체 안경의 주인이기도 하다. 잭의 조력자 로저는 폭력적인 야만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피기를 무참하게 살해한다. 두려움에 내몰린 소년들은 랄프를 배척하고, 잭을 중심으로 광기의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한다. 색칠한 얼굴에 가면을 쓴 채 암퇘지 사냥을 하고, 랄프를 죽이려고 뒤좇는 소년들의 광기는 어른의 세계보다도 더 폭력적이다. 이들을 광기로 내몬 두려움의 근원인 괴물이 실제 존재가 아니라 자신들의 내면에서 시작된 허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유일한 인물 사이몬까지 살해당하고, 구조된 소년들이 돌아가는 곳 역시 핵전쟁이 벌어지는 세계이다. 이처럼 최소한의 희망도 이 소설에는 없다. 솔직히 소설이 내재하고 있는 문명과 야만에 대한 이분법적 접근은 불편하다. 문명이 옳다는 절대적 확신을 피력하는 작가의 서구 중심적 관점에 대한 반론의 욕망도 있지만 이 글의 논제에서는 비껴있기에 제외하기로 한다.
파리대왕
연극 <파리대왕>
연출 : 윤시중 / 번안 : 윤조병
제작 : 극단 하땅세
연극 <파리대왕>은 기본적으로 소설의 중심서사를 충실하게 따라간다. 하지만 300페이지가 넘는 장편소설을 1시간 30분의 연극대본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작가(윤조병)는 선택과 집중을 할 수밖에 없다. 20명이 넘는 소설 속 등장인물이 10여 명으로 축소되고, 사건과 갈등의 양상이 랄프와 잭에게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소설의 주제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는 인물인 사이먼의 존재감이 사라지고,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 다양한 의미의 이분법적인 층위가 폭력과 광기가 난무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단순화되었다. 작가의 선택이지만 인간의 본성에 관한 철학적 담론이 현실비판으로만 약화된 것은 아쉬운 지점이다. 주제의식은 소설과 다른 결말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소설에서 소년들은 구조하러 온 해군 장교 앞에서 지금까지의 광기와 살의는 모두 잊은 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울기 시작한다. 하지만 연극은 구조의 순간에도 순진함을 회복하지 못한 소년들의 행위를 보여주고, 광기와 폭력을 포기하지 않은 잭이 홀로 무인도에 남는 것으로 끝난다. ‘연극은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소설의 철학적 깊이 대신 현실의미를 담으려 한 것이다. 공연에서는 이러한 의도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현실을 환기시키는 연극적 상상력

극단 하땅세의 <파리대왕>은 설명적 서사를 시각적 표현으로 어떻게 환치할 수 있을까에 대한 흥미로운 고민이 담겨 있다. 무대 중앙에 360도 회전 가능한 커튼걸이가 놓여있고, 흰색과 검은색의 커튼이 무대 대부분을 감싸고 있다. 흑백의 커튼을 이동시키는 시각적 연출만으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다양한 극적 의미를 창출했다. 첫째로 해변, 숲속, 절벽 등 다양한 공간을 가능케 한다. 무인도를 재현하는 사실적인 장치들을 배제하고 소라껍데기, 모닥불, 모형 멧돼지 등 극적 전개에 필수적인 최소한의 소품만을 사용한다. 그런데도 흰 커튼이 흔들리는 끝자락에 소년들의 신체 일부가 나왔다 들어가는 것만으로 파도에 휩쓸리며 해변으로 밀려온 소년들의 모습을 충분히 표현한 것처럼 관객은 커튼의 움직임에 따라 자연스레 공간을 상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무대를 감싸고 있기 때문에 공간의 고립성과 폐쇄성까지도 자연스레 드러난다.

