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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학교, 꼭 현장과 만나야 하는가?

[일그러진 학생 예술가의 초상] #정리편

서나영

188호

2020.10.08

(*이 글은 연극in 이번 기획에 대한 앞선 글을 참고하여 주제에 대한 나의 단상(斷想)을 서술한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에 대한 어떤 ‘진단’, ‘대안’, ‘방향제시’ 등과는 관련이 없는 글임을 미리 밝혀둔다.)
1. 예술학교 : 다양성(Diversity)
예술학교 시절에 대한 ‘추억팔이’로 글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연극in의 이번 기획 의도를 핑계 삼아 살짝 짚고만 넘어가자. 내가 예술학교에서 누린 것은, 생각해보면 ‘다양성’이 주는 자유였다. 비록 함께 모여 있던 동료들은 인종과 젠더에서는 천편일률적이었지만, 적어도 연령과 출신 지역, 전공, 고교내신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버라이어티’함을 보여주었다.

교수들도 그랬던 것 같다. 일반대학의 교수들과는 달라 보이는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그런 삶이, 그들이 가르치는 어떤 기술과 철학보다 매력적이었다.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내가 살아왔던 좁은 세계가 갑자기 무너지면서 괜찮겠구나, 더 많이 선을 넘어도 괜찮겠구나, 내가 살아온 이력이 아무것도 아니구나. 삶. 다양한 삶이 신기했고 호기심 충천이었다. 몹시 ‘버라이어티’한 인간 군상들이 그래도 ‘라떼는’ 거기 모여 있었나 보다.

20년이 흘렀고 이제 나는 대학에서 연극과 연기를 가르치는 위치에 있다. 지금은 어떤가? 학생들이 예술학교에서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다양한 인간 군상들을 만나 그들의 삶에 매혹되고 호기심을 자극받고 있는가? 비슷한 지역에서 비슷한 연기 학원을 다니다가 온, 고만고만한 내신 성적에 나이도 겨우 한두 살 정도 차이 나는 동료가 전부이지 않은가? 피부, 언어, 젠더, 장애의 유무가 다른, 연령과 이력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는 동료들이 있는가?

교수들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가격만 달랐지 수도권 근처에서 비슷하게 만들어진 아파트에 살면서 외제차 혹은 국산차를 몰고, 대략 확연한 이성애자에 결혼 아니면 이혼, 아이 한둘 키우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닌가? 주식에 관심 있거나 아파트 투자에 (자기들은 절대 투기라 부르지 않는다) 동참할 수밖에 없는, ‘어쩔 수 없이’ 연금에 영혼을 판 가련한 인생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아닌가? (학생들의 눈에는 아직 이런 모습이 안 보일 수도 있겠다) 자본주의가 만든 각본에 순응하며 찍어내듯 똑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 비스무리한 인간들에게서 무슨 ‘예술’이 나올까? 나오기야 나올 것이다. 찍어내듯 아주 비슷하게.

대학은 ‘다양함’을 불편해한다. 태생이 그랬던 것 같다. ‘다양함’을 수용한다는 것은 시장에서 효율이 떨어지니까, 관리와 통제가 용이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차피 근대 교육을 주도한 학교는 결국 자본주의에 순응하는 인간형을 대량생산하는 일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나. 그러니 대학에 이런 다양함을 수용하고 포용하라고 항의해도 끄떡 않을 것이다. 내가 예술학교를 졸업하던 시절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나마 생존해 있던 고교내신, 출신 지역의 다양함도 날아가고 서울경기/강남학원 출신의 수험생들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졸업 후에도 뭐 그리 딱히 찍히지 않고, 딱히 튀지 않고, 적당히 살아남은 자들이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 다시 비슷한 무리들을 뽑고 통제하고 관리한다. 삶이 비슷해도 예술은 역동적일 수도 있겠다고 한 발 양보해도, 결론은 늘 우리의 삶이 달라지지 않는 한, 예술도 거기서 거기다. 그러니 미안하지만 예술은 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이라는 기울어져 가는 배에 승선하여 ‘굳이 예술하는 꼴이 보고 싶다면’, ‘옜다, 예술’하고 던져 줄 수많은 메소드와 기술과 학벌과 줄서기는 지금, 여기, 한국의, 예술학교에 즐비하다.
2. 연극현장 : 쓸모없음(Useless)
대학은 태생이 그랬으니 그렇다 치자. 그럼 현장은 어떠한가? (사실 나는 현장 예술가가 아니다. ‘현장’이 ‘대학로를중심으로한서울근교각종국공립사립공연장과지역국공립극장’을 의미한다면 말이다) 연극 현장도 미투 운동에 크게 흔들리고 코로나 여파로 거의 질식 직전인 듯하다. (그런데 그런 현장 예술을 두고, 앞서 지적했듯 예술학교를 다 말아먹은 장본인인 교수라는 작자가 감히 돌을 던진다면, 이번 생에 인간관계,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미투 운동과 코로나에 감사한다. 많은 사람이 고통 받았고, 받고 있지만, 이 사건들이 쉼 없이 굴러가던 우리 삶 전체를 멈춰 세웠기 때문이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연극이 멈췄다!!! OMG, 연극을 멈추다니!!! 사실 멈춰 세우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나 개인의 힘으로는 버거웠는데, 용기를 낸 많은 후배와 동료들이,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지구가 결국 연극을 멈춰 세웠다.

