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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에 대한 몇 가지 질문

연극in 필자들에게 묻다 “그래서 비평은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정리_연극in 편집부

194호

2021.01.21

연극인 웹진은 2021년 첫 기획으로 “비평 플랫폼 시뮬레이션”을 시작합니다. 비평 플랫폼 시뮬레이션은 말 그대로, 비평의 공간을 만들어 그 자리에서 'OO'을 실험해본다는 뜻입니다. ‘OO'이라고 칭해진 자리에는 ‘비평’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할 테지만, 플랫폼에서 수행되는 담론의 방식은 난상토론이 될지, 의견교환이 될지, 질의응답이 될지 구체적인 모습은 아직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무엇이 될지 모르는 과정 중에 있는 ‘비평’을 2월과 3월에 걸쳐 [기획]코너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비평/플랫폼을 시뮬레이션하기에 앞서, 연극in은 비평(批評)에 대하여 웹진의 다양한 필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연극in의 필자들은 대체로 이론을 전공한 비평가 정체성을 가진 이들과 무대 작업을 지속하는 현장의 창작자들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창작자라는 범주에 비평가가 포함된다는 개념은 잠시 미뤄두고) 필자들에게 피해갈수 없는 ‘당사자성’을 부여하고자 다음과 같이 의도적인 질문을 마련하였습니다.
질문 1.
“비평(critic)은 무엇을/누구를 위해 존재해야 하나요? 비평은 항상 창작자 편이어야 할까요?"
질문 2.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더불어 연극in은 비평문화를 위해 필요한 장치, 플랫폼, 아이디어, 기술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비평의 존재론에 대한 질문과 더불어, 그것을 실현시킬 비평의 방법론에 대해서도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총 스물다섯 분의 필자들이 설문에 응해주셨습니다. [기획]코너를 통해, 연극in의 질문에 대해 필자들이 전달한 내용을 2회에 걸쳐 공유합니다. 먼저 비평 작업을 수행하거나, 창작과 비평의 경계에 있는 필자 14인의 응답입니다. (기명과 익명이 섞여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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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보기]
비평은 작품에 기생한다. 비평 없는 창작은 가능해도 반대는 불가능하다. 숙주가 살아야 기생충도 살 수 있기에 비평은 항상 창작자의 편이어야 한다.
편이 되는 방식이 하나일 필요는 없다. 비평가는 때로 창작자를 변호해야 한다. 창작자가 아직은 낯선 것을 시도할 때, 비평은 그 낯섦이 불러올 반발을 막아줄 방패가 되고 흐린 눈에 초점을 맞춰줄 렌즈가 되어야 한다. 아쉽게도 현실은 반대일 때가 많다. 현대 예술은 오늘의 비평가가 무시하거나 탈락시킨 작품이 내일의 걸작으로 재평가받는 사례의 연속이다. 기존의 법칙을 공고히 하기보다 기꺼이 예술가의 불확실한 실험에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현대 비평가들의 몫이다.
항상 창작자의 변호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비평가는 창작자에게 모진 소리도 해야 한다. 그런데 날카로운 말들은 그저 비평가의 기분대로 내뱉은 것이 아니라 창작자에게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언어여야 한다. 예술가가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작품을 되새기고 엄선한 언어로 뜻을 전하는 작업도 모두 비평가가 창작자를 위할 때 가능하다. 비평가는 창작자를 살리기 위해 대항한다.

+ 저는 꽃점이 불편합니다. 전문가 리뷰와 객석 한줄 리뷰의 구분과 구획이 계속 필요할까요? 객석에서 없었던 구분이 왜 꽃점을 매길 때는 생겨야 하는 걸까요? 전문가 리그가 따로 있으려면 자기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관점을 제시해야 할 겁니다. 어쩌면 공연계 전문가보다 객석에 있던 다른 분야 전문가들이 공연을 어떻게 봤는지가 더 중요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전문가가 꽃점을 매겨야 일반 관객이 참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그리고 어떤 연극에 관해서도 쓸 수 있는 코너가 되길 바랍니다. 더불어 꽃으로 점수를 매기는 일도 재고가 필요합니다. 꽃은 한 송이가 다섯 송이 보다 덜 예쁜 것이 아니잖아요. 꽃 숫자를 매기는 게 아니라 꽃 색깔을 정하고 꽃의 종류를 선택하게 하면 안 될까요?
임승태
▶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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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근본적으로 관객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평이 항상 창작자 편일 필요는 없습니다.

