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끓어오르는 욕망과 숨겨진 죄의식

[색色다른시선] 희곡 「맥베스」vs 연극 <레이디 맥베스>

이선형 _ 연극평론가

웹진 30호

2013.08.14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환하는 맥베스 장군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욱한 안개 속에서 세 마녀와의 조우로 그의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녀들은 그에게 새로운 영주가 되고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인간적이며 명예를 귀히 여길 줄 알고 감수성이 풍부한 맥베스는 불경스런 예언에 놀라 마녀들을 쫓아버리지만...

  •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귀환하는 맥베스 장군은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자욱한 안개 속에서 세 마녀와의 조우로 그의 운명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마녀들은 그에게 새로운 영주가 되고 왕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인간적이며 명예를 귀히 여길 줄 알고 감수성이 풍부한 맥베스는 불경스런 예언에 놀라 마녀들을 쫓아버리지만 가슴 속에는 묘한 여운이 남는다. 그리고 예언들이 하나 둘 기적처럼 이루어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맥베스의 마음은 점차 흔들린다. “정말 내가 왕이 될 존재란 말인가!” 맥베스가 애초부터 왕을 살해하려던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세 마녀가 그의 앞에 나타나 마음을 뒤흔들었고, 망설이는 그를 아내가 부추겼다. 그렇다. 흔들리는 주인공의 마음을 결심하게 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은 레이디 맥베스였다. 그녀를 주목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원작에서 처음엔 우유부단한 모습이었지만 왕의 시해 이후 강렬하게 밀고나가는 전사의 모습을 보이는 남편 맥베스와 달리, 레이디 맥베스는 처음엔 강한 모습이지만 이후에는 죄의식의 고열에 신음하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처음에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을 왕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 여성성마저 포기한 강렬한 이미지로 극 전반을 지배한다. “살인의 계획을 관장하는 정령들이여, 내게서 여성성을 없애라.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무시무시한 잔인함으로 가득 채워라. 내 피를 엉겨 붙게 해서 후회로 이끄는 통로를 막아 양심의 가책을 부르는 천성이 살아나 내 잔인한 계획을 흔들지 못하게, 내 의도를 달성하지 못한 채 머물러 있지 못하게 하라! 와라. 이 여자의 가슴에서 내 젖을 빨아버리고 쓴 담즙으로 채워다오. 살육을 도와주는 정령들이여.”(1막 5장)그런데 그녀는 새로운 왕이 탄생한 다음부터 갑자기 그 존재감이 미약해진다. 3막 4장이 지나면서는 아예 무대 뒤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5막 1장에 잠시 등장하지만 이 때 그녀는 정신착란을 일으키는 몽유병자일 뿐이다. 그녀의 죽음마저도 소식으로 전해질 뿐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왜 이렇게 축소되고 전략해 버린 것일까. 1998년에 초연된 한태숙 연출의 <레이디 맥베스>는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하여 5막 1장을 클로즈업시켜 레이디 맥베스의 괴로워하는 심리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레이디 멕베스
레이디 멕베스
(왼쪽부터) 1998년, 1999년, 2000년, 2013년에 공연된 <레이디 맥베스> 포스터

<레이디 맥베스>에는 두 가지 변용의 미학이 작용한다. 하나는 원작을 비틀어 여성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다. 바뀐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공연은 용맹스런 맥베스가 아니라 괴로워하는 레이디 맥베스에 초점을 둔다. 인간은 해석하는 존재다. 끊임없이 시도되는 해석은 개인의 인생관, 신념, 철학을 바탕으로 지극히 주관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절대적 권력체인 정전을 해체시켜 재해석하는 작업은 개인의 의지를 중시하는 현대철학의 흐름과 맞물려 더욱 확산되고 있다. 셰익스피어의 극작품도 다양한 시각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여성적 관점에서 바라본 셰익스피어다. 원전에서 소수자인 여성은 남자 주인공을 부각시키기 위한 부차적인 인물로 여겨졌지만, 해석의 시대에 접어들어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큰 힘을 얻게 되었다. 거투르드<햄릿>의 왕비, 데스데모나<오셀로>의 여주인공, 코딜리어<리어왕>의 막내딸그리고 레이디 맥베스는 여기에 단골로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이다. 이들은 각자 고유한 특성으로 남성인물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극 전반을 이끄는 인물로 거듭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연출적 차원으로 공연 양식의 변용이다. 불면의 밤을 보내거나 겨우 잠이 들었지만 몽유병자가 되고 마는 그녀를 치유하기 위해 전의는 사이코드라마를 펼친다. 전의는 맥베스-마녀의 역할연기를 통해 그녀의 죄의식을 불러내는 한 판의 살풀이를 벌인다.

