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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안티고네가 될 수는 없어

호랑이기운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

하은빈

207호

2021.10.14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의 ‘찐 교회 바이브’에 관해서라면 익히 들었다. 하이퍼리얼한 주보부터 공연장 입구 공간의 각종 청년부 장식, 시종일관 은은하게 흐르는 찬송가, 예배와 설교 장면에 이르기까지. 과연 교회 경험이 있는 관객들이 SNS에 쏟아낸 핍진한 증언대로였다. 극사실주의적 설교로 극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객석 어딘가에서 무심코 ‘할렐…’ 하는 화답마저 튀어나왔다. 과연, 어떤 이들의 중추에 아로새겨진 조건반사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공연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교회가 탄압해온 이들의 관점에서 한국 교회 내부의 규율과 문법을 정교하게 재현하고 희화화하는 일의 목적은, 곧 그 논리의 허구성과 자의성을 폭로하고 어떤 균열과 전복의 순간을 꾀하기 위함이다. 이런 기획에 있어서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는 지난해 공연된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극단 쿵짝프로젝트, 연출: 임성현)>와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남산예술센터 대부흥성회>가 개신교 보수화의 거시적인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아우르며 한국 개신교 권력 전반에 관한 비판에 날을 세웠다면,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는 중심인물 ‘혜인’에게 일어난 사건을 따라가면서 그러한 권력이 미시적으로 침투하여 개개인을 옭아매는 양상을 파고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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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보다 성실히 교회에 봉사하던 시온교회의 신실한 청년 혜인이는 청년부의 또 다른 구성원인 ‘예수’와 교제하면서 교회에서 함께 가는 단기 네팔 해외 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임신에 혜인이는 중절 수술을 받게 되고, 예수는 혜인이가 없는 중보기도회 자리에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이 사실을 털어놓으며 속죄한다. 목사는 낙태라는 죄를 저지른 혜인이가 예정대로 청년부 행사에 끼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하며 ‘몸조리’를 핑계로 해외 선교 팀에서 혜인을 배제하고, 혜인이는 충격과 상처를 입어 잠시 교회를 떠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혜인이는 낯선 모습으로 귀환한다. 진한 화장에 초커 목걸이, 올블랙 착장에 터프한 워커를 신은 혜인이의 첫마디는 상큼하고 도발적이다. “늦어서 미안해! 나 낙태하고 오느라고~” 혜인이는 본격적으로 교회의 ‘물을 흐리며’ 청년부를 혼란에 빠뜨린다. 설교 시간에 꿋꿋이 손을 들어 그간 아무도 묻지 않아 온 것들을 질문하고, 찬양인지 조롱인지 혼란스러운 CCM ‘오진예수’에 맞추어 거친 랩을 열창한다. “네가 모두를 힘들게 하고 있다”라는 비난에 혜인이는 예의 말간 얼굴을 한 채 독실하고 천연덕스러운 어조로 반문한다. “제가 무슨 힘이 있어서요?”
극의 후반부는 목사와 혜인이의 팽팽한 갈등을 중심축으로 흘러간다. 그 팽팽한 양강구도는, 일견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의 크레온과 안티고네가 벌이는 갈등마저 연상시킨다. 목사가 (크레온이 그러했듯) 공동체의 규율과 정의를 대리하여 ―그러나 사실은 자의적이고 선별적으로 채택된 논리를 적용하여― 혜인의 죄를 묻고 추방하려 한다면, 혜인이는 (안티고네가 그러했듯) 신의 법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을 변론하고 부당한 압제와 탄압에 영웅적으로 맞선다. 한때 의심 없이 존경하고 따랐던 목사를 똑바로 마주 보며 당당히 사죄를 요구하는 혜인이의 목소리에는 모종의 비장함과 숭고함마저 서려 있다. “나한테 사과해. 주일날 설교 시간에, 신도들 앞에서 나한테 사과해!”
