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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논쟁 #1

기획자-평론가 토론

진행_정진세, 정리_강보름

제166호

2019.08.22

웹진 연극in은 “과정-논쟁” 이라는 주제로 기획 기사를 연재합니다. 첫번째로는 연극 현장의 ‘과정’에 주목하고 있는 기획자와 평론가분들을 모시고 '과정'의 개념과 이를 둘러싼 여러 이슈에 관하여 토론을 진행하였습니다. - 연극in 편집부

일시 : 2019. 8. 7. 수. 오후 5시
장소 : 서울연극센터 2층 아카데미룸
토론 : 김덕희(서울예술단 공연기획팀장), 박지선(독립프로듀서), 이경미(평론가), 전강희(드라마터그)
진행 : 정진세(본지 총괄에디터)
정리 : 강보름(본지 편집위원)

#변방연극제 #연출의 판 #창작실험 과정공유 #과정이란 무엇인가
정진세
최근 연극계에는 ‘과정’을 중시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오늘이 첫 번째 토론회로, 기획자-비평가 네 분을 모셨습니다. 현장에서 ‘과정’이라는 언어가 어떻게 통용되고 있는지 궁금한데요, 예를 들면 변방연극제의 ‘워크룸’, 국립극단의 ‘연출의 판’, 아르코의 ‘창작실험 과정공유’, 남산예술센터의 ‘서치라이트’ 정동극장의 ‘예술가의 작업실’이라든지 과정을 도드라지게 하는 워딩이 눈에 많이 띕니다.
전강희
서울변방연극제 ‘워크룸’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제작비가 충분하지 않아서 기획하게 된 프로그램이에요. 그래서 과정을 어디까지 공유할 것인가가 숙제였어요. 먼저 아티스트를 선정해서 1월에 미팅하고, 3-4월에 조금씩 준비를 해나가면서 축제 중에는 총 여덟 번을 만났어요. 중간에 한 번 창작과정을 어떻게 진행하고 있고, 관객을 어떻게 만날 것인지 일반 관객을 초대해서 공유하는 자리가 있었고요. 가장 크게 느꼈던 부분은 만드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공연이 올라가는 것이 아닌 ‘중간’을 보여준다는 것 자체에 대한 부담감이 있다는 것이었어요. 또 하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과정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라는 고민으로, 결국은 관객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 방법을 어떻게 탐구해야 하는가, 로 귀결됐어요. 끝날 무렵, 매일의 과정이 더 많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에 대한 탐구는 축제 측의 몫인 것 같아요. 유튜브를 해볼까도 생각했는데 비용 면에서 부담이 있었죠. 그런 커버 비용을 고려해보면 일반 공연 제작비와 다르지 않더라고요(웃음). 그러면 굳이 과정을 해야 하나? 이 정도 금액이 똑같이 들어가는 거라면 작품을 하나 만드는 게 더 낫지 않나? 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씨앗을 만들어서 공연을 올리는 것이 목표였고, 하고자 하는 바는 달성했던 것 같아요. 예술가들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했어요.
이경미
‘연출의 판’도 기획 자체는 변방연극제의 워크룸과 같다고 봅니다. 흔히 연출가들은 본인은 물론이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어떤 한 작품에 대해 최종 책임을 지는 사람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연출가들에게는 의식하건 의식하지 않건 최종적으로 완성된 좋은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야 한다는 강박적인 부담 같은 것이 있죠. 그래서 정말 하고 싶은 것들을 내내 붙잡고 있다가도 마지막 순간에 결국 내려놓는 경우도 있고요. 좋은 의미로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한 일종의 자기점검 같은 것이지만, 뭔가 그 스스로 자신을 허물고 과감히 드러낼 수 있는 어떤 결정적인 도전을 자꾸 포기하는 것이 되는 거죠. 국립극단의 ‘판’은 말 그대로 연출가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한판 벌여보게 하는 것이었어요. 2년 차인 올해 제가 합류하면서 느꼈던 것은 연출가들은 스스로 실험이라는 우회로를 거치겠다고 선언을 해도, 결국 완성된 작품에 대한 강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더라는 점입니다. 국립극단에서 공연한다는 것에 대한 부담감도 있는 것 같고요.
