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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도착할 수 없는 만남에 대하여

丙 소사이어티 X 김한결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

김태희_연극평론가

제133호

2018.02.08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가령 지금의 ‘나’는 극장의 객석에서 나의 서재로 나의 머리에서 화면의 활자로 옮아와 웹진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당신과 마주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이 보고 있는 활자는 ‘나’의 대리물인가 진짜 ‘나’인가. 혹은 그것은 과거의 ‘나’인가 현재의 ‘나’인가. 제한된 시간동안 웹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만나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가까워질 수 있을까. 우리는 과연 서로에게 닿을 수 있을까. 송이원 연출은 전작 <노동집약적유희 2017>에 이어 <의자, 눈동자, 눈먼 예언자>에서도 미디어에 대한 흥미로운 사유를 보여준다. 전작에서 그는 객석과 무대의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을 일치시킴으로써 미디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현실성의 극단을 구현한 바 있다. 이번 작품은 반대로 가장 비현실적인 시공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노인과 노파가 죽음을 향해 가는 손님들을 배웅하는 곳, ‘지금, 여기’에 있는 관객들은 그들의 애도를 보고 있지만 결코 그들에게 닿지 못한다. 이것은 곧 다시 나와 타인 사이의 거리에 대해, 이 사이를 매개하고 있다는 착시를 일으키는 미디어의 실체를 폭로한다. 우리가 ‘지금, 여기’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모든 만남은 결코 도착할 수 없는 만남일 수밖에 없다.

죽음과 애도를 ‘보여주는’ 미디어

김태희
공연 관극 후에 마련 된 아티스트 토크에 참여를 했어요. 관객 분들과의 대화중에 이 작품이 세월호를 계기로 구상한 작품이라고 밝히셨어요.
송이원
네. 다들 비슷하겠지만 저는 제 경험이 작품에 영향을 많이 주는 편이에요. 세월호 사건 이후에 뭔가 하고 싶었어요. 아무래도 연극이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죽음과 애도에 대한 생각이 이 작품에 영향을 주었죠.
김태희
저는 사실 작품을 보면서 세월호 이야기까지 확장시키지는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 작품을 보면서 세월호를 떠올렸고 너무나 슬펐다는 관객의 감상을 듣고 놀랐어요.
이은조
이원 연출이 세월호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에 왜 세월호를 넣고 싶은지 어떻게 담고 싶은지를 행운의 편지를 통해 전달 받기는 했어요. 작업 할 때 이원 연출은 행운의 편지를 보내거든요. 이번에는 두 번 받았는데요. 지금 하고 있는 생각들을 3, 4페이지를 글로 써서 보내는 거예요. 저희가 이원 연출의 생각에 대해 좀 더 깊이 이해를 하는 데 도움이 되요. 다만 연출의 의도는 그런 식으로 전달 받았지만 작업을 하면서 세월호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들을 공유하고 같이 문제의식을 가다듬고 이런 작업을 하진 않았어요.
정재윤
세월호에 대한 직간접적인 이야기는 많이 들어냈어요. 시간을 지나오면서 너무 다양한 방식으로 여러 매체들에서 다루어져왔기 때문에 지금 이 시점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게 맞나 고민이 많았거든요. 그것보다는 미디어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연출님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대개 우리는 세월호 사건을 미디어를 통해 접했잖아요. 그런데 본인에게는 헬기에서 한 가닥 줄이 내려오는 그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슬픔, 애도를 직접적으로 다루기보다는 미디어가 주는 거리감에 대해 다뤄보고 싶다고 이야기해서 거기서 출발을 했어요.
김태희
노인과 노파가 손님을 기다렸다가 이들을 잘 보내주는 이야기가 한 축에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해설자가 해주는 이야기, 요컨대 제주도 넋들이 이야기, 천지 창조 신화, 저승과 이승의 교차점인 미여지벵뒤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어요. 이 이야기들은 어떻게 접하시게 된 건지요?
송이원
공연에서 이야기 한 대로 제주도에 사는 친구가 제가 교통사고가 났을 때 제일 먼저 병문안을 왔어요. 사고 때문에 놀란 저한테 해 준 이야기가 ‘넋들이’이야기에요. 사람에게는 세 개의 넋이 있는데 크게 놀랐을 때 그 넋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다시 불러들이는 의례를 해야 한다는 거죠. 그 방식은 그 사람이 입었던 옷을 흔들면서 넋에게 돌아오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거예요. 친구에게 넋들이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쩌면 몸과 이름과 넋, 이 세 가지 요소가 사람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이름만 해도 사실 제 거지만, 제가 제 이름을 부르면 너무 귀여워 지잖아요. (웃음) 이름은 항상 타인이 불러주는 건데 그렇다면 이름은 내 것일까 다른 사람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결국 원론적으로 이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나임과 너임 사이에 다양한 요소들이 있고 그게 어떻게 보면 인간의 틀인 것 같았어요. 인간은 그걸 조금씩 변주해보려고 기계를 만드는 것 같기도 해요. 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더 빨리 더 효율적으로 타인에게 닿기 위해서 바퀴를 만들고 비물리적인 미디어까지 가게 된 거죠.
김태희
아티스트 토크에서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은 나와 타인의 거리를 통해서 현대인의 고독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에 반해 무당과 굿이라는 전통문화는 고독과는 반대되는 의미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거리가 먼 것 같다는 질문도 있었어요.
송이원
그 둘이 멀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아요. 일상에서 사람은 다 똑같구나 라는 생각을 자주 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보통 놀라면 우황청심환을 먹는다든가 화학적인 약을 선택하는데, 옛날에는 놀라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넋들이를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대처 방법이 다를 뿐이지 거기서 느꼈던 건 공포라는 감정은 유사하거든요. 그러다 보니 그 두 가지가 엄청 멀다고 느끼진 않았던 것 같아요.

