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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 #7

미투운동 연대자 좌담회

참석_권김현영, 나희경, 장은정, 전강희/ 정리_강보름

제 162호

2019.06.27

웹진 연극in은 ‘미투 이후 1년, 연극은 달라졌는가?’를 주제로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그 일곱 번째로 연극계, 문단 내 성폭력 연대자와 여성학자를 모시고 현재 연극계 현장에서 체감되는 변화는 어떤 것인지, 혹은 변하지 않았다면 어떤 것이, 왜 변하지 않았는지 등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좌담회를 진행했습니다. - 웹진 연극in 편집부

일시 : 2019. 6. 12. 수. 7시30분
장소 : 서울연극센터 2층 아카데미룸
진행 : 오성화(PD)
참석 : 권김현영(여성학자), 나희경(연극기획자), 장은정(문학평론가), 전강희(드라마터그)

 
#지난좌담회리뷰 #문단_내_성폭력 #공통점과차이점
오성화
3월부터 배우편, 4월에 학내미투편, 법정 과정에 계신 피해자편, 5월에 제작극장 실무자편, 관객편, 6월에 조연출편 그리고 이 자리에 오기까지 총 여섯 번의 좌담회가 진행되는 긴 여정이었는데요. 지난 좌담회 기획연재 기사를 어떻게 보셨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장은정
제가 외부자로서 읽은 후기를 먼저 말씀드리면, 사실 2018년 미투가 터졌을 때 문단 내에서의 반응은 굉장히 서늘하고 조용했거든요. 최영미 시인이 미투를 외쳤을 때 연극계에서 터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온도와 반응이었는데, 사실 그 이유는 피로감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면 2016년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이후에 연대체들이 꾸려졌고, 연대체간의 갈등도 있었고, 그 사이에서 해체되거나 새로 생겨나는 여러 작용이 이미 일어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미투가 터졌을 때 또? 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저도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이하 성반연) 포럼에 참여한 적 있었는데, 2016년 10월 문단의 분위기와 유사하게 느껴졌어요. 문단과 비교해 어떤 참조점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는데 사실 그때는 별로 할 말이 없었거든요. 여성 연대체들 사이에서 여러 갈등을 겪은 후였고, 그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발언권을 박탈당한 연대자들이 많았고, 그 상황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구요. 문학계 같은 경우는 공동체라는 것이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고 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기 때문에 연극계에서 집단적으로 호응하는 것에 대해 부러운 점도 있었어요. 분위기는 유사하지만, 대응 방식이 굉장히 달랐기 때문이죠. 저희는 처음부터 공동체를 다시 만들어야 했다면, 연극계는 이미 만들어진 공동체를 중심으로 빠르게 대응해나가는 방식이 굉장히 인상적이었어요. 그런 시점에서 1년이 지나고 기획연재 기사를 따라 읽었을 때, 공동체 내에서 다양한 지위를 가진 분들이 하나의 코너를 가지고 발언하는 형식이 이어지는 게 사실 부러운 점이 있었고요. 저희 경우에는 피해자, 가해자로 양분되어 출판계 내 다양한 목소리로 발화되는 공론장이 덜 형성됐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오성화
저는 개인적으로 문단에서 먼저 해시태그 운동이 있었기 때문에 연극계 미투가 힘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연극계가 조금 더 집단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덜 우왕좌왕할 수 있었던 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먼저 고민했던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해시태그 운동한 분들에게는 정말 감사한 마음이에요.
나희경
2018년 2월을 떠올려보면 한 4-5년 전의 얘기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그사이가 너무 길게 느껴져요. 지난 기사들을 읽으면서, 좌담회에 참석한 분들은 변화의 폭을 많이 체감하신 분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이 만큼 변화를 체감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질문이 들더라고요. ‘바뀌는 사람만 바뀐다’고 많이 얘기하잖아요.
