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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후 ’ 의 이후를 상상하기

관객 - 창작자 좌담회 :ㅤ‘ 이후 ’ 의 연극이 요청하거나 누락한 것들

김연재

207호

2021.10.14

미투 이후 연극은 예술의 윤리적 무게추를 담당하는 듯 보였다. 기존의 기득권 비퀴어 비장애 남성이 독점하고 있던 연극 창작 주체의 외연을 넓히거나 혹은 탈환하고, 연극을 만드는 과정상의 안전과 노동 환경에 주목했다. 사회와 예술을 매개하는 연극의 정치적 실천들은 연극의 어떤 형식을 발명했으며 재발명할 것인가. 또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재구성될 것인가. 최근의 연극들이 사회-현장-관객과 어떤 영향을 주고받고 있는지 전반적으로 살피고자 연속 좌담을 진행한다. 첫 번째 좌담에서는 관객-창작자들의 다양한 관극 경험을 토대로 배리어프리, 페미니즘 서사, 극장 안전성, 담론을 생산하고 연극의 개념들을 토론하는 방식에 관해 이야기한다.
일시 : 2021년 10월 12일 9시 반–12시 반
장소 : 서울연극센터 아카데미룸
사회 : 김연재(극작가)
참여 : 김민조(평론가), 김은한(배우), 라시내(연출가), 박하늘(배우), 정혜린(연출가), 진해정(연출가)
기록 : 예준미(본지 에디터)
참관 : 김슬기(본지 편집장)

공연 선택의 기준들

김연재
최근 어떤 공연들에 관심을 두고 있나. 공연을 선택하는 기준은 어떻게 변화해왔나. 극장 접근성, 공연 창작진을 향한 신뢰, 코로나 이후의 예매 방식, 공연의 온라인화 등의 변화가 관극 경험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나.
박하늘
요즘에는 다큐연극이나 소수 관객이 참여하는 연극들을 주로 관람한다. 관심 있는 창작자들 SNS에서 공연 정보를 얻는다. 공연 정보를 얻는 창구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부지런을 떨어야만 공연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관극의 키워드라고 할 만한 것은 동시대성, 소수자, 접근성이다. 공연을 예매할 때 해당 공연이 접근성에 관한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먼저 고려한다. 창작자로 프로덕션에 참여할 때도 마찬가지다. 배리어프리를 실행하는 공연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김민조
올해 관극 리스트를 살펴보니까 확실히 창작진에 대한 신뢰를 무시할 수 없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작업하고 있다고 믿는 팀의 공연들을 챙겨본다. 공연 정보는 SNS나 동료 창작자를 통해 얻고는 하는데, 코로나 이후에 인맥에 의해 공연을 선택하는 경향이 심화된 것 같다.
김은한
