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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6

조연출편

조연출 A, B, C / 정리_정진세

제161호

2019.06.13

웹진 연극in은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여섯 번째 기획으로는 조연출로 활동하는 세 분의 이야기를 익명의 글로 옮겼습니다. 원고는 공통된 질문과 그에 대한 답변으로 구성되었습니다. - 웹진 연극in 편집부
(출처: 『불편한 연극』,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여성가족부)
1. 연극계 미투 이후 작업 환경, 또는 나 자신의 달라진 부분이 있나요?
A
내가 생각하기에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들이었다. 아무도 불편하다 말하지 않으니 나만 불편하게 여긴 것은 아닌지 고민하며 내 탓으로 돌리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미투 이후 “지금 발언은 성희롱이다(불편하다)”라고 말하고, 상대방의 사과와 함께 달라진 태도를 경험한 적도 있다. 나의 불쾌함을 표현할 언어를 찾았고,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개개인의 인식 변화가 있었고 간담회, 포럼, 집회 등 불편함을 느낀 개개인이 모여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계약서에 인권, 성범죄에 대한 부분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어느 한 요소가 아니라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되면서 작업 분위기가 변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내 나이가 중요한가 싶을 정도로 내 나이를 알기 전과 알고 난 후 상대방의 태도가 달라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예전에는 내가 지금 조연출이라는 이유로 어린 사람 취급을 받고, 보호를 받는 느낌이 있었지만, 이제는 조연출이어도 같이 작업을 하는 동료로 여기고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는다. 연출가보다 먼저 일어나는 술자리에서도 ‘연출보다 집에 먼저 가는 조연출’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다.
B
아무래도 미투 이전과 달라진 부분이 없다고는 볼 수 없을 것 같다. 분명히 바뀐 부분들은 있다. 그러나 조연출이라는 직업 자체를 전문적으로 보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한 데다, 공연계의 특성상 재원 부족, 인력 부족에서 오는 문제들을 조연출이 온몸으로 메꾸는 일이 있다 보니, 조연출의 역할 자체가 미투 운동으로 인해 받은 영향은 크지 않다. 조연출의 위치와 역할이 바뀌려면 공연계 전반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공연은 왜 충분한 경제력을 갖기 못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로 돌아오게 된다. 미투 이후 가장 강력하게 영향을 받는 곳은 상업 프로덕션인 것 같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영향을 크게 받는데다가, 공연계 관객들이 젠더 이슈에 민감하기 때문에 상업 프로덕션에서는 성차별적인 스토리 라인이나 대사를 정리하고, 이야기 안에서의 성폭력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더 하게 되는 것 같다. 작업을 하다 보면, 캐릭터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여성적인’, ‘남성적인’ 같은 단어를 사용하게 될 때가 있다. 공연계 미투 이후 젠더 이슈가 민감하게 다뤄지면서 공연계 전반의 모든 사람들이 문제의 심각성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공감하던 공감하지 않던, 위에 말한 것 같은 성차별적인 형용사나 설명을 조금 자제한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30대 후반의 남자 연출과 40대 초반의 남자 디자이너와 디자인 회의를 했던 적이 있었다. 연출이 다양한 디자인 아이디어를 내던 중, 여성의 몸이 성적인 코드로 소비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냈고, 디자이너가 이를 지적했다. 그리고 연출은 수긍했다. 디자이너가 그 말을 했을 때, 나는 비꼬는 말인 줄 알았다. 남자 스태프에게서 한번도 그런 말을 진심으로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자이너는 진심이었고, 두 사람은 여성이 몸이 성적인 코드로 소비되면 안 된다는 공통의 명제를 이해하고 있었다. 그 순간 희망을 보았다. 공연계의 유니콘들이 어쩌다 여기 모여있나 싶었다.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C
바뀌어 가고 있다고는 보이는데 아직 크게 체감하진 못한 것 같다.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하 성반연)의 핸드북을 받아 읽거나 동료들과 성평등, 위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그래도 변해가고 있구나, 변할 수 있겠구나 하고 느끼긴 한다. 내가 주로 함께 하는 팀은 상대적으로 성폭력, 위계폭력에 경각심을 가지고 서로 존중하는 작업 문화를 가진 것 같다. 그러나 과거에는 언어적 성폭력과 성 편견, 차별, 위계 폭력을 일삼는 연출과도 작업한 적도 있다. 정말 지옥 같은 몇 달이었다. 물은 셀프가 아닌 센스 있게 조연출이 갖다 바쳐야 했고, 소품은 물론 연습 신발까지 가지런히 세팅하고, 뒤풀이 분위기까지 띄워야 했다. 창작에 대한 의견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고 연출에 대한 도전 혹은 치기로 받아들인다고 느끼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조연출을 할 때 힘든 건 “어디쯤 오셨어요?” 하는 지각하는 사람의 확인 전화를 거는 자체가 아니라 조연출이 그런 일 하는 사람 정도로 여겨지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조연출을 동료 예술가가 아닌 쉽게 부리는 아랫사람으로 여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굴욕감을 느끼며 힘들게 연습을 나갔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동료들에 대한 위계폭력과 폭언, 언어적 성폭력이었다. 