서로 다른 작업이 함께할 때

김태희
송이원 연출님과 김한결 작가님 두 분이 어떤 계기로 함께 작업을 하게 되셨는지 궁금해요.
김한결
<신파극장-모터기계> 작업을 할 때쯤 이원이의 작업을 보게 되었는데, 연극이라는 장르가 가지는 촉각성이 참신하게 느껴졌어요. 저는 아무리 작업을 해서 그걸 공간에 내놓고 해도 그게 분리된 별도의 공간이 되고 말더라고요. 제가 하는 작업은 차지하는 공간에 한정될 뿐 거기서 공간이 뚝 끊기고 사람들은 그 안으로 안 들어가거든요. 근데 연극에서는 암전되고 나면 옆 사람 숨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 작품의 공간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와 있더라고요. 그게 가장 인상 깊었고 연극이랑 협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의 뿌리가 된 것 같아요.
송이원
저는 바다나 세월호 사건에 대한 작업을 한다면 꼭 한결 작가와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한결 작가의 졸업 작품과 그 다음 전시를 보고 난 다음에 소리를 다양하게 읽어낼 수 있구나 처음 깨닫게 된 것 같아요. 한 번은 세탁기를 돌리고 그 옆에 앉아있는데 세탁기에서 바다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이건 진짜 한결 작가가 열어준 감각인 거죠. 신기한 마음에 한결 작가에게 세탁기에서 바다 소리가 난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본인도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사실 파도소리로 작업을 구상한 드로잉이 몇 개 있다고 해서, 어떤 기계들과 함께 협업을 해보고 싶다는 씨앗이 그 때 생겼던 것 같아요.
김태희
그 때 이원 연출님이 보신 작품이 어떤 거였나요?
김한결
졸업전시작품이 <코고는 소리를 만드는 모터기계>였고 이후 개인전으로 올린 게 <신파극장-모터기계>였어요. 그 작업에서는 어떻게 하면 일상적인 사물들이 가지는 신파적인 외양과 건조하게 돌아가는 모터의 움직임이 맞붙어서 신파가 없어질 수 있을까를 제일 많이 고민했던 것 같고, 이번 작업도 그 고민이 연장되어 있어요. 당시 코고는 소리를 만들고 거기에 텍스트를 붙였는데 그 텍스트는 꽤 신파적이고 로맨틱한 연상에 관한 거였거든요. 이번에도 파도 소리가 뭔가 로맨스는 아니지만 어떤 슬픈 감정을 가질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다만 외양 자체는 가능한 건조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김태희
프로그램을 보니 ‘측은한 기계’를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하셨는데 지금 말씀하시는 신파가 측은함과 같은 의미인가요?
김한결
네. 그것과 대응하는 것으로 쓴 거예요. 기계가 일상적인 완성품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다른 기능을 하고 있을 때, 실패작을 어떻게 계속 실패하게 만드는지가 고민이어서요. 원래 코고는 소리를 내기 위한 용도가 아닌 전혀 뜬금없는 사물들이 부딪혀서 실수로 우연히 뭘 연상시키는 소리가 났는데, 그걸 모터 움직임으로 지탱할 수 있는 축들을 만들어서 반복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작업을 하는 거죠.
