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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이 움직이고 극장은 문을 연다

[홈 스윗 홈] 집의 재발견

서현제_무대디자이너

192호

2020.12.03

어느덧 새로운 집을 구해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그때(2019년) 나는 양주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연극 수업을 하고 있었고, 동부간선도로를 따라 의정부로 가다 보면 도봉산이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었다. 커다란 바위, 군데군데 있는 푸른 나무. 운전하고 있는 찰나에도 어찌나 아름답던지, ‘저 산을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매일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나는 산을 볼 수 있는 곳으로 집을 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북한산이 보이는 정릉을 돌아다녔다. 허나 내가 겨우 마련한 보증금을 가지고는 산이 보이지 않는 지하를 구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산은 높았고, 조금 낮은 도봉산이 있는 도봉구로 향했다. 억수로 설레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동네 방학동, 가벼운 마음으로 본 첫 집의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이곳이 나의 터전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왔다. 이곳은 방학동의 핫플레이스 도깨비시장 근처 5층 상가주택 건물의 3층, 커다란 창문을 열면 왼쪽에는 북한산이 오른쪽에는 도봉산이 펼쳐진 기분 좋은 곳이었다. 다른 곳을 볼 필요도 없었다. 나는 서둘러 계약하고 ‘산들’이 반겨주는 이곳을 나의 보금자리로 삼을 준비를 했다.
창문을 열면 오른쪽에는 북한산, 왼쪽에는 도봉산이 버티고 있다
창문을 열면 오른쪽에는 도봉산, 왼쪽에는 북한산이 버티고 있다
500의 50. 이곳을 뜻하는 숫자다. 비싼 듯 안 비싼 듯 보이지만, 약 90㎡라는 면적을 생각하면 비싸 보이진 않는다. 혼자 살기에는 넓은 이곳의 반은 목공 작업 공간, 나머지 반은 생활공간으로 나누었다. 집 한가운데 있는 기둥을 기준으로 폴딩 할 수 있는 가벽을 설치하여 목공 작업할 때 발생하는 먼지를 막아주고, 생활공간의 단열에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전체 공간이 다 쓰고 싶을 때는 벽을 접어 자유롭게 꾸밀 수도 있다. 이렇게 공간을 구성할 수 있는 이유는 이곳이 상가이기 때문이다. 상가다 보니 잠을 청하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신발을 신고 생활하고 있다.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다 보니 없는 것이 많았고, 살면서 하나하나 채워가고 있다. 웃픈 이야기지만 작년 초겨울까지는 온수기가 없어서 자고 일어나면 씻기 위해 PT체조 50회를 하고 열기가 식기 전에 찬물로 뛰어들었다. (지금은 온수기를 설치해서 따뜻한 물이 콸콸 잘 나온다.)

불편한 삶을 감수하며 상가에 살고 있는 이유는 명확하다. 작업실과 집을 동시에 구할 여력이 없었고, 만들고 싶은 연극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공연을 만들고 싶었다. 2019년은 배리어프리 공연을 드디어 종종 볼 수 있던 한 해였지만, 애초에 비장애인을 관객으로 생각해고 만든 공연의 한계를 느끼고, 장애인에서 출발한 공연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먼저 지원사업을 신청했지만 똑 떨어졌다. 떨어졌다고, 하고 싶은 것을 안 할 순 없었다. 지원 없이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다양한 감각 경험을 할 수 있는 무대를 생각했기 때문에 실험할 수 있는 작업실이 필요했고, 극장을 빌리는 돈으로 월세를 내면서 내가 거기서 생활하면 될 것 같았다.
가벽 너머 작업공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작업 먼지가 쌓여있다
가벽 너머 작업공간에는 아직 치우지 못한 작업 먼지가 쌓여있다
이렇게 생긴 벤치형 객석 9개를 만들어 침대 프레임으로 쓰고 있다