전강희
저도 비슷하게 겪은 것 같아요. 큰 폭으로 겪어서인지, 아주 먼일로 느껴지거든요. 똑같은 생각이 들어요. 과연 정말 많은 수가 바뀌었을까? 물음표는 있지만 적어도 다른 데 가서 “이것은 틀렸습니다”, “아닌 것 같습니다. 다시 생각해주십시오.”라는 말을 조금 더 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공동체라는 연극인 연대가 있어서이지 않나. 예전에는 그냥 뜨겁기만 했다면 내가 하는 말에 근거를 마련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다, 잘 판단이 서지 않는 문제라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의식은 생긴 것 같아요.
권김현영
해당되는 사람들을 범주로 묶어 계속 이야기하는 기획을 지속적으로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계 내 성폭력 문제가 제기됐을 때, 잡지 <씨네21>에서 열 두번에 걸친 좌담회를 했는데요. 안에서도 그만 좀 하자는 얘기가 있었는데, 여성기자들이 끝까지 밀어붙였고, 중간에 박찬욱 감독을 섭외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일들이 전반적으로 기세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식으로 기획을 해야 사실은 힘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한 가지 상대적으로 아쉬운 점은 <씨네21>이 영화계에서 갖는 담론적 지위가 있잖아요. 웹진 ‘연극in’이 연극계에서 갖는 담론적 지위가 좀 더 높아져야 여기 나와 있는 기획이 조금 더 많이 회자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한편으로는 이런 식의 기획으로 ‘연극in’의 지위가 올라가면 이런 담론 자체가 연극계에도 영향을 미치면서 ‘연극in’에게도 이 기획이 중요한 시도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두 가지가 잘 만나서 기획의 의미가 잘 살았으면 좋겠다, 흥행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어떻게 흥행시키지? 하는 고민을 하게 됐어요.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지만 괜찮으시다면 계속 이어가셔도 좋을 것 같아요. 이어가서 딱 쌓아놓는 것 자체가 되게 중요한 움직임이거든요.
장은정(좌), 권김현영(우)
#여성선배의발견 #피해자중심의연대체란?
오성화
이 기획을 준비하면서 우려되는 지점은 없었나요? 수개월 동안 이어진 하나의 기획이 끝났는데, 연극계 내에서 느껴지는 성과라든지.
강보름
우려되는 지점은 개인적으로는 별로 없었어요. 왜냐면 오성화 PD님이나 전강희 터그님 같은 분들이 ‘일다(페미니스트 저널)’나 다른 매체에 기고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지금 나의 위치에서 말할 수 있는 것들을 말하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마음이 가장 컸기 때문이에요. 미투 이전에는 20대 창작자로 혼자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오히려 이런 시기를 통과하면서 여성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큰 의미가 됐던 시간이었어요. 저를 보고 동료 20대 여성 창작자들이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도 컸어요.
장은정
전혀 다른 게이트지만 저도 똑같은 경험을 했거든요. 신경숙 표절 사태 이후로 저보다 5~10년 이상의 선배들이 먼저 모여서 함께 논의하는 여성비평가 공동체 모임이 생겨나게 됐어요. 문단 내 성폭력 이후로는 제 또래의 친구들이 그 모임에 같이 합세하게 되면서, 최근 1~2년 사이에 여성 선배에 대한 자의식을 강하게 갖게 된 것 같아요. 판 자체가 바뀌었냐고 묻는다면 회의적이겠지만 일단 여성들의 존재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위치시키고 네트워킹을 전혀 다르게 재구성한다는 점에서는 저도 동일한 경험을 한 것 같아요. 이 지점이 되게 흥미롭고요.