박지선
아르코 ‘창작실험 과정공유’에서 과정을 어떻게 공유해야 하는가,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보면 좋을까, 하는 논의과정과 기획, 운영에 참여했습니다. 모든 지원은 발표가 전제되어 있잖아요. ‘창작실험’도 발표를 해야 하죠. 그런데 발표가 공연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어요. 그래서 초기에 예술가들과 미팅할 때 많이 열어두고 고민했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의 경향성을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아요. 첫 번째는 그 무엇도 상관없다. 관객층이 누구여도, 피드백도 상관없다. 두 번째는 내 작품의 커미셔닝을 실행할 수 있는 파트너가 생겼으면 좋겠다. co-producing 할 수 있는 극장 관계자나 프로듀서들이 왔으면 좋겠다. 세 번째는 공연 주제와 관련된 특별한 리서치 대상을 만나고 싶은 팀. 10대의 성에 관한 공연이니 청소년을 만나고 싶다거나 해외 입양아의 이야기를 어떻게 공연화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예술가의 경우. 굳이 이야기하자면, 리서치 베이스, 다큐멘터리 베이스, 혹은 커뮤니티 워크숍을 통해 만들어지는 작업이 피드백을 더 많이 받고 싶어 하는 것 같아요.
김덕희
저는 사실 ‘과정’이라는 용어 자체도 익숙하지 않아요. 현장에서 충분히 공유된 것 같지 않거든요. 거꾸로 정의해보자면, 방금 얘기해주신 세 가지가, 프로덕션 내에 전반적으로 녹아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왜 자꾸 공공 지원제도에서 과정을 발표하는 프로세스를 만드는가? 살펴보면 과정이 결과물로 가기 위한 중간 점검이거나 발굴인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 오히려 심사위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과정을 만들게 되는 거예요. 리서치 작업에 대한 피드백을 받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사실 모든 리허설이 과정이라고 볼 수 있잖아요. 근데 굳이 과정이라 명명해서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들을 만들어놓은 거죠. 그렇게 했을 때 과정에 여러 가지 목표들이 동시에 섞여 있거든요. 그걸 구분해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사업의 목표가 어디 있느냐에 따라서 과정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지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공동창작의 방식으로 작업하는 프로덕션의 경우 ‘과정’이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전통적 방식의 연출가 중심 구조가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런 이슈들이 대두된 게 아닌가.... 과정이라는 것이 어느 작가, 연출가가 그려놓은 그림을 구현하는 공연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을 통해서 작품의 메시지를 도출하기 위한 방식이어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그 방식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가장 좋은, 리얼리티를 구현하기 가장 좋은 방식이라면 그 자체가 결과물이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대개 리서치를 통해 창작자들이 영감을 받는 것과 공연으로서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은 다르잖아요. 창작자들은 과정 자체를 드러내면 관객들도 알 거라 생각하는데 그게 아닌 거죠. 배우들만 이해하고 관객들은 수수께끼 풀어야 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공연화를 거치지 않은 불완전한 작품을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올리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과정의 가치는 그 작품이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기반으로 봐야 하는 것 같아요.