이렇게 생긴 벤치형 객석 9개를 만들어 침대 프레임으로 쓰고 있다

텅 빈 상가를 살면서 무언가 만들 수 있는 공간을 꾸미는 일에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여름에 시작한 공사(?)가 겨울이 되어서야 마무리되고 겨우 사람이 살만한 곳으로 변했다.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공구와 재료를 사고. 그것들로 가구를 만들고 벽을 세운 과정이었다. 어느 날 창문을 열고 산들을 보았을 때,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 저 산들도 움직인다면 재미있겠다고 상상하며 극단 이름을 [산들이 움직인다]라고 정하고, 이곳을 [산들극장]이라 부르기로 했다. 넓은 식탁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이곳의 탄생을 축하했다. 이제 연극을 만들면 되겠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비극이 찾아왔다.
할 수 있었던 수업이 사라졌고, 만들던 공연이 중단되었다. 올봄, 관객들을 맞이하기 위해 만든 산들극장의 객석은 오직 내 몸을 누일 침대로만 사용되었고, 그 위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생존의 위협마저 느끼며 꿈꿨던 공연을 만들 힘이 없었다. 사람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었던 공간에 사람들이 사라지니 봄이 찾아와도 서늘했다.

하반기 우리는 다시 연극을 할 수 있었다. 손가락만 빨던 처지라 밀려오는 작업들을 거절하지 않고 받았다. 작업공간과 생활공간이 분리되지 않다 보니 쉬는 것이 쉽지 않았다. 잠이 잘 오지 않고, 잠을 자도 항상 피곤했다. 그러다 공연 리서치 중 대전에 계신 무속인(옥황선녀님) 한 분을 만났다. 선녀님께서는 지금 있는 작업실 나무에 귀신이 많아서 그러니 자는 침대 밑에 붙이라고 부적 하나를 주셨다.(관운이 있으니 연극을 그만두는 것을 제안한 건 안~비밀) 알려주신 방법대로 잘 붙이고 잠을 잤다. 물론 때마침 매트리스를 바꾼 탓도 있겠지만, 거짓말처럼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아침에 눈이 뿅 떠졌다! 지친 몸과 마음이 조금씩 좋아지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생활공간에는 공연하고 남은 물건들이 창고처럼 쌓여있다
생활공간에는 공연하고 남은 물건들이 창고처럼 쌓여있다
무언가를 만드는 것을 단지 좋아할 뿐 이것을 업으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 공간도 비록 아직까지 공연을 못 올리고 있지만, 단지 내가 만들고 싶은 연극이 있어서 만든 것뿐이었다. 허나 작업할 공간이 생기니 신기하게 무대 작업이 많아졌다. 자연스럽게 나를 무대디자이너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 집이 나에게 준 선물 같았다. 보일러가 없는 이곳에 겨울이 다시 찾아왔고, 이제는 코끝을 스치는 시원함에 자연스럽게 아침이면 눈을 뜨게 된다. 그사이 또 코로나가 기승이다. 전처럼 가만히 시간을 보낼 순 없다. 이제 먼지가 쌓인 나무에 후 바람을 불고, 조용했던 감각을 깨우고 만들고 싶었던 연극을 준비하려고 한다. 이곳에서 아직 만나지 못한 극장을 선물할 시간이다.

그럼 곧 찾아올 봄, 우리 집에서 연극으로 만나요! 안녕.

[사진 제공: 서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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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현제

서현제 무대디자이너
과정이 아름다운 예술을 꿈꾸며 어린이청소년극을 공부하고 있고,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믿으며 산들도 움직이는 연극을 만들기 위해 놀고 있습니다. <사물함>, <죽고 싶지 않아>, <자전거도둑헬멧을쓴소년>에서 예술교육, <성실로 28길>, <토끼 깡충>, <굴러간다, 살아난다!>의 무대디자인, <이야기 비단길> <얼었다 꽁! 풀려라 호!>의 배우로 참여했습니다.
sansmove1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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