나희경
이 기획이 최근 변화의 모습을 포착해서 보여주는 거잖아요. 사실 이걸 보는 사람들은 ‘아 요새 흐름이 이렇구나’ 하고 생각할 거예요. 똘똘 뭉쳐서 잘 가시화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웃음)
권김현영
아까 우리끼리만 변화하는 것 아닌가라고 얘기를 해주셨는데, 사실 제가 조금 더 거리가 있는 사람으로서 말씀을 드리자면 변화를 일으키는 사람은 언제나 소수예요. 특히 이런 종류의 문제들은 소수의 문제 제기자가 있고, 그 문제 제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을 때 바뀌는 건데, 그 사람들 다 합쳐도 늘 소수거든요. 그런데 중요한 건 소수의 문제 제기가 한 번 귀에 들리게 되면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거죠. 제가 자주 예를 드는 집단이 군대인데요, 군대는 가장 변하기 어려운 집단이죠. 소위 신세대 장병들이 들어와서 1~2명 정도가 장교나 지휘관에게 “내가 동물도 아니고 계속 우리를 짐승처럼, 여자만 보면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만드는 게 기분이 나쁘다”라고 말한 거예요. 그리고 “‘여자친구 있냐’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건 결국 누구를 소개시켜달라고 이어지는 건데 이런 건 원치 않는다. 사생활 개입하시는 건 원치 않는다”고 했다고 해요. 처음에 이런 장병들은 소수였고 미친놈 취급을 받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소원 수리함에 의견을 넣고 신고를 해서 결국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민을 이끌어 냈고, 그때 구조가 정말 바뀌는 거예요. 이러한 말은 하면 안 된다는 문제 제기를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걸 전제하고 그 다음 판을 짜는 거죠. 그전에는 아예 전제가 안 됐거든요. 소수가 이야기하는 목소리의 힘이 되게 세다는 걸 저는 종종 느껴요. 그러니까 여러분도 되게 강력한 목소리를 가진 소수이다, 왜냐면 문제 제기가 없었을 때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전강희
정말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건 피부로 느끼고 있어요. 지금 제가 속해있는 단체보다 조금 더 보수적인 누군가들을 만났을 때 예전보다 대화하기가 힘든 걸 느끼거든요. 저 개인으로서도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고 체감하는 순간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요.
나희경
그런 종류의 문제의식은 더 피로하죠. (일동 공감)
권김현영
문제는 우리의 피로함이에요. 가장 큰 문제는 그거라고 봐요.(웃음)
전강희
저는 장은정 선생님께 궁금한 점이 있는데, 저희는 뜨거워서 좀 피로하거든요. 캄다운(calm down)이 힘든 사람들이고, 무대 위에서도 자기를 다 드러내야 잘한다고 생각하는 필드이기 때문에 뜨거워서 힘든 게 있어요. 문단 내에서는 어떤 피로감이 있을지 궁금해요.
장은정
일단 연대 방식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희의 경우 “#문단_내_성폭력”이라고 하는 해시태그가 익명을 통해서 터져 나왔고, 트위터 안에서의 익명 제보에 기성 여성 작가들이 단위체를 만들어 연대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어요. 연극계 같은 경우는 이미 극단이 만들어져 있고, 극단의 문제를 여럿이 같이 다루는 거라면, 저희는 그런 모임 자체를 처음 해야 하는 거죠. 이게 저희에겐 큰 도전인 거예요. 각자 출판사로부터 따로 제의를 받아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의견이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굳이 마주할 필요가 없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가, 문단의 문제로 드러났을 때, 이것이 구조적 문제라고 인지가 됐다면 더 이상 개인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죠. 그렇다면 단위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는 합의가 돼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부터 어떤 단위체를 만들 것인가에 대해 합의가 되어야 하는데 생각도 다르고, 정의도 다르고, 연대 방식도 다르고... 이런 논의를 해본 경험치가 없는 거예요. 다 개인으로 낱낱이 떨어져 있다가 공동체로 시작했을 때 피로감이 첫 번째인 것 같고, 두 번째는 운동 방식의 차이 때문에 다양한 연대체로 쪼개어진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문학출판계라는 같은 영역 안에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차이에 대해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하지만 쉽지 않았어요. 고양예고 같은 경우는 굉장히 다른 케이스인데, 똑같이 성폭력 문제가 터졌어도 거기는 이미 학교라고 하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에 단체가 굉장히 빠르게 대응할 수 있었거든요. 반면 학교 단위가 아니라 사설 강의에서 수강생으로 피해를 당했던 분들은 다 고립되는 형태였거든요. 저는 연대활동을 하면서 구성원 개개인의 페미니즘적 의식이나 자질보다는 노동환경의 구조라든지 훨씬 더 출판 산업의 문제, 그것이 연대자로서 더 많이 성찰하게끔 요구하는 측면이 있었다고 느껴요. 연극계와는 좀 다른 방식의 피로감이 아닐까.