+ 비평은 창작자에게 환류되어 다음 창작을 발전시킬 동력이 된다는 측면에서는 창작자를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질적인 면에서 창작자의 창작물은 결국 관객을 만나는 데에서 의의가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평은 곧 관객을 위한 것이 됩니다.
한 시절 전 비평은 작품의 아카이빙 역할을 하거나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보조적으로 사용되는 첨언의 기능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상 매체의 발달로 인해 글을 통한 작품의 아카이빙의 의미는 거의 상실되었고, 전문가의 창을 통해 어떤 작품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개념 자체에도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어떤 작품을 이해하고 감각하는 방식은 한 가지의 올바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발신자와 수용자의 정보 및 메시지 전달 방향이 일방적이지 않고 상호작용하게 된 인터랙티브 씨어터, 관객의 적극적인 참여와 행위를 요구하는 이머시브 씨어터 등의 대두를 지켜보고 있으면, 더 이상 연극은 어둠 속에서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라 함께 만지고, 겪으며, 만들어나가는 놀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 따라서 비평은 기존의 권위를 과감하게 벗어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새로운 비평에 대한 요구는 드높지만 여전히 비평은 학술적으로 공부를 쌓은 사람, 그러니까 국문학이나 각국 어문학, 미학, 공연예술학을 대학원 이상에서 전공한 사람들의 전유물과 같아 보입니다. 비평이 궁극적으로 관객을 위한 것이라면 그 시작지점 또한 관객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비평가’의 존재가 말소되고 관객들 모두가 개별적이면서 집단적인 비평가로서 활동하게 될 때에 비로소 ‘비평의 민주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 이상론일 뿐이라고 생각한다면, SNS에 좀 유명한 연극이나 뮤지컬 제목을 검색해보세요. 이미 비평가들의 관점을 뛰어넘을 정도로 심도 있고 예리한 ‘연뮤덕’ 관객들의 비평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봐주지 않습니다. 이러한 관객들이 대형 뮤지컬이나 상업극 외의 연극, 그러니까 소위 ‘우리가 하는 연극’에도 관심을 돌리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좀 무섭지 않나요? 네, 관객은 가장 무서운 비평가입니다. 비평의 권위가 추락하는 세상, 비평가가 사라지는 세상, 모두가 비평가인 세상을 상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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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비평의 독자들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때로는 창작자가 비평의 독자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평이 언제나 창작자의 편을 들어줄 필요는 없다. 작품의 결과물이 되었든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되었든, 심각한 윤리적인 결함이나 미학적 문제가 노출될 때, 비평가는 창작자와 반대 입장에 서서 작품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비평이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보여줌으로써 완성도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아주 오랜 믿음이지만 그다지 신빙성이 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비평가는 창작자들에게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방법을 알려줄 수 없으며, 다만 작품을 보고 난 뒤의 감상과 의의를 조금 더 체계적으로 전달해 줄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이 작품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도움이 될 수 있는지, 우리 연극사/계에서 이 작품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지. 운이 좋다면 창작자가 궁금했던 관객의 반응을 대신 전달해줄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애초에 ‘객관적인 시각’을 담지하고 있는 비평문이란 건 불가능에 가깝다.
따라서 비평은 창작자보다 오히려 독자와 긴밀하게 소통해야 한다. 비평가는 자신의 비평적 관점에 따라 독자에게 연극에 대한 안내를 제공하고 나아가 작품과 작품을, 결과물과 과정을 가로지를 수 있는 담론을 만들어야 한다. 비평문화는 그렇게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 비평가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지금의 비평계는 지나치게 서울에서 발행되는, 몇몇 전문지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개 글을 쓰는 방식이나 내용, 다루는 화두들이 비슷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하는 비평가들, 지역에서 활동하는 비평가들과 네트워킹하는 기회를 가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금처럼 정형화된 방식의 글만 생산한다면, 언젠가는 진짜 비평이 사라지지 않을까. 아울러 이제 막 평론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진입하기 어려운 구조(혹은 구조의 부재)에도 문제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기존의 매체들은 늘 필자의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과 필자가 필요한 매체, 둘 사이를 이어줄 수 있는 매개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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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평은 까기놀이: '창작자 편'이라는 표현이(아니, 질문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있다. 본인의 답이 마치 창작자에 적대적이라는 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실, 맞다. 본인이 행한 호의적 비평과 적대적 비평을 천칭에 올려놓으면 확실히 후자로 기운다. 그동안 수많은 연출가의 마음(과 공연)을 아프게 했다.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그들은 적대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적대적 비평보다 더 적대적인 것은 중립적(인 척하는) 비평이다. 이는 비평이 아니라 리뷰다. 리뷰는 저널리즘에 가까운 글쓰기다. 공연의 정보와 특징, 인상을 나열하는 관객 가이드다. 신문에 실린 공연기사는 대부분 리뷰다. 하지만 비평은 '결정하다, 비판하다'란 어원을 가진다. 호-불호의 입장을 분명히 결정하고 비판하는 것이 비평의 본질이다. 비평은 자신이 하는 욕과 자신이 먹는 욕 사이의 비례관계를 확정하는 일이다. 정리하면, 공연의 되새김질은 리뷰이고, 공연의 특징과 의미를 발라내는 일은 '연구'이며, 공연의 유기성과 총체성을 판단하고 good or bad를 결정하는 것이 비평이다.