정진세
과정이라는 용어를 살펴보면 ‘process’라는 개념과 한문으로 된 ‘科程’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process‘의 어원을 살펴보면 ‘앞으로 나가서 굴복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신학적 개념인데, 일원론적 세계관에서 죽음으로 나아가고, 그 결과는 구원입니다. 이것을 ‘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문의 ‘科程’은 ‘특별한 장소로 지나갈 수 있도록 빌다’라는 뜻이에요. 재밌게도 두 의미가 무엇을 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굴복하거나 빈다는 의미가 있더라고요. 철학에서는 여러 현실적 계기들이 하나의 현상으로 수렴되어가는 것을 일컬어 ‘과정’이라고 합니다. 공연에 접목해보면, 다양한 주체들이 만나 하나의 디렉션으로 모아지면서 ‘결과’를 내는 기간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다양한 주체들을 종합해내는 ‘연출‘이 중요했다면, 최근에는 여러 가능성을 인정하는 ‘과정’ 자체의 특수성이 중요해지지 않았나 싶고요. 다양해지고, 자유로워지고, 특별해지는 최근의 경향과, 완성도를 위해 일관성을 가져야 하고, 관객을 만나기 위해서 정리되어야 하는 공연예술의 관성이 마주하면서 요동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2010년을 전후해 한국 공연예술계의 화두였던 ‘포스트드라마’ 현상과 비슷하게, 연극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개념들을 새롭게 정리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경미 ( 좌 ), 박지선 ( 우 )

#과정의 문제 #혼용되는 개념들 #공공의 역할 #피드백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경미
포스트드라마 현상이 아니더라도 현대 예술은 완성된 작품이 아닌 ‘과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왜냐하면 현대예술은 대상을 지시할 하나의 작가 언어는 없을뿐더러, 작품의 최종적인 완성자는 예술가가 아니라 관객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예술가는 그냥 어떤 화두에 대해 질문하는 사람이고, 관객은 그 질문을 받아 자기 생각과 감정, 가치로 채워야 하는 사람이라는 거죠. 관객이 생각을 구성해 나가도록 그 ‘과정’을 열어주는 것이 바로 예술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수행성(performativity)’이라는 미학적 개념이 그거죠. 아니면 ‘문지방 경험’, ‘이도 저도 아닌 경험’과 같은 거요. 그것은 미완이나 미숙함이 아니라 관객의 생각을 추동시키는 일종의 질문지 같은 것입니다. 아직 드라마적 재현관습이 익숙한 한국연극에서는 여전히 납득할 수 없는 화두일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과정’이 ‘일단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라도’ 보여주겠다는 생각이 ‘과정’으로 인식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상황이 아직 허락하지 않아 이것밖에 할 수 없는 예술가만 있죠. 공연을 보러 가면 그들만의 무대인 경우가 많아요. 더 큰 문제는 공공지원 기관도 이런 생각을 갖고 지원금을 잘게 쪼개 나누어주고 있다는 것이죠.
김덕희
저도 역시 관객을 만나는 지점이 기본이라고 생각해요. 과정은 말 그대로 과정이고, 목적지가 있어야 하는데, 거꾸로 목적지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과정이라고 이야기해버리고 결과물을 내버리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요. 목적이 뚜렷해서 과정 자체가 ‘우리의 무엇이다’라는 것이 정확하게 서 있다면 문제가 없다고 봐요. 그런데 뚜렷한 선이 있지 않은 상황에서 무책임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여러 지원제도가 이런 쪽으로 열리다보니까. 다음 단계로 가는 게 약해서 선순환으로 작용하기 어렵죠.
이경미
덧붙이자면 첫 번째로는 현대 공연예술과 관련한 담론과 실천을 공유하지 못하는 학교 교육의 문제, 두 번째로는 젊은 창작자들의 열악한 환경에 원인이 있죠. 제작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비용 부담을 느끼지 않고 어떤 이슈에 대해 심정적으로 공감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이는 편의성도 좀 있는 것 같아요. 또 좀 전에 말했지만 적은 돈으로 가능한 한 많은 예술가를 지원하려는 기관들의 생색내기 정책도 한몫하고요.
박지선
우리는 과정을 'working process'로 쓰는데, 외국에서는 'work in progress'로 쓰거든요. 영국 “BAC(Battersea Arts Center)”에서는 과정을 공유하면서 작품을 창작해가는 방법론을 ‘스크래치 작업’이라고 해요. 어디로 향하기 위한 작업을 보여준다, 나아가야 할 목적이 있다는 거죠. 초기 아이디어를 갖고 스크래치 작업을 관객과 여러 번 공유하거든요. 가장 중요한 게, 예술가가 관객에게 설명하면 관객이 피드백을 줘요. 다시 작품을 발전시키고, 또 피드백을 받고, 이 모든 과정에서의 피드백을 수합해서 창작자는 다음 단계의 창작으로 가는 거예요. 이런 경우 명확한 설계 속에서 과정이 가치 있게 여겨지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많은 과정 프로그램들이 발표와 공유를 전제로 하지만 공유의 과정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해 이 발표가 어떤 의미가 있는가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이 논의되지 않는 것 같아요.
