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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시선이 머무는 곳

[색色다른시선] 연극 <대학살의 신> vs 영화 <대학살의 신>

최영주_연극평론가

웹진 32호

2013.09.26

최근 들어 화제를 모았던 공연들이 심심찮게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연극 무대가 영화의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영화 산업이 번창하면서 스크린에 올릴만한 다양한 자원이 무시로 필요했기 때문일 터이다. 오랜 세월을 통과하며 생존해온 연극이 영화보다 더 공고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연극의 희곡을 영상에 담고...

  • 최근 들어 화제를 모았던 공연들이 심심찮게 스크린에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연극 무대가 영화의 관심의 대상이 된 이유는 영화 산업이 번창하면서 스크린에 올릴만한 다양한 자원이 무시로 필요했기 때문일 터이다. 오랜 세월을 통과하며 생존해온 연극이 영화보다 더 공고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가 연극의 희곡을 영상에 담고 영화 스타들이 무대를 다녀간다고 해도 두 매체의 메커니즘은 사뭇 다르다.

    연극 무대는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살아 있는 경험으로 배우들의 피와 살을 느낄 수 있는 현장의 예술이다. 연극적인 특성 혹은 연극성은 무대와 관객이 공모하여 사실을 왜곡할 수 있는 체험인지라, 작은 나무 조각 하나가 군함이 되는 그런 경험은 상상력을 가동할 수 있는 연극 기법이자 연극 무대에서만 가능한 유쾌한 체험이다. 한편, 영화는 카메라의 눈을 통해 대상이 매개되어 목격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방대한 시공간을 순식간에 훑으면서 관객의 시야에 대령한다. 카메라가 배우들의 모습을 클로즈업하여 그 미묘한 표정을 포착하여 스크린에 담아낼 때 관객은 실제 너머의 세계를 엿보는 기회를 갖는다. 카메라의 편집 기술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술과 같은 능력을 스크린에 부여하며 진화해 왔다. 영화는 기술의 발전과 동행하여 발전해 왔고, 복제를 통해 분산될 수 있는 속성을 가졌기에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무한한 관객 동원이 가능한 장르이기도 하다. 현대 사회에서 영화가 선전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대학살의 신
야스미나 레자의 <대학살의 신>

한 아이가 다른 아이의 이를 두 개나 부러뜨린 상황에서 부모들이 만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부모들 역시 싸운단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된다는 말은 동서고금을 넘어 통용되는 보편적인 사실인가 보다.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의 희곡 <대학살의 신>은 누구라도 살면서 한번 즈음 겪었을 법한 그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여기에서 페르디낭과 부르노의 부모들은 처음에는 교양 있고 점잖게 그리곤 이내 속내를 드러내며 격렬하게 싸움을 한다. 세월을 더 살았고, 더 교육을 받았기에 어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주먹이 아닌 언어이다. 처음 피해자와 가해자의 논리를 좇아 진영을 구축했던 부부들은 말이 길어지자 논리는 내동댕이친 채 평소의 본색을 드러내더니 이내 자신의 남편과 아내를 향해 참았던 불만을 터뜨리며 분열된다. 그리고 다시 남자 대 여자로 진영을 재편하면서 어른들의 싸움은 계속된다. 여기에 끊임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에 대고 변호사 알랭이 하는 이야기는 부작용을 낳는 약을 판매하는 제약회사의 편에서 조직적이고도 교묘하게 진실을 덮으려 하는 것이다.

대학살의 신
야스미나 레자 Yasmina Reza(왼쪽)와 원작 희곡 <대학살의 신 Le Dieu du carnage>(오른쪽)

자식 싸움이 부모 싸움이 되어버린 문제적 상황 속에서 작가는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을 강요하거나 흔한 상식을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작가는 속물적인 위선을 까발리면서 인간의 이기적인 속성으로 인해 더불어 산다는 것의 불가함을 역설하는 듯하다. 희곡 <대학살의 신>은 여느 희곡처럼 극적 사건이 부재한다. 극적 사건을 대신하는 것은 네 인물이 주고받는 촌철살인적인 대사들이다.

대학살의 신
연극 <대학살의 신> 10.4.6~5.5
한태숙 연출, 신시컴퍼니 제작

대학살의 신
영화<대학살의 신>2011년 제작
로만 폴란스키 감독
배우들을 위한 신랄한 풍자극

한태숙 연출에 의해 2010년과 2011년 공연되었던 <대학살의 신>의 연극적 특성은 희곡을 무대에서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 관객과의 소통 방식은 어떠한 지에 의해 살펴볼 수 있다. 무대는 정교하게 디자인이 된 설치 미술을 방불케 하였는데, 검은색의 벽에 걸린 커다란 액자 모양의 은빛 조형물, 파란색의 카펫, 왼쪽의 빨간 카우치, 정면의 흰 소파와 테이블은 여느 거실의 공간에서는 볼 수 없는 미니멀리즘의 강한 인상과 함께 원색 대비와 조화를 통해 미학적 공간을 연출하였다. 이러한 공간 연출은 중산층의 거실 공간이라는 실용성을 내장하면서 공연의 분위기를 선도함으로써 관객의 미학적인 지각을 자극하는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효과 음악 역시 연극적인 선택을 한 점에서 주목할 수 있는데, 타악기의 리듬을 타고 원시의 자유를 환기시키는 정열적인 아프리카 노래와 연주는 명랑함과 분방함을 공연에 실어 나르는 한편, 문명사회에 대해 풍자를 내포한다.