김태희
객석에서 보기에 무대 좌측에 있는 기계는 파도 소리를 담당하고 있고 무대 우측에 있는 기계는 어떤 소리를 담당하고 있나요?
김한결
도착, 배가 정박하는 소리요. 이오네스코의 원작 <의자들>을 읽었을 때 저는 거기 등장하는 반복적이면서도 광적인 발화방식과 어떻게 바다가 감각적으로 묘사가 되고 있는지에 초점을 두고 읽었거든요. 이원 연출은 죽음을 읽어냈고요. 서로 오독이라고 생각 할 만큼 다르게 읽은 거죠. 이걸 조율해 나가는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저에게 포인트가 되었던 게 손님의 도착 지점과 변사가 발화하는 지점, 계속 흘러나오는 파도소리였어요. 발화를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배우들이 맡을 테니, 제가 만들어야 하는 기계는 배가 정박하는 소리, 파도 소리 정도로 생각을 했답니다.
김태희
연극의 적극성이 참신했다고 하셨는데요, 연극과 협업을 해보신 후의 소감이 궁금해요.
김한결
연극은 하면할수록 미술 작업과 많이 다르고 참 다른 감각에 많이 열려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오퍼가 어떻게 돌아가고 백스테이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들어왔거든요. 무대 감독님이 기계를 적절하게 움직이기 위해 5개 버튼이 달려있는 멀티탭을 열손가락으로 컨트롤하고, 의자가 무대를 빼곡히 채우는 장면을 위해서 재윤 씨와 은조 씨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서 의자를 가지고 나가고. 그런 모든 것들이 잘 맞물려야 하나의 공연이 나온다는 게 참신했어요. 그 부분은 제 작업이랑 비슷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계의 부품들이 사람으로 바뀐 것이 연극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송이원
어제 아티스트 토크 중에 한 관객 분이 한결 작가의 소리가 마치 자연의 소리처럼 느껴진다고 하시더라고요. 기계가 되게 자연이라고요. 그게 인상 깊었어요.
김한결
자연의 소리를 표방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극찬이죠. 공연 이후 처음으로 활짝 웃은 것 같아요.
김태희
관객들이 느끼신 바가 작가님이 가 닿고 싶은 지점에 정확히 일치한 거죠.
김한결
저에게 이렇게 들렸다고 다른 사람 귀에도 그렇게 들리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제 작업은 규모는 크지만 가리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해요. 가려 버리면 거기서 레이어가 분리되서 효과음과 다를 게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거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걸 다 보여줬는데, 과연 누가 이걸 파도소리라고 생각할까. 어떻게 보면 연극 공간에 들어온 게 다행인 거죠.
김태희
하지만 기둥 때문에 기계가 잘 안보여서 아쉬웠어요.
송이원
그래서 저희 다음 작업이 기둥 부수는 기계에요. (웃음)

