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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과 땅콩버터로 무치는 아무 나물 레시피

서로를 돌보는 응원 레시피

안담

제251호

2024.03.28

웹진 연극in에서는 새해의 문을 열며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쉬어가기 위한 기획을 마련합니다. 지난 작업의 과정을 돌아보고, 함께했던 이들을 떠올리며, 앞으로 열어갈 세계를 계획해보는 시간 위에, 요리를 준비하고, 나누면서, 기운을 차리는 시간을 얹어 봅니다. 필자분들께는 새로운 시작의 소망과 바람을 담아 ‘서로를 돌보는 응원 레시피’를 공유해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 책상과 식탁 사이에서 더 건강한 밥을 짓고, 예술을 짓고, 삶을 지어갈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3월에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크고 작은 무대에 서서 책과 글쓰기에 대해 떠들었어요. 전부 혼자만 말하는 자리였습니다. 살면서 말을 넘치게 하고도 기분이 괜찮은 날은 없었습니다. 항상 괴로웠어요. 그러니 3월에는 자주 괴로웠다고도 하겠습니다. 말을 많이 하고 나면 몸에서 물이 사라집니다. 입이 마르고 위가 쪼그라듭니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잘 나오지 않아서 애를 먹어요. 말라버린 우물이나 쥐어짠 행주, 내용물을 따라버린 음료캔에 이입합니다. 신체가 불쾌한 방식으로 가볍게 느껴져서 평소보다 신중하게 걷습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땅에서 발이 떠버릴 것 같다는 비상식적인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죠. 한번 뜨면 이대로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하늘의 구석까지 날아가 외롭게 소멸할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로 말하기는 내가 이 땅에 붙어있을 이유를 스스로 고갈시키는 일처럼 느껴집니다.

말하기도 글쓰기도 둘 다 언어를 다루는 일인데 왜 말하기가 더 자주, 그리고 더 강렬하게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심지어 말은 지나치게 잘했을 때조차 부끄러워요. 어떻게 그렇게까지 끊김없이 말할 수 있었을까? 진정 마음을 담았다면 잠깐이라도 머뭇거렸어야 하는 건 아닐까? 익숙하고 편한 방식으로, 아무것도 새로 발견하거나 느끼지는 않으려는 게으른 태도로 말했기 때문에 유려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긴 배움의 공백으로 언어가 자동화되어버린 건 아닐까?

대체로 이런 걱정은 무용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관객은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놀랍도록 잘 가져가니까요. 좋은 강연은 강연자보다는 청중의 덕으로 만들어집니다. 그러니 준비를 과하게 할 필요가 없어요. 그걸 알면서도 할 말을 과하게 준비하면 꼭 후회하게 됩니다. 모든 걸 보여주리라는 각오로 임한 무대에서 아무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제사상이라도 차리려는 사람처럼 갖은 과일을 가져가서 바삐 깎은 다음 껍질만 주고 오는 황당한 실수를 하는 날이 있습니다. 속살만 남은 과일들을 어쩔 수 없이 다 버리면서, 사실 내가 주고 싶었던 건 물 많은 딸기 한 알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드는 칼로 과감하게 꼭지를 잘라낸 딱 한 알의 좋은 딸기. 행여 밍밍해질까 키친타올로 물기를 한 번 더 닦은 딸기. 그런 딸기를 한 알만 준비했더라면, 치명적이고 결정적인 그 한 알만을 주고 왔더라면 좋았을 텐데.

