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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3

피해생존자 익명 좌담회

참석_령웨이,무민,미모,아스타/정리_유혜영(본지에디터)

제158호

2019.04.25

웹진 연극in은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기획 기사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연극계 최초 미투 이후 법정 싸움을 지속해오고 있는 피해생존자 분들을 모시고 재판의 과정과 어려움, 이후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좌담의 특성상 실명이 아닌 익명으로 처리하였음을 밝힙니다. -연극in 편집진

일시 : 2019. 4. 8. 월. 오후 3시

장소 :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

진행 : 정진세 (본지 총괄에디터)

참석 : 령웨이, 무민, 미모, 아스타

#미투 이후 #재판 시작 #일상의 변화
서울 서초구 서울지방법원 앞 이윤택 성폭력사건
1심 선고 기자회견 현장(사진출처: 뉴시스)
무민
1심에서는 재판이 2주에 한 번씩 있었고, 2차 공판 때는 3주에 한번 재판이 들어갔었던 것 같아요. 그게 일상이었죠. 특히 1차 공판 할 때는 준비할 것이 너무 많았거든요. 판사님을 이해시키기 전에 검사님부터 이해시켜야하는 상황이었고, 진술서를 쓰지만 검사님이 중간 중간 물어보시는 것들에 대해 답변하고, 주위 분들한테 전문가적인 소견을 써달라고 부탁도 해야 했고.
아스타
증언할 수 있는 분들 찾아야 했어요. 공소시효 안에 있는 분들을 찾고, 같이 고소할 수 있냐고 물어보고. 할 수 있다고 싸워보자고. 그러다가 안 되면 괜찮다고 위로하고.
무민
상대편의 참고인으로 오는 분들이 다 아는 분이에요. 옛날에 친했던 선배들, 그러면 그렇게 오는 분들이 누군지, 극단 안에서는 어떤 위치였는지, 그 사람이 이런 성폭력의 사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그런 내용을 써서 검사님한테 보내드려야 했고요.
아스타
미투 이후부터 바빴죠. 서류 작업도 진짜 많이 했어요.
미모
이를테면, 검사님이나 변호사님들은 어떤 프로젝트를 맡은 연출가인 거예요. 맡은 프로젝트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2-3개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참고자료가 될 만한 게 유튜브나 네이버나 논문에는 없어요. 우리가 그 역할이었죠. 왜냐면 제일 잘 알고 있으니까. 특히 미투 재판은 시간이 많이 지났고 증거라는 게 없잖아요. 증인이 있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의 말, 우리의 기억, 우리의 기억을 증언해줄 수 있는 참고인, 이런 게 너무 중요했어요.
진세
재판이 시작되고, 언론에서 조명을 받았을 때 상황이 어떠했나요?
미모
미투하고 나서는 매일 매일이 팡팡 터졌어요. 감정적인 글들도 막 올라오다 보니까 진실 공방이 따라 붙으면서 별별 이야기가 오고갔어요. 가명을 써서 글을 올리니 추측되는 사람들을 언급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멘붕에 빠지는 거죠. 그리고 가장 큰 사건은 곽모 배우와 얽힌 사건. 어떤 변호사가 ‘꽃뱀이란 촉이 왔다’ 고 말했죠. 원래도 SNS를 잘 안했는데,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하게 됐어요.
아스타
그 이후에는 모든 접촉을 다 없애려고 했고요. 그때부터 ‘피해자다움’에 집착했던 것 같아요. 우리는 나서면 안 되고, 나서면 항상 문제가 생기고, 구설수에 오르고, 구설수에 올랐더니 ‘꽃뱀’이더라, 하는 종착역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얌전히 있자, 조용히 있자, 나대지 말자, 이렇게 생각했어요.
무민
우리끼리 했던 얘기가 있어요. 절대 누구를 만나든 다 녹취된다고 생각하고 나도 녹취하자고.