이 공연은 온전히 배우들을 위한 공연이라고 표현했던 연출가의 말 것처럼, 무대에서 단연 돋보였던 것은 네 배우의 앙상블 연기였다. 무대 위에서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연기하는 것과 더불어 적절한 타이밍에서 상대에 대해 반응함으로써 극적 현실에 현존하게 된다. 공연 내내 알랭 역 박지일, 미셀 역 이대연, 아네트 역 서주희, 베로니크 역 이연규는 대사에서뿐 아니라 그들의 몸의 움직임과 느낌으로 각 역할을 표현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이때 배우들의 몸은 역할을 재현할 뿐 아니라 상황을 살아내는 현존으로서 공간과 시간에 노출된다. 알랭으로 분한 박지일은 반복되는 전화에 예민해지고 쪼잔한 성격을 약호화 하듯이 신경질적인 어조로 관객이 빈정거리도록 부추겼다. 박지일이 계산된 연기로 몰입하여 상황을 몸을 통해 구축해냈다면, 서주희는 즉흥적인 몸의 충동성을 강화하며 상황에 존재한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몸의 메스꺼움을 호소하다가 한 순간 참다못해 토해낸 뻥튀기 밥풀들은 관객의 혐오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실재가 아닌 극적 기호라는 사실에 관객들의 즐거움은 배가된다. 이러한 재현과 소통 방식을 통해 공연은 그 내용이 중산 계층의 위선을 폭로하든지 더불어 산다는 것에 대한 비관적 관점으로 끝나든지 즐거운 연극적 체험을 선사한다고 할 수 있다.

대학살의 신
2010년 연극 <대학살의 신> 국내 초연 사진 [출처] 신시컴퍼니 홈페이지 www.iseensee.com

로만 폴란스키Roman Polanski 감독의 영화 <대학살의 신>은 희곡에는 없는 놀이터에서의 아이들 싸움을 프로롤그처럼 서두에 담아내며 시작된다. 이어 카메라는 가족사진과 그 밖의 세간들로 빽빽하게 장식되어 삶의 체취가 녹아든 마이클미셀과 페넬로피베로니크의 집안을 꼼꼼하게 훑어내며 시공간의 사실성을 강화한다. 한편, 폴란스키 감독은 각색까지는 아닐지라도 인명을 프랑스식에서 미국식 성씨인 코웬과 롱스트리트 집안으로 바꾸고 공간을 뉴욕, 브루클린의 지역으로 구체화시킴으로써 미국 관객의 이야기로 변모시키기도 한다. 이후 전개되는 인물들의 관계에서 카메라는 배우 네 사람을 개별적으로 담아내면서 그들 개인의 관점과 의견을 강조하고 교차시킨다. 이 과정에서 인물들의 성격은 한층 강화되는데, 특히 크리스토프 왈츠가 분한 앨런알랭이 핸드폰 전화소리와 함께 카메라에 빈번하게 포커스 되고 변호사로서 그의 행위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이 노출될수록 관객은 이들 인물들의 행위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갖게 된다. 이와 같이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카메라와 결탁하여 프랑스의 하이 코미디를 뉴욕의 중산층에 대한 신랄한 풍자극으로 변모시킨다. 공연에서 아네트의 구토가 연극적 장치로 처리되어 관객의 웃음을 자아내며 공연의 에너지를 고조시키고 관객의 소통을 도모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실적으로 처리된 케이트 윈슬렛이 분한 낸시아네트의 구토는 점차 노골화되는 인물들의 신경전과 갈등을 강화할 뿐이다. 그 결과 편집 없이 한 번의 컷으로 촬영을 진행했다는 이 영화는 공연이 선사했던 희극적 유쾌함 대신 시종일관 절제된 영상으로 중산층 문화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선사하는 셈이다.

대학살의 신
2012년 8월 국내에 개봉한 영화 <대학살의 신> [출처]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


매체의 차이가 만든 소통의 차이

한태숙이 연출한 공연 <대학살의 신>과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한 영화 <대학살의 신>은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까발리는 블랙 코미디라는 점에서 공통되지만, 매체의 차이로 인한 접근 방식과 그에 따른 관객 소통의 결과에서는 다소 이질적이다. 즉, 관객이 연극을 통해 경험한 것은 일종의 게임에 해당한다. 특히 이전의 공연에서 배우들이 했던 또 다른 연기를 기억한다면, 관객은 그들의 극중 행위를 ‘배우-역할-연기’라는 중복된 인식으로 바라볼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장면에서 피식하고 웃었던 것은 그 진지했던 배우 박지일이 알랭 역으로 분하여 쪼잔 하고 비열하게 구는 몸짓 때문이었다. 여기에 구토 행위와 같이 연극적 장치가 포함된 경우 관극 경험은 공연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변모한다. 반면, 영상이 담아내는 배우의 모습은 그 화면 안에서 통제된다. 카메라의 움직임은 서사를 부연하고 틈을 메우면서 사실성을 강화하지만, 그것은 지각적 체험이라기보다는 카메라의 대상으로서 객체에 해당한다. 카메라의 각도와 접근 방식은 이미 대상에 대한 감독의 판단과 관점을 담고 있으며, 관객은 이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다시 예를 들자면, 영화에서 앨런알랭 역으로 분한 크리스토프 왈츠는 변호사의 전형성 안에서 역할을 재현한다. 그를 보면서 상기했던 것은 배우나 연기가 아닌 변호사라는 인물의 이중성이었다. 연극 <대학살의 신>에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 인물은 서주희가 분한 아네트였지만, 영화 <대학살의 신>에서는 두 여배우들의 매력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앨런 코웬 역의 왈츠가 관객의 시선을 모은다. 공연 후에 유쾌한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던 반면, 영화를 보고 나서며 자조적 웃음을 지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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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주

최영주 연극 평론가/드라마투르그
동국대, 경기대 출강
『동시대 연출가론-서구편』 편저자
『연출가의 기술』 번역 외 다수의 논문과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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