▷ 일단 두 점 접고?: 비평은 평가와 판단이 필수다. 비평가는 평가를 직으로 삼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비평은 인연과 인성의 자장을 벗어나질 못한다. 공적 평가 업무와 사적 품성을 동일시한다. 공적 엄정성과 사적 관계를 마구 섞는다. '우리가 남이가!' 비평은 사적 고백이 아니다. 명절 덕담도 아니고, 주례사도 아니고, 격려사도 아니다. 일례로 꽃점. 쓸데없이 잉크를 소모하는 좌측 두 송이는 꺾어버려야 맞는 게 아닌가. 형편없는 공연도 두 송이가 최저점이다. 공연만 올려도 두 송이 먹고 들어간다. 꽃송이가 인건비인가? 한줄평도 평이 아니라, 인상이 대부분이다. 평의 사전말은 '잘잘못을 살피어 정하다. 됨됨이를 평하다.'이다. 영화 한줄평을 흉내낸 고급스러운 애매모호함은 둘째치고, 'So what?'이라고 따지고 싶다. 영화평은 그래도 된다. 비평가의 평과 무관하게 천만 관객 들면 장땡이다. 평단 반응 따위는 안중에 없다. 하지만 평가의 장이 협소하고 상연기간이 짧은 연극계에선 비평이 차지(해야)하는 몫은 심대하다. 그런 비평이 소진/소각/소비/소모/소거/소실되고 있다.

▷ 연극은 좋겠네: 연극비평지도 마찬가지. 기말감상문인지 착각할 정도이다. 리뷰인지 감상문인지 비평인지 헷갈리는 그 글만 보면 대한민국 연극은 태평성대가 따로 없다. 좋은 공연 천지이고 관객이 철철 넘치겠다. 점점 쪼그라드는 연극계를 조롱할 의사가 없다면, ’비평‘은 유보하고 희곡분석과 공연해석에 치중하는 그 착한 중립적 품성은 뭔가. 도덕적 해이다.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힘든 시기일수록 착한 비평이 약이 된다고? 어디서 찾았는지 블로거 관람평까지 박박 긁어와서 자기위안을 삼지 않냐고? 비평이 죽은 자도 살리고 병든 자도 일으키는 특효약이던 시대는 지났다. 칸트가 고전주의 꼰대로부터 낭만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판단’을 비판한 이후, 비평은 예술의 친위부대이자 후원자이자 변호인으로서 제 역할을 다했다. 20세기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평 없이 ‘생존’할 수 없었다. 칸트가 낭만주의 전속 비평가였듯, 루카치는 리얼리즘 호위무사였고, 형식주의는 모더니즘의 순장조였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상황이 달라졌다. 비평은 더 이상 예술가와 관객의 중개가/중재자/중계자/중매자가 아니다. 연출은 관객에게 직접 호소하고(다큐드라마, 포스트드라마, 이머시브 씨어터, 플래이백 씨어터......(SNS, 티켓포탈, 팬덤). 이제 비평 따위는 필요 없다. 10회 공연 2,000명만 보는 연극에, 사후약방문 하듯 때 지난 비평을 접하는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재공연 기약도 없는 공연에 대해 결함을 집요하게 꼬집고 개선을 권하는 행위는 오지랖이 되어버렸다.

▷ 제 밥그릇 걷어차기 시전: 한때 비평은 지원금 심사계 ‘나와바리’를 장악하면서 자신의 공익적 쓸모를 증명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물 건너갔다. 블랙리스트를 최종 실행한 자는 많은 경우 심사를 맡은 비평가였다. 누구 하나 반성문 쓴 자가 없다. 이제 어딜 가도 비평가가 심사위원회 과반을 넘는 경우는 없다. 시장이 줄자 존경도 줄었다. 옛 어르신들은 이때 이렇게 말했다. 꼴 좋다.

▷ ‘한때 비평은’ 2탄: 한때 비평은 대학로 공연을 모두 섭렵한 ‘전문가’였다. 한해 150편 정도 올라가던 시절이다. 지금은 500편 넘게 올라간다. 최대치가 200편이다. 반도 못 본다. 연말 연극계결산 좌담회는 눈감고 코끼리 만지기 결승전이다. ‘올해의 베스트’ 운운은 코미디가 따로 없다. 지원금 심사장은 서류나 영상만으로 공연을 상상하는 SF판타지 경연장이다. 비평은 ‘겨우’ 존재하고 있다. 누구 편에 선다고 힘이 되지 않는다. 설 만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관객 편이다.