내가 직접 당하지 않아도 곁에서 목격하고 나중에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참담함과 무력감을 느꼈다. 해당 연출과는 다시는 작업을 하지 않아서 미투 이후 어떻게 변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늘 기억하고 있고 동료들이 걱정된다. 개인으로서는 미투 운동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윤택 기자회견 날 연습실 분위기가 기억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그때 동료들의 표정을 보고 저 멀리 이상한 극단의 문제가 아닌 나와 내 동료들의 삶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문제구나 하고 체감했다. 미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동료, 친구들, 연인이 다양한 형태의 성폭력 경험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미투와 그 제반 현실의 문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고, 들어볼수록 그에 비해 나는 위기의식이 적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 이후 작업에 있어서나 일상에 있어서나 좀 더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고, 주의하고, 성평등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것 같다.
2. 미투 이후 오히려 더욱, 또는 여전히 겪는 어려움이 있나요?
A
한동안 미투는 여러 사석에서도 사람들이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빠지지 않는 이슈였다. ‘요즘에는 이런 말 하면 안 된다지만’이라고 말문을 떼며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분명 이제는 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알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과는 더 이상 논쟁하고 싶지 않아서 뒤에 이어지는 말들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사람의 이런 대화가 나에게서 끝이 났으면 했다. 다른 이들도 나와 같은 피로함, 분노, 무기력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잠자코 있을 것인가 논쟁을 시작할 것인가 갈등한 경험이 있다. 사실 대화에서 일부러 드러내지 않아도 나타나는 상대방의 태도가 분명히 있다. 함께 작업하는 여성 작업자들을 작업자,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나 행동을 조심해야하는 상대로 여기는 남성 작업자들을 만날 때 불쾌하다. 그런데 또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타나는 태도가 이 정도라면, 해당 작업자는 계속 조심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B
관객들은 이제 더 이상 남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주체적인 여성의 서사를 보고 싶어 한다. 그 역할이 꼭 남자가 아니어야 한다면 여자 배우가 대신하게 하는 공연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왜 관객들이 이런 변화에 목말라하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단순히 ‘요즘 잘 팔리기 때문에’ 그런 공연을 만든다는 연출, 그리고 ‘관객들은 여자 배우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남자 배우들도 분명히 있다. 이런 이야기들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빠진다. 연극은 강자가 아닌 약자의 편에서 약자가 왜 약자가 되어야 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예술이라는 생각을 한다. 약자의 편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약자가 왜 약자인지 알지 못할 때, 그리고 최소한의 공부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공연을 만드는 모습을 볼 때 동료로써 부끄러웠던 적이 많다.
미투에 반발심을 갖는 여성 동료들은 본 적이 없다. 왜냐면 그 모든 이야기들은 우리가 분명히 어딘가에서 겪었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처음 공연계에서 일을 할 때, 그 극단의 대표가 절 술자리에서 옆에 앉히고 손을 주무르며 ‘연출이 되고 싶어?’라고 물었던 적이 있다. 위계와 젠더 폭력이 합쳐진 엄청난 짓이었는데, 나는 그때 그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동료들이 불편해할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느 여성 동료를 만나도 항상 공감을 살 수 있다. 하지만 남성 동료들 중 일부는 이런 이야기들에 크게 분개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많이 취하셨네’ 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이런 반응 자체가 그들이 위계질서의 위에 있다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미투에 반발심을 갖는 남성 동료들은 미투를 당한 사람들이 단지 운이 없어서, 여자가 다른 마음을 품어서 미투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미투는 단지 한순간의 농담처럼 소비되는 것을 목격하기도 했다. 성차별적인 농담을 던진 후, 여성 동료들의 표정이 굳거나 반응이 없는 것을 보고, ‘알았어, 미투하지 마’라는 말을 들은 적도 많다. 이런 식으로 미투 자체를 농담처럼 소비하면서 그 안에서 숨구멍을 찾는 비열한 짓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미투 이후에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제 무서워서 여자랑 일하겠나’였다.