연극계 포럼을 갔을 때 흥미롭다고 생각했던 게 아까 뜨겁다고 얘기해주셨는데, 대화를 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의 온도와 저희처럼 안 보고 싶으면 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온도의 차이가 있고, 그럼에도 대화를 계속해나가야 할 때의 그러한 공론장을 구성하는 방식 자체가 전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 점에서 피로감의 종류가 좀 다른 것 같아요.
최근에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 연대체들이 새로 꾸려지고 있어요. 저희가 ‘시즌2’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시즌1’ 때와는 굉장히 다른 양상이에요. 2016년에서 2018년까지를 시즌1으로 묶는다면, 당시엔 피해자 연대체와 여성 문인 모임 사이에 괴리감이 있었어요. 그 안에서도 등단 제도라고 하는 여성들 간의 차이에서 위계 구조가 작동했다면, 지금 같은 경우에는 피해자 연대체가 중심이 돼서 공론장을 만들고 구성원들을 초대하는 형태로 꾸려지고 있어요. 그래서 훨씬 더 평등한 방식의 공론장이 형성되고 있어서 저로서는 고무적인 상황이에요.
나희경
‘시즌2’처럼 피해자들이 먼저 주체 단위가 될 수 있는 건, 사실 일정 기간의 회복 기간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하기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연극계 안에서 그런 과정들이 있었는지 의문이 생겨요. 본인의 일상을 회복하고 사건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장은정
저도 궁금한 게 피해당사자분들이 분명한 법적 절차를 거치고 계신 분들이 있고, 그렇지 않고 공동체 내에서 해결을 원하는 분들도 있잖아요. 다 각자 처한 입장이나 위치가 조금씩 다른데, 연극계에서는 피해당사자 분들끼리의 네트워킹이 있나요?
나희경
좌담회 패널로도 나오셨던 ‘정의로운 미투 생존자들의 익명모임’(이하 정미모)이 있고, 저는 다른 모임도 또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제 짐작이지만 사실은 그렇게 모여있는 사람들 외에는 다 고립되어 있을 것 같아요.
전강희
실명을 밝히지 않고 미투를 하는 게 힘든 상황이잖아요. 실명을 밝히려고 시도했다가 상처받고 접으신 분들이 몇 분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분들은 적극적으로 미투를 하지 않았을지라도 성인지 강사 교육 모임에 나가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활동을 작게라도 이어가고 있어요.
나희경
약간 다른 게 뭐냐면 피해자분들이 아까 말씀하신 문단에서는 어느 정도 회복 기간을 갖고 나오셨다면 제가 봤을 때 (연극계는) 회복과정이 없었는데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게 큰 차이인 것 같아요.
전강희
피해자모임도 있고 피해자만으로 구성되지 않은 모임도 있거든요. 이야기를 할 때 온도 차가 있죠. 사안을 바라보는 관점도 조금씩 다르고요. 어떻게 보면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릴렉스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은데 끊임없이 어떤 자리에, 피해자로서 나와야 하는 상황들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연극계미투의특성 #가해와피해의복합성 #연극계미투되짚어보기
오성화
연극계 미투 말하기의 특성이 있다고 느껴졌나요? 성반연도 있고,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이하 페연연)도 있고, 작업을 중심으로 하는 페미씨어터가 있고, 여러 노출된 그룹들이 있잖아요. 제가 1년 반 정도 연극인의 삶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느낀 게 있는데요. 이 세계는 조력자, 피해당사자, 지지자 하는 구분이 존재하기가 굉장히 애매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구체적인 사건이 내 몸 안에 있지만 ‘나는 미투라는 형태로 가지 않겠어’, 내지는 우리가 지금까지 수행해왔었던 공동작업의 행위 안에서 ‘모두가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하는 식의 차이가 있는 거죠. 미투 운동 자체는 물론 피해당사자가 법적 혹은 외적인 방법으로 고발하는 그 위치성도 굉장히 중요하지만, 각자 다른 위치성을 갖고 있는 사람도 서로를 구분하기 되게 애매해서, 당사자성이라는 것만 놓고 봐도 피해자, 고발자 등 하나의 유형으로만 존재할 수 없다는 거죠. 그런 논쟁이 올라오다가 사그라들다가를 반복하면서, 지금은 감히 말할 수 없다, 라는 식으로 된 상황인 것 같아요.