아스타
솔직히 미투 이후부터는 거의 잠을 못 잤어요. 미투 이후부터는 일상이 완전히 뒤집어진 것 같아요. 개인적인 사생활, 인간관계, 가정생활이라든지 이런 것도 잃었지만, 공적으로도 작업을 접는 일들도 발생했고요. 작업을 하는 태도라든지 작업을 하는 방향성이라든지 하는 것들도 변했죠. 한편으로는 법정싸움을 계속 해나가야 했어요.
미모
저는 너무 공적인 사람이 되어버렸어요. 길에서건 어디서건 질문을 받는 사람이 됐어요. 인사와 안부를 가장한 끝도 없는 질문들이 쏟아졌고요. 물론 재판 때문에도 너무 정신이 없었고, 그 외 변호사나 형사들, 증인들을 만나는 일상이 추가됐죠. 그 와중에 공연을 해내기도 벅찼어요. 일상이 변화했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 뺨을 맞고 하루를 시작한다는 느낌? 그런 거였죠 뭐.
령웨이
미모 언니가 일상 얘기 제일 많이 했는데, ‘빨리 우리의 일상을 회복해야해!’ 그런데 회복되지 않았어요. 일상이 완전 변해버린 거죠. ‘그래 그런 일상은 다시 회복될 수 없는 거였어.’ 이제 이런 입장이 됐어요.
아스타
미투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많이 얘기했던 것 같아요. 그 이전과 이후는 너무나 달라졌다고요.
#재판과정에서의 어려움 #2차가해 #피해자다움 #관계의 변화
무민
처음 미투를 했을 때는 사실 내가 당한 성폭력에 대해서 어느 정도 치유가 됐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시간이 많이 지났거든요. 그래서 용기내서 할 수 있었고... 그런데 법정까지 가게 되니까 생각과는 다르게 일이 커진 거예요. 특히, 경찰서에 갔을 때가 제일 힘들었어요. 조서를 쓰는데 그림 그리듯이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해요. 그때 그 상황에 무슨 옷을 입었고, 어떻게 당했고, 이런 것들을 자세하게 얘기를 해달라고. 조사받을 때 아침 9시에 들어가서 새벽 2시쯤 나왔거든요. 그 하루를 그 시절로, 그때로 돌아갔던 거죠. 돌아가고 싶지 않고, 돌아가지 않으려고 몇 년 동안 노력을 했는데 단번에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간 거예요. 그리고 다음날 일어날 수가 없었어요. 다시 그때의 몸 상태, 그때 힘들었던 상태로 돌아가게 되면서 심리 상담을 받고 있어요. 일주일에 한번씩. 약도 먹고. 그렇게 버티면서 재판을 계속 하고 있습니다.
령웨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다시 그 순간으로 가야만 해요. 그래야 증언을 할 수 있거든요. 우리도 억지로 노력해서 가는 거예요. 그리고 다시 타임머신 타고 여기로 와야 하는데, 갈 때와 올 때가 차원이 달라요. 배우가 연기를 하면 극중 상황에 몰입이 되었을 때 그 순간에 확 빠져버리잖아요. 그런데 이건 실제로 나한테 있었던 일이니까, 그 상황 안으로 완벽한 몰입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때 고통이 고스란히 떠올라서 엉망인 상태가 되는 거죠. 다시 나를 치유해야하는 상황이 될 수 밖에 없어요.
무민
시간이 흐르면서 간신히 상처를 덮어놨는데, 그거를 막 저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그 상처를 다 헤쳐 놓는 거죠. 지금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힘들어요.
진세
심리상담은 어떻게 지원이 되나요?
미모
여성가족부에서 해바라기센터를 지원해요. 그래서 성폭력과 관련된 분들은 바로 스마일센터나 해바라기센터로 연결을 해주시고, 좀 더 상태가 심각하신 분들은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로 가게 되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경우, 치료비는 전부 국가에서 지원해줘요.