레이디 멕베스
연극 <레이디 맥베스>의 서주희 배우와 정동환 배우 [출처] OTR PHOTO GALLERY

이쯤에서 다음의 질문이 생겨난다. 왜 남편과는 달리 레이디 맥베스는 죄의식에 시달리는가? 전반부의 강인한 태도는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둠과 꿈속으로 도피하면서 자꾸 현실에서 달아나려 하는가?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정도로 대답이 가능하다. 하나는 <레이디 맥베스>에서 밀가루 반죽으로 그녀의 목을 감싸는 뱀 같은 존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촉각의 물체인 흰 색의 기다란 줄은 여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코드인 탯줄을 상징한다. 새 생명의 탄생의 순간 싹둑 잘리는 현상, 분신과의 순간적인 분리는 여성성의 의미를 완전히 새롭게 한다. 연구자들은 레이디 맥베스에게 아이가 있었을까 궁금히 여겼지만 명쾌한 결론은 없다. 다만 출산을 경험했을 것이고 아이가 죽었을 것이라는 가정이 있다. 여성에게 있어 낙태 또는 자식의 죽음만큼 충격적인 것은 없다. 그것은 제 2의 탯줄의 잘림이기 때문이며 최고의 상실이자 죄의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레이디 맥베스가 남편이 왕좌에 오를 수 있도록 극단적 행동을 취한 이면에는 낙태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했다고 봐도 된다. 하지만 그녀는 대가로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을 얻는다. 그렇다면 그녀는 진정 제 4의 마녀인가! 또 다른 대답은 살해당한 왕과 그녀 아버지와의 중첩이다. “늙은 왕의 잠자는 모습이 내 아버지를 닮지만 않았어도 이런 지옥을 경험하진 않을 텐데... 왜 자꾸 아버지와 죽은 왕의 얼굴이 겹쳐지는 걸까? (사이) 내가 본 것...? 후! 내가 본 것이 존재하는 것인가?” 아버지의 살해는 권력 쟁취에서 필연적인 것이지만 필히 죄의식에 시달리게 하는 행위인 것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그녀의 심리적 내면이 얼마나 불안과 공포로 동요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들려준다. 그녀는 두려움을 애써 억누르며 남편의 버팀목이 되었지만 정작 자신은 양심의 소리에 시달린다. 남자에 비해 심적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여자를 보면 여자야말로 원죄 의식의 진원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밀려온다. <레이디 맥베스>의 연극은 몸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믿음과 물체, 소리, 빛으로 형상화된 내면의 세계를 보여준다. 죽음의 열망과 동시에 밀려오는 씻김의 갈망은 근원적인 물체들로 은유화된다. 원작이 흑장미처럼 어둡고 붉은 색이라면 <레이디 맥베스>는 흑백의 명암이 분명한 작품이다. 삶에의 의지가 강할수록 다가오는 죽음의 사신, 깨끗하고자 하나 가슴에서 치밀어 오르는 더러운 죄의식, 그래서 흰 옷을 입은 레이디 맥베스의 절규는 더욱 고통스럽고 비극적이다. 전의는 사이코드라마의 디렉터가 되어 그녀의 깊은 무의식 속에 숨겨져 있는 죄의식이 무엇인지 연극적으로 풀어낸다. 무대에 등장하는 얼음, 밀가루, 물, 흙 같은 원초적 질감들, 직접 무대에서 제공된 시원의 소리들은 그녀의 무의식이 실체화된 것이다. 주인공의 심리가 극적으로 시각화·청각화된 것은 <레이디 맥베스>에서 핵심 사항이다. 전의의 최면요법에 의해 레이디 맥베스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무의식 속에 묻혀있던 잊고 싶었던 순간을 재조명한다. 끓어오르는 욕망과 숨겨진 죄의식이 백일하에 드러난다.

레이디 멕베스
연극 <레이디 맥베스>의 한 장면 [출처] OTR PHOTO GALLERY

사이코드라마는 치유의 연극이다. 참여자가 역할을 행하는 가운데 의식하지 못했던 죄의 근원을 깨닫고 밖으로 표출시키면서 해방됨을 느끼는 연극이다. 사이코드라마에서 참여자가 된 레이디 맥베스는 거울에 비추듯 스스로의 죄를 확인한다. 디렉터는 시뻘건 고깃덩이 기억의 조각을 토해내야만이 통증이 가실 것이라고 말한다. 내담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디렉터를 바라보며 절규한다.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를 괴롭히고 목을 조이냐고 묻는다. 디렉터-전의는 자신은 그녀의 양심, 죄의식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고통의 근원을 알게 되면 휴식을 취하고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자신의 실체 혹은 죄의 근원을 똑바로 직시하게 된 레이디 맥베스는 더 이상 숨을 쉴 욕망을 느끼지 않는다. 그녀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마지막 호흡으로 생과 이별을 고한다. “내 목숨의 저울이 기울고 있구나. 잘 있거라 밤이여. 내 가장 친한 친구였고 오랜 시간 함께 했던 친구여 잘 있거라. 숨 쉬며 눈뜨고 바라보았던 세상의 빛. 이제는 빛 없는 빛 잘 있거라.” 죄는 정화되지 못하고 오히려 확대됨으로써 사이코드라마는 미끄러진다. 이 미끄러짐은 <레이디 맥베스>가 원작이 지닌 비극성을 고스란히 떠안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리하여 차가운 얼음은 비수가 되어 그녀의 핏줄에 박히고 만다. 차가움, 냉정함의 대명사였던 레이디 맥베스는 그 차가움으로 인해 숨을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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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형

이선형 연극평론가, 김천대학교 교수
연극의 치유성에 관심을 두고 있으며,
『연극, 영화를 만나다』, 『연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등 저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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