오성화
나희경
이 팀에서는 선배고, 저 팀에서는 후배고. 이러다 보니 이쪽에선 가해자, 저쪽에선 피해자고. 복합적인 구조들이 얽혀서 누구도 섣불리 얘기할 수 없죠. 그래서 다 본인을 ‘피해자’의 위치로 끌고 가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 2018년 초반에 성반연 집담회나 포럼을 했을 때 느꼈던 건, 모든 사람이 어떤 주장이나 자기의 말을 하기 위해서, 그 앞에 자기 피해 사실을 붙였어요. 내가 피해자여야만 발언권이 있거나 발언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느꼈거든요. 그때는 정말 두드러지게 그런 식으로 발언하시는 분이 많았고요.
권김현영
민감한 얘기지만 민감한 이야기의 전문가로서 말하자면,(웃음) 피해자로서만 말할 수 있게 되는 문제들이 사실 모든 종류의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반복되죠. 피해자로서 얘기할 때 다들 아시겠지만 ‘피해자화’라는 게 있잖아요. 피해자로서 발언권을 준다는 게 곧 피해자로서만 살 수 있게 하는 것, 그것 이외의 의사표시는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거죠. 거기서 피해자라는 걸 증명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압력으로 이어지게 되고요. 이 순환하는 피해자성에 갇히게 되면 사람이 망가지죠. 그러니까 이 사람이 망가진 상태에서 계속 사람들이 “당신이 진짜 피해자냐?” 혹은 “피해자로서 말해봐라”라는 질문을 하게 되면 자동응답 기계처럼 되고, 그것에 권능을 느끼게 되면 그걸 중심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쓰고 싶어 하는 그런 판이 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개별적 피해자의 문제가 아니라 피해자의 목소리를 다루는 사회의 방식이라고 하는 게 그런 문법 안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개별 피해자의 특성을 생각하기보다는 처음 운동을 시작할 때 많은 경우에 똑같은 방식의 시행착오, 실패, 망함을 경험하게 되는 건 너무 당연한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도 살 수 없기 때문에 잠적하게 되거나 어떤 식의 시간이 필요하게 되거나 하고요.
저는 회복하는 시간과 잠적하는 시간을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두 가지가 유사한 게, “나는 쉬고 싶어”가 사실은 자기가 지금까지 던진 이야기로부터 혹은 사회로부터 도망가고 싶다는 ‘회피’일 때 다시 자기를 다치게 만들기 때문에 그가 쉬고 싶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지금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고립됐다고 느끼는 건지를 구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립된 상황에서 갑자기 쉬고 싶다고 하면 사실은 그건 쉴 수 없는 거예요. 그런 걸 구분해가면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고요.
