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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적인 영화, 더없이 연극적인 연극

[색色다른시선] 영화 <외침과 속삭임> vs 연극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이경미_연극평론가

웹진 33호

2013.10.10

죽어가는 아그네스가 고통으로 단발마의 비명을 질러댄다. 그런 그녀를 언니인 카린과 동생 마리아가 지키고 있다. 째각거리는 시계 소리는 아그네스의 죽음까지 남아있는 거리를 청각적 울림으로 환기시킨다. 죽어가는 것은 비단 아그네스만이 아니다. 슬픔과 고통 사이를 오가며 이들 세자매가 의례적으로 보여주는 행동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

  • 죽어가는 아그네스가 고통으로 단발마의 비명을 질러댄다. 그런 그녀를 언니인 카린과 동생 마리아가 지키고 있다. 째각거리는 시계 소리는 아그네스의 죽음까지 남아있는 거리를 청각적 울림으로 환기시킨다. 죽어가는 것은 비단 아그네스만이 아니다. 슬픔과 고통 사이를 오가며 이들 세자매가 의례적으로 보여주는 행동 이면에는, 누군가의 죽음으로도 극복하지 못할 서로에 대한, 자신에 대한 애증과 열등감, 분노와 질투, 절망과 우울이 소리없이 아우성치고 있다. 거기에 하녀 안나의 숨죽인 탄식과 절망도 얹어진다. 아그네스의 육체가 죽어가고 있다면 다른 여자들은 영혼이 죽어가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죽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영화<외침과 속삭임>의 감독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출처] 국립극장 월간 미르 3월호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영화 <외침과 속삭임> 1972년作
[출처] 네이버 영화
“나는 인간 영혼의 내부는 빨간색 장막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 잉마르 베리만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살아있지만 지독한 죽음의 한 가운데에 있는 사람들. 모든 것이 다 거짓임을 되뇌이며 지독한 불감증 속에 갇힌 삶을 살아가는 카린, 내면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흔들리는 마리아. 그로 인해 스스로에 대해, 주변인물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저주, 수치와 경멸감이 목을 조른다. 그들은 아그네스가 죽었을 때, 그 죽음과 함께 자기 안에 속삭이는 모든 외침들을 함께 봉인해버린다. 죽은 아그네스를 위한 신부의 임종기도는 비록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남겨진 자들의 간절한 외침이다. 그러나 죽었다 생각했던 아그네스가 갑자기 다시 눈을 뜨고 격한 고통과 두려움을 호소한다. “난 죽은 사람이야. 문제는 내가 잠이 들 수 없다는 거야. 떠날 수가 없어. 너무 피곤해. 날 도와줄 사람 없어? 내 손을 잡고 따듯하게 해줘. 모든 게 너무 공허해.” 자기 안의 죽음을 외면함으로써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녀들 안에 숨죽이고 있던 감정들이 아그네스의 육체가 내지르는 암울한 비명과 함께 섬뜩하게 다시 분출된다. 아그네스의 닫힌 방에서 카린이 필사적으로 울부짖는다. “누구도 네 부탁을 들어줄 수 없어. 난 아직 살아있다구. 네 죽음과 연관된 걸 받아들일 수 없어. 너를 사랑하지 않아. 네 부탁은 아주 혐오스러워. 몇 시간 후면 난 여길 뜰거야.” 그러나 하녀 안나는 이미 스스로 죽음 한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받아들였다. 딸의 죽음과 함께 그녀는 이미 죽었다. 딸의 죽음도 그렇고, 아그네스의 죽음도 그렇고 그녀에게 죽음은 거부하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그녀의 삶 자체다. 젖가슴을 드러내고 아그네스와 아그네스의 죽음을 품을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화면 위에서 카린과 마리아와 대비되는 각도를 이루며 움직이는 안나는 그 자체로 그녀가 자기화한 죽음을 상징한다.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영화 <외침과 속삭임(Cries And Whispers)> [출처] 국립극장 월간 미르 3월호