창작자의 발전을 쫓고 싶다는 마음으로 관심 있는 창작자들의 작업을 따라서 보고 있다. 동시에 새로운 창작진을 찾는 일을 지속하고 있다. 내 기준으로 폭력적이거나 과격하거나 나와 안 맞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팀들의 작품도 선택하려고 한다. 나와 다른 곳에서 어떤 계승과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김민조
코로나 이후에 공연 선택의 폭이 좁아지다 보니 창작자들도 ‘이 사람과 작업을 하면 안전하다’라고 검증된 사람들과 작업하기를 선호하는 것 같다. 그래서 미투 이후에 연극을 시작하는 창작자들을, 진행 단계에 있는 창작자들을 만나기 더욱 어려워졌다. 또 서울과 지역의 경계도 심하다고 느낀다. 가령 연극을 하기 위해 상경하신 분들은 ‘도대체 공연 정보를 어디서 얻느냐’라고 묻기도 한다. 미투 이후에 연극계가 선호하고 있는 바에 공감을 하고, 나 또한 그렇게 하고 있지만 이제는 문제점과 사각지대가 보이는 것 같아서 반성을 하고 있다.
진해정
시놉시스를 중심으로 작품을 고르는 편이다. 다만 시놉시스를 대하는 태도나 관점이 달라진 것 같다. 지금은 확실히 퀴어, 페미니즘적 관점이 반영된 시놉시스를 우선적으로 선택한다. 동료들의 추천, 배리어프리 실행 여부를 선택의 기준으로 삼을 때도 있다. 코로나 이후 예매가 어려지면서 NT live at home과 같은 외국 스트리밍 서비스를 자주 이용하고 있다.
정혜린
코로나 이후 여유가 줄어들다 보니 공연을 선택하는 데 있어 보수적인 태도가 생겼다. 이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창작자들의 공연을 보게 되는 것이다. 주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공연 정보를 얻는다. 공연 정보를 빠르게 얻고 예매하기 위해서는 SNS를 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갑갑함을 느낀다.
라시내
작품과 작품 창작 과정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편이다. 공연을 보러 갈 때는 좋은 작품에 대한 기대 하나만 가져간다. 공연을 선택하는 기준이 변했다는 생각은 못 했는데, 최근 공연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것을 경험했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극단의 공연을 보러 갔는데 여성 재현과 관련하여 전에는 거슬리지 않았던 부분이 거슬렸다. 시대가 변하고 나도 변했구나 생각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서 공연을 선택하는 기준이 바뀌어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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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배리어프리