▷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 비평이 창작자 편에 서는 것은 도덕적 해이지만, 그 반대는 오지랖이고 시대착오이다. 이것이 본인의 비뚤어진 심성을 정당화하는 논거이다. 공허한 태평가보다 ’소리 없는 아우성‘이 사망선고를 받은 비평의 존엄이다. 창작자 편에 서지 않는다. 그것이 창작자 편에 서는 길이다.
백승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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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작업으로부터 (동)시대의 언어를 찾고 기록하려는 노력이다. 이는 작업을 산출한 작업자의 아이디어를 재현하거나 복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창작자를 상찬하거나 치장하려는 것 역시 아니다. 창작자의 의도가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작품의 실패를 본다. 아니 많이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쓸 것인가. 곧 우리는 작품을 통해 그 작품을, 그리고 작품들을, 또한 시대를 기록하지만, 기록되지 않고 사라질 것들을 포기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 동시에 기록되어야 할 것은 기록해야 할 것이다. 비평가는 나아가 일부 파편(=작업)의 절대화가 아닌, 어떤 작업(자)의 계보를 만들고, 예술의 궤도를 구성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는 여러 작업이 아닌 결국 하나의 작업이다(가설).

+ 비평 문화는 비평에 대한 비평, 곧 작품 이후의 시간을 전개하는 부분이 중요함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작품의 시간이라는 게 없다. 모든 게 금방 사라지고 그 자리를 다른 작업이 대체하는데, 비평이 예외적인 것을 기록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기대되는 것, 인정받은 것의 후속 작업―막연하게 그럴싸한 것들―이 주로 기록되는데, 이는 대부분 플랫폼과 제도의 힘에 의해서다(비평가는 대개 그 틈에서 살아간다). 내부적 관점에서 본다면, 시각 문화에서의 서문은 작업 이전에 비평을 대신해 작업을 지시하고 홍보하는 주요한 역할을 하는 데 반해, 공연 문화에서의 글은 과정의 체험 정도를 기록하는데, 공연 이후의 체험은 언어화되기 어렵다. 기록 자체가 어렵고, 기록에 대한 필요성 자체가 크지 않다. 뒤풀이는 공연 연장의 한 방편이지만, 내부적이거나 일시적이다. 작업에 대한 관점 이전에 비평에 대한 관점이 필요할 것이다. 작업의 호불호가 아닌 그러한 준거점의 차이로부터 메타 비평이 가능할 것이지만, 대부분의 비평은 표피적으로 작업을 훑는 정도에 그치거나 그 자신을 치장하며, 자체적인 계보를 만들지 못한다. 그리고 대부분 심미적인 차원의 묘사에 그치거나 정치적 올바름의 견지에서 작업을 재단한다. 연극의 경우, 후자의 차원이 되게 많다. 심미적 차원의 기술 역시 연구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결국 비평이 너무 단순해서 또는 복잡한 외양으로 자신을 숨겨 실패하므로, 작업 역시 온전하게 남기 어렵다. 플랫폼은 편집자라는 보이지 않는 비평가의 시선을 분산시킨다. 드러나는 비평가는 대개 영혼 없이 임무를 떠안는데, 비평가 스스로 중차대한 작업을 제시할 수 있다면, 편집점은 분명해질 것이다. 중복되더라도 소수의 작업을 다루자. 에세이가 아니라 비평의 언어로써. 다른 한편 연극 문화, 현재 연극의 공기를 말하자. 에세이를 닮은 비평의 언어로써. 글로 작업을 감추거나 치장하지 않고, 현재가 작업을 통해 드러나도록 하자. 비평가의 지속적인 언어 공간을 만들고, ‘연극의 현재’에 관해 분기마다 화두를 뽑고 첨예한 입장 차로 다루며, 그 문제의식의 편집점으로 플랫폼을 그때마다 구획하라.
김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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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특정 단어나 개념의 용례가 모호할 때는 우선적으로 어원을 추적해보는 편인데요. 비평가, 즉 critic이라는 영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krités”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다고 하는데, 이 단어 자체가 “이유에 의거한 판단이나 분석, 가치판단, 해석 또는 견해(reasoned judgement or analysis, value judgement, interpretation or osbservation)” 등을 제공하는 사람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ritic) 또한, 비평(criticism/Kritik))이라는 행위는 “기준에 의거하여 사물이나 행위 등을 판단하는 것(die Beurteilung eines Gegenstandes oder einer Handlung anhand von Maßstäben)”을 일컬으며, “회의(Skepsis)”나 “의심(Zweifel)”, “비난(Tadel)” 등과도 구분된다고 합니다. (출처: https://de.wikipedia.org/wiki/Kritik)
이는 곧 비평 혹은 비평가라는 개념에 있어 무엇을 혹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판단’하는가의 문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비평에 대한 질문은 창작자와의 관계와는 별개로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판단의 주체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 주체의 판단 기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비평은 무엇을/누구를 위해 존재 하는가’라는 질문은 동시대 비평문화의 존립에 대해 근본으로 되묻는다는 점에서 연극계뿐만 아니라 공연예술계 전반에 걸쳐 유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쩌면 소위 ‘비난어린 비평’에 대한 이 같은 역 비판적 질문이 공연예술계 내부적으로 끊이지 않고 터져 나온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비평의 기준이 보편성, 객관성과는 동떨어진 채로 비평가의 자의적 해석에 머물러있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평행위는 예술에 대한 단죄행위일 수 없다는 의견에는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그럼에도 공연예술계 안에서 그러한 상황을 왕왕 목도하게 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무엇보다 먼저 비평가 스스로가 자기 판단의 조건과 기준을 정합적으로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판단의 여정을 보다 세밀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 부지런히 언어를 정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억은 망각될 수 있지만, 어딘가에 기록된 언어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옥주
