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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와 ‘사이’ 이야기

[홈 스윗 홈] 나의 홈메이트를 소개합니다 1

장성희_극작가

189호

2020.10.22

웹진 연극in은 [홈 스윗 홈] 이라는 타이틀로 2020년 하반기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연극인들의 ‘집’을 중심으로 일상 속에 발견되는 소소하고 평범한 이야기들을 공유하여 동료 및 관객들과 마음의 거리를 좁히는 계기가 되고자 합니다. - 연극in 편집부
고양이 얼굴 그리기는 너무 쉽다. 시옷을 먼저 그리고 작은 시옷을 뒤집어 얹으면 된다. 동그라미는 나중에. 중요한 것은 큰 ‘ㅅ’ 위 작은 ‘ㅅ’을 뒤집어 나비처럼 살포시 얹는 것이다. 수염은 석삼(三)자 날리기, 쫑긋한 귀는 다시 2개의 ‘ㅅ’을 벌려서! 마무리로 해바라기 씨앗 만한 눈동자를 박아 넣으면 완성이다.

고양이 삶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것이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 작가 김영경은 『묘생이란 무엇인가?』에서 고양이의 삶은 ‘길과 집 사이에 있다’라고 썼다. 그렇다. 고양이를 키우는(키워본) 사람은 안다. 나의 고양이가 얼마나 ‘사이’에 서서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를. 집사가 제공하는 안락함과 야생, 구속과 자유, 의존과 독립 그 사이에서 늘 서성이고 긴장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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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이가 구복이 다울 때

내가 ‘가슴으로 낳아서 지갑으로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 고양이는 이름이 ‘구복이’다. 남들은 만복이나 십복이가 아닌 구복이므로 “겸손한 이름을 붙였군요!” 알은체를 하지만, 천만에 만만에 콩떡이다. 내 고양이 구복이는 늦가을 서리 앉은 구덩이에 앞다리 뒷다리가 부러진 채 웅크려 있던 것을 담쏙 품에 안아 납치하듯 해 구십오만 원 수술비로 일으켜 세운 아이다. 동물병원 원장님께 애원해 오만 원을 겨우 깎아 구십만 원을 결제하고, 평생 내 은혜를 잊지 말라고 구십만 원짜리 복덩이 운운하며 구복이라 이름 지었던 것이다. 2킬로그램 남짓한 가느댕댕한 냥이를 지금 7킬로그램 넘게 살찌웠으니 나는 랜선 상 유명한 ‘고양이확대범’들 중 한 명인 셈이다.

나는 지금까지 여섯 마리 고양이와 인연을 맺었다. 첫 번째 묘연은 어린 시절 할머니가 밥을 걷어 먹이던 턱시도 고양이 ‘나비’다. 쥐약을 먹은 쥐를 해코지했기 때문인지 갑자기 죽어버려 사촌들과 내가 장례식을 치러준 고양이였다. 한겨울이었는데 추울까 봐 어린 마음에 김장비닐로 꽁꽁 싸서 묻어주었으니 어쩌면 아직도 흙으로 돌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두 번째 고양이는 어미에게 버림받고 태양초고추장 곽에 들어가 숨어 있다가 발견된 스트릿 출신의 ‘만번이’, 사노 요코 작 『백만번이나 산 고양이』 그림책을 너무 좋아했기에 이름을 거기서 빌려왔다, 만번이는 잠시 키우다 강제 출가, 유기시키듯 하여 성북동 어느 큰 절로 들여보냈다. 절간의 공양주 보살님께 사랑 많이 받고 새끼를 여러 배 내려 잘 키워 독립시켰다. 아쉬울 것 없이 살다가 지금은 그림책 주인공처럼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 번째 고양이는 가회동 한옥살이 시절, 어느 시인의 문상 길에 눈에 띄어 구출했다. 화분 너머에서 어른 고양이의 위협으로 하얗게 질려있던 노랑이를 안고 와 서재 방에 위리안치, 가둬두고 마음 열어주기를 전전긍긍 바라마지않았던 아기냥이였다. 이름은 ‘가릉이’, 생각해보니 가릉이는 가성비가 아주 높은 아이였다. 그저 손을 얹기만 해도 골골송을, 쓰담쓰담 한 번에 가릉가릉 잘도 응답해주던 고양이었다. 눈치가 얼마나 빠른지 외출하려고 가방을 들면 혼자 두고 가지 말라고 애옹애옹 강력히 호소했고, 내가 우울감에 누워 일어나지 않으면 내 머리카락을 오랫동안 그루밍 해주면서 괜찮아질 거야, 눈빛으로 위로했다. 가릉이는 찬 비 오는 가을, 외출냥이 시절을 짧게 즐기다가 미스터리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네 번째 고양이는 ‘애깽이’다. 남의 밭의 고구마를 수확해주러 갔다가 용문사 사하촌 동네 꼬마들에게 둘러싸인 채 울고 있던 생후 3주나 되었으려나 아주 어린 삼색고양이였다. 요괴 인상을 하고 있었으나 놀랍게 예뻐져 내가 키운 고양이중 단연코 가장 ‘미묘’라 할 수 있다. 살성이 좋지 않은지 중성화 수술 뒤 상처가 붙지를 않아서 애태우던 아이다. 지금은 무지개다리를 건너 우리 집 거실에서 건너 보이는 앞산에 묻어주었다.
다섯 번째 고양이는 소위 터키시 앙고라, 품종 고양이였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기이한 느낌을 주었던 아이. 일종의 ‘나대기’ 캐릭터였다. 흰 털에 푸른 눈 고양이는 유전적으로 귀가 안 들릴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때는 전혀 알지 못해 잘 보듬어주지를 못했다. 귀가 안 들려서 두려움이 없었고, 제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은 무조건 차고 굴리면서 부쉈던 구름이를 나는 끝내 받아들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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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이가 구복이 다울 때

