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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논쟁

왜 지금 ‘과정’인가?

김방옥

제165호

2019.08.08

웹진 연극in은 “과정-논쟁” 이라는 주제로 총 4번에 걸쳐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최근, 제작극장과 예술축제, 공공지원기관으로부터 강조되고 있는 ‘과정’에 주목하고 현장에서의 반응과 현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연극in은 예술창작의 ‘과정’을 지켜보는 여러 주체들의 입장을 ‘난상토론’의 방식으로 중계합니다. - 웹진 연극in 편집부
1.
연극계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과정(process)’에 관한 논의가 터져 나오고 있다. 젊은 연극 창작자들을 중심으로, 연극행위에 있어서 반드시 공연이라는 결과물을 목표로 해야 하는가? 과정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은가? 결과지상주의에서 벗어나 과정을 존중할 때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창작 분위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 경우 어떤 새로운 콘셉트의 연극들이 가능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관객은 어떤 식으로 참여 할 수 있을까? 이런 자기를 향한 질문들이 제기된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도 두산의 ‘아트랩’, 남산의 ‘서치라이트’, 국립의 ‘판’ 등 주요 단체들이 인큐베이팅의 일환으로 완성된 결과보다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과정 중의 공연 지원을 표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최초예술지원 등 청년예술지원사업의 특수성 역시 이런 현상들과 관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밖에 24시간 연극제, 십분 희곡 릴레이 같은 시도, 낭독극이나 일반인들의 리딩 파티 등의 유행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그렇다면 왜 지금 ‘과정’인가? ‘과정성’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 앞으로 몇 회에 걸친 연극in의 ‘과정’에 관한 기획에 참여하면서, 누군가 이를 정리하고 시작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첫 글을 맡게 되었다.