평등한 관계에서 작업을 하고 싶지만, 도제식으로 유지되기 쉬운 ‘연출-조연출’의 관계에서 평등을 찾기란 쉽지 않다. 몇몇 연출들에게, 조연출은 동료로 인식되기 전에, 아랫사람이나 제자로 인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연출은 함께 작업을 해 나가는 어시스턴트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는데, 연출들은 그러지 않았던 경우가 있다. 작업을 하면서 디자이너나 배우들에게서 쌓인 화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조연출에게 푸는 연출들도 분명히 있다. 작년에 페미니즘 연극제 공연을 보러 갔다가 평등한 공연 작업 문화를 만들기 위한 핸드북을 받은 적이 있는데, 그 안에는 저도 인지하지 못했던, 혹은 이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던 위계질서의 불평등이 낱낱이 적혀 있어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옳은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함께 작업하는 어시스턴트인지, 이 사람의 보모인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로에서 생각되는 훌륭한 조연출의 표본은 일 잘하는 것보다, 술 먹은 연출 챙겨서 집에 바래다주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누구 조연출은 누구 연출이 술을 먹고 길바닥에서 잠들어도 끝까지 집에 데려다준다는 식의 이야기들이 미담이었던 생각을 하면 눈앞이 캄캄하다. 조연출들은 보통 20대이기 때문에 선배 배우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선배 배우들 역시 조연출들을 동료로 생각하지 않을 때가 정말 많다. 함께 작업을 만들어가는 동료가 아니라, 내가 가르쳐야 할 후배로 보통 본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더 아랫사람으로 보고, 소위 꼰대질을 하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분들은 미투를 젠더 이슈로만 이해하고, 위계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러한 인식 자체가 없기도 하다.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드러내면 ‘저 조연출은 싸가지가 없다, 어린애가 되바라졌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C
‘오히려’ 라기보다는 ‘여전히’ 인 것 같다. 위계에 의한 문제가 많기 때문에 그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여전히 문제가 잠복해 있을 테니까. 이런 고민이 들 때가 있다. 누가 당사자인가? 연습실에서 ‘어?’ 하는 순간이 있다. 누구 한 명이 타겟이 될 때. 만만하거나 저항하지 못할 만한 사람이 불평등한 대우를 받을 때, 근데 나는 단순한 목격자에 불과하고 당사자가 아니니까, 지금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는 순간이 있다. 나는 불편했는데, 당사자들끼리는 친해서 그런 건가? 저들의 관계를 내가 알지 못하는데 어떡하지?
피해의 당사자가 공론화를 원치 않을 때도 있다. 심지어 이를 문제로 여기지 않을 때도 있다. 그래도 저에게 잘해주세요, 좋은 분이세요, 저를 데뷔시켜 주신 은인이에요, 라는 수사를 듣기도 한다. 이게 교묘한 건지 내면화된 건지 뭐라 말하기 애매한 지점이다. 내가 타겟팅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러한 폭력적인 분위기에 나는 피해를 입었다, 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현실에선 온갖 관계에서 오는 불확실성 때문에 심경만 복잡해지는 것 같다. 애매한 지점들은 쉽게 이슈화, 공론화되지 않는다.
3. 연극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자정활동들(성반연, 연극인들의 자치규약 혹은 코리안 씨어터 스탠다드, 관객집회 등)에 관해 알고 있나요? 어떻게 생각하나요?
A
자정활동들에 대해 알고 있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연습, 공연, 아르바이트로 참여가 불가능해 온라인으로만 소식을 접하고 있다. 어느 현장보다 자정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연극은 극단 차원에서 공연을 직접 기획해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 연출이 처음 작업을 기획해 프로덕션을 꾸리고 기획(홍보, 티켓팅 등)을 섭외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프로덕션 내에서 연출이 가해자가 인 경우, 피해자가 어떻게 피해 사실을 알리고 가해자와 분리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또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을 때, 작업을 그만두게 되고, 오히려 가해자는 계속 활동을 하는 경우, 당사자가 아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B
알고 있는 것들도 있고, 모르고 있는 것들도 있다. 나 역시 연출을 할 때, 함께 공연을 만들어가는 입장에서, 모든 구성원들이 성평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갖고 작업하는 환경을 바란다. 이는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나의 편의를 위해서다. 나는 아직 ‘어린 여자 연출’이니까.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연극을 연출할 때, 모든 배우들이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작업하기를 원해서 개론서를 각자 읽고 작업을 시작한 적이 있다. 그 이후 작업하기가 너무 편했다. 지금까지 내가 조연출 하던 환경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젠더 평등이 실현된 연습실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도 ‘남자는 000’ ‘여자는 000’ 같은 말을 스스로 조심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런 설명 없이도 내가 원하는 바를 충분히 배우들에게 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남자/여자 그게 뭐라고 선배 연출들은 캐릭터들을 그렇게 가둬두었나. 공연장에서 스태프들 간의 젠더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모든 건 내가 연출가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반성한다. 조연출은, 평등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가 정말 어렵다. 그런 점에서, 평등한 작업 환경을 위해 함께 규약을 정하는 일도 의미 있었던 것 같다.