새로운 감각을 열기 위해

김태희
아까 하신 말씀 중에 감각을 열어준다, 재밌는 표현인 것 같아요. 스탭 명단을 보니 장재키 선생님 성함이 있더라고요. 신경계를 이용한 워크숍을 하시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워크숍은 어떠셨나요?
정재윤
노인과 노파 역할을 했던 저와 은조, 재키 선생님이 워크숍을 했어요. 일단 노인의 움직임을 젊은 배우들이 해야 하니까, 그걸 접근하고자 재키 선생님과 다양한 연령별로도 해보고 다양한 신체 부위에 포인트를 둬가면서 움직임 워크숍을 했었어요.
이은조
조금 첨언하자면 5세 아동의 몸, 95세 노인의 몸을 각각 연기 해보면서 어떤 차이가 있나 느껴봤어요. 제 또래의 움직임과 다르게 노인들 특유의 움직임들이 있어요. 저는 한 템포에 움직이는 동작을 노인 분들은 대개 한 가지 동작이 더 들어가는 식이죠. 이런 개념을 공유했기 때문에 재윤 배우와 첫 작업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빠르게 호흡을 맞춰 갈 수 있었어요. 움직임이 상대 배우, 연출과 공유할 수 있는 일종의 언어가 된 거죠. 사람의 몸에 있는 신경에 대한 설명도 들었는데요, 1신경부터 12신경까지 어떤 요소가 있는지 공유하고 그 신경을 축소, 확대, 삭제 해보면서 그것만으로도 움직임이 어떻게 다채롭게 나올 수 있는지를 경험했어요. 연출이 노인과 노파가 등장하는 장면들이 현실적이지 않기를 원했어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공간과 인물들인 거죠. 처음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했었는데 신체 언어 덕분에 조금 수월해지기는 했어요.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가지 찾았는데 그게 실제로 공연에 많이 쓰이진 못해서 아쉽긴 하지만요.
김태희
그에 비해 윤지 배우님은 휠체어에 내내 앉아 있어서 신체에 제약이 많잖아요.
신윤지
저는 오히려 휠체어를 쓸 수 있다는 점이 재미있었어요. 무대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어딘가에 앉아있는 경험을 할 일이 별로 없잖아요. 오히려 그게 저한테는 큰 경험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처음엔, 휠체어에 갇혀 있는 내가 시각적으로 얼마나 답답해 보일까 고민했어요. 이 작품 안에서 휠체어의 역할이 몸이 불편한 인물로서 사용하는 오브제가 아니다 보니 더 고민했던 것 같아요. 몸의 방향성이나, 움직임, 높낮이의 변화 등 몸의 상태의 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부분들을 휠체어라는 틀 안에서 표현해야 하니까 움직임에 한계가 있잖아요. 결국 이 갇혀 있는 틀 안에서 어떻게 다채롭게 표현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압박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김태희
오히려 극 내용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요. 휠체어가 주는 시각적 이미지 때문에 신체와 이름에 갇혀 있는 ‘나’가 더 잘 드러났던 것 같아요. 보이지 않는 대상을 두고 연기해야 하는 노인과 노파 역할은 또 다른 압박이 있었을 것 같아요.
이은조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손님들을 제가 그려내는 것, 제 시야 안에서 확보하는 게 첫 번째 과제였고 그 다음에는 이 일루젼을 관객에게도 보여주는 것이 두 번째 과제였어요. 내가 보는 것을 관객에게 보이게 하는 것 까지, 배우로서 내가 어떤 것을 해야 할까 고민의 과정이었던 것 같아요. 연습을 할 때 어떤 때는 그 일루전이 지켜보는 연출에게 보이는 경우가 있고 아예 안보여서 연출이 패닉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어요. 그런데 그 차이가 손님들을 대할 때의 몸의 형태, 높낮이나 방향성에서 나타나기도 하지만, 미묘한 태도 같은 것들에서 나타나기도 하더라고요. 노인 노파는 극 중 안에서는 손님을 맞이하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기본적으로 인류애를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망자를 대할 때 사람이라면 느끼는 감정들이 있잖아요. 그런 것들이 조금씩 얹어졌을 때 어떤 일루전이 만들어지는 것 같아서 그런 것들을 살려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죠.
