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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어날 수 없는 곳에 머무르기

극단 연애시절

송이원_연출가

제136호

2018.03.22

(극단 연애시절 제작의 <거기 서 있는 남자>는 김정팔(남자)/양예승(여자) 캐스트와 이한희(여자)/유종연(남자) 캐스트로 나뉘어 상연되었으며, 필자는 김정팔/양예승 캐스트의 공연을 관람한 후 네 배우와의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극장으로 입장하니 낙엽과 작은 벤치 그리고 나무 몇 그루가 놓인, 평온하고도 한적한 무대가 눈앞에 펼쳐졌다. 가을날의 숲을 옮겨 놓은 듯한 무대 앞에 앉아 산뜻한 하우스 음악을 들으며 공연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찰칵. 평온하고 한적하던 무대는 어쩐지 지뢰 소리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송이원
러닝타임 내내 무대에서 지뢰를 밟고 계셨어요. 다리는 괜찮으신가요?
김정팔
허리가 많이 아프네요….
양예승
참고로 제가 아까 허리에 파스 붙여드렸습니다.
송이원
공연 내내 지뢰를 밟고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로 연기를 하시니 허리나 다리가 많이 아프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한 편, 또 발 저림이나 몸의 상태가 만들어내는 연기나 감정도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기도 했어요. 직접 하시면서는 어떠셨나요?
김정팔
컨디션에 따라 그날그날 다르기도 한데, 아무래도 1시간 20분이라는 시간을 지뢰를 밟고 서있어야 하다 보니 어쩔 땐 실제로 다리가 파르르 떨릴 때도 있어요. 그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가야 하는 거죠. 굳이 감추면서 갈 필요도 없고 또 너무 과장해서 갈 필요도 없고, 그냥 느껴지는 바에 따라 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래서 공연 중에 허리가 아플 때에는 폈다가 굽혔다가 하기도 하고, 다리를 잡기도 하고 여러 자세들을 취하는데, 그게 만들어낸 연기라기보다는 정말 힘들어서 그런 거예요.
이한희
두 분(김정팔 유종연) 다 암전 때도 발을 떼지 않으세요. 발의 위치가 바뀔 수 있으니까.
송이원
공연 중에 실제로 땀을 엄청 흘리시고 또 허리를 잡았다가 비틀었다가, 다리를 잡았다가 놓았다가 하시니까, 연극이란 게 어떤 상황을 만들어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동시에 정말로 그 상황 안에 있는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더라고요.
김정팔
종연이랑 저랑 원래 둘 다 땀을 워낙 많이 흘려요. 저희끼리는 그런 얘기도 하죠. 배우의 고통은 곧 관객의 즐거움이다. 관객 분들도 땀이 나서 더 리얼하다고 얘기를 하시기도 하고요.
유종연
저는 이번에 하면서 제 실제적인 삶과 생활이 포함되어서 관객 분들에게 전달이 되었으면 했어요. 물론 제 생활 속의 면들이 무대 위에서 엄청 가시적으로 드러나진 않겠지만요, 아무튼 그래서 처음에 캐릭터를 맡으면서는 지뢰에 대한 걱정이 많았어요. 밟은 상태로 감정적으로 몰입도 되어야 하고, 정말로 지뢰를 밟은 사람이라면 과연 어떨까 하는 고민들도 많이 했고요.
그런데 처음 런스루 때 실제로 밟고 나니까 다 차치하고, ‘공연 중에 만약 발이 떼지기라도 한다면 내 연기 인생도 여기서 끝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밟고 있는 이 지뢰라는 게, 물론 진짜 지뢰는 아니지만, 발이 떨어지면 공연이 그대로 끝나는 거니까요. ‘티켓 값 환불요청이 들어오면 내가 물어줘야 되는 상황이 벌어지려나? 돈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고요. 실제 지뢰가 아니더라도 제 연기 인생에 있어서는 발을 떼면 ‘터지는’ 진짜 지뢰라는 생각이 들었고 이 느낌으로 지뢰를 밟고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지뢰를 밟아 발을 떼지 못하고 ‘거기 서 있는’ 남자는 벗어나기 위해 목청껏 소리도 질러보고 구조 신고를 시도하기도 하지만, 외딴 숲 속엔 안타깝게도 오다니는 사람도 없고, 설상가상 핸드폰 신호도 송수신되지 않는다. 그러다 남자 앞에 나타난 한 여자, 고개(객석)만 넘어가면 구조 신고가 가능한데도 어쩐지 객석의 고개를 넘지 못하고 무대에만 머무른다.

