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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에서 이것까지 해봤다

[홈 스윗 홈] 집의 재발견

이은진

192호

2020.12.03

나에게 집은,
가면공방이자 대본 리딩 공간이자 스탭 미팅 장소이자 의상·소품 창고이자... 대체로 ‘작업실 및 연습실’로서의 기능을 수행해주는 곳이다. 지금은 집이 좀 넓어졌지만 좁은 집에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일을 하는 남편은 집이 주로 쉼터였으면 좋겠다고, 다른 건 몰라도 미팅만은 밖에서 하자고 하지만, 집에선 커피도 맘껏 마실 수 있고 시간에도 덜 구애받고 그때그때 필요한 자료도 바로 펼쳐볼 수 있고...얼마나 편한데..! 뒤치다꺼리만 빼면.
#1 작업실
약 20명 이상의 배우 얼굴을 석고로 떠봤다.
공연에 사용될 가면을 만들 때는 그 가면을 쓰게 될 배우의 얼굴을 석고 모형으로 뜨는 작업을 우선한다. 얼굴 전체를 가리는 가면이면 누구의 얼굴이든 상관없지만, 부분 가면(코만 가리는 작은 가면부터 이마 ~ 윗입술을 덮는 가면까지)이라면 그 역할을 할 배우의 얼굴을 기본으로 가면의 모양을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좋기 때문이다. 특히 광대뼈, 눈썹 사이 콧대 너비, 윗입술 라인과 같은 곳이 큰 영향을 미친다. 이리하면 아무리 가면 형태를 과장할지라도 결국 가면이 배우 얼굴에 착 달라붙는다. 효과는 좋지만, 집은 항상 엉망이 된다. 방바닥, 책상, 의자, 집기 등 주변 모두에 석고도 착 달라붙기 때문이다.
약 100개 이상의 코 가면을 만들어봤다.
극단의 첫 작품이 고골의 단편소설 <코>를 각색한 것이었는데, 엔딩에 ‘코’가 무진장 많았으면 했다. 상상으로는 마그리트의 ‘골 콩드’(중절모를 쓴 신사들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그림)처럼 수많은 코가 무대를 넘어 객석까지 둥둥 떠다녔음 했지만, 현실에선 배튼에 작은 장치를 달아 떨어뜨리고, 배우가 던지고, 배드민턴 채로 날리고... 로 대신했다. 여하튼 수많은 코, 특히 딱딱하지 않으면서 적당히 가벼운 코가 필요했기에 종이를 대신할 재료를 찾아야 했고 이것저것 실험해보다 액체 라텍스를 선택했다. 모양은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집안 가득 라텍스 냄새는 견디기 힘들었다. 수많은 코 가면의 냄새가 정말 코를 찔렀다.
가면 말고, 배경막 염색과 의상·소품 제작도 했다.
지금은 거의 하지 않지만, 극단 초반엔 배경막 커튼 염색도 했었다. 높이 4m, 폭 8m 정도의 사이즈로 기억하는데, 동대문에서 광목을 사서, 재단을 하고, 염색을 해서, 말린 후에, 다시 모양 잡아 미싱으로 박고... 지금이라면 꿈도 못 꿀 작업을 했다. 많은 분량의 염색작업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천을 물로 적시는 일부터 염색을 들인 후 헹굼까지 온통 물 작업이다. 당연히 큰 대야를 여러 개 써야 해서 집 화장실에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호수를 연결해서 집 옥상 마당에서 했는데, 당시 집 구조상 큰방 창문을 다 들어내야 했다. 그래야 멀리 돌아가지 않고 들락날락이 편했다. 창문으로 긴긴 천이 토해지며 나가고, 단원들이 삼켜지듯 들어오고를 수십 번 반복했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염색작업을 진두지휘하던 친구의 맹장이 터진 것이다. 다행히 늦지 않게 병원에 가서 수술은 잘 마쳤으나... 그 이후 다시는 염색작업 따위는 집에서 하지 말자고 거듭 되뇌었다. 고생 참 많았고 고맙다, 그때 그 친구들아.
#2 연습실 겸 만남의 공간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한 후, 우리 집은 미팅 장소로서의 기능이 더해졌다. 소수의 인원이면 거실에서 대본 리딩이나 스탭 회의를 하기도 하고, 동선이 단순한 장면이라면 연습실을 못 구했을 때 장면 연습도 한다. 공간이 충분하진 않아도 어쩔 수 없을 땐 진행할 만하다.

얼마 전 거실에서 장면 연습을 하는데(이 집에 온 후, 고양이 두 마리도 식구가 됐다), 사회성 좋은 첫째 메이가 배우들과 함께 커튼콜을 했다. 그 순간을 지켜보던 스탭들은 메이를 향해 환호했다. 배우가 받을 박수를 가로챈 기특한 관종 고냥이 내 새끼.
대본 리딩 중인 배우들과 함께 (좌), 커튼콜 하는 고양이 메이와 배우들 (우)
여기선 가끔 파티도 한다. 거실에 다닥다닥 붙어 않으면 10명 정도는 실컷 놀고 먹고 마실 수 있다. 술이 떡이 된 자에겐 이부자리 던져주고 거기서 자게 한다. 집이 먼 몇몇 연극인들은 우리 집을 한때 숙소처럼 이용하기도 했다. 그럴 땐 집에 든 객이 스승이건 선배이건 후배이건 내가 마치 엄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친절하고 헌신적인 엄마는 아니라서 상대방은 그리 느끼지 않을 수도 있지만.

워낙 집순이인 나는 집이 주는 편안함과 고요함을 좋아한다. 남편과 고양이 둘이 함께하는 우리 집은 대체로 고요한 편이다. 그래서 반대로, 집이 연극인들과 만남의 공간이 될 때의 그 들썩임이 반갑고 좋다. 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후에 고요함을 넘어 적막함을 느낀다는 약간의 후유증이 남긴 해도.
#3 극장을 꿈꾸다
지금의 집이 관객을 맞는 극장이 될 수 있을까? 우리를 포함해 11가구가 사는 이 빌라 전체가 연극의 무대로 활용될 순 없을까? 뉴욕에선 이미 10여 년 전 호텔 전체를 공연 공간으로 탈바꿈 한 이머시브 공연이 이뤄졌다는데. 안될 게 뭐람? 아니지, 안 되겠지. 여긴 빈 호텔이 아니니까. 옆집, 아랫집, 그 아랫집 다 각기 다른 삶의 방식으로 집이라는 공간에 곁들어 살고 있을테니.
방 한쪽에 걸린 가면들
방 한쪽에 걸린 가면들
그래도, 집에서 모든 걸 하기 원하는 엉덩이 무거운 나는, 소규모 공연이 가능한 미래의 (또 다른) 집을 꿈꿔본다.

[사진 제공: 이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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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진

이은진
극단 바바서커스 대표. 국민대학교 공연예술학부 전임교수. 연출로 활동 중이며 가면디자인 및 제작도 겸한다. 대표작으로 <댓글부대>, <연옥>, <코믹환상극 코>, <셰익스피어 여인숙>, <외투, 나의 환하고 기쁜 손님> 외 다수가 있다.
babacircu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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