그동안 서로 다르게 살아온 사람들이 갑자기 어떤 공동의 감각을 가진 사람들이 되는 건 쉽지 않아요. 서로의 차이가 인정되면서도 연결되어있다는 것. 그 위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합니다. “나는 너가 아니다”와 “나일 수도 있었다”, “내가 피해자일 수도 가해자일 수도 있다” 이 세 문장이 같이 있을 수 있을 때 저는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질 수 있는 혁명적 계기가 만들어지는 것 같아요. 피해는 기본적으로 개별적인 경험이잖아요. 개별적 경험의 당사자성에 대해서는 저마다의 심경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나도 피해를 당할 수 있어’와 ‘난 실제 피해자야’의 물질성은 되게 다르거든요. 그런데 이 잠재성이 “내가 바로 그 피해자야” 라고 얘기했을 때 피해자의 자리를 다시 뺏어버리거든요. 그럼 피해자는 “너는 당하지도 않았잖아”라는 심정이 들죠. 연대라고 해도 이걸 존중받지 못해요. 왜냐면 피해는 자기 몸으로, 완전히 개별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그 피해라고 하는 걸 사람들이 이해하는 방식이 그 개별성을 완전히 고립시킬 수밖에 없게 존재하잖아요. 그렇다면 나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성원으로서의 공동성을 가지게 될 것인가 이렇게 얘기가 전개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이게 잘 안 되는 거죠. 사실 많은 경우 오히려 공동성을 만들고 변화를 만들고 집단성을 만들기 쉬운 건 “나도 피해자일 수 있다”는 아닌 거예요. 피해는 개별적 경험이기 때문에. 오히려 “나도 가해자일 수 있다”는 것이 공동성을 더 쉽게 만듭니다.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진 않으니까요. 사람들에게 “여기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 어떤 공간이든 분명히 그 공간에 약자, 피해자, 목소리를 갖지 않은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라는 식의 요청인 거죠. 이 요청은 본인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요청이거든요. 피해자가 있을 수 있다는 감각을 가지라는 것이 더 퍼져야 된다고 생각해요. 피해자에 대한 생각을 바꾸는 방식이 하나 있어야 하고, 본인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게 같이 갈 수 있어야 우리가 이걸 통해서 조금 나은 집단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렇게 이어져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희경
예를 들면, 다 여성인데 한 명의 남성 팀원이 있어요. 어떤 자치규약이나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 하겠다. 내가 왜 계속 잠재적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 해.”라고 피해자성을 자기가 가져가는 걸 봤거든요. 그래서 속이 터져요. 성폭력 예방 교육할 때 많은 남성분이 이걸 내면화하고 계시더라고요.
권김현영
피해자성을 그렇게 쓰기도 하죠. 굉장히 많은 가해자들이 피해자라고 자처하고요. “그렇게 따지면 나도 피해자” 이건 거의 가해자의 구호예요.
전강희
민간극단에서 교육을 할 때는 작은 규모라 비슷한 사람들끼리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질문도 활발하고 적극적으로 듣는데, 규모가 큰 극장이나 극단의 경우에는 프로덕션도 여러 개 돌아가고 연령대가 다양하다 보니까 거기선 항상 불편해하는 남자 어른을 만나게 돼요. 말을 안 해도 뒤에 앉아있으면 불편해하는 에너지가 그대로 전달이 되고요. 정말 당당하게 ‘이건 아니다’, ‘왜 자꾸 편을 가르냐’고 말씀하세요. 저는 그래서 ‘연극in’이 그런 분들을 모셔놓고 얘기를 하면 어떨까 생각이 들어요.
나희경(좌), 전강희(우)
#자율성과공동체 #예술계로의문제의식확장
장은정
사실 문단 내 성폭력 때는 페미니스트 비평가들의 목소리가 굉장히 우세했고, 그런 담론을 만들어내는 흐름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가 최근에서야 남성 평론가들이 하나둘씩 숨기고 있던 속마음을 발언하기 시작했거든요. 저도 고민이 됐던 것 같아요. 결국 그들도 공동체의 구성원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응답하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가 가능할 텐데... 사실 듣기가 너무 괴롭잖아요. 그런데 제가 성반연 포럼 갔을 때, 모두가 그 자리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 끝까지 떠나지 않고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저한테는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왜냐면 문단에서는 그런 자리가 있어도 안 가면 그만이고, 듣지 않으면 그만이고, 그 잡지 안 보면 그만인데요, 여기는 모두가 서로에게 고통 받으면서도 참고 있는 거죠. ‘어떻게 하면 문단에서도 이렇게 모여서 끝까지 얘기할 수 있을까’하는 과제를 저에게는 남기기도 했고요.