김연재
매뉴얼을 넘어 고유한 형식을 만들어낸 배리어프리 연극들을 관극한 경험이 궁금하다. 향유할 수 있는 공연의 다양성이라든가, 교란된 감각의 위계라든가, 재고하게 된 장애 감수성이라든가. 이러한 관극 경험들이 예술 활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박하늘
배리어프리 음성해설 작업을 하고 있다. 음성해설이 해설 혹은 보조의 자리에 머물지 않도록 음성해설과 배우의 수행을 어떻게 같이 갈 수 있게 할까 고민한다. <7분>이라는 공연의 수어 통역 회차에서는 배우 열한 명, 수어 통역사 열한 명이 같이 공연했다. 수어통역사들이 무대 전면에 서고 배우들은 최소한의 동선만 이용하는 형태의 공연을 만들었다. 배리어프리 작업을 하면서 지금까지 배제해온 세계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배우 활동 중에 재활 치료를 겸했던 나로서는, 장애라고 칭하든 그렇지 않든 다양한 몸들을 위한 가능성의 세계가 극장에 열리고 있다는 안전함을 느꼈다. 내가 생각하는 동료, 관객의 범위가 확장되었다. 단순히 ‘장애인 관객이 올 거야’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 올 거야’로 변화한 것이다. 같은 장애의 범주 안에서도 사람마다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알고 고려하게 되었다.
김은한
처음에 배리어프리 연극을 경험할 때는 관극 경험이 보완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비장애인 관객뿐 아니라 장애인 관객도 공연을 볼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고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배리어프리 연극이 내가 가장 편안하게 관극을 할 수 있는 형태라고 생각한다. 이전까지의 관극 환경이 누구도 편하게 공연을 볼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 같다.
정혜린
예전에는 공연 안내에 문자통역, 수어통역이라는 말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지금은 공연 안내 방식과 문구 자체가 변했다. 어떤 종류의 디폴트를 만들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인식하는 관객, 공연의 모습이 달라지기도 했다. 배리어프리를 지원하는 제도가 있으면 좋겠다. 배리어프리를 포기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바란다.
김연재
배리어프리 연극을 볼 때 ‘지금까지 관극을 할 때 어떤 한 감각을 닫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까지 극장 안에서 시각적인 게 청각적인 것보다 우선시되었고 한 감각이 다른 감각을 보조해왔음을 알게 되었다. 감각의 위계가 와해되는 경험을 했다.
김민조
우리가 기존에 생각한 관극 행위는 ‘무대 위에 매끄럽게 잘 만들어진 단일한 세계를 본다’에 가까웠다. 관객에게도 S석, A석, 시야제한석 등 그 매끄러운 세계를 더 잘 관람할 수 있는 위치가 중요했다. 배리어프리 공연에서는 음성해설, 수어통역, 문자통역 같이 여러 층위들이 경계를 드러내며 동시 진행되는데 이 모습 자체가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얼마 전에 웹진 『이음』의 기고글 「릴렉스드 퍼포먼스 제작의 몇 가지 관점 - 발달장애 관객만 편안한 극장? 모두에게 특별한 극장!」에서 릴렉스드 퍼포먼스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발달장애 관객이 소리를 지르거나 의자에 올라가는 행위가 불쾌하거나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는 관극 환경은 사실 기존의 연극, 극장 소통 모델에서는 거의 용납되기 어려웠던 것이다. 배리어프리가 관객이나 극장의 공동체에 대해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코로나 이후 온라인 공연의 편안한 관극 환경들을 떠올려보면 지금의 연극들이 관람 모드 자체에 대한 재고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라시내
이제껏 베리어프리를 포함과 배제의 문제로만 생각해 왔는데, 어떻게 관객을 몸의 존재로서 만날 것인가의 문제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비장애인 관객에게는 음성해설이 감각을 교란하는 감각적인 물질의 재료로도 주어질 수 있지 않은가. 여기에서 발생하는 잠재적인 효과를 고민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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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늘