이경미
전체 창작과정에서 리서치도 단순히 자기들끼리의 자료 모으기가 아니라 자료를 모으는 과정, 모은 결과물들을 분류하고 연결하는 그 과정이 관객과 공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관객은 일반 관객과 달리 그 과정을 참관하면서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죠, 그리고 그 자체가 또 하나의 리서치이고요. 작품의 형식을 떠나 저는 모든 연극은 하나의 리서치이고 progress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발전되면 비로소 우리는 수행성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요.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을 정확히 보여주겠다’가 아니라 ‘관객과 이런 생각을 나누고 우리 정말 이래도 되는 건지, 이 상태로 괜찮은 건지, 그들의 생각을 한번 들어보겠다’라는 자세라고 생각해요.
박지선
설계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예술가가 만나고 싶은 관객을 큐레이팅해야 하고, 작품이 개발될 때 다음 단계에서 같이 커미셔닝할 수 있는 극장 관계자나 프로듀서를 만나서 관심을 갖게 해야 하는데, 한국은 이러한 커뮤니티 또는 네트워크가 잘 형성되어 있지 않은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과정을 공유해도 관계자들이 관심을 갖고 피드백을 주거나, 피드백을 통해 어떻게 성장할 수 있을지에 대한 담론이 형성되지 않는 거죠. 독립적인 하나의 예술가 개인의 과정으로 끝나버리는 것 같아요.
김덕희
말씀하신 것처럼 lab 기능이 거의 없죠. 예전에는 대본 공모를 기반으로 작품 개발을 하다가 최근 들어 리서치 지원으로 가고 있는데, 사실 모든 지원의 목표는 결과물 도출이 아닐까, 생각해요. 근데 도출을 한다는 목표가 같아도 정확한 선을 어디까지 둘 것인가가 다른 거죠.
이경미
작가나 연출가 역시 lab을 그냥 공연 한번 해보는 기회로 볼 것이 아니라, 자신을, 자신의 미학을 많은 사람에게 알릴 중요한 기회로 생각해야죠. 그래서 다른 기획과 달리 lab에서 극장이나 창작자 모두 공유해야 하는 것은 차별성이며, 발전 가능성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다각도로 공연과 그 공연에서 선보인 미학에 대해 참여 예술가가 다양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통로가 보장되고 또 더 강화되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lab은 platform이 되어야죠. 이때에는 극장 자체의 열정과 의지도 중요하지만, 바로 이 지점에서 공공지원이 해야 할 또 하나의 역할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 전반에서 늘 지속적인 피드백이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이고요.
박지선
경로설정에서 피드백이 중요한 문제인데, 여기서 ‘피드백’은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해요. 피드백을 받는 현상이 최근 10년 사이에 많이 생겼는데, 우리는 창작의 구체적인 내용에 직접적인 피드백을 주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작품을 이렇게 바꿔라, 저렇게 바꿔라 하는 거죠. 창작산실의 경우 중간 쇼케이스를 통해서 과정 심사를 하죠. 멘토 프로그램도 운영하면서 멘토가 피드백 주는 방식이 있어요. 이때 과정을 보는 방식이 한 작품의 완벽한 결과물을 보는 방식과 동일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토론이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작품을 보고 나서 평가는 하는데, 궁금해하지는 않아요. 질문하기가 안 되는 거죠. 과정도 평가를 해버리기 때문에 이 안에서 실제로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있는가 점검해보게 되죠. BAC는 예술가들이 어떻게 본인의 과정을 관객에게 설명하고 공유하는가의 방법론을 많이 고민하더라고요. 예술가가 이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창작과정을 통해 예술가 본인에게 무엇이 제대로 이루어졌고 무엇이 안 됐는가 등의 대화 방법론이 개발되어 있는 거죠.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과정에 대한 결과물을 공유하는 방법을 고민해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경미