진세
미투 이후에 사회에서 2차가해, 피해자다움, 백래시, 성인지 감수성 등의 용어를 새롭게 알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런 개념을 모를 때, 당사자를 대하는 방식에서 의도와는 다르게 잘못 소통하는 경우가 꽤 있었죠.
미모
저 같은 경우는 미투 하고 나서 2차 피해에 시달렸어요. 그게 2차 피해인 줄도 몰랐어요. 제가 극단 대표이기도 하고, 늘 대변하는 입장이다 보니까 질문이나 항의 글이 들어오면 계속 읽고, 대답하고, 읽고, 대답하고 했었어요. (변호사님 추천으로) 나중에 해바라기 센터에 갔어요. 너무 힘들어서요. 거기서 알게됐죠. 그게 다 2차 피해인거고, 추가적인 가해에 시달린 거라고. 저는 거부할 권리가 있다고요. 대꾸할 이유도 없고, 절대적으로 떨어져 있었어야 했는데 우리가 다 무지했던 거예요.
령웨이
인간관계가 완전히 변했죠. 모든 관계가 다 재정립됐고요. 저를 이해하는 사람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분리가 됐어요. 이해하는 사람이 굉장히 적어요. 제가 사실은 관계가 두루 좋은 사람으로 유명했어요. 그런데 주변 사람들이 하나 둘 연락을 안 해요. 응원하고 지지한다고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 남은 사람이 진짜 없어요. 이유는 말하지 않아요. 그냥 바쁘대요. 그럼 그동안 고마웠으니까 밥이라도 살게, 그래도 안 만나주는 거예요.
아스타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이면, ‘어머 오랜만이야!’ 그래야하는데, 그 사람이 나를 다르게 보는 게 딱 느껴지면서 ‘아, 내가 이제 다른 사람이구나. 이제 예전이랑은 다르구나’ 이런 거를 되게 감각적으로 느꼈던 것 같아요.
미모
특히 친한 사람들이 ‘그렇게 심각했어?’ 라든가, ‘그렇게까지 해야겠어?’라고 마치 저를 걱정한다는 듯이 얘기하는데요, 그 말에는 자기 주변에 대한 계산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어요. 저를 포함해 주변 연출들이 위계와 권위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래서 제가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거부반응이 많죠. 저희가 법원을 다니며 외부활동을 자제하는 동안 저희와는 전혀 접촉이 없는 상황에서 저희를 대변하는 활동들이 계속되고 있어요. 미투운동은 몇 번의 포럼이나 강연으로 전문성을 갖게 되는 게 아니잖아요. 피해생존자가 어떤 상황이고, 무엇이 필요하고, 어떻게 그들에게 접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학습 없이 생겨난 활동도 있다고 생각해요. 때로는 활동의 목적이 피해생존자들과의 연대와 보호가 아니라 활동하시는 분들의 존재당위가 우선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고요.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스타
술자리 같은 것도 안 가게 돼요. 술자리에서 실수하는 경우들이 있죠. 대단한 악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워낙 남성중심주의적인 연극계 문화에서 활동해온 분들이니까, 그러는 걸 텐데... 심한 경우도 있어요. 1심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는데, 어떤 뒤풀이 자리에서 남자 배우 분들이 공연 끝나고 어깨가 좀 뻐근하다고 그런 거예요. 근데 제가 피해생존자인줄 모르던 어떤 분이 웃으면서 “야 너 밀양 가서 안마 받아.” 이렇게 말씀하신 거죠. 제 몸에서 피가 한 번에 다 빠져버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흔하게는 ‘야 너도 미투할거냐? 내가 이렇게 하면 미투할거냐.’ 그러는 분들도 있어요. 이런 얘기들을 들을 때마다 싸울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모임에는 잘 안 나가고 피하게 되는 것 같아요.