여섯 번째 고양이가 지금의 내 고양이 ‘구복이’다. 구복이는 여느 고양이와 크게 다를 것 없는 평범한 고등어무늬를 가진 고양이다. 특징이 있다면 멜론 같은 눈빛에 먼치킨처럼 팔다리가 다소 짧고 얼굴이 동그래 귀여운 맛이 있다. 구복이는 두 살에 집으로 들여서 이제 아홉 살이 되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봐야할, 보고 싶은 공연이 취소되어 드물게 ‘저녁 있는 삶’을 살게 된 요즘 나는 스마트 폰으로 구복이의 하루를 기록하고 있다. 나의 고양이 구복이가 턱을 괴고 잠들어 있다가 떠난 자리, 방석이라든가 소파 패드, 이부자리에 남아있는 작은 도트(dot), 침 자국을 찍어보는 것이다. 찰칵! 그리고 꿀렁꿀렁 배를 흔들며 다른 장소로 떠나는 냥통수에 대고 자작곡을 바치는 것이다. “구복이는 깨떡 찰떡/ 렌지에 3분 3분/ 뱃살이 흘러내리네, 등살이 흘러내리네”

나의 고양이 구복이는 오늘도 ‘사이’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스킨십을 좋아하지만 30초 이상의 구속은 단호히 거부한다. 길들여짐과 길들임 거부 사이, 안락한 실내와 그리운 실외 사이, 제 멋대로의 삶과 집사의 네 맘대로 사랑 사이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수많은 사이에 살듯이. 꿈과 생계 사이, 골방과 광장 사이, 문학과 연극 사이, 공부와 현장 사이, 일과 놀이 사이, 예술과 광대놀음 사이, 무대와 촬영장 사이, 직업과 백수 사이, 창작자와 관객 사이, 청년과 중년 사이……. 고양이도 그렇게 어딘가 사이에서 살아간다. ‘부비부비’와 ‘하앍하앍’ 사이, 그리고 낮 동안은 “냐아~” 밤과 꿈속에선 “어흥”, 그 사이의 길 “냐~흥” 하면서 말이다(앞서 소개한 그림책에는 “마음은 묘생과 인생 사이에 있었습니다.” 라고 결론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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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희_극작가

장성희_극작가
한국일보 신춘문예 <판도라의 상자> 당선으로 극작 활동을 시작했다.
연극< 꿈속의 꿈>, <매기의 추억>, <안티안티고네>, 뮤지컬 <백범>,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 아동극 <우산도둑>등을 창작하였고, 희곡집으로는 장성희희곡집(평민사) 꿈속의 꿈(애플리즘), 미스터리 쇼퍼(연극과 인간)가 있다. jsainthee@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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