송이원
남자는 지뢰를 밟았다는 물리적인 제약으로 인해 발을 떼지 못하고, 여자의 경우 무대 위의 인물로 보이지는 않지만,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못해 남자보다 동선이 자유롭기도 하지만, 결국 무대라는 제한적인 공간 안에만 머무는데요, 두 캐릭터 모두 ‘지뢰’를 밟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어요. 작품 속 지뢰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무엇이 있을까요?
김정팔
처음엔 작가님의 의중을 알고 싶어서 질문을 많이 했었어요. 그러다 얻게 된 제 나름대로의 답인데, 지뢰는 누구나 다 가지고 살고 있는 ‘삶의 굴레’가 아닐까 싶어요. 벗어나지 못하는 굴레요. 인생이란 것도 가만히 보면 늘 힘들고 불안하고 초조하잖아요. 그 삶 속에서 누구나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벗어나면 더 큰 두려움과 불안함이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결국 삶의 굴레에 안주하는 그런 인생이요. 저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여기 서있었어요.
송이원
말씀해주신 부분을 여자 캐릭터를 통해 많이 느끼기도 하였어요. 엄마라는 지뢰보다 더 큰 지뢰를 밟게 될까 두려워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는 대사도 있었고요.
이한희
여자는 한 때 떠나기도 했지만 혼자 있을 수 없는 엄마를 위해 결국 다시 돌아와야 했죠. 무대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 ‘밟고 있었던’ 지뢰였기 때문에 어쩌면 이제 같은 존재가 되어버린 거라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양예승
맞아요. 너무나도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는 지뢰죠. 그런데 보시는 분들은 무대 위에 바로 보이는 지뢰에 비해 엄마라는 존재는 보이지가 않으니까 “왜 신고를 하러 가지 않지?” 같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여자의 입장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까봐, 또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로 느껴질까 봐 조금 걱정이 되긴 했어요.
이한희
극 후반부에서 여자가 실제로 지뢰를 밟았을 때도, 발을 떼어서 다치거나 죽을 수 있을지라도 아픈 엄마를 간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중요하고 크니까 여자는 발을 떼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약 그 만큼이 안 되었다면 여자도 남자처럼 발을 못 뗐을 텐데, 그 만큼 자기 인생에 있어 엄마라는 존재가 컸던 거죠. 그런데 관객분들에게 여자가 되게 신기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지기도 하다 보니 여자가 직접 심어 놓은 지뢰였냐는 질문이 나오기도 했어요.
유종연
공연을 올리면서 점점 드는 생각은, 제목이 <거기 서 있는 남자>이고 실제로 눈에 보이는 지뢰를 밟고 있는 것도 남자이다 보니, 관객 분들이 이 작품에서 남자의 이야기가 중심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과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건 오히려 여자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일상의 지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관객 분들이 공연을 보시고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지뢰, 다시 말해 ‘내가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요.
송이원
그렇다면 오랜 시간 그곳에서 엄마라는 ‘지뢰’를 밟고 있던 여자의 삶에 어느 날 지뢰를 밟은 남자가 사건으로 개입한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어땠을까요? 자신은 이곳에서 평온한 삶을 살고 있었는데 당신이 와서 내 삶을 바꾸지 않았냐는 식으로 부정적인 대사를 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어서인지 남자에게 따뜻한 차도 가져다주고 이것저것 챙겨 주기도 하고요.
이한희
엄마는 매일 혼수상태이고 그 외딴 곳에서 이야기할 상대도 없었을 테니 남자의 등장에 여자가 환기가 되긴 했을 것 같아요. 둘이 만난 지 별로 되지 않았을 때 소통이 굉장히 되지 않고 있는 상황인데도 여자는 끊임없이 말을 하는 걸 보면 대화가 고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집에서 외롭게 지내왔던 게 상상이 되기도 하고요.
양예승
처음엔 낯선 남자의 등장이 무서웠다가도 아마 사람이 되게 그리웠을 테니까, 무섭기도 하고 엄마도 걱정이 되지만 계속 호기심을 갖고 챙겨주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한희
작가님께서 두 낯선 세계가 만나 서로 소통이 되지 않다가 ‘거기 있음’을 통해서, 그러니까 시간과 과정을 통해서 하나의 집과 가정이 이뤄지는 걸 보여주고 싶으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김정팔
두 낯선 세계는 아마 현실적인 공간과 비현실적인 공간인 것 같아요. 실제로 우리 삶도 그렇게 살고 있지 않을까 싶고요. 남자와 여자의 삶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보이지만 관객 분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충돌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으니까, 두 인물의 관계를 전체적으로 보며 삶으로 가져가는 게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송이원
그렇다면 남자는 무대 위에서 눈에 보이는 지뢰를 밟은 상황이니 보다 현실적인 공간에 가까운 캐릭터이고, 여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간호하며 전화도 없이 사는 비현실적인 공간의 캐릭터라고 보면 될까요? 그런데 또 한 편으론 이런 상황에서 만남과 충돌이 일어나니 오히려 여자가 되려 현실적으로 밥을 챙겨주고 입을 것도 갖다 주고…. 현실과 비현실이 만나는 지점이 불분명하기도 하고, 현실과 비현실이 뭔지 아리송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양예승
저는 말씀하신 것과 반대라고 생각했어요. 처음에 남자는 지뢰를 밟고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계속 발을 떼려 하고 벗어나려고 했는데, 여자는 여기 이 현실을 벗어나면 당신이 자유로워지냐, 저기로 가면 당신은 구원받을 수 있냐, 저기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건 도대체 뭐 길래 가려고 하냐 등의 대사를 하거든요. 여자는 엄마라는 지뢰를 인정하고 계속 여기 남아있는,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는 캐릭터이고 남자가 오히려 다른 세계로 떠나려고 하는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을 하기도 했었어요.
그래서 극 초반에 등장하는, 오래 전 거기서 지뢰에서 발을 떼고 저 세상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는 대사에 대해 저는 캐릭터의 전사를 잡으며 그 사람이 아빠라는 설정을 했었어요. 그런 입장에서 남자가 오랜 시간 그 자리에 묵직하게 서있는 걸 보고 반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아마 그래서 극 후반부에 당신이 여기 서있는 게 정말 대단하다, 장하다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요.