페미니즘 서사

김연재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페미니즘 서사, 퀴어 서사는 장르를 넘어 계속해서 움직이며 변화하고 있다. 무엇을 페미니즘 서사, 퀴어 서사라고 인식하고 있는지 연극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해 달라. 그 연극들은 타 장르와 어떻게 다르고 또 함께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나.
박하늘
연대와 공존의 감수성이 여성, 퀴어뿐 아니라 다른 소수자의 범주로 뻗어나간 작품들이 떠오른다. 페미니즘 연극제 포럼에서 기후위기를 다루고, 연극 <여기, 한때, 가가>에서 장애인 배우와 장애인 관객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진해정
퀴어, 여성 인물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작품을 퀴어·페미니즘 서사로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소수자성을 기반으로 한 인물들이 분명한 욕망을 지니고 있는지, 그 욕망이 서사 안에서 얼마나 무게감 있게 그려지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최근에 본 작품들 중에는 <달콤한 노래>를 페미니즘 서사라고 받아들였다. 두 여성 인물이 등장하고, 그들 내부의 욕망이 깊이 있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연극계 미투 이후, 기울어진 운동장과 기형적인 권력구조를 바로잡으려는 창작자들의 움직임이 타 장르에 비해 더 활발했던 것 같다. 너무나 유의미하고 마땅히 지속되어야 하는 과정이지만, 그런 시간을 통과하며 작품 내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부분들이 생긴 듯도 하다.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해하고자 나아가는 여정이 드라마라는 장르의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물들의 이해 불가한, 때로는 불편한 지점과 성질들이 드라마에는 꼭 필요하다고 본다. 그런데 어떨 때는 그런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듯한 분위기를 느낀다. 불투명하고 부정확한, 뒤틀린 욕망을 더 많이 보고 싶다. 관객으로서도 창작자로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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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여성서사라는 말은 정치적인 무브먼트에서 비롯된 말로 알고 있다. 일단 여성 인물이 나와야 하고, 여성 배우가 중요한 역할을 맡고, 벡델 테스트를 통과해야 하고. 이런 요소들을 갖춘 연극이 너무 적기 때문에 만들어진다면 무조건 보고 소비하겠다는 관객들의 움직임에서 비롯된 말이다.
페미니즘 서사라는 말은 여성서사, 여성 배우가 등장하는 연극에 대한 수요가 늘고 좋은 결과물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관객들의 움직임 이후에 따라 붙은 말이다. 예전에 어떤 밈 중에 여성 서사의 발전 단계를 마치 단선적인 발전 모델처럼 그려놓은 이미지가 있었다. 이것은 정치적 목적성을 전제로 연극을 생각했을 때 빠지게 되는 허점을 암시한다. 연극이 정치적인 목적을 얼마큼 효율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달성하는가의 문제에 붙들린다는 허점. 그러나 소수자를 특수하게 취급하지 않고 보편적 인간으로 보고 싶다면 보편적 인간에게 허락된 만큼의 자유와 운신의 폭이 보장되어야 한다. 이러한 예로 알라리얄라의 <즐거운 너의 집>이 인상적이었다. 보수적인 성역할이 공고하게 존재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젊은 여성 주인공과 1세대 페미니스트 엄마라는 역전된 구도가 등장한다. 주인공이 비호감으로 느껴질 법한 언행을 구사함에도 끝까지 그 인물을 주목하며 관찰하게 되는데, 이것은 희곡이 ‘서사적으로’ 잘 쓰였기 때문만은 아니고 그 역할을 다루는 경지은 배우의 연기 방식 때문이었다. 인물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 인물이 무대 위에 표현되는 자신의 삶과 유머러스한 거리를 두고 있는 지점 등을 함께 드러내는 연기 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배우가 인물에게 빨려드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몸을 통해서 인물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식으로, 일종의 안전거리가 확보된 상태에서 공연을 보니까 정치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여성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게 관찰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라시내