지난주에는 큰 강연 하나를 마치고 장을 보았습니다. 사려던 것은 딸기인데 정작 사서 나온 것은 취나물이었습니다. 큰 폭으로 할인하는 취나물을 보니까 그걸 한아름 사다 데치고 싶었습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 숨이 죽는 잎채소를 보는 걸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무 도마 위에 참나물 한 움큼이 놓여 있다. 연둣빛 줄기가 길게 휘어져 있고 줄기보다 진한 초록색의 잎이 무성하다. 나무 도마가 놓인 싱크대에 주황색 망에 담긴 귤이 살짝 드러나 있어 색감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나물은 허무한 음식입니다. 시금치 한 단을 손질해도 나물로는 두 주먹 밖에 나오지 않잖아요. 데치기 전의 수고를 따지면 기분이 상해서 나물을 만들지 않겠다는 사람도 나올 법합니다. 우선 뿌리를 다듬어야죠. 그다음엔 풀더미를 뒤적이면서 시들거나 무른 잎을 솎아내고요. 흐르는 물에 잎채소를 씻을 때는 흙이 잘 모이는 뿌리 쪽 줄기를 신경 써서 문지르며 미끄러운 느낌이 없어지도록 닦습니다. 너무 두꺼운 줄기는 잘라줍니다. 수 차례 물을 맞아 몰라보게 싱싱해진 이파리들을 채반 가득 담아서 냄비 앞에 섭니다. 그리고 잘 손질한 풀더미를 한 줌씩 끓는 물 속으로 넣어요. 풀들이 사르르 가라앉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한 냄비로 감당이 가능할까 걱정스러울 정도로 많은 양을 준비해도 냄비가 넘친 적은 없습니다. 넣으면 넣는 대로 숨이 죽는 나물을 보다가 나는 넘침에 대한, 감당가능함에 대한, 숨죽임에 대한, 허무에 대한 진실을 깨달을 듯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을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한눈을 팔다가 나물을 건지는 타이밍을 놓치면 잠깐 사이에 풀죽이 됩니다. 진리가 임박했더라도 미련 없이 잊어버리는 게 좋습니다. 재빠르게 건져낸 나물을 찬물로 씻어 열기를 빼느라 나는 방금 전에 깨달을 뻔했던 진실이 무엇이었는지 완전히 까먹습니다. 다만 나물의 물기를 짜고 또 짭니다. 손 안에서 나물이 점점 작아지고 또 작아집니다. 말의 공허와는 달리 이 공허는 기쁨을 줍니다. 말의 공허를 자주 느끼는 이에게 이 레시피를 드립니다.

된장과 땅콩버터로 무치는 아무 나물 레시피

재료
시금치, 취나물, 참나물 등 데쳐 먹는 초록색 나물 한 종류
된장
국간장
땅콩버터
참기름이나 들기름
설탕(요리당, 매실청, 알룰로스 등 당류)
다진마늘 조금
통깨 or 들깨가루


조리법
  1. 국간장을 넣고 무치는 일반적인 나물도 깔끔하니 맛이 좋지만, 저는 나물에 된장을 즐겨 씁니다. 된장과 땅콩버터를 넣고 무친 나물은 개성이 강해서 밥이 잘 넘어가요.
  2. 된장 한 큰술, 국간장 반 큰술, 땅콩버터 반 큰술, 설탕 한 꼬집, 다진마늘 조금을 섞으면 양념 완성입니다. 이 양념으로 나물을 버무립니다. 간이 배면 참기름 또는 들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통깨나 들깨가루를 추가해 한 번 더 버무려줍니다. 땅콩버터에 이미 단맛이 있기 때문에 설탕 등의 당류는 맛을 보면서 가감하세요. 다진마늘은 생략해도 됩니다.
  3. 저는 이 된장 양념으로 주로 취나물이나 시금치 나물을 만들어 먹습니다. 참나물도 좋아요. 초록색 나물에는 두루두루 다 어울릴 거예요. 단, 데쳐 먹는 나물이어야 합니다. 똑같은 초록색이라도 돌나물처럼 생으로 먹는 나물에는 잘 맞지 않습니다.
  4. 같은 양념으로 가지를 무쳐도 좋은 밥반찬이 됩니다. 찐 가지든 튀긴 가지든 상관없습니다.
  5. 나물을 맛있게 무치려면 물기를 아주 꽉 짜야 된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야 나중에 나물이 질척해지지 않는다고요. 그런데 오히려 잎이 상하지 않게 물기를 아주 살짝만 짜야 물이 덜 나오고 아삭하다는 의견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저는 전완근이 뻐근할 정도로 물기를 열심히 짜는 편입니다.


[사진: 필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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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담

안담
무늬글방의 대표, 엄살원의 주인장. 1992년 서울 서대문에서 태어났다. 봉고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다가 강원도 평창에서 긴 시간 자랐다. 미학을 전공했으나 졸업 후에는 예술의 언저리에서만 서성였다. 2021년부터 ‘무늬글방’을 열어 쓰고 읽고 말하는 일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가끔 연극을 한다. 우스운 것은 무대에서, 슬픈 것은 글에서 다룬다. 그러나 우스운 것은 대개 슬프다고 생각한다. 정상성의 틈새, 제도의 사각지대로 숨어드는 섹슈얼리티 이야기에 이끌린다. 존재보다는 존재 아닌 것들의, 주체보다는 비체의, 말보다는 소리를 내는 것들의 연대를 독학하는 데 시간을 쓴다. 주력 상품은 우정과 관점. 얼룩개 무늬와 함께 산다. 지은 책으로는 『엄살원』, 『소녀는 따로 자란다』가 있다.
everyother_d@naver.com
사진: 곽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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