베리만Ingmar Bergman 은 네 여자들의 소리죽인 고통과 외침, 속삭임을 아그네스의 죽음을 가운데 두고 마치 네 개의 악장처럼 교차시킨다. 그러나 회상이자 잠재적 무의식이기도 한 이 장면의 인물들 감정을 언어가 아닌 색감으로, 어둠과 빛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느린 움직임과 클로즈업으로 표현한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베리만처럼 인간의 얼굴에 그렇게 가까이 다가간 감독은 없었다’라고 말했다.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카메라의 이 깊숙한 시선은 인물들의 무표정 뒤에서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의 물컹거림을 무심한 듯, 그러나 미세하게 담아낸다. 천정과 벽, 바닥에 이르기까지 공간의 대부분을 채운 붉은색은 인물들이 입은 검정색과 흰색의 의상, 흰색 이불, 흰색 커튼과 대비를 이룬다. 그로 인해 붉은 색은 더 음울하고 탁하게, 검정색은 끔찍이도 무겁고 갑갑하게, 흰색은 더없이 가볍고 순결하게 색감을 드러낸다. 화면 위에서 이들 색이 다른 색에 대해 어떤 비중으로 얼마만큼의 공간을 차지하는가에 따라 인물들의 감정 또한 대비를 이룬다. 어둠을 가르는 가녀린 촛불의 흔들림, 침묵을 깨는 비명과 신음 또한 불안하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인물들의 내면을 시각화하는 장치다. 영화의 배경이라기엔 너무나 좁은 실내 공간은 몇 겁의 코르셋으로 꼭꼭 조여 맨 카린의 몸처럼 이들을 짓누른다. 테이블 위에 놓인 붉은 와인이 담긴 유리잔과 물 잔의 대비, 마주 않은 두 인물의 뒤에 나타나는 서로 다른 배경 등, 베리만은 언어가 아닌 이미지를 통해 대상에 감각적으로 다가간다.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연극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연출가 안드레이 서반 (Anderi Serban)
[출처] 국립극장 공식블로그 엔토니아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연극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2013.05.02~2013.05.05
[출처] 국립극장 홈페이지
“영화에서는 카메라가 순간을 기록하며 심오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장면을 잘 포착하는 반면, 연극은 그런 표현이 상대적으로 어렵습니다. 대신 친밀한 공간에서 관객들이 배우, 극중 상황과 관계를 맺으며 감정과 주제를 공감할 수 있다는 건 영화와 가장 다른 특징이죠.”
- 안드레이 서반


루마니아의 클루지 헝가리어 극단의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Cries and Whispers>. 이 연극의 연출을 맡은 안드레이 서반Anderi Serban은 독특한 클로즈업 기법으로 스크린의 평면성을 극복했던 베리만의 예술적 열망을, 역할과 역할 이전의 경계를 오가면서 순간순간 감정을 응축하고 이완시키는 배우들이 뿜어내는 몸의 존재감을 통해 새롭게 탄생시켰다. 공연은 이 무대 공간의 바깥에서 시작된다. 해오름 극장의 옆문을 통해 입장하면, 유일한 남자 배우인 졸트 보그단Zsolt Bogdan 이 워킹 스테이지처럼 생긴 좁고 긴 무대 위에서 가볍게 환영인사를 건넨다. 그리고 이내 베리만 역할 속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 이 영화를 만든 배경에 대해, 그리고 영화에 얽힌 여러 우여곡절을 털어놓는다. 그런 다음 영화에 등장한(아니 연극에 등장할) 네 명의 여배우들을 소개한다. 붉은색 바탕에 흰색 글씨가 씌여지던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연극에서는 현실과 영화, 연극이라는 세 개의 차원이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중립의 공간으로 표현된다.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연극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출처] 국립극장 공식블로그 엔토니아