페미니즘 서사보다는 페미니즘 비평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여성서사에 대한 요구는 여성이 과소 재현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이 문제의식은 정당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과연 ‘재현’이 동시대 창작의 지향점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여성 재현에 대한 요구와 재현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가 충돌하거나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까지 온 것 같다. 재현된 내용뿐만 아니라 재현의 형식 측면에서도 이야깃거리가 많은 페미니즘 연극을 보고 싶다. 연극에 텍스트의 측면과 퍼포먼스의 측면이 있다면, 퍼포먼스를 만드는 사람들은 텍스트의 일차 독자이자 해석자이기 때문에 이 일차적 독해에서 발생하는 페미니즘적 충돌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텍스트와 퍼포먼스가 너무 붙어있는 작품은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효과 또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혜린
페미니즘 리부트 직후 페미니즘 공연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정치적 목적성이 전면화된 공연을 보러 갔는데 공연을 아쉽게 감상한 경험이 있다. 그런데 ‘아쉽다, 재미없다, 연극의 내용 혹은 서사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후기를 남길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을 하면 내가 페미니즘의 백래시에 기여한다는 죄책감이 든다. 페미니즘 서사, 퀴어 서사, 라고 명명하는 데서 시작했지만 도착점에서는 목적성이 보이지 않게 된 연극들을 보고 싶다. 연극은 총체적인 매체인데, 서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영역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연극들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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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린
김연재
최근에 <괴담 모란등롱>을 봤는데 공연 서두에 요즘 사람들이 보고 싶지 않아 하는 자극적인 것들을 다 넣어서 만들었다, 하고 소개를 한 것이 통쾌한 경험으로 남아있다. 소수자들의 연대가 와장창창 실패하는 페미니즘 연극도 보고 싶다. 페미니즘 그리고 퀴어가 서사라는 말을 수식하게 되면서 다양한 연극적 요소들의 페미니즘적 해석 가능성이 좁아진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서사뿐 아니라 연극의 다양한 측면에서 지금의 연극들을 정교하게 바라본다면 더 많은 연극들이 페미니즘 연극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민조
배우와 역할이 완전히 붙어있는 연기가 좋은 연기의 표본처럼 이야기되는 것이 늘 부담스럽고 이데올로기적이라고 생각해왔다. 미투 이후 연극들에서는 역할과 배우가 완전히 일치할 수 없음을 드러내고 그 거리를 편하게 인정하는 연기를 발견한다. 그 거리를 통해 배우가 역할을 해석한 바, 창작진이 그 역할에 대해 토론하고 만들어간 과정도 함께 보인다. 뚜렷한 사례로는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연기 스타일이 있을 것이다. 배우가 인물로서만 발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을 바라보는 바깥의 층위에서 입장을 표명하는 등, 분배된 역할이라는 틀에 배우를 가두지 않고 다양한 발화 양식을 고안한다는 점에서 자유롭고 해방적이다. 연기의 스펙트럼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 나에게는 연기가 페미니즘 연극에서의 중요한 요소다.
진해정
<인간이든 신이든>을 페미니즘 서사라고 생각했다. 여성이 주요 인물이어서가 아니라, 이슬람 극단주의와 IS라는 공동체를 다뤘다는 점 때문이었다. 내게 페미니즘은 소수자성을 기반으로 권력구조를 해체하려는 시선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의 이야기가 인상적으로 읽혔다. 현재 페미니즘 연극은 여성·퀴어·장애 담론이 주인데, 또 다른 소수자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신선했다.
김민조
남성중심적 서사임에도 불구하고 젠더프리 캐스팅으로 매우 활발한 논의를 쏟아내는 작품들이 있다. 극단 신작로의 <비평가>, <레드 스피도>의 경우 잘 설계된 젠더프리 캐스팅이 아니었음에도 젠더교란성과 관련해 매우 풍부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것을 보면서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여기, 한때, 가가>처럼 장애인 배우들을 적극적으로 캐스팅하고 <춤의 국가>처럼 10대 여성 역할에 다양한 연령대의 배우들을 캐스팅한 공연도 있다. 이제 배역이란 서로 다른 신체들을 만나게 해주는 일종의 장소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장소에서 어떤 신체들의 만남을 주선함으로써 몸에 대한 상상력을 확장해갈 것이냐 하는 고민이 지속되면 좋겠다.
김은한
<춤의 국가>는 소리 나올 때 객석이 진동했는데 그것이 배리어프리의 일환이었다.
박하늘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1, 2>는 페미니즘 하면 꼭 말해야 하는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김민조
여성 배우에게 주어지는 한정적인 성역할, 오디션의 지정연기 등의 문제점이 여성 배우들의 발화를 통해 무대에서 최초로 제기된 공연이었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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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한