혜인이의 이러한 용기는 단연 눈에 띄게 눈부신 한편으로 궁금증을 자아냈다. 그런 담대하고 우뚝한, 흔들리지 않는 용기를 혜인이는 도대체 어떻게 낼 수 있었던 것일까? 이 극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는 혜인이의 드라마틱한 돌변을 그저 보여줄 뿐, 혜인이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러한 이행을 거쳤는지에 대한 단서는 제시하지 않는다. 극작과 연출을 맡은 이오진은 혜인이가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의도적으로 생략했다고 밝혔다. 이오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혜인이는 그냥 바뀌었고, (…) 더는 같은 혜인이가 아니다. 혜인이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마라. 왜냐하면 혜인이는 이미 혜인이기 때문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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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혜인이를, 그리고 혜인이가 보여 주는 용기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엔 어딘지 석연찮다. 위의 인터뷰를 계속해서 인용하자면 이 극은 혜인이를 통해 ‘피해자다움’이라는 (허구적) 이미지에 틀지어지지 않는 피해자를 그리고자 목표했다. 그러나 피해자의 내면과 외부에서 무수히 발생하는 의심과 검열을 초월할 수 있는 무결하고 스스럼없는 위치에서 행위한다는 점에서, 혜인이는 피해자에게 요구되는 또 다른 판타지를 충족시키는 인물처럼 보인다. 혜인이는 그 어떤 내적인 자기모순과 혼란의 과정도 건너뛰고, 논리정연한 언어로 자신의 피해를 정돈하며,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혜인이 앞에서 “왜 그땐 가만히 있었어?”, “이제 와서 왜 그래?”, “너는 아무런 잘못도 없어?”와 같은, 흔히 피해자에게 돌아오거나 스스로 내면화하기 마련인 질문들은 너무나 간편하고 손쉽게 효력을 잃는다.
물론 어디엔가는 그런 혜인이가 ‘그냥’ ‘이미’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지옥에서 돌아온 페미니스트’ 혜인이가 선사하는 청량감에 즐겁고 통쾌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도처에 있는 피해자들의 자기의심과 자책도 함께 떠올렸다. 왜 혜인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지 못했는지, 그러한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하고 지키지 않았는지 곱씹으며 고통받고 수치스러워하는 이들의 숱한 얼굴들을. 혜인이 보여주는 종류의 당당하고 두려움 없으며 확신에 차 있는 용기란 누구나 쉬이 낼 수 있는 용기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누구나 혜인이처럼 성큼성큼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용기를 모색해야 할까? 누구나 안티고네가 될 수는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변론해야 할까? 가장 하찮고 범속하고 초라한 종류의 용기를 상상한다. 세상에서 가장 겁 많고 가장 두려움에 떨며 가장 흔들리고 잘 넘어지는 이가 내는 한 줌의 용기를 떠올린다. 어딘가에 ‘이미’ ‘그냥’ 존재하는 숱한 혜인이들이 그런 한 뼘만큼의, 한 발짝만큼의 용기를 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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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호랑이기운]

호랑이기운 <청년부에 미친 혜인이>
일자
2021.9.17 ~ 9.30

장소
시온아트홀

작·연출
이오진
연출부
이다빈
드라마터그
장지영
자문
임성현
조명
신동선
무대
장호
음향
임서진
의상
EK
무대감독
이현석
오퍼레이팅
오기택
드럼자문
김범철
홍보사진
이지수
공연사진
박태양
기획
나희경
출연
신윤지, 마두영, 변승록, 송광일, 이산, 이지수, 정은재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1007781
  1. 김세운, 「[인터뷰] 이오진 작가,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혜인이’의 탄생”」, 『민중의소리』, 2021.10.1., https://www.vop.co.kr/A000015992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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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빈

하은빈
목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미학을 공부했으며 글을 쓰고 공연을 한다. <질문들>, <플루토>, <2020 메갈리아의 딸들>, <무용수-되기> 등에서 글을 썼다. <연인들은 바닥없는 호수에서 헤엄친다>, <공연장의 장애인 재난대피 워크숍>,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등에서 무대에 섰다.
https://blog.naver.com/bingguuu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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