C
씨어터 스탠다드가 극단별로 만들어지고 있다고는 들었다. 성반연에서 준 ‘평등한 연극 제작문화를 위한 질문과 제안’이라는 핸드북을 통해 이를 처음 접한 것 같다. 내용도 실제 현장에서 발생하는 지점을 많이 다루고 있다고 느꼈다. KTS에 대해서도 관심이 가고 그 과정이 궁금하다. 이러한 것들의 극단 내 도입은 당연하다고 느낀다. 적용의 가능성보다는 실효성이 고민이 되는데, 해보고 나서 다양한 사례를 공유해서 꾸준히 개선해나가는 것이 중요할 것 같다.
공연 전 성폭력 예방교육은 몇 차례 받았다. 다만 실제적인 느낌은 못 받았다. 머리로는 아는 내용이지만 실제 상황에서, 여러 가지 관계와 폭력이, 때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섞이기도 하는 상황에서 쉽게 실천 가능할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심정지의 위험성과 심장 건강 식습관은 가르치지만, 심폐소생술을 실습해보지는 않는 수업 같은 느낌이랄까. 동료들과 이야기해 보았는데 역시 현실성에 대해 의문을 느낀다고 하더라. 불편하고 불쾌하더라도 상대가 술에 취한 상태인지 이 자리가 어떤 분위기의 자리인지를 다 고려하다 보면 즉시 문제를 제기하기 어려운 것이다. 강사분이 강의식으로 진행할 때보다 마지막 30분 혹은 3분이 할애되는 참여자들의 질의응답 혹은 자기 사례 말하기가 훨씬 좋았다. 들어보면 공연자들이라면 다 공감할 법한 복잡 미묘한 고충이 담긴 현실적인 고민이어서 그렇다. 그 사람은 그때 어떤 걸 느꼈지, 어떻게 행동했지? 무엇을 후회하고 무엇이 효과가 있었지? 하는 생생한 이야기가 삶과 작업에 도움이 되었다. 그에 대한 추가적인 토론이 더 시작되길 바라는 시점에서 늘 교육은 마치게 된다. 예방 교육은 길어도 좋으니 긴 만큼 실제적인 교육과 실습이 되면 좋겠다. 안전 교육처럼, 시간 되면 가는 게 아니라 시간 없어도 내서 받아야 하는 당연한 것이 되기를 바란다.
자정 활동은 근본적으로 위계 구조에 대한 재편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보장되고 장려될 수 있어야 한다. 위계가 강하지 않은 팀이더라도 아직 리더 1인의 윤리성에 의존하거나 서로 수평적인 태도를 가지려 애쓰는 정도의 수준에 멈춰있는 것 같다. 작품에 대한 논의에 비해 작업자 간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에 대해서는 체계적인 고민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친구로서 친해지는 것 말고 동료의식을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론이 없다. 그간 의례적으로 해온 제작 문화와 서로 간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서도 고민을 나눴으면 한다.
4. 미투로 인한 변화가 연극계의 발전에 동력 또는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왜 그런가요?
A
연극계는 미투 운동으로 인해 ‘알탕 연극’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재가 다양한 방식으로 무대화되었다. 또 성별이나 캐릭터들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물들을 접할 수 있었다. 작업자들도 관객도 접할 수 있는 이야기의 스펙트럼이 넓어져 변화가 좋은 발전을 가지고 왔다고 생각한다.