극장 안전성

김연재
세월호, 미투 이후에 다양한 범위의 안전함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극장에서 기대하는 안전함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안전함인가. 극장은 어떤 식으로 안전해야 하나.
박하늘
배우의 신체적 안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극장에서 배우는 일용직 노동자다. 산재 보험을 든다고 해도 공연장에서만 보험이 적용되고 연습실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복지재단의 의료비 지원 한도는 300만 원밖에 되지 않고, 입원치료가 아닌 통원 치료는 지원 대상이 아니다. 배우의 부상이 배우 개인의 책임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최근에는 권리 보장법 등 구체적인 개선의지와 노력들이 많아졌지만 여전히 미흡하다. 그동안 공연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김으로써 창작자의 안전이 소홀하게 여겨졌는데 지금은 이런 생각이 많이 변화했다. 공연은 언제든 취소될 수 있고 또 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으며 이 과정을 함께할 동료들이 있다는 믿음이 안전한 감각이다. 또 극장은 비상상황 발생 시 공동으로 대응하고 대피하는 공동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김은한
거리공연 중에 민원이 들어오거나 시민이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럴 때 불안감을 느낀다. 극장의 시설물, 오브제 등이 위험하게 설치되어 있을 때 안심하고 공연을 보기 어렵다. 트리거워닝의 경우에도 어디까지 미리 고지해야 하는가 고민된다.
라시내
나는 거리예술에서 발생하는 우발성을 너무 사랑하는 관객이고 극장에서 만나는 날것의 위험함에 대한 사랑과 경애가 있다. 위험함이라는 말에는 다양한 층위가 있겠지만. 창작의 과정에서는 안전함을 생각하지만 작품을 관극하는 데 있어서는 위험성을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김은한
‘공연자는 재앙이어야 한다’라는 말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다. 관객에게 무조건 트라우마를 남겨야 한다고. 공감하는 부분이 있음에도 이 말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기분 좋은 거리를 유지하는 한에서 기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퍼포머가 관객에게 참여를 요청했을 때 창작자가 거기에 응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 퍼포머가 마음대로 거리를 허물어버리면 안전하지 않다고 느낀다.
김민조
세월호 이후에는 극장 환경의 안전함에 대해서 생각했고 미투 이후에는 공연이 관객에게 주는 심리적, 정서적 안전을 생각했다. 코로나 이후에는 우리가 서로에게 위험한 사람들이 되어버려서 방역과 관련한 안전을 생각했다. 결국 ‘우리가 서로에게 어떤 거리를 얼마나 두고 있어야 안전한 공간을 구성하는가’라는 질문에 수렴한다. 가령 올해 변방연극제 <재주는 곰이 부리고>를 보면서 이 팀이 안전제일주의를 바탕으로 작업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스릴과 안전함을 함께 느꼈다. 안전의 경계를 찾아내는 영민함, 섬세함, 안전하지 않은 것을 안전하게 보는 틀을 충실히 만들었는지 혹은 폭력을 재도입하겠다는 욕심만 앞섰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김은한
무엇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에 하면 안 된다기보다는, 안전한 것이 세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최근 <정물화 서곡>을 재미있게 봤다. 폭력을 시각적으로 경험하지 않았는데도 가혹한 공연이었다. 하지만 안전하다고 느꼈다. 관객에게 상상의 여지를 많이 주는 공연들이 더 반갑다.
진해정
최근 몇몇 작품들에서 폭력을 재현하는 장면을 보며 그 공연의 창작자가 속한 씬과 내가 속한 씬이 굉장히 다르다고 느꼈다. ‘연극계’라 불리는 하나의 판 안에서도 일찌감치 폭력의 재현에서 벗어나 그것을 더 다각도로 의미화하는 작업에 들어선 창작자들이 있는 반면, 아직도 폭력의 노골적인 재현만이 드라마에 충실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는 창작자들이 있다. 세대별·활동 영역별로 창작자뿐 아니라 관객층도 나뉠 테고, 각각의 씬에서 생각하는 안전에 대한 개념 또한 너무 다른 듯하다.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필요하다.
김민조
임신중단 운동을 소재로 한 극단 Y의 <344명의 썅년들> 관객과의 대화 때 나왔던 이야기들이 생각난다. 공연 내용과 관련한 관객 개개인의 경험에 따라 느끼는 고통의 질과 크기가 달라지는데 이러한 내밀한 경험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안전의 문제는 개인적이고 특수한 것이기 때문에 다수의 반응을 근거로 ‘안전했다’라고 예단하는 것에는 늘 위험이 따른다.
박하늘
‘2020 연극의 해’ 기획에서 비상상황 발생 시 <장애인의 공연장 내 안전을 위한 재난대피 가이드> 워크숍을 했던 기억이 난다. 다양한 경우들이 고려된 극장 안전 매뉴얼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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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해정