▶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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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역사화 과정에 있어 비평은 연극이라는 각개의 사건에 대한 경험적 기록으로 볼 수 있다. 하나의 사건에 대한 기록은 다양한 관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연극의 경우 제작 노트와 영상, 사진 등이 연극의 대표적 기록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이는 창작자들의 의도와 과정, 결과의 기록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창작의 결과물을 경험한 수용자들의 기록, 그것의 일부가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극의 기록에 있어서 우리는 연극이 관객의 존재, 관객과의 즉각적 상호작용과 그에서 비롯되는 현장성, 관객 개인의 경험을 포괄하는 총체적 공연예술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따라서 연극 무대의 결과, 그리고 그 기록에는 관객 개인의 경험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관객의 일부, 연극 경험에 대한 보다 깊은 애정을 가진 비평가에 의해 비평이라는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비평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가를 묻는다면, 나는 비평은 연극의 역사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답하고 싶다. 그리고 그 존재의 방식은 창작자보다는 관객의 입장과 의견을 대변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할진대, 그렇다면 비평은 온전히 관객을 위한 것은 아닐지라도, 보다 관객에게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것이다. 이는 비평가가 연극이라는 사건의 현장에서 객석에 앉아, 관객의 일부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현재 비평은 온라인에 비재한 관객들의 감상 사이에서 비평은 ‘몇 선생님들의 의견’ 정도로 치부되는 듯하다. 비평이 진정한 경험의 공유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극장 문을 나서며 함께 본 관객 동료들과 함께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공유되고, 회자되고, 언급되어야 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한 단발성의 리뷰가 아니라, 마치 SNS의 해쉬태그처럼, 같은 작품에 대한 여러 비평가의 비평, 작품의 각 창작자, 혹은 같은 희곡의 다른 공연 등 유사한 비평을 오가며 살필 수 있는 일종의 아카이브 형태의 비평 플랫폼 역시 고려해볼만하다. 국립극단의 아카이브에서 공연·활동/ 인물·단체/ 작품 등의 분류에서 비평을 찾아볼 수 없고, 학술·보도 카테고리 안에 보도기사, 학술 저널 사이에 ‘공연평’이 섞여있다. 나는 이 아카이브의 분류를 보며 비평의 현재 위치를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난 비평의 아카이빙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공연의 비평을 아카이브 형식으로 남겨 정보의 상호접근성을 높이고 일련의 지속성을 구축하는 것도 유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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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창작과 별개로 또 하나의 창작물이자 생산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비평에서 매번 창작자를 의식하기 어렵고, 작품의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창작 의도를 추적하는 것과는 다른 결의 작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창작자에 집중하는 글도 개개인을 인식하기보다는 창작자의 과거, 현재, 미래의 ‘활동’에 초점을 두고 보게 되어 ‘연극의 지속성’을 생각하게 됩니다. 따라서 비평은 창작자 편에 서서 쓰기보다는 ‘(이) 연극이 지금 어떤 의미가 있고, 왜 계속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을 쓰는 것으로서 작품이나 연극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 작품과 비평에 시간적인 거리가 있어 접근성이 떨어져 비평 문화가 더 확산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관객들은 공연을 보고 바로 후기를 찾아보는 경우가 많은데 비평이 시간상 뒤에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공연장에서 비평이 실린 프로그램북을 살 수 있지만, 구매를 전제로 하기에 선택적이라 더 보편적으로 비평이 전시되고 펼쳐지면 좋겠습니다. 현장성을 살려 관객이 즉각적으로 볼 수 있는 실시간 비평은 어떨까요. 예를 들어, 관객과의 대화가 질의 응답으로 구성되는 경우 생생한 대화가 오가기는 하지만 심도 있는 생각이나 말이 나오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따라서 약식으로라도 비평 낭독회를 한다든지 원탁회의처럼 평등한 관계에서 원탁비평 등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좌담회와 달리 미리 쓴 비평을 읽고 이야기하되 긴 글이 아닌 짧은 글로 조각 비평을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조각 비평들을 플랫폼에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각보처럼 펼쳐 놓아도 좋겠지요. (포스트잇들을 붙여 놓는 것 같은 이미지도 떠오릅니다.) 또는 관객에게 쪽지나 카드를 주고 관객 참여형 공연을 하는 것처럼, 공연이 끝난 뒤 관객에게 비평 글이 담긴 쪽지를 주는 게릴라 비평도 좋을 듯합니다. 또한 비평과 관련한 독립 출판물들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작품과 달리 비평은 ‘소장’의 의미가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따라서 공연 때 비평 글도 굿즈로 배부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권혜린
▶메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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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창작자 ‘편’이냐고 묻는다면 답은 아니다, 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비평은 근본적으로 누군가를 편들어주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평이 작품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작품을 둘러싼 존재들을 위한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평은 창작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독점적으로 창작자만을 위해, 창작자의 편에 존재하는 것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학교에 다닐 때 저는 비평을 시, 소설, 희곡과 함께 하나의 장르로 배웠습니다. 명확한 장르의 구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비평이 무언가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점만은 여전히 확실하다고 믿습니다. 창작자들의 의도와 다른 비평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틀리지 않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는 창작자들이 단지 자신들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비평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은 작품으로는 다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더해줄 수도 있고, 관객들에게 유효한 해석의 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무엇보다 비평은 작품을 동시대의 담론 장 안에 작품을 기입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작품이 이 시대의 맥락 안에서 어떠한 위치를 갖는지 그 값은 무엇인지를 보다 넓은 맥락 안에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은 작품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입니다. 제가 비평이 작품을 위한 것이라고 믿는 이유는 이 때문입니다.