요즘 ‘관객과의 대화’가 활발히 이뤄지는 것도 이것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주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식이었는데, 관객 중에 적극적으로 자기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이게 바로 가장 생산적인 피드백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다음이 소위 전문가 평가죠. 평가의 방식이나 평가자의 관점이 바뀌어야 할 것 같습니다. 평가라는 말도 좀 억압적이고 권위적이고요. 이런 작업의 경우 무엇을 평가할 것인지 그것부터 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김덕희
최근에 ‘공연예술생태계’라는 용어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요. ‘선순환 구조’를 바탕에 두고 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면, 창작->제작->유통->평론->재제작의 프로세스를 말하는 것이겠죠. 이때 창작에서 어느 정도의 영역을 민간에서 책임지고, 공공에서 책임지는지, 어떤 부분에 어느 정도의 자원이 투입되었고 그다음 프로세스가 어떻게 가는지에 대해 연구가 되면 좋겠어요. 공적 자원이 투입됐는데 그다음에 갈 데가 없다는 건 예산의 낭비인 거잖아요. 유통구조를 확장할 수 있도록, 여기에 몰려있는 예산을 비어있는 쪽으로 투입해서 좋은 작품들이 그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생태계를 운영하는 방식이 필요한 거예요. 예술가가 성장하는 시스템이든 작품이 성장하는 시스템이든 이런 부분이 어긋나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박지선
공적 자원이 투여되었는데 지속되지 않는 것을 예산의 낭비라고 보고 계신데, 저는 반대로 질문해보고 싶어요.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이 반드시 다음 단계로 가야 하는가? 그건 아니잖아요. 과정의 가치를 무엇으로 봐야 할 것인가가 중요한 거죠. 예를 들어 과정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배우가 발견되기도 하고 몰랐던 부분이 드러나기도 하잖아요. 과정 안에서의 가치를 무엇으로 볼 것인가도 중요한 것 같아요.
또, 공동 리서치, 공동창작, 디바이징 씨어터가 많이 생기면서 창작 방법이 바뀌고 창작 기간이 길어지게 되고, 그에 따라 리서치 시간이 더 필요하게 되었어요. 극장이 아닌 공간을 새로 실험한다거나 테크놀로지를 사용한 작업을 하는 경우, 다원예술 창작의 경우에도 처음 만나는 타 분야의 예술가와 갑자기 프로덕션을 꾸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리서치를 같이하는 과정에서 서로 발견하는 시간이 있어야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거죠. 최근 5년간 국제 공동제작도 많아졌어요. 물리적인 거리와 서로 알아가는 시간 때문에 기본적으로 2~3년이 소요되죠. 그렇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을 갖고 창작하는 데 있어 과정 지원은 분명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환경 안에서 왜 우리가 과정을 지원해야 하는가가 더 넓게 공유되어야만 예술가, 기획자 모두가 과정을 기획하는 데 있어서 멀리 내다볼 수 있다고 생각해요.

김덕희 ( 좌 ), 전강희 ( 우 )

#창작을 공유하는 새로운 형식 #예술가만의 과정 #소외되는 관객
전강희
올봄에 신촌문화발전소의 ‘창작공유과정’ 프로그램을 석 달 동안 했어요. 제가 참여했던 세 가지 작업을 더 발전시키는 방향을 목표로 삼고 시작했는데, 모두 이전 버전과는 다른 공연이 되었어요. 작품 자체의 완성도 보다는 하고자 하는 작업의 개념을 더 단단하게 다지는 시간이었어요. 하던 것을 점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게 굉장히 좋았어요. 그런데 이때 포커스는 관객이 아니었거든요. 와주시면 정말 감사한 일이지만요. 예술가의 목적, 동기로서의 과정에서 굉장한 만족감을 주었어요. 우리가 어디까지 할 수 있다는 계획이 정확했고, 허둥지둥하지 않았어요. 이후 세 작품 모두 다음 단계로 연결이 되었고요. 다음에는 이만큼 하자, 이것이 정해지면서 창작과정 자체가 길어졌고, 길어진 과정 안에서 작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제도와 강하게 결합하지 않더라도 아티스트가 무언가를 설계할 수 있게 됐어요.