연극의 담론 생산 방식

김연재
연극을 본 뒤의 감상을 누구와 공유하며 어떤 방식으로 남기는가. 피드백의 언어나 관점은 어떻게 변화해왔나. 연극은 어떤 경로로 담론을 생산하고 있는가. 가령 전문 매체의 비평 및 리뷰, SNS, 타 작품 혹은 타 장르와의 교류 등. 해당 경로들을 통한 담론 생성의 의미는 각각 무엇이고 효력은 어떠한가.
김은한
인스타 스토리로 공연 후기가 공유되는 경우가 많은데 24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기 때문에 아쉽다. 나는 보통 SNS에 후기를 간단히 남긴다. 연극의 변화와 함께 감상 기록의 언어와 관점이 자연스럽게 변한다. 이를테면 ‘여기는 당연히 극장’의 경우 처음에는 ‘너무 소리 지른다’라는 식의 반응이 많았는데 지금은 많은 이들이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연극의 변화에 따른 후기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재밌다.
박하늘
SNS에 후기를 남기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코로나 이후, 관극 직후에 공연에 대해 대화하는 경우가 적어지다 보니 집에 가서 공연에 대해 생각할 시간이 주어졌다. 또 객석이 줄어들면서 공연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주로 따뜻한 평들을 썼는데, 최근에는 아쉽게 본 공연의 후기를 쓰게 되기도 했다. 그러한 후기를 남기는 것이 불편했다. 창작자로서 평가적인 언어를 구사하거나 듣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정혜린
긴 글로 감상을 남길 때는 주로 트위터를 이용하고 창작자에게 인사를 건네고 싶을 때는 인스타그램 DM 기능을 이용한다. 또, 다른 장르의 창작자인 친구들과 함께 관극을 하고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연극 장르에서 발생하는 특수한 형식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동시대 담론이라고 할 만한 것들에 대해서, 연극이 어떤 제안을 빠르게 제시하는 데 적합한 장르임을 알게 되었다. 작업과 결과물 사이의 시간은 길 수 있겠지만 담론을 수행한다는 측면에서는 동시대 현안들과 빠르게 발맞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진해정
트위터를 통해 ‘관객’이라는 존재를 크게 감각하게 됐다. 연극의 3요소 중 하나라는 ‘관객’의 존재감, 그들의 니즈와 경험들이 창작자인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확실히 느끼고 있다. 여성서사 붐 이후에 형성된, 연극의 정치적 목적성을 너무 호의적으로 봐주시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지만, 관객과 함께 연극을 만들어가고 있다는 감각과 지금의 상황은 너무나 좋고 감사하다.
김민조
트위터 관객 리뷰 중에는 둥글둥글하고 호의적인 반응들이 있는 동시에 연기, 텍스트, 소품, 조명, 음악 등 모든 요소를 망라해서 정확하고 신랄하게 적어 내려간 리뷰들도 있다. 양면적이다. 나는 선배 비평가들보다는 관객들에게 더 많이 배워왔다. 이전까지는 비평가로서 텍스트적인 관점에서 의미가 발생하는 부분에 집중해서 연극을 봐왔다. 그런데 배우와 연기를 중심으로 섬세하게 비평하는 트윗들을 보았다. 작품이 아닌 연기 중심으로 공연을 감상하고 비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행하는 몸에 대한 민감성이 부족했구나, 생각했다.
라시내
이미 존재하는 어떤 담론의 지형들이 있다. SNS는 모두에게 열려있지만, 그 안에서 특정한 경향의 작품을 주목하고 선호하는 흐름이 분명히 있다. 또 전문 평론의 경우 지면의 분배에서 권력이 작동한다. 피드백에 목이 마른 사람은 창작자니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직접 파면 어떨까. 시각 예술의 경우 기획 단계에서부터 비평가를 섭외하는데, 작품에 대한 담론을 스스로 생산한다는 점에서 이 방식이 강력하다고 생각한다. 공연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작품이 어떤 담론을 생산할 수 있을지 미리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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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시내