+ 비평에 대한 비평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전에 기회가 있어 퀴어 연극에 대한 비평들을 모아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퀴어 연극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 평론이 많지 않아 답답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비평은 비평받을 일이 많지 않다보니, 만약 어떤 작품에 비평이 단 하나만 존재한다면 그 비평이 마치 정설인 것처럼 오해받기 쉽습니다. 그 비평이 작품의 가치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 않은 경우, 위험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극은 공연이 끝나고 나면 사라져버리는 것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경우 메타비평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다 보니 근본적으로 연극 비평의 수적인 증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도 드네요.
장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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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비평가의 것이다. 비평은, 비평가 ‘개인’의 관점, 취향, 세계관 그리고 경험의 산물이다. 문학이 그런 것처럼 비평은 혼자쓰기이다. 물론 문학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저마다의 ‘개인’이 그런 것처럼, 비평 역시 세계의 여러 사실들, 관점들에서 자유롭지않다. 게다가 비평은 비평대상으로 글쓰기가 한정된다. 누군가는 좀더 과감하게 종속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비평이 비평의 대상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비평이 비평대상의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니다. 비평은 비평대상에서 출발하지만 혼자쓰기는 오로지 비평가 개인의 몫이고 비평가는 혼자쓰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곳은 출발과 아무 상관이 없다. 비평은 오롯이 비평가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평은 종종 객관성이라든가 불편부당함의 요구를 받는다. 아니 대부분 비평은 아무 요구도 받지 않는다. 그 와중에 간혹 어쩌다 비평이 관심을 모은다면, 그 주제는 대부분 비평이 객관성과 불편부당함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과 몇 년전 문학장을 뒤흔들었던 표절논란은 표절에 대한 문학적 검토가 아니라 표절을 용인하는 문학권력, 비평을 장착한 출판권력에 대한 논란으로 전개되었다. (앗 너무 복잡한 사건을 끌어들었다. 빠져나가자.) 연극비평도 마찬가지다. 연극비평이 혹시라도 사람들의 관심에 떠오를 때란, 저기 객관적이지 않은 비평이 있다고 외칠 때이다. 그러나 사실 그런 외침도 최근에는 거의 없다. 왜? 아무도 읽지 않으니까.
질문에 답하기 위해 너무 길을 멀리 돌아왔다. “비평은 무엇을 /누구를 위해 존재하나요? 비평은 항상 창작자 편이어야 할까요?” 이미 나는 답을 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당연히 ‘창작자 편’ 이런 것 없다. 비평은 비평가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질문이 우리의 어떤 현실을 환기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연극계에 ‘연극비평가’라는 직함을 달고 쓰여지는 글들의 대부분은 작품을 놓고 비평가와 독자(그 독자가 창작자이든 관객이든)의 대화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글들은 창작지원심사의 근거자료로 가장 유용하게 쓰이며 그런 지원심사의 심사위원 자격을 득하는 데에 소용된다. 그런데 그런 글들은 비평가가 작품을 매개로 자신의 관점, 취향, 세계관 그리고 경험을 투영하여 자신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비평’이 아니다.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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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창작작품'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렇기에 '비평은 항상 창작자 편이어야 할까요?'라는 질문 자체가 이상하고 낯설게 다가온다. 비평은 창작작품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둘러싼-작품을 만든 이들이나 그것을 경험한 향유자, 그 작품에 관심있는 이들 등등- 모든 것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고 그 누군의 편도 될 수 없다. 비평 또한 일종의 창작작품이기에 비평가의 손을 떠나면 그것이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지 또한 역시 고정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 지역의 창작자들, 특히 젊은 창작자들일수록 자신들의 작품에 대한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있다. 비평가 역시 서울에만 집중되어 있는 게 아쉽다. 지역 곳곳에 비평문화가 활발하게 일어나면 좋겠다. 또 관객들의 비평(일종의 작품을 중심으로 한 소통과 대화의 장)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트위터나 익명게시판에서 소비되는 글쓰기를 하는 것보단 건강한 담론을 나누었으면 싶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면 비평문화 역시 자연스레 발전하지 않을까.
김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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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평은 (작품과 세계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을 위해 존재해야한다.