B
분명히 바뀌고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동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이것이 문제라는 생각을 하지 않던 사람들도, 이제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민감한 문제다’라는 사실에는 수긍하니까. 이렇게 조금이라도 바뀐 모습들을 보면서 희망을 얻는다. 하지만 스스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은, 미투로 인해 말할 수 ‘없게’ 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연극은 삶을 담아내는 장치다. 미투 이후 창작자들은, 특정한 문제에 대해 민감한 관객들을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두려워서 하지 못한다. 혹은 내가 잘 몰라서, 공부가 부족해서, 라는 이유로 자기 검열을 한다. 그런 상황에서 창작자로서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한편으로, 미투 이후 남성 창작자들이 순식간에 매장되는 경우가 많이 생겼다. 물론, 잘못을 했다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내가 여자라는 성별이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는 저들보다 우위에 있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다. 단순한 말 한마디가 맥락과 관계 없이 전해지면서, 젠더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한 순간에 상대가 매장되는 것들을 보면서, 내가 그와 같은 실수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부분 역시 내 안에 내면화된 무언가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C
이제 안 변하면 연극을 못 하지 않을까.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연극으로 계속 일하기 위해서도, 연극 외에도 중요한 나의 일상이 있는 사람으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나만 버티면 연극을 오래오래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주변 환경에 대단히 취약한 사람이더라. 내가 힘들고, 하기 싫을 때 하소연 들어주는 친구, 동료의 소중함을 최근에서야 느꼈다. 그들이 없었다면 진작에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나와 동료들이 계속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성폭력, 위계폭력이 사라져야 한다.
운 좋게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배운 건 어떤 연출의 테크닉이나 분석력 이런 것이 아니라 어떻게 공연하는 사람들을 대하느냐였다. 좋은 모습이든 반면교사이든. 한 사람의 동료 예술가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크게 배웠다. 그리고 그 존중 받는 느낌의 소중함과 그것이 박탈당했을 때의 참담함과 무력감도 알게 됐다. 제작환경이 제대로 변하길 바란다. 미투 운동이 그런 환경 변화를 이끌어 내기 시작했다.
5. 연출 혹은 제작자, 극장, 제도 등 연극계가 달라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고,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요?
A
우리는 알고 있다. 위계폭력이나 성폭력으로 연극계를 떠난 피해자들이 많다는 것을. 여기에 남아있는 우리들은 더 이상 같은 문제로 다른 사람들이 떠나는 일은 없게 만들어야 한다. 내가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타성에 젖어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게 폭력을 행하고 있지 않은지 살펴야한다. 또 더 이상 삼키는 말들이 존재하지 않도록 계속 목소리를 내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있는 동료가 없는지 살펴야 한다. 모두가 할 말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극장에 리허설 들어가서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작업을 시작하는 단계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고, 모든 계약서에 폭력에 대한 문장이 들어가야 한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의식하지 못하던 사람들이 작업 시작 단계에서 의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B
작업을 하는 건데, 선/후배, 사제 간의 관계가 뭐가 중요할까. 우리는 모두 동료다. 선배들은 우리보다 조금 더 이 길을 먼저 간 사람일 뿐. 후배들은 조금 더 뒤에서 오고 있는 동료들이다. 평등한 제작 문화를 위해서 다른 동료들을 평등하게 대한다면, 더 많은 생각들이 자유롭게 모여들어 더 나은 작품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C
대개 연출은 리더다. 그 리더십이 수평적이든 수직적이든 어쨌든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되고 또 기대를 받게 된다.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거나 교육받을 기회가 없었던 리더이기도 하다. 올바른 판단을 하기에는 미숙한 채로 중요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근데 작품 외적인 인간관계의 갈등을 조정하거나 위계나 성폭력 사건에 대응하거나 그런 사건 앞에서 막상 어떻게 해야 할지는 훈련받지 못했다. 보고 배운 환경의 관성대로 무뎌지기 쉽고 선배가 되면 답습하기 일쑤인 것 같다. 우선 연출이 잘못 행동하고 잘못 판단했다고 느낄 때 다른 팀원들은 어떻게 행동하는가? 거기서부터 현실 인식이 필요할 것 같다. ‘나 정도면 괜찮지’라는 착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연출가는 공동작업을 위한 환경을 어떻게 만들고 개선할지에 대한 책무가 더 커졌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지금 학교가 학생이 자유로운 곳인지, 교수가 자유로운 곳인지. 교수에 대한 감시와 견제가 이뤄지지 않으니, 잘못이 바로잡혀질 턱이 없다. 졸업을 해도 선생님과의 일방적인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가 대 예술가, 성인 대 성인의 관계가 아니다. 불평등과 위계를 학습하고 재생산하는 것에 있어서 교수들의 책임이 대단히 크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이 교수를 보고 배우기 때문에, 바람직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들 의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수평적이고 자유로운 소통과 작업방식이 성폭력과 위계폭력을 근본적으로 예방하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인의 일탈만으로 치부하거나, 개인의 윤리성에만 의존하지 않는,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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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세

정진세
독립예술웹진 인디언밥 편집장, 서울프린지네트워크,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공연예술 현장에서 창작과 비평 등의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lilytulips@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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