논쟁 혹은 깊은 토론

김연재
연극 작품은 어떻게 논쟁적일 수 있을까. 연극 창작자와 창작자 간, 창작자와 관객 간, 관객과 관객 간의 논쟁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것은 뜻을 함께하지 못하는 연극들 간의 과감한 이별 때문인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공연들을 향한 지지와 옹호 때문인가, 상호 존중의 공론장이 부재하기 때문인가, 자본주의적 평가와 논쟁을 구분하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인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하다. 연극에 더 많은, 논쟁적인 언어가 부여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김민조
논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여전히 ‘범주’라는 매개가 필요할 수도 있겠다. 가령 어떤 연극을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범주에 넣어보고 그 호명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는지, 전형성과 탈전형성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페미니즘 연극이라는 말이 아예 필요 없는 시점이 오면 좋겠지만 그것은 다소 이상적인 생각일 수 있고, 오히려 지금 각각의 주체들이 가지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입장들을 드러내려면 연극에 더 많은 이름을 붙여보고 그것에 반박하는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까.
진해정
연극은 논쟁의 대상이 아니라 독해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독해의 길들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가끔 문학 비평을 읽을 때면 비평 주체가 그만의 관점으로 작품을 뚫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데, 연극에 관한 비평을 접할 때는 독자로서 그러한 경험을 자주 하진 못했다. 다양한 관점이 허락되는,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장이 생겼으면 좋겠다.
김은한
논쟁적이라는 말 자체가 자극적으로 느껴진다. 민감한 문제들이 녹아있는 작품 혹은 장을 논쟁적이라고 일컫는다면, 최근에 가장 인상적이고 논쟁적인 장은 연극in 꽃점이다. 나는 꽃점이 흥미롭다고 느낀다. 관련된 논의가 건전하게 지속되기를 바란다.
정혜린
문학비평, 영화비평에서는 서면 ‘디스전’을 목격하기도 한다. 어느 비평가의 비평을 다른 지면에서 비판하기도 하고. 비평 논쟁의 대상이 되는 작품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나 연극비평의 경우, 비평을 읽은 뒤에 관극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비평을 통해 사유를 연속하기 어렵다. 또, 어떤 트위터 공연 리뷰는 그것이 정돈된 비평의 언어가 아닐지라도 예상치 못한 발견을 통해 공연의 생명력을 가동시키기도 한다. 어떤 공연에 대한 텍스트를 읽고 느끼는 쾌로써 다른 공연을 볼 때의 쾌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언어가 SNS 상에만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록될 수 없는 운명을 가진 매체가 어떻게 기록될 수 있을까. 비평을 어떻게 재밌게 읽어야 하는지 고민한다.
박하늘
연극in 200호 배리어프리 특집 때 리뷰 또한 음성낭독, 자막, 수어가 담긴 한 영상으로 제공했는데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다양한 몸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논쟁하기 위해서는 분량, 형식, 단어 선택, 소통 매체에 대한 고려 또한 수반되어야 한다.
라시내
지금 우리가 말하는 논쟁이라는 것이 이루어지려면 특정 화두나 개념을 좁고 깊게 끈덕지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블랙리스트 이후 연극계에서 공공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던 시절에 나는 공공성이라는 말을 다들 어떤 뜻으로 쓰는지 궁금했다. 안전함이라는 화두에 대해서도 토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안전함은 과연 의심의 여지가 없는 당위일까. 트랜스젠더 입학생을 거부했던 모 대학의 경우나 난민 거부, 코로나로 인한 외국인 혐오 문제 등에서 배제의 논리에 안전함이 동원되기도 하니까.
어떤 작품이 지금 어떤 주제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정도의 논의를 넘어서 더 근원적인 질문을 제시하고 답해야 한다. 작품에 대한 산발적인 논의 너머에서 작품이 남긴 것은 무엇인지, 그로부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사유와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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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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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재

김연재 극작가
작가, 단추학자, 이미지 수집가
<매립지>, <상형문자무늬 모자를 쓴 머리들>, <폴라 목> 등을 썼다. 기계 및 광물과 상호침투하는 배우의 몸 그리고 오컬티즘에 관심이 있다.
인스타그램 @publish_ser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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