1-1. 비평은 창작자의 의도를 넘어서거나 혹은 모자라게 해석하는 작업이다. 거칠게 말해서 비평은 제 3자의 시선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고,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창작자의 ‘원래’ 의도와는 다른 위치에 놓여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

1-2. 창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은 ‘원래’ 작품으로부터 일말의 자유로움을 갖는다. 창작자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비평은 새로운 감각과 의미를 포착하고 확장해나가며 작품에 대한 해석의 폭을 자유롭게 넓혀나간다. 이러한 운동성 속에서 다양한 사유와 고민의 가능성이 생기고, 시대와 사회에 대한 다채로운 담론들이 공유되며, 창작자 개인의 산물이었던 작품은 향유자(들) 공동의 공유재가 된다.

1-3. 어느 정도 자유로우면서도 작품 내적으로 일관된 해석을 이어나가는 과정은 지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유희를 안겨다 준다. 이러한 즐거움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찾는 힘을 만든다. 예술에 대한 향유를 지속시키는 힘이자 예술적 미감(취향)을 기르는 근력을 만드는 원동력이다.

1-4. 비평은 창작자의 훌륭함에 대해서 존경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창작자의 편이 되어서는 안 된다. 창작자와 작품은 별개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 2. 비평문화를 위해 필요한 장치 : 애정, 존중, 익명의 접견장소

2-1. 애정 : ‘나’는 왜 그토록 이 작품에 매료되었는지, 이 이야기가 어떤 의미에서 ‘나’에게 가치 있게 다가왔는지, 이 관심사가 ‘나’에게만 한정되지 않고 바깥으로 확정되어 어떻게 ‘우리’와 만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것.

2-2. 존중 : 창작자 또는 작품이 이 이야기를 왜 지금 여기 이 시점에서 (다시) 하는지에 대해서 심사숙고 해보는 태도. 작품을 볼 때 별로인 것을 보는게 아니라 좋은 것들을 발견하고자 하는 태도. 설령 작품에 대한 기대와 달랐다고 하더라도, 작품의 맥락을 잃지 않으며 왜 이렇게 이야기가 풀려갔는지 되짚어보는 신중함.

2-3. 익명의 접견장소 : 여타의 온라인 영화/드라마리뷰 플랫폼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과 사유와 해석이 자유롭게 떠도는 플랫폼의 형태여야 함. 개인에게는 취향의 기록 수첩이 되고, 타인에겐 서로 다른 시각의 공유장이 되는 플랫폼. ‘왓챠’의 연극 버전이 없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연극이 끝나고 난 뒤에도 작품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풍성하게 떠돌 수 있다면, 그렇게 관객의 시선이 무한증식하게 된다면, 비평은 우리 모두의 문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단, 자유롭고 편하게 입을 여는 분위기를 위하여 익명으로 운영되어야함. (필수)가볍고 편하게 만날 수 있는 플랫폼이어야 함.
차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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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은 누구든 무엇이든 편드는 글이 아닙니다. 굳이 어느 편에 있어왔나 생각해보자면, 나는 내가 글로 지어 남기고자 한 경험과 그 경험에서 비롯된 사유만을 옹호합니다. 그것이 부디 정교하고 아름다운 글로 표현되기를 바라고 또 바라면서 글을 고치고 또 고칩니다.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 한 권의 책을 읽어야 할 때도 있죠. 그 내용과 과정은 아주 주관적이고, 때로는 작품과 전혀 관계없는 곳으로 뻗어 나가기도 하며, 창작자 개인과는 사실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비평은 그저 반응입니다. 공들여 잘 다듬어진 반응이요. 딱 그때만 의미 있는 글이 될 수도 있죠. 돌아볼 무언가가 있다는 건 언제나 의미 있고요. 관계는 비평이 누군가에게 전달되었을 때 발생합니다. 나는 비평이 창작자에만 가 닿을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창작자는 가장 예민하고 감정적이기 쉬운 독자일 뿐입니다. 비평을 내 편으로 삼을지, 적으로 삼을지는 독자가 판단할 문제입니다. 부디 비평의 내용과 가치를 창작자와 작품 안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극비평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가 될 수는 없을까요. 그게 연극계에도 더 득이 될텐데...