#사법 당사자로서의 경험 #현실과 법정의 괴리
미모
쌍방의 목적이 완전히 다르잖아요. 한쪽은 형을 많이 받아내야 하고, 한 쪽은 무죄를 증명해야 하는 거죠. 목적을 달성하려면 논리를 만들어내야 해요. 한 줄의 문장 같은 것이죠. 이윤택이 만들어내는 문장은 ‘여성들이 암묵적으로 합의를 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연극계 문화 안에서 예전에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런 것이었어요.
아스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연극을 만드는 과정에서의 연출가와 배우 사이의 특수한 일이다.’ ‘특수성이 있다.’ 라고요.
미모
지난 1심 때의 한 줄은 ‘미모가 부산에 있는 친구들과 서울에 있는 친구들을 다 매수하여, 극단의 성공을 위해 연희단거리패를 무너뜨리려고 한다.’였어요. 그런데 우리 극단이 거기를 깨부술 정도의 실력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편 변호사가 알게 된 것이죠. (웃음)
령웨이
그런데 아직도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 많아요. 미투한 사람들이 극단의 대표들이거든요. 이들이 자신의 극단의 이익을 위해서, 부산에 있는 극장을 차지하기 위해서, 지원금을 타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아스타
저희가 살아가면서 법이라든지 이런 사회적인 체계를 잘 모르잖아요. 예전에 저도 뉴스를 보거나 기사를 접할 때 ‘아, 이 사람은 억울하겠지만 법은 냉정한 거야. 법은 안 되는 건 안 돼’라고 생각 했는데, 실제로 가서 들어보니까 강간, 유사강간, 추행 이런 것을 가르는 기준이 말도 안 되게 세워져 있는 거예요. 진실을 알려고 하는 눈으로 바라보면 이 법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 많이 느꼈고요, 그러다보니까 웬만한 노동문제나 인권문제, 그런 거에 굉장히 눈이 열리게 되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 사람들의 억울한 마음을 알게 되더라고요.
무민
저 같은 경우는 피해자보호가 법정에서 너무 안 되어 있어서 깜짝 놀랐어요. 가해자가 앉아있는데 가림막 하나 두고 옆에서 들으라는 듯이 기침하고 있는데, 거기서 네가 당한 걸 얘기하라, 그러고요.
아스타
저는 심지어 검사 앞에서 진술할 때 바로 옆 옆방에 문을 열어놓고 이윤택이 반대 변론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이곳이 밀양인 줄 알았어요.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진술하면서 그 때, 그 곳으로 가있는 상태인데, 가해자 목소리까지 들리니까 멘붕이 오더라고요.
미모
법정에 들어가면 거기서는 다 마주할 수밖에 없어요. 판사님, 변호사님, 가해자도 거기 앉아있어요. 우리가 무슨 얘기하는지 들어야 하거든요. 정말 칸막이 하나 있어요. 가해자가 자기가 여기 앉아있다는 걸 끊임없이 어필해요. 증인이건 참고인이건.
아스타
안희정도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헛기침. 유독 피해생존자들이 증언할 때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하나만으로 위력이 발생되는 거죠.
미모
그리고 우리가 변호사님이나 검사님들한테 정보를 제공하고 질문을 전해드리는 것처럼, 상대편 변호사에게서 나오는 말들도 대부분 이윤택의 생각일 거예요.
아스타
‘배우는 환상과 환영을 쫓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들은 감성적인 언어만 얘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증언을 믿을 수 없다.’ 이런 말들. ‘연출과 배우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지 이것을 일반 사회에서의 시각으로 바라볼 수 없다.’ 항상 들어왔던 그 단어, 문장들. 그것은 변호사의 말이 아니라 이윤택의 말일 거라고 생각해요.
#재판과정에서의 역할 #실질적인 임무 #공대위의 도움
령웨이
실질적으로 할 일이 너무 많아요. 변호사님들이 우리의 사정을 다 알 수가 없는데, 모든 항목들을 법리에 맞춰서 검사님께 제출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변호사님들은 저희한테 요청을 하세요. 한동안 업무를 보시는 변호사님이 일곱 분이었는데 일곱 분들이 한명에게 돌아가면서 연락을 해요. ‘정확하게 날짜가 언제였죠?’, ‘이 가명이 누구였죠?’ 이렇게 필요한 부분들을 물어보세요. 그래서 나중에는 농담삼아 우리가 서로를 사무장이라고 불렀죠.