이경미
공연을 보는 관객의 입장에서 말해 볼게요. 다양한 과정 공유의 현장에 가보면 관객들은 있지만 사실 없는 존재예요. 자신의 작업을 점검하고 확인하는 차원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다고 할까... 재미있는 것은 이런 워크숍일수록 일반 관객들보다 동료 창작자들이 더 많다는 거죠. ‘나 이런 거 해, 너 이런 거 하는구나’ 같은 그들끼리의 교감과 확인이라 할까.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 점이 늘 아쉽습니다. 늘 좋은 연극, 때로는 뭔가 새로운 파동을 기대하며 이 극장, 저 극장을 기웃대는, 하지만 창작을 하지 않는 나에게는 당신들의 시도가 무엇일 수 있는지 생각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완성작을 바라는 것이 아니에요. 관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의 접점을 찾는 방향으로 나가는 것이 과정, progress라고 생각해요. 작품은 완성되어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거잖아요. 그 질문이 담겨있지 않고 계속 작품 만들기의 과정, 그 과정 안에서의 예술가의 자기 고민만 순환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요.
김덕희
때로는 반복적으로 지원도 받고 리서치도 길게 했는데 결과물이 없는 거예요. 발전되지 않으면서 동어반복만 하는 경우죠. 완성품이 아니어도 분명히 이 작품이 어떤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는데 예술가의 입장에서 이건 증명할 수 없으니 보여줄 수 없고, 의심하지 말라고 얘기하면 애매해지는 거예요.
전강희
과정을 공유하는 것이 관객에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해요.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만드는 창작자에게도 과정 자체를 소화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것 없이 무조건 담론화하는 것이 가능할까. 과연 어떤 담론을 관객과 나눌 만큼 과정을 준비할 여력이 있을까. 창작자가 과정을 충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도 되는 과정으로서의 플랫폼이 부재한 상태니까요.
박지선
과거 축제를 기획할 때부터 이런 고민을 많이 해왔어요. 예술가들이 블랙박스가 아니라 다른 공간에 대한 탐구를 했으면 좋겠다, 어떤 주제와 관련한 리서치와 실험과 관련된 과정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방법론이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데 창작과 관련해서는 참 어려운 게, ‘과정’을 잘 거쳤는데 보기에는 다 똑같아 보일 수 있는 거예요. 창작의 내부에 있던 사람들은 무엇이 변했는지 알겠지만요. 그러니까 이경미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런 과정이 사실 학교나 다른 데서 선행되어야 하는데, 창작 과정에서 이루어져야만 하는 거예요. 창작그룹 노니가 파쿠르, 서커스 퍼포머들과 창작을 할 때, 오랜 창작 기간과 여러 차례의 과정 공유를 거쳤어요. 파쿠르 퍼포머들은 전문 공연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훈련하는 과정이 2~3년이 필요한 거예요. 파쿠르 전문가들이 공연의 퍼포머로 전환되는 과정이 2년인 거죠. 그런데 이것은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작업이 아니죠.
김덕희
예술가는 발전을 하겠죠. 다만 과정의 가능성만 이야기하면서 결과물을 중요하지 않게 이야기하는 경향을 지적하고 싶어요. 둘 다 중요한 거지 어느 한쪽만 중요한 것이 아닌 거죠. 논의가 거꾸로 치중되어 있는 거예요. 관객을 만나야 하는데 예술가가 훨씬 더 중요해지고 관객을 만나는 부분에 대한 논의는 없는 거예요.