제3자 입장에서 흥미롭다고 느꼈던 건, 문단 내 성폭력 문제에서 모든 것에 웜홀처럼 빨려 들어가는 단어가 ‘자율성’이었어요. ‘페미라이터’라는 연대체에서 활동 했을 때, 작가서약운동을 했었거든요. ‘반성폭력 사회를 만들자’, ‘함께 문단의 구조를 바꾸자’라는 서약을 페미라이터 쪽에서 구성해서 제시하고 서명을 받았거든요. 저희는 ‘반드시 여기에 서명하셔야 합니다’, ‘하지 않으시면 당신은 잠재적 가해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일부 남성 작가분들이 굉장히 불편해하면서 “왜 나의 작가적 자율성을 침해하려고 하냐”, “너희가 왜 규율을 만들어서 우리한테 적용하려고 하냐”는 식의 반론을 펼치거나, 어떤 분은 개인 성명서를 써서 페미라이터 공식계정으로 내가 왜 이 서약에 응하지 않는가에 대해 엄청 길게 진술을 써서 보내주시고 했거든요. 문단에서 ‘자율성’이라는 단어가 성폭력과 관계를 맺는 복잡한 단어라면, 제가 성반연에서 자주 들었던, 웜홀 같은 단어는 ‘공동체’ 였어요. 그 단어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데, 각자 다른 위치에서 다 다르게 사용하면서 모든 것을 틀어막거나 없애버리는 단어로 사용이 되는 거예요. 이 업계의 특수성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 지점이었고요.
또 하나는 아까 피해자로서만 말할 수 있다고 말씀해주신 부분에 대해 제가 느낀 건, 어떤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문단 내 성폭력 같은 경우도 한 1년 반 정도는 그것이 거의 지배했던 것 같고. 그 시기를 벗어나면서 피해자분들도 자기를 피해자보다는 연대자로 전환하는 시기를 경험하면서 모두들 피해자가 아니어도 발언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호작용으로써 확인하는 시기가 필요한 것 같아요.
피해자성을 벗어나서 우리가 연대자로서 발언할 수 있는 공동체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문단 내 성폭력이라고 했을 때 문단이라고 하는 계, 연극계라고 하는 계의 성격, 이것들이 너무 구획되어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사실 저희가 속해있는 예술계로 더 확장시켜서 얘기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같은 문제를 여기서도 논의하고 저기서도 논의하게 되잖아요. 이 논의들이 연결되지 못하고 따로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연극계의 피해당사자 네트워크가 있냐고 여쭤봤던 이유가, 제가 얼마 전에 미술계 좌담회를 갔었는데요. 미술계가 문단이랑 굉장히 유사하더라고요. 여기도 똑같이 노동구조가 개별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피해자들이 각자 계에 주저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술계 전체로 확장되면서 연극계 피해자와 문단 피해자, 미술계 피해자분들이 같이 네트워킹할 수 있고, 연대자들끼리 네트워킹할 수 있게 좀 더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 해요. 자신의 업계에서만 있던 것과는 좀 더 거리감을 유지하면서 좀 더 큰 구조, 예술계에서 좀 더 키우면 한국 사회 전체가 되겠죠.
얼마 전에 <미투 운동 1년 이후>라는 포럼에 참여하게 되었는데요. 법조계 체육계 문학계의 발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문단 내 성폭력 이야기만 하다가 거기 갔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있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우리가 자기에 속해 있는 계에 밀착돼서 특수성에 대해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좀 더 우리끼리의 특수성을 연결해서 더 큰 네트워킹 단위를 만들 때 자신의 피해자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요.
오성화
지금까지 논의에서 ‘피해자성’에는 두 가지 분리된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정리해보면 가해자들이 전유해서 사용하는 피해자성과 당사자와 연대자 사이의 피해자성은 다른 거죠.
>>>> 이후 내용은 다음 호로 이어집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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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름

강보름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연출가
연출작으로 <레디메이드 인생>, <우리가 고아였을 때>,<모던걸타임즈> 등이 있다.
rkdekdzh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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