지뢰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남자, 그리고 아픈 어머니를 간호하기 위해 집을 떠나지 못하는 여자의 ‘비현실적인’ 만남은 그렇게 하루, 이틀, 그러다 곧 열흘, 석달, 또 삼년이란 시간으로 비약을 하기도 한다. 그 사이 지뢰 위의 남자는 거의 묘기를 펼치다시피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둘은 다투기도, 또 심지어 그 긴박한 상황 가운데 소소한 게임을 하기도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기보단 무엇이든 해보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오히려 현실의 시간들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송이원
또 시간의 차원도 흥미로웠어요. 무대 위의 시간이 초반엔 실제의 시간과 같이 진행되다가 곧 열흘 석달 삼년의 순으로 비약을 하더라고요. 직접 연기를 하시는 입장에서는 관계로부터 오는 감정들이나, 배경과 상황의 변화에 따라 연기의 재료를 많이 찾으실 텐데, 무려 삼년이라는 시간의 비약이 많이 힘들진 않으셨나요?
양예승
시간의 변화를 대사 이곳저곳에서 느낄 수 있도록 노력을 많이 했어요. 얼마나 보였을 지는 정확히 할 수 없지만 대화가 점점 더 부드러워지고 친해지는 걸 말투로 많이 표현하려고 했죠.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소품도 조금씩 조금씩 계속 갖고 들어와서 쌓아 두는 식으로 최대한의 표현을 해보았어요.
김정팔
3년이란 시간 동안 지뢰를 밟고 서있었다는 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잖아요. 제가 하면서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처음엔 당혹스러웠죠. 시간의 흐름을 연출적인 선에서 해결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얘기도 했었고, 눈을 내려주거나 낙엽을 뿌리거나 등의 아이디어들도 많이 나왔었는데 결국엔 조명의 변화 정도로만 표현을 해서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했어요. 인물 표현에 있어서는 시간이 갈수록 힘이 빠지고, 여려지고, 내가 죽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다가, 그러다 또 힘을 내서 다시 에너지가 올라오고 하는 것과 같은 리듬감에 많이 중점을 뒀죠. 에너지의 리듬감에서 일주일에 대한 느낌, 열흘에 대한 느낌, 석 달에 대한 느낌 등을 찾으면서 시간의 흐름을 연기로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고민을 했었어요. 사실 고민을 많이 하였는데, 그런 것까지 디테일하게 보이진 않았을 것 같아요. 문제는 이거죠. (웃음) 조금 더 찾아봐야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이한희
그래도 연극이란 장르의 특수성의 도움을 받은 것 같기도 해요. 아무 장치도 없이 배우의 말로만 시간의 흐름이 제시되어도 서로 믿게 되는 거잖아요. 관객 분들의 믿음을 저희도 믿고 가야하는 것 같아요.
유종연
사실 지뢰를 밟은 것도 손으로 짚고 발을 떼어내면 되기도 하고, 말이 안되는 게 많죠.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을 장치로 이용해서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연극적 허용이랄까요. 관객 분들도 이런 연극적 허용을 느끼기 위해 극장을 찾아주시는 것 같고요. 결국 저희가 하고 있는 건 지뢰를 벗어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것에 대한 말을 하는 거니까요.

극중에서 남자는 자신이 오랜 시간 지뢰를 밟고 있으니 강한 건지 아니면 벗어나지 못하니 약한 건지 묻고, 이에 여자는 강하고 약한 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당신이 거기 서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란 대답을 한다. 생각해보면 삶이란, 자신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닌 출생의 순간부터 시작해 끊임없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들과 맞닥뜨리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게 나의 잘못이든 아니든, 그 의도치 않음을 마주하고 있는 자신이 강하든 약하든, 또는 비겁하든 간에,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연극 <거기 서 있는 남자>는 그곳에 당신이 서있음을 잠시 위로하고 힘이 되려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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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이원

송이원 연출가
‘丙 소사이어티’에서 글 쓰고 연출하는 사람.
eewons@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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