남산 ‘서치라이트’(좌)와 변방연극제 ‘워크룸’(우) 기획의도


오늘의 진보적 예술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철학적, 정치적, 미학적인 자기성찰(self-reflexivity)과 자기지시성(self-referentiality), 예컨대 ‘이것은 왜 예술인가? 왜 이런 예술을 하는가?’ 라는 질문 없이는 존립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연역(演繹)에 대한 강박증일 수 있으나 지금 논의되는 ‘과정’은 연극현장에 관한 논의 뿐 아니라 거슬러 올라가면 철학, 미학, 사회학, 문화연구 등 많은 분야와 연결된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내 일천한 공부로는 이 부분은 감히 쓰지 않는 게 양심적일 것이며 나머지 부분은 연극인 누구나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의 정리이다. 이런저런 이유로 주저되기는 하지만 현재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앞으로의 기획 토론의 밑거름이 되고 아쉬운 대로 현장 연극인들에게 대강의 배경 그림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과정의 계보학’을 간단하게나마 시도하고자 한다.
2.
‘과정’이라는 개념
은 크게 보면 탈근대 이후의 철학과 미학에서 주류를 이루는 생각과 멀지 않다. 우선 좀 거창하지만 철학에서 과정이라는 개념을 대변할 철학자로 화이트헤드(Alfred N. Whitehead, 영국, 1861-1947)를 들 수 있다(최근 중고생을 위한 논술대비 철학시리즈 책에도 포함되었다).1) 수학, 물리학, 심리학, 진화론 등을 배경으로 거대한 사변철학의 체계를 이룬 그의 ‘과정 철학 philosophy of process’에는 아쉽게도 예술에 대한 직접적 언급이 포함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과정 철학’은 대상을 고정된 불변의 것으로 보는 데카르트나 칸트 등 전통적 서구 근대 철학과 반대로, ‘변화’‘생성’이라는 의미를 중시하는 서구 철학사의 큰 흐름의 중심에 있다. 세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생성과 변화 중에 있다는 그 생각은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로 유명한 고대의 헤라클레이토스부터, 세계는 가변적 모나드 단위들의 유동적 자기복합체라고 본 라이프니츠, 삶의 경험과 행위가 이론에 앞선다고 본 퍼스와 제임스 같은 미국의 실용주의, ‘지속’의 철학자인 베르그송을 거쳐 체계화된 것이다. 그리고 화이트헤드의 과정 철학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니체나 들뢰즈 같은 탈근대의 여러 사상 및 불교나 도교 같은 동아시아 철학과도 같은 맥락을 형성하는 것으로 재해석되고 있으며 탈근대 이후의 예술작업에도 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이중 예술가들에게 비교적 친근하게 인용되는 경우로는 유명한 “존재에서 생성으로(from being to becoming)”를 부르짖은 니체가 있다. 그는 플라톤 이후 다양하게 변주되어온 고정된 존재론에 종속될 것이 아니라 차이 생성의 반복을 통해 각자의 해석의 관점과 긍정의 힘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더불어, 베르그송은 존재론에서 시간의 지위를 회복하면서 ‘진짜 시간’이란 지속되면서 무엇인가 생성되고 있는 것이며, 지속이란 끊임없는 질적 변화의 연속이라고 보았다. 또한, 들뢰즈의 ‘되기(devenir, becoming)’는 일원론적 물질론의 관점에서 차이의 반복, 즉 생성이라는 사건의 순간, 잠재태가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성적, 물질적 변화를 말한다. 최근 연기론에서도 가끔 언급되고 있다.
그 다음으로 미학(철학)적인 맥락에서 ‘과정’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겠다. 진중권은 베스트셀러 『현대미학강의: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2)에서 현대(탈근대)미학의 특성들인 숭고(현전)와 시뮬라크르(해체) 모두에 작용하는 ‘사건성(event, Ereignis)’에도 주목한다. 미학의 역사를 작가미학 → 작품미학 → 관객(영향)미학으로 볼 수 있다면 현대(탈근대)미학에는 작품미학에서 관객(영향)미학으로 가는 어딘가에서, 무엇인가가 스스로 드러나거나 체험되거나 일어나는 그 사건성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각자 입장은 다르지만 하이데거, 아도르노, 데리다, 들뢰즈, 리오타르들에 숨어있는 그 ‘일어남’이라는 ‘사건’들의 ‘과정성’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는 오늘날 많이 언급되는 ‘수행성(performativity)’과 연결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20세기 초중반 이래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탈근대의 예술로 들어가 보면 주지하듯이 연극의 키워드는 텍스트에서 몸으로, 물질로, 과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 중 과정의 연극과 가장 밀접한 최초의 작업은 죠셉 체이킨(Joshep chaikin)의 오픈씨어터가 아닐까 한다. 알다시피 체이킨은 리빙씨어터의 급진적, 정치참여적, 공동체적 연극을 극단 내 미학적 작업으로 끌어안으면서 즉흥연기, 공동창작, 워크숍 중심 공연 등을 본격적으로 시도했다. 다소 산만하더라도 결과물보다 리허설 과정을 중시했으며 연기자들의 아이디어를 모아 작가와 함께 공동창작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연습복 차림의 리허설 과정들이 공연 속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기도 했다. 1950~60년대 이후의 해프닝, 이벤트 같은 실험적 퍼포먼스를 거쳐 80년대 이후부터 리차드 셰크너(Richard Schechner)의 퍼포먼스 연구(Performance Studies)3), 혹은 공연학 개념이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다. 특히 셰크너가 인류학적 관점의 영향을 받아 정리한 ‘공연 과정(performance process)의 10단계(트레이닝 → 워크숍 → 리허설 → 워밍업 → 공연 → 공연 컨텍스트 → 쿨 다운 → 비평적 반응 → 아카이빙 → 기억)’4)은 과정으로서의 연극에 좋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2000년대 이후에는 20세기 초부터 이미 연극을 ‘공연, 몸, 사건’으로 파악해 온 독일 연극학이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정의가 모호하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스-티스 레만의 ‘포스트드라마’라는 개념이 포스트모던 연극을 대체하게 되고, 특히 에리카 피셔-리히테가 강조한 수행성5)이 현재까지도 진보적 문화계 및 연극계의 주요 키워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수행성은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 창발성(emergence), 관객과의 상호작용(autopoietic feedback-loop) 등을 중시한다. 그리고 젠더는 반복적 수행의 결과일 뿐이라고 본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수행성이 그러하듯 수행성이란 궁극적으로 행위하는 자신과 세계의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한편 탈근대와 후기자본주의, 그리고 디지털 사회에 들어서면서 대중의 힘이 막강하게 커졌다. 그들은 소비자, 시청자, 관객, 인터넷 사용자라는 이름으로 많은 경제, 사회, 문화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를 원하며, 연극관객들의 경우 단지 공연된 결과를 소비하고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면과 과정을 들여다보고 참견하고 참여하고자 하는 욕망을 지닌다. 이런 관객의 요구와 욕망은 과정의 연극을 가능하게 하는 한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과정의 연극은 관객을 소외시킬 수도 있다.6) 한편 평등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는 『해방된 관객』에서 작가와 관객 사이의 불일치, 불연속, 그리고 미리 계산할 수 없는 우연한 결과와 미적 단절이 관객을 해방시킨다고 말한 바 있다.7)
정치적으로는 21세기 들어 미국 중심의 세계 권력 구조를 강타한 9.11 이후, 국내의 경우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기존의 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회의와 비판이 강해졌다. 한국 연극에서 ‘과정의 연극’에 대한 관심에는 제 기능을 못하는 국가 제도에 대한 불만과 공정한 민주사회에 대한 희구, 그리고 ‘미투’ 이후 기존 연극제작 방식의 위계적 폭력과 결과지상주의의 비민주적 과정에 대한 분노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압축된 근대화와 성과 위주 사회에서 강요받던 결과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지금 현재 ‘제대로 살고 있다는 게 무엇인가?’하는 과정에 대한 성찰이 고개를 든 것이기도 하다.
구체적 연극현장을 들여다보면 젊은 예술가들이 결과 위주의 예술작업에 대한 피로와 회의를 호소하는 데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고 본다. 연극창작을 하고 싶은 젊은이들은 많은데 지원기관의 지원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한정되어 있고 제작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관객에게 보여주는 결과보다 창작자들끼리의 과정에 더 집중하는 식으로 방향이 바뀌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서로를 존중하는 민주적 과정에서 작업자 사이의 상호자극과 연대감을 통해 창작 의지가 왕성해질 수 있고 전혀 새로운 작품 콘셉트들이 떠오르기도 한다.6)
물론 이런 움직임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연장으로 공연의 다원예술화나 개념적 예술, 연극의 매체화 같은 세계 연극의 흐름과 궤를 같이할 뿐더러 실제 작업과정 면에서 1980년대 이후 영국 발 디바이징 씨어터(devising theatre)나 버베이팀 씨어터(verbatim theatre)를 비롯한 각종 다큐멘터리 계열의 연극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디바이징 씨어터는 장기간의 연구와 리허설 전개 과정을 거치는 공동창작의 성격을 띠고 있고 다큐멘터리 연극이나 버베이팀 역시 자료 수집과 텍스트 구성이라는 점에서 과정에 대한 존중이 중요하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생활과의 경계를 넘어선 연극개념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볼 때 교육연극, 치료연극, 커뮤니티 아트 등 실제 생활과 실용적으로 연계된 실용연극(applied theatre)도 원래 과정의 연극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제작이나 지원의 관점에서도 과정의 연극은 뜨거운 이슈가 될 수 있다. 앞으로 과연 과정성과 인큐베이팅은 미학적으로, 현실적으로 창작 활성화와 얼마나 더 잘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과정 위에 있는 그들이 보다 더 성숙한 예술가가 되도록 이끌고 지원할 것인가? 요즘 지원사업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생활예술 vs. 전문예술, 생활예술 vs. 비생활예술이라는 개념의 재배치와, 창작지원을 축소하려는 전반적 경향 속에서 ‘과정의 연극’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아르코 ‘과정과 공유’ 포스터