배우들의 안내에 따라 영화 속으로, 그리고 동시에 연극 속으로 들어가 관객이 만난 작은 공간에는 무대가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다. 안드레이 서반은 해오름의 넓디넓은 무대를 의도적으로 포기하고, 그 위에다 고작 100여명 남짓한 관객만이 입장할 수 있는 직사각형 모양의 작은 공간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영화 속의 좁은 실내공간이 주었던 갑갑함과 은밀함의 분위기가 이 연극의 공간으로 더 압축되어 밀도있게 전이된다. 관객들이 기다란 한쪽 벽을 따라 4열로 배열된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하나, 얼굴의 미세한 주름 하나하나가 손에 닿을 듯 가깝다. 연극무대에서도 영화 속의 붉은 색과 흰색, 검정 색은 그대로 가져온다. 영화 속의 주요 장면 또한 구도에서부터 배우들의 움직임까지 거의 그대로 가져왔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스크린 속 카메라의 흔적으로 존재하는 베리만의 ‘시선’이 졸트 보그단에 의해 구체적인 몸을 입고 연극의 공간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번번이 촬영을 중단시키고, 네 명의 여자 배우들과 함께 자신들이 다가가고자 하는 감정의 실체와 그것을 순간적으로 포착해내기 위해 열정적으로 고민하는 베리만이 무대에 같이 존재한다. 졸트 보그단은 카린의 남편과 마리아의 남편, 그리고 의사와 신부의 역할 또한 역동감있게 소화한다. 역할과 역할 사이를 이동하는 그런 그의 모습은 공연을 보는 또다른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무대 위에 서반의 공연 속에서는 단연코 배우와 배우의 몸이 중심이다. 특유의 클로즈업 기법으로 인물의 내면을 세밀하게 포착해낸 베리만의 영화는, 무대 위에서 감정을 순간적으로 응축시켰다 다시 순간적으로 이완시키는 배우들의 농밀한 연기를 통해 또다른 차원을 얻는다. 이제 스크린에 대한 ‘응시’ 대신, 관객은 배우들이 역할 속으로, 역할 밖으로 오가는 과정에서 뿜어내는 에너지 속으로 흡수되어 그와 직접적이고도 감각적으로 교감한다. 동성애와 피에타, 에로티즘, 자해, 소심함과 냉혹함, 경멸과 굴욕, 아름다움과 추함, 환희와 고통 등, 배우들은 이 모든 것을 그 어느 것으로도 매개되지 않은 그들의 날 것의 몸에 담아낸다.

연극의 마지막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안나가 아그네스의 일기를 읽는 장면이다. 안드레이 서반은 이 장면만큼은 유일하게 영화의 본래 장면을 그대로 가져와 무대 뒷벽에 투사시켰다. 흰색 드레스에 흰색 양산을 쓰고 푸른 초원 위를 걷는 세 자매와 안나의 모습은 영화에서 그 자체로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실제로 있었던 일에 대한 서술인지, 아니면 아그네스의 무의식이 빚어낸 환영이었는지 모호한 이 장면은, 연극에서 연극과 스크린이라는 이질적인 대비를 통해 또다른 의미에서 낯설고도 몽환적이다.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연극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 [출처] 국립극장 공식블로그 엔토니아

오랫동안 스톡홀름 왕립극단을 이끄는 등 남다른 연극작업의 과정을 거친 사람답게 베리만은 스크린 속으로 연극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불러온 감독이다. 안드레이 서반은 너무나도 연극적인 베리만의 이 영화를 정통연극으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특히 공간 속 배우의 몸과 그에 대한 감각이라는 물질적 매체성을 도드라지게 맞세웠다. 영화와 연극의 접촉면 위에서, 이 연극은 한편으로 베리만의 예술세계에 대한 연극적 오마주가 된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어떤 해체적 실험에도 불구하고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연극의 본원성을 보여주는, 전혀 새로운 <크라이스 앤 위스퍼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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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이경미 연극평론가

한편의 연극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이 극장, 저 극장을 기웃댄다.
'잘 만든' 연극 보다는 꿈틀대는 파동이 느껴지는 연극을 좋아한다.
http://blog.naver.com/puru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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