+ 누군가를 좋게든 나쁘게든 직설적으로 평가하는 비평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연극이 창작되는 과정을 생각한다면 더더욱이요.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의 글은 재미가 없습니다. 특히 창작자가 무대에서 하지 않은 것을 했어야 한다고 말하는 글을 읽을 때면, 그 글이 쓰인 시간이 아깝습니다. 피상적 해석만 늘어놓고 정작 자기 생각이 없는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발 그런 분들한테 청탁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읽지 않을 수 있게요. 반면, 글쓰기든 뭐든 기록해서 다시 볼 욕구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작품들은 잊혀질 것입니다. 어쩔 수 없죠. 즐겁지 않아도 사명감과 책임감으로 때로는 생계수단으로 비평을 써내야 했던 많은 비평가들의 수고가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노동이 된 비평은 재미도 없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노동이 된 창작을 봐줄 수가 없는 것처럼요) 아마 그런 비평들은 무조건 창작자의 편을 들 수도 있겠네요. 그게 제일 쓰기 쉬우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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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이 누구를 혹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할지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우선 이 세상에서 비평이 또는 연극이 필요한 것은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겠지요. 연극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들은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인생에, 일상에 연극이 없어도 된다는 냉소의 의미라기보다는, 노동으로서 연극을 하고 밥을 먹는 사람들에겐 말 그대로 ‘살아가는 데’ 연극이 없어선 안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열심히 연극을 해서, 연극 자체로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연극을 과정으로든 결과로든 가진 채 감각을 벼리기도 관계를 확장하기도 세상의 틈과 요철에 대해 말하기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다른 이들에게도 꽤 의미 있는 일일 거라고 (너무 순진한 말일까요, 그렇지만 전 퍽 진심으로) 생각합니다. 비평의 역할은 그 연극적 순간과 의미를 언어로 짚어내고 기록하는 것, 나아가 연극이 아니라 비평만의 빛나는 면면을 건져내는 것이겠지요. 저는 비평이 세상에 필수불가결한 존재까진 아니더라도, 비평이 세상에 있기에 연극과 연극이 유비하는 것들이 그 찰나를, 그 종말을 잠시나마 연장하고 미룰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비평은 닻은 아니어도 돛은 되기도 한다고, 정박할 곳에 갈퀴를 내리진 않아도 바람의 방향을 만들기는 한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이 망망대해에서 공회전을 하고 있다고 느낄 때 ‘아닙니다, 여기 숨결이 있고 입장이 있습니다’ 말해주는 역할을 한다고요.
비평이 창작자 편일 필요는 없고 창작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만 창작자의 읽을 몫이긴 하다고 생각합니다. 비평이 대단하므로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비평을 읽지 않으면 다수의 창작자는 자신의 작업에 관한 읽을거리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평이 창작자의 편일 필요가 전혀 없음에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잦은 까닭은 지면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지면이 많으면 지면의 종류도 많을 거고 할 수 있는 얘기도 많을 텐데 그렇지가 않으니까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 입장이지만, 저는 때로 ‘이 글이 이 연극에게 주어지는 유일한 비평이 되면 어떡하지’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 마음이 글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습니다. 그리고 그 한정된 지면에 무언가를 써야할 때면, 기왕이면 마음을 준 작품을 선택하게 됩니다. 쓸 자리나 기회가 충분치 않은데 그 자리와 기회를 시금털털하거나 떫은 작품에 사용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 그래서 저는 일단, 얘기할 곳이 많았으면 합니다. 너무 뻔한 소리여서 왠지 부끄럽지만, 그 구태의연함이 이 글의 콘셉트라고 해두겠습니다. 연극에 대해 얘기할 곳이 많고, 얘기하면 받아쳐줄 상대도 있고, 얘기했을 때 누군가 돈도 주어서, 얘기하는 것이—그러니까 비평하는 것이 더 수월하고 흔한 일이 되었으면 합니다. 재미없으면 없다고 쓰고, 시원찮으면 시원찮다고 쓰고, 아름다웠으면 아름다웠다고 써도 될 만큼 각각의 연극이 충분한 비평을 받고 각각의 비평이 충분한 지면에 여유롭게 안착했으면 합니다.
김송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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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작업을 위주로 활동하는 연극in 필자의 응답은 2월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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