3.
공연에서 과정에 대한 관심이 어제오늘 생긴 것은 아니고 십 년 전에 비하면 최근의 젊은 연극들은 거의 모두 ‘과정지향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정이라는 담론은 젊은 연극을 자극하는 주요 동력이 될 수 있고 그들을 효율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플랫폼이 될 수 있으며 연습 과정과 관련해서도 연극계에 뿌리내린 적폐들과 불공정성이 청산되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과정의 연극에 관한 논의에 우려되는 측면은 없을까? 창작행위에 있어 지나친 관념화나 이론적 정당성의 과잉 부여는 연극예술을 자기만족적이거나 자기유희적인 테두리에 머물게 하지는 않을까? 혹시 부족한 결과물에 대한 변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관객을 창출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연극의 대중적, 사회적 영향력과 파급력을 약화시키는 면은 없을까? 아무리 뜻이 좋아도 만일 과정이라는 담론이 공연을 앞지르다 보면 우리 젊은 연극계가 혹시 거대한 리허설, 자기만족적인 자기성찰의 공동체, 정치적 올바름의 실험실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현재,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한국연극계는 모처럼의 에너지로 들끓고 있지만, 한편 교조적 이론을 앞세우며 자기도취나 자기합리화에 빠졌던 1980~90년대의 마당극이나 민족극이 이데올로기 붕괴 이후 급속히 퇴조했던 사실을 되새겨 볼 필요도 있겠다. 이 글 역시 혹여나 그런 우려에 일조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다음 호부터 분야별로 이어지는 토론들이 생산적으로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1. 추천할 만한 안내서로는 니컬러스 레셔. 『과정형이상학과 화이트헤드』, 장왕식 옮김. 서울: 이문출판사, 2010.
  2. 진중권. 『현대미학강의: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서울: 아트북스, 2003.
  3. 마가렛 크로이든. 『현대연극개론: 광인,연인,시인들』, 송혜숙 옮김. 서울: 한마당, 1984; 조셉 체이킨. 『배우의 현존』, 윤영선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1995. 등.
  4. Richard Schechner. Performance Studies: An Introduction. London: Routledge, 3rd. ed., 2013. pp. 221-262.
  5. 에리카 피셔-리히테. 『수행성의 미학(2004)』, 김정숙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 2017.
  6. 한윤미, “우리에게 왜 과정이 중요해졌을까?”, 연극in, 2019.07.11.http://webzine.e-stc.or.kr/03_story/plan_view.asp?SearchKey=&SearchValue=&rd=1&flag=READ&Idx=1368
  7. 자크 랑시에르. 『해방된 관객』, 양창렬 옮김. 서울: 현실문화, 2016.
  8. 진중권. 『현대미학강의: 숭고와 시뮬라크르의 이중주』. 서울: 아트북스,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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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방옥

김방옥 연극평론가
 bangoc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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