진세
피해 당사자이면서 일을 처리해야 하는 실무자이기도 했던 건가요?
령웨이
우리가 다 조사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정확한 시기, 분위기, 실제적인 피해 상황 안에서 법리적으로 해당되는 것들, 여러 가지 정보들을 모으는 시기가 3개월 정도 계속되었던 것 같아요. 아이러니하지만, 가해자의 사모님이 정리하신 ‘극단 30년사’ 자료가 있었어요. 빨간색으로 된 백과사전만한 책인데 저희가 그 책을 뒤져가면서 가물가물한 기억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고, 단원명부록에 잠깐 있다가 나간 분들까지 다 있어서 도움을 받았죠.
미모
미투를 하고, 해바라기센터에서 치유를 시작하고, 고소를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비슷한 게, ‘그때 내가 거기를 안 들어갔거나 쟤를 도와줬거나 그랬으면 어땠을까’하는 자책을 한다는 거예요. 그때 즈음 다들 증인을 섰던 것 같아요. 상대측 변호사가 ‘알고 있지 않았느냐. 갑자기가 아니지 않느냐, 이게 어떻게 추행이냐, 네가 좋은 역할 따내고 싶어서 네 욕심에 저 사람이 안마를 요구했을 때 오케이 한 것이 아니냐.’ 이런 식의 언어로 피해 생존자들을 공격하죠. 처음에는 아니라고 강력히 대응하다가도 감정적으로 추슬러지지 않아요. 왜냐면 후배였을 때는 모른다 해도, 입단한 지 1년이 지나면 누구나 선배가 되거든요. 모든 후배를 구해주고, 그 후배들을 대신하려고 했었는가에 대한 자책에서 자유롭지 않죠. 그렇게 상대측 변호사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니까 재판을 하고 나오면 만신창이가 되는 거예요. 다시 병원으로 달려가고, 약을 먹고, 힘들어지죠.
령웨이
증언하고 나오면 밖에서 한 5명 정도가 기다리고 있다가 마치 다 쓰러져가는 환자를 부축하듯이 데리고 나와서 얘기 털어놓게 하고, 하룻밤 재워서 보내고 그래요.
미모
서울에 살지 않는 분들은 증인으로 출석하면 차비가 5만원 나와요.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부산에서 와요. KTX타면 기본 차비가 10만원이 넘는데다가 바로 못 내려가죠. 우선 밥 먹고, ‘잊어버리자’ 하면서 계속 얘기하게 해요. 재판 과정을 반복해서 말하면서 ‘이때는 내가 잘못한 거 같아, 이때는 내가 잘못했어.’ 그러면 자책하지 못하게 괜찮다고 아니라고 달래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재판 이전에 자료 수집 다니면서 쓴 돈 외에 이런 재판 이후의 비용도 많이 들었어요.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금전적으로 지원해주셨던 몇 분의 선배님들께 감사드리고 싶어요. 그분들이 보내주신 소중한 기금이 총 450만원이었고 그거 가지고 아껴 썼어요.
령웨이
사실 지원해주시는 금액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각자 다 사비를 들였어요. 그래도 저희는 무료 변호의 도움도 받고 그나마 돈이 많이 안 들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지금까지 몇 천 만원이 들어간 거예요. 진짜 혼자 법정 투쟁하시는 분들은 너무 힘들 거라고 생각해요.
미모
혼자 하는 분들은 불가능해요. 저희 같은 경우는 이 사건이 엄청난 이슈가 되었었기 때문에 변호사님들이 많이 나서주셨어요. 그리고 변호사님들은 여성가족부에서 소정의 사례비만 받고 지금 1년 반 동안 일하고 계시는 거예요. 이게 가능하냐는 거죠.