박지선
창작 초기부터 관객에 대해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많이 했던 작업은 극장 바깥으로 나가거나 특별한 공간에서 하는 공연이다 보니 누구와 대화하고 싶은지가 중요했어요. 그런데 그런 생각을 많이 안 하게 되죠. 관객은 늘 마지막 순간에 극장에 와서 앉아 있는 존재이니까요. 창작자 입장에서 내 관객이 누구인가가 좀 더 명확하면, 중간 과정을 공유하고 싶어지고 관객 입장에서도 보러왔을 때 저 사람이 나를 왜 관객으로 요청하는가가 명확해질 것 같아요. 소수여도 상관없죠. 그런데 또 여기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 있다면, 모든 과정이 모든 관객에게 오픈되어야 하는가, 입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누가 이것에 관심이 있는가? 또 하나는 나는 누구와 만나고 싶은가? 어떤 과정을 공유할 때는 모든 관객에게 오픈하지만 어떤 과정에서는 관객을 큐레이팅할 수도 있어요. 완전 오픈이 아닌 거죠. 관객의 기대라는 게 있잖아요. 과정을 공유할 때는 이게 무엇이라는 걸 제대로 설명해야 하고, 이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관객을 큐레이팅하는 것도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경미
오늘날 연극에서 과정 담론이 집중적으로 나오게 된 건 드라마 재현의 관습, 텍스트 중심의 문법이 깨지면서인 거예요. 과정을 중요시한다면, 그 과정이 무엇을 위한 과정인지, 어떤 새로운 모색을 하기 위한 준비인지 점검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과정을 하나의 좋은 작품을 만드는 ‘사전 단계’ 정도로만 가져가려고 하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 리서치는 리서치대로 하고, 작품은 의미가 완결된 한 편의 드라마로 만드는 거죠. 창작자들이 기존의 공연 관습과는 다른 시도를 하고 싶고, 어떻게 배우가 기존과 다르게 무대에 서고 싶었는지 등등 이러한 고민들이 보여야 관객들이 인지적으로 참여해서 논의할 수 있는 거죠.
정진세
이 지점까지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부분은, ‘과정’은 결국 관객을 잘 만나기 위한 방법론, 창작에 있어서 ‘문법을 바꾸는’ 일종의 방법론 탐구인데, 역설적으로 지금은 관객이 소외되는 경향성이 다분히 있다는 거죠. 한편으로, 과정 중심의 시대에는 관객의 관극문법 또한 바뀌어야겠네요.
전강희
변방연극제의 워크룸 프로그램은 매시간 참여 관객이 있었고, 작업 과정에서 무언가를 공유하는 시간이 있었는데요. 제가 느꼈던 것은 과정 중에 관객이 들어올 때 기획적인 측면에서 생각해야 할 변수들이 더 많아진다는 거였어요. 예를 들면 우리끼리 연습할 때는 계획이 지연되거나 빨리 끝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데, 관객이 들어올 때는 이 부분까지도 철저하게 구성해야 하는 거예요. 약속했던 것들이 계속 어긋나게 되는 거죠. 그렇다면 연습을 철저하게 다 짜서 공유해야 하는데, 이것이 과정이 중심이 되는 작업의 원래 취지에 맞는가. 변방연극제의 경우, 상황을 이해해주는 관객들이어서 자유롭게 들락날락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과정 공유 프로그램의 경우 기획자들이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점검해보는 것이 다음 숙제이겠다고 생각했어요.
#과정에서 예술가의 책임성 #상호참조 문제
정진세
과정을 공유하는 순간 일어날 수 있는 문제들, 이를테면 예술가의 상호참조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개념의 도용이나 표절 문제, 과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무책임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질문들도 현장에서 제기되고 있습니다.
박지선
참 어려운 것 같아요. 표절을 과정에서 찾는다는 게.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라는 게 굉장히 비슷하기도 하고요. 창작자의 책임성은 필요한 것 같아요. 중간과정을 지원해준다는 건 그만큼 더 많이 리서치해서 찾아보고 고민하라는 의미잖아요. 그런데 또 이것이 개인의 창작 방법이라서 나는 남의 레퍼런스를 보지 않고 오로지 내 것으로만 하겠다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남들이 봤을 때는 그것이 고유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그래서 이것은 예술가의 도덕적 책임으로 남겨져야 하는 부분이지 우리가 평가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아닌가 생각해요. 결과에서는 형식이 똑같다거나 유사한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과정에서 짚어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경미
가장 좋은 것은 온전하게 자기 이야기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풀어내는 것이죠. 그러나 워크숍일 경우 자신이 참조한, 아니면 연관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을 스스로 밝히면 어떨까 생각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어떤지, 이로부터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발전시키고 있는지, 그 과정 자체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가능성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워크숍의 의미이니까요. 하지만 관객 앞에서의 공연이라면, 표절 가능성이 제기될 행위는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양심의 문제죠.
박지선
제도적으로 만들기는 어렵고 문화를 바꿔야죠. 윤리의 문제니까 인식이 바뀌어야 해요.