정재윤
제 경우에는 세세한 연출적 방향성보다는 이 공연이 나한테 갖는 의미를 찾는 것이 더 큰 압박이었어요. 제가 했던 이전 작업들을 생각해보면, 저에게 그 작품이 어떤 의미인지가 들어와야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초반에는 그걸 잘 정리를 못하고 있다가, 공연이 임박해서 제 나름대로 정리를 할 수 있었죠. 뉴스로 사건사고를 접하면 저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에고, 저 사람들 그냥 좋은 곳으로 잘 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곤 하거든요. 어느 순간 그런 습관 같은 게 생겼어요. 뉴스를 보면서 무의식적으로 저에게 스쳐지나가는 생각을 70분으로 풀자, 그게 이 공연이 저에게 갖는 의미였어요. 그 의미가 공연 시작 전에 생겼다는 게 한편으로는 다행이고 지금 하면서는 나름 만족하고 있어요.
신윤지
제가 가장 오래 고민했던 건 송이원을 이해하는 일이었어요. 제가 맡은 역할은 단순히 해설자가 아니라, 송이원 자체라고 생각하거든요. 단순히 작가여서가 아니라, 해설자의 대사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원이의 온전한 생각들임을 잘 알기 때문이에요. 그러다 보니 다른 인물을 만났을 때와 달리 송이원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는가 계속 고민했어요. 희곡에 나오는 인물들은 실존하지 않고, 저와 직접 관계를 맺지 않잖아요. 계속해서 생각하고 상상하고 혹은 제 안으로 들어와서 제 나름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물에 대해서 생각하는 작업을 해왔다면, 이번 작업은 매일 눈앞에 있는, 너무나도 가까이 있는 실존 인물을 연기해야 했으니까요. (웃음) 또한, 이원이의 생각과 관념들을 어떻게 하면 최대한 직관적으로 혹은 직관적이진 못하더라도 조금 더 편안하고 쉽게 전달 할 수 있겠는가를 고민했어요. 그것이 이 작품 안에서 해설자의 몫이며 그 기능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노인과 노파가 끊임없이 죽은 자들을 맞이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수행하고 있다면 해설자는 그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들을 전달한다. 그것은 제주도에 전해지는 전통 의례와 설화들, 눈 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들은 절묘하게 나와 너의 거리, 나와 너임 사이의 공간들에 대한 감각을 열어준다. 이름이 불리면 몸에 돌아와 갇히고 마는 넋처럼 우리는 지금 여기에 깊게 뿌리박고 있다. 나와 너의 거리는 그만큼 견고하다. 인간은 기계장치라도 부여잡고 그 거리를 극복해보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착시에 불과할 뿐, 죽음에 대한 애도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 해설자의 에피소드와 교차되며 배치되는 노인과 노파의 애도는 그 애도의 불가능성을 이미 알고 있는 자들의 것이다. 이들은 감히 죽음을 알고 있노라 자만하지 않는다. 그들은 죽은 자들을 손님을 맞이하듯이, 가는 길이 평온하길 빌어주고 있다. 이들이 보여주는 태도는 산 자가 떠나는 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애도일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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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희

김태희
한국연극사를 공부하고 있고 연극과 관련된 글을 쓰고 있다.
shykt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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