진세
공대위(공동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시는 변호사님들이신거죠?
미모
네, 맞아요. 제가 최근에 만화, 영화 쪽에서 미투하고 해바라기센터에서 상담 받는 분들을 몇 분 만났어요. 그런데 저희보다 먼저 성폭력 사실을 밝혔음에도, 아직 국선변호사도 못 만난 분들도 있는 거예요. 저희는 워낙 사건이 컸기 때문에 바로 바로 진행이 됐는데, 그 분들은 그렇지 않았던 거죠. 그 순간 되게 죄송하고 조심스러웠어요. 어떻게든 도와드리고 싶었고요. 그래서 변호사님하고 상의를 했는데, 역시 돈 문제와 부딪혀요. 변호사님들의 선의를 언제까지 요구할 수는 없잖아요.
진세
재판 당사자들 간에도 속도와 관심의 차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군요.
미모
사실은 미투하고 초기에 대표 변호사님이 변호사들의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성폭력, 위계폭력 피해생존자들이 재판을 받을 수 있게 지원하는 전국적인 기금을 모아보면 어떨까 말씀을 하셨었어요. 그래서 ‘그런 것을 해도 될까요? 사람들이 돈을 낼까요?’ 그런 질문을 던지며 논의를 하던 단계였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곽모 배우를 만난 것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서 논란이 되었고, 그 계획이 올스톱 된 거예요.
아스타
돈도 돈이지만, 미투의 본질을 흐렸다는 이미지가 생겨버렸죠.
령웨이
너무 화가 나는 거예요. 그 사람들은 아무 생각없이 돌 던져놓고 잘 살고 있잖아요.
아스타
우린 서로가 진실인지 알지만, 그때 대학로 분위기도 아무도 안 믿어주고... 남자선배들은 뭐 이러다가 회식문화 없어지고, 선후배 사이 안 좋아지면 어떻게 하냐, 이랬다고 해요. 운동권이었던 선배들까지도 그런 걸 보면서, 내가 절대로 흐트러지면 안 되겠다, 고 생각했어요. 성폭력 사건은 성폭력 사건으로 형사처벌이 되어야 하는 문젠데 마치 우리가 스스로의 도덕성을 증명해야하는 것까지 돼버린 거예요.
미모
사람들이 우리를 ‘꽃뱀 프레임’에 씌워서 보겠구나 생각했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다움’이라는 틀에 옭아매서 봤다고 생각해요.
아스타
재판은 오히려 허들을 하나둘씩 넘는 기분으로 헤쳐 나갈 수 있었는데... 제일 힘들었던 건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프레임 씌우기였던 것 같아요.
#연극 현장에 바라는 점 #전하고 싶은 말
미모
지금은 이 일이 중요하니까, 그래도 목적이 있으니까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열심히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하고 싶은 건 연극이에요. 무대로 돌아가 연출하고 싶어요. 너무.
령웨이
사실 제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길었어요. 근데 친하다고 생각했던 어떤 분이 제 머리를 붙잡고 흔들면서, ‘이것도 성희롱이야?’ 라고 하셔서 그 날 머리를 밀었어요. 너무 화가 나서. 친하다고 농담처럼 하시는 행동이지만, 정말 말씀을 조심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괜찮겠지,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요.
미모
지금은 국공립단체에서만 성폭력 예방교육을 하잖아요. 작은 극단에서도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규모 극단에 교육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아스타
저는 작품 안에서 허용되는 도덕적 범위가 실제보다 훨씬 더 넓다고 하는 그런 생각 때문에 예술계가 너무 많은 것들을 놓치지 않나 생각해요. 작품도 마찬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도 자유로움을 빙자해서 시대감각을 놓치고 있는 것 같아요.