특히 코로나는 연극in의 이번 기획에서 언급되고 있는 핵심 키워드를 모두 멈춰 세웠다. “예술, 연극, 학교, 교육.” 질식해서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들이 미투 운동으로, 다 죽어가고 있는 지구가 코로나바이러스로 우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만하라고. 그렇다면 잠시 멈춰 있어야 옳다. 조금 늦게 시작해도 늦지 않다. 공연은 계속되어야 하고 극장은 문을 열어야 하고 ‘쇼는 머스트 고 온 해야 한다’는 그 사명감을 좀 내려놓았으면 한다.

연극이 마치 인류 기원과 함께 시작된, 없어서는 아니 되는 어떤 것인 양, 지난한 가난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사명의식으로 나만큼은 이곳을 지킨다는 열정은 잠시만이라도 살포시 덮어두었음 한다. 오히려 모두가 멈추어 서서, 연극함에 대해 깊이 성찰 할 시간이다. 그동안 연극을 왜 했는지, 연극이 왜 필요한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연극은 어디로 가는지, 나의 작품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그 이야기가 전달은 되는지, 관객이 듣고는 있는지, 소통은 되는지 조금 더 냉정하게 살펴보아야 할 순간이다.
죽어야 산다는 말도 있다. 연극이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 대학로에서, 연극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닌 모두의 삶 속에서, 나와 내 이웃들에게 진심으로 다시 살아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는 잘 죽어야 한다.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안 해도 되는 힘’을 축적할 수 있는 시간도 필요하다. 비대면에 발맞추어 어줍은 잔머리로 자꾸 다시 살려내려고만 말고, 죽이지 않고 자꾸 다시 살려내려고 버둥거리지만 말고, 죽음이라는 힘든 시간을 성찰과 비판이라는 살아있는 에너지로 채울 수 있다면 연극은 반드시 다시 살아날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우리의 삶과 더불어 강력하고도 은근하게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의 ‘쓸모없음’의 힘이 모든 ‘쓸모있음’을 비웃을 수 있었으면 한다. 연극이 지금처럼 동정의 시선과 값싼 동전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도 늘 쓸모없는 일을 하고 있는데 이 쓸모없음이 내 삶과 내 이웃에 몹시 필요하게 되는 아이러니를 실천할 수 있는 연극쟁이가 되었으면 좋겠다.
3. 예술학교와 연극현장, 이래도 꼭 만나야 하나?
그러니까 연결 안 되어도 좋겠다. 줄 잘 서서 교수‘님’ 작업에 함께 했다고 우쭐할 필요 없다. 그 줄 못 잡아서 졸업하고 할 일 없다고 절망할 필요 또한 없다. 물론 이번 기획의 앞선 글에서 몇 번 언급 되었듯이 예술학교는 학교대로 대학은 대학대로, 현장은 현장대로 신진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이디어를 내고, 힘을 모으고, 목소리를 높여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연극 예술가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그들이 일하고 있는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는 선후배동료 예술가들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그 전에, 예술학교는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기비판과 성찰에 박차를 가했음 한다. 대학이라는 공룡이 자본주의와 너무나 친한 친구여서 또한 교육이라는 이념은 지구 멸망 즈음에서야 깨져나갈 몸집을 가졌음으로 몹시 힘든 일이겠으나, 살면서 어디 쉬운 일 하나 있었나? 틈새가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모두의 삶의 현장이 곧 연극 현장이 되길 소망한다. 예술 학교 졸업생들이 생각하고 있는 현장, 선배들이 당겨주고 선생들이 득세하고 있는 그 현장에는 미안하지만, 졸업한 예술학교 학생들이 잘 연결되지 않기를 빌어본다. 오히려 지금까지 현장이 아니라고 생각한 곳을 현장으로 만드는 시도가 모든 후배들과 내 삶에 있기를 축원해본다. 그래서 그들만의 현장에 제대로 된 ‘F’하나 날려주길 기도한다.

물론 의지할 수 있는 플랫폼 하나 제시하지도 후원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이런 희망찬 마무리가 가당치 않다고 생각은 되나, 그 현장, 당신들이 생각하는 그 현장에는 더 이상 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변함없다. 그곳이 현장이라고 말하는 사람과도 작업하지 않기를 욕심부려 소망해본다. 지금 당신이 서 있는 거기가 현장이고 나와 그대는 이미 예술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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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나영

서나영
남편과 함께 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평택대학교에서 연극과 연기를 가르치고 있으며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한 소규모 공동체 속에서 잘 살아가는 방법을 연구하는 중이다. na7405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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