전강희
표절이라는 관점에서만 접근할 것이 아니라, 한 워크숍에서, 아니면 한 과정 공유 프로그램에서 출발한 씨앗이 어떤 경향으로 이어지고 비슷한 맥락을 갖고 뿌리를 내리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과정에 대한 전망 #과정은 창작의 동력이 될 수 있을까
정진세
젊은 세대 창작자들이 과정을 중시하는 최근의 경향은 작업의 투명성을 증명하려는 자기 노력 같기도 해요. 기성세대와의 변별성을 어필하는 방식이기도 한데요, 결과를 만들어가는 단계에서 요구되는 사회적인 감수성이나 제작과정에서의 평등함의 조건들이 장착되는 시기 또한 ‘과정’으로 본다면, 그런 차원에서도 중간과정이 강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밀실에서 결과물이 나오는 방식이었다면, 지금은 투명한 연습실에서 과정까지 공유한다는 발상인 거죠. 이처럼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제도적 차원이나 생태계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과정을 중시하는 발상과 관점이 연극계에 어떤 영향력을 가질지 궁금합니다.
전강희
지금은 과정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도 해요. 피로도가 쌓이고 있어요. 그런데 과정 프로그램을 진짜 많이 한 개인 창작자로서 저에게는 모든 프로그램이 다 도움이 됐어요. 기대와는 다르게 좋지 않은 결과물도 정말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이 분명히 되었거든요. 과정 지원프로그램이 더 세분화되면 좋겠어요. 예술가가 성장하는 것에는 분명히 도움이 되니까요. 관객을 만나는 과정 지원이라면 중간을 매개하는 퍼실리테이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관객을 만나는 플랫폼이 좀 더 다양해지면 좋겠어요. 그럼 선택지가 생기니까요.
박지선
창작의 끝에는 언제나 관객이 있거든요. 그런데 관객까지 가기 위한 과정에서 끊임없이 창작의 과정을 계속 찾아 나가는 것이고, 관객이 어디쯤 함께 해야 하는가에 대한 것은 분명히 고민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요. 창작하는 과정을 밀실에서 하지 않고 오픈해서 한다면 더 많이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거잖아요. 커뮤니케이션하려고 여는데 대상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과정을 ‘왜 공개하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다시 해야 할 것 같아요.
이경미
지금 우리 연극에서 유행처럼 되고 있는 ‘과정’ 창작은 반드시 그 다음을 전제로 한, 적어도 스스로 예감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고 봐요. 개인 창작자의 단계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는 반드시 동시대성과 연결되어야 하고요. 이를 통해 연극에 대한 관객의 감수성도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원도 이 점을 고려해야 하고요. 적은 돈이니 묻지 않겠다는 지원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행정편의주의적인 정책이라고 보여요.
박지선
과정은 내가 다 책임지는 게 아니잖아요. 아티스트가 혹은 이 작품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이 과정을 같이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극장으로서, 축제로서, 지원기관으로서 나는 누구와 협력해서 예술가들이 다음 과정으로 갈 수 있도록 할 것인가 협력이 필요해요. 과정이 예술가들에게 어떤 이익이 있고, 관객에게는 어떤 이익이 있고, 전체 예술계에는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생각해야지만 과정이 하나의 가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김덕희
저는 사실 용어에 대한 정의보다는 합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책에서 사용되거나 개인이 이해할 때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결과물 도출하기 위한 과정인지, 성장을 위한 기회인 건지 선명해진다면 오해나 혼란이 줄어들 것 같아요. 과정이 중요하다는 건 결국 변화하고 있다는 표시라고 보는데, 관객의 존재에 대해서도 좀 더 다른 각도의 연구가 필요할 것 같아요.
정진세
지금까지 과정에 대한 논의를 나눠보았습니다. 이후에는 지원기관과 예술가, 자기만의 과정 프로그램을 갖고 있는 예술가분들과 함께 토론할 예정인데요, 많은 관심 가져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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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보름

강보름 프로젝트 레디메이드 연출가
연출작으로 <레디메이드 인생>, <우리가 고아였을 때>,<모던걸타임즈> 등이 있다.
rkdekdzh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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