미모
그래서 KTS(Korea Theater Standard : 한국형 연극 자치규약)가 꼭 만들어져야하는 것 같아요. 공연 문화, 뒤풀이 문화. 연습실 분위기. 너무 심각했던 도제 시스템들... 이런 것이 우리나라는 유럽이나 미국과 많이 다르잖아요.
령웨이
많은 피해 사례를 바탕으로 그런 기준들이 정해지고,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하는 교육이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미모
더해서 연극계에서 미투나 성폭력 관련 활동을 하는 단체들이 좀 더 투명하고 전문적인 활동들을 해주었으면 좋겠어요. 피해 생존자들과 연대하는 방식에 대해 더 고민해주시고 행동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계획 #공유하고픈 생각
령웨이
무너진 일상을 다시 회복할 수는 없지만, 또 다시 아름다운 일상을 만들어나가야 할 것 같아요, 앞으로. 이제부터는 내가 하고 싶고 너무 재밌고, 나한테 상처주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아주 좋은 작업들을 하자. 그것이 나의 또 다른 일상이 될 것이기 때문에. 아예 없는 상태에서 다시금 하나씩 계단을 놓는 작업들이 될 것 같아요.
무민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어렸을 때 성폭력을 당하고 얘기를 못했던 이유가 어떤 누구한테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위계가 너무 강했고,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 바로 위 선배에게도 ‘할 얘기가 있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선배도 어려운데, 그런 선배도 어려워하는 ‘대표가 나한테 이래요.’라고 어떻게 말해요. 저는 그런 분위기에서 말을 못했는데... 이제 제가 선배가 됐잖아요. 제 밑에 후배들이 많은데, 어떤 이야기라도 연극계 안에서 했으면 좋겠어요. 연극계는 할 수 있는 얘기가 있고, 할 수 없는 얘기가 너무 많아요. 연극은 다 같이 하는 건데 왜 개인적인 얘기를 자꾸 하니, 분위기가 그렇게 되니까 못 하는 거죠. 이제 그 분위기를 바꿔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예요.
미모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들어 주느냐도 참 중요해요. 누군가 듣고 있다는 것 자체가 치료의 시작이거든요. 사실 완벽한 치료는 가해자의 진심어린 반성이에요. 그런데 그게 어렵더라고요. 저희는 지금 재판이라는 방식을 통해 억지 반성을 끌어내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 것으로는 치유가 안돼요. 그래서 최근 피해생존자들과 함께 ‘정의로운 미투 생존자들의 익명모임’을 시작했어요. 지금의 미투운동은 피해생존자가 오롯이 본인을 드러내 가해자를 형사고소하는 방식 아니고서는 관심을 받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그마저도 공소시효라는 벽에 부딪혀 소리도 못내는 피해생존자들이 대부분이고요. 그 판을 바꿔보려고요. 피해생존자는 익명으로 연대하고 가해자에게 집중되게. 성직자분들, 수도자분들과 연대해서 피해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를 성직자분들과 수도자분들이 직접 대독 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만들어 SNS에 공개하고 있어요. 그 영상에서는 피해생존자 뿐만 아니라 가해 지목자도 익명이에요. 폭로나 공격이 아닌 익명의 지목을 통해 가해 지목자의 진심어린 반성을 끌어내 보자가 목적이에요. 내부적으로도 너무나 이상적인 방법이라 현실에서 가능하겠냐는 평가가 있지만 저는 조금씩 바뀌어나가리라 믿어요. 피해생존자들을 2차 피해로부터 보호하는 최소한의 안전망이 돼주지 않을까 생각해요. 많은 분들이 관심 가지고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진세
긴 시간 동안 고생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이 귀기울여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윤택 성폭력 사건 경과 및 4월 9일 공동대책위원회 기자회견 발언문
http://hotline.or.kr/board_statement/55590

정의로운 미투 생존자 익명모임
https://www.facebook.com/792647497765655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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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영

유혜영
본지 前편집에디터. 공연이 일어나는 공간을 좋아하고, 기록하는 일과 기록되지 않는 사람들에 관심이 있다.
yoohy_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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