연극 파리대왕
연극 <파리대왕> [출처] 인터파크 PLAY DB

둘째로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선명하게 대비되는 흑백의 커튼은 소년들이 폭력적인 괴물로 변화하는 과정을 표현하는데 효과적이다. 빈번한 흰색과 검은색의 겹침을 통해 선악의 경계를 모호하게 연출함으로써 이 작품이 원작과 같은 이분법적 가치관에 고정되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뿐만 아니라 커튼 너머에서 내면의 공포에 의해 발현된 괴물이 등장하여 미지의 존재에 대한 두려움도 강조한다.

셋째, 기능적 역할도 크다. 수면에 물수제비를 날리고, 중력을 거슬러 공간의 전복을 시도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장치가 된다. 이처럼 커튼은 이번 공연에서 배우 이상으로 중요한 오브제였다. 그리고 폭력으로 장악당한 무인도를 상징하기 위해 바닥을 검은 천으로 덮고, 그 위로 똥(?)을 날려 검은 바닥을 똥 무더기로 만들어버리는 장면은 긴 설명보다 훨씬 강렬하게 의미를 전달했다. 설명적인 소설이 연극적 상상력에 의해 시각적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파리대왕
연극 <파리대왕> [출처] 인터파크 PLAY DB

결말에서 배우들은 무대를 덮고 있던 커튼을 걷어낸다. 공연을 위한 잔재가 그대로 남아있는, 정돈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무대 후면이 완전히 노출된다. 그리고 구조 장면이 전개된다. 자신들의 행위가 드러날까 랄프를 무인도에 남기려는 소년들의 마지막 시도는 그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무인도에 홀로 남은 잭이 무대 위를 뛰어다니면서 공연은 끝난다. 극적 공간의 환상성을 깨는 행위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의도적으로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려 관객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폭력의 상징이 된 잭과 관객은 한 공간에 존재하며, 이곳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극단 하땅세는 전작 <천하제일 남가이>에서도 무대 후면의 풍경을 그대로 노출했지만 의미는 달랐다. 모든 사건이 남가이의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대장치를 360도 회전시키면서 무대 후면이 어쩔 수 없이 노출된 것이다. 하지만 <파리대왕>에서는 무대의 환상성을 거세하기 위한 의도적인 연출이었다. 문자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밖에 없는 소설과 달리 연극은 시청각적인 연출로 의미의 층위를 얼마든지 확장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장면이었다.


의도와 실현의 간극

극단 하땅세는 독창적인 상상력과 진지한 사회의식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항상 지적받는 것이 배우들의 미숙한 연기력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기에 배우들의 땀이 무대에서 그대로 느껴지는 ‘수공예연극’을 표방한다. 이 공연에서 배우들은 등장인물로서 연기할 뿐만 아니라 커튼을 이동시키는 기능적 역할까지 수행하면서 몸을 아끼지 않는 열정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공연도 <천하제일 남가이>에서와 마찬가지로 의도와 실현의 간극을 채우지는 못했다. 커튼의 빈번한 이동이 민첩하게 이루어져야 했지만 커튼걸이에서의 둔중한 움직임이라는 물리적 한계와 커튼 동선의 복잡성으로 인해 의도처럼 움직이지 못했다. 급박하게 커튼을 정리해야 할 때도 여의치 않아 연기의 타이밍이 어그러지기까지 했다. 절벽을 오르는 랄프와 잭, 이를 지켜보는 소년들의 시선을 전복적인 공간연출로 보여주는 장면도 정치하지 못한 배우들의 움직임에 기발한 상상력이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이처럼 의도가 공연 속에서 세련되게 구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무대 후면이 노출되면서 환기되는 현실인식은 강렬했다. 극단 하땅세의 <파리대왕>은 연극의 장점과 한계를 그대로 노정한 공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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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경

이은경 연극평론가
명지전문대학 겸임교수, 문학박사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연극분야 책임심의위원
계간 [연극평론], 계간 [한국희곡] 편집위원
연극이 일상이 되는 '공감의 시대'를 기다리고 있다. zungb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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