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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대학과 연극>

정준원

제222호

2022.09.29

나는 자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모든 사람들의 삶에는 너무나 ‘드라마틱’한 측면들이 조금씩은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겪은 일들을 무대에서 솔직하게 말해버리는 사람들이 좋다.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무언가로, 공연으로 만들어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이야기가 좋다. 사실 이런 내 선호에 대한 논리적인 근거는 없다. 그냥 내 취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그 사람들의 이야기들에는 분명히 누군가는 공감할 만한, 누군가에게는 중요할 법한 어떤 보편의 가능성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대학과 연극>은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의 신작으로, 연출가 성기웅이 배우 이종무와 함께 실제 한 대학에서 계약직 교수로 일하면서 경험했던 일들을 ‘일종의 모크-다큐멘터리’ 형식으로 풀어낸 연극이다. 공연의 이야기 속에서 성기웅은 연출가 성기린, 이종무는 배우 김동무라는 이름의 인물로 등장하는데, 이때 성기린 역은 성기웅 본인이 아닌 배우 선명균이 연기한다. 성기웅은 이야기 속에 직접 출연하는 대신 무대 한쪽의 오퍼석에 계속 앉아 있으면서, 무대에 나와서 직접 발언하거나(맨 첫 장면에서 이 공연의 형식과 이야기 등에 대해서 직접 밝히거나, 공연 내용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등) 공연에 개입하며(‘이번엔 초시계 없이 가보자’와 같은 연출적인 지시를 하는 등) 영향을 준다. 이렇게 공연의 무대에는 이야기의 중심인 성기린과 무대 한쪽에 함께 위치하여 이를 바라보고 개입하는 성기웅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공연 중에 성기린이 어떤 말을 하거나 경험을 할 때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성기웅의 얼굴을 흘깃흘깃 살피곤 했다. 이렇게 성기린과 성기웅 사이의 긴장감은 공연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가늠해 보게 만들었다.

<대학과 연극>의 공연 사진. 두 명의 배우가 보면대에 대본을 펼쳐두고 마주 앉아 있다. 그 사이에 한 명의 배우가 서 있고 이들은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무대 뒤쪽 스크린에는 “낭독공연 <바냐 아저씨> 제 3막의 끝”이라는 제목의 무대 스케치가 보인다

성기린과 김동무는 지방에 위치한 D대학 연기예술학과의 ‘비정년트랙 교수’로 근무하게 된다. 비정년트랙이란 1~3년 정도의 단기 계약으로 임용하는 계약직 교원으로, 승진이나 급여 등의 근무여건이 차별되는 교수계약제의 형태를 말한다. 연극만으로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없었던 성기린은 타 대학들의 교수 임용에서 낙방하다 D대학에 이르게 되고, 이내 성기린의 동료이자 여러 대학에 강의를 나가던 김동무도 D대학으로 오게 된다. 이들은 2년만 근무하면 정규직 교원으로 전환해주겠다는 학교 측의 말을 믿고 D대학으로 왔으나, 곧 같은 과 왕배우 교수의 위계폭력 사실이 밝혀지자, 이 사건에 대한 수습과 더불어 학과장 보직, 커리큘럼 개편 등 수많은 업무들을 떠안게 되면서 과로에 시달린다.
하지만 성기린과 김동무가 아무리 학교에서 밤을 새우며 업무에 열을 쏟는다고 해도, 비정년트랙의 구조적 특성과 성과를 중시하는 대학의 논리들로 인해 재임용 심사를 위한 성과 점수를 채우기는 어렵다. 이와 같이 비정년트랙 교수는 정교수와 다름없는 강도의 노동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비정규직으로서의 불평등한 지위를 갖는다. 공연은 성기린과 김동무를 중심으로, 그들의 입장에서 진행되며 비정규직 교원들이 처한 열악한 노동 현실 문제를 조명한다.

그런데 성기린과 김동무가 과노동에 시달리는 동시에 학과 운영의 주도권을 갖게 되면서, 이들에게는 또한 상대적인 권력이 부여되기 시작한다. 연기예술학과에서 오랫동안 강사로 일한 노연기는 이들의 결정에 의해 강사 자리를 잃게 된다. 학생들은 성기린과 김동무 교수의 마음에 들기 위해, 관심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학생들과 강사들에게 성기린과 김동무는 어쨌든 교수라는 자리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대학과 연극>의 공연 사진. 네 명의 배우들이 책상에 일렬로 앉아 있다. 책상 위에는 스탠드형 마이크 두 대가 놓여 있으며, 한 배우가 마이크 가까이에서 말을 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유행이 시작되었던 2020년, D대학 학생들은 졸업공연으로 <바냐 아저씨>를 준비하는데, 코로나 상황으로 인해 공연은 낭독극으로, 배우들 간의 거리두기를 유지하는 형태로 준비된다. 이러한 연출을 납득할 수 없었던 바냐 역의 학생은 연습 중에 지도교수인 성기린에게 그의 지도 방식에 대한 의문과 함께 여러 불만들을 쏟아낸다. 한 번뿐인 졸업공연을 이렇게 올리는 건 아닌 것 같다, 교수님은 배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야기해준 적은 없지 않느냐, 어차피 교수님은 서울로 돌아갈 생각만 하고 있고, 우리에게는 관심도 없지 않느냐.
공연 중에 등장하는, 성기린과 김동무가 겪는 D대학의 열악한 현실(오랫동안 재직한 교수의 위계폭력, 취업률과 성과만을 중시하는 학교 본부, 학교재단의 비리, 전용극장도 없고 화장실은 매일 막히는 열악한 환경, 그리고 코로나19로 인한 졸업공연의 낭독극 전환까지)에 의해 가장 피해를 보는 것은, 사실 D대학 연기예술학과의 학생들일 것이다. 연기를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치열한 연극영화과 입시를 거쳐 학교에 들어온 학생들.
성기린에게 D대학은 벗어나고 싶은 곳이다. 강도 높은 업무에 시달리며 혹사당했던 학교이니 당연히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그에게 학교는 서울로 돌아가기 전 잠시 머무는 곳이다. 그런데 이 학교의 학생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들에게 학교는 단순히 잠깐 머무르는 곳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것들을 배우고 만들어가는 곳이다.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걸고 학교에 왔을 것이다. 교수의 위계폭력을 고발하고 목소리를 냈던 학생들도, 교수에게 자신이 갖고 있는 의문과 불만을 쏟아냈던 학생들도 그랬을 것이다.

성기린은 결국 D대학을 떠나 다른 학교로 가게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성기린은 전화 통화를 하며 학생들의 졸업공연 <바냐 아저씨>를 보면서 조금 울었다고, 이 학교에서 있었던 일로 <대학과 연극>이라는 공연을 만들어야겠다고 말하고, 공연은 끝이 난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결국 이 공연은, D대학이라는 곳을 ‘탈출’한 사람이 자신이 탈출한 ‘지옥’을 돌아보는 이야기가 되지 않나? 마지막 졸업공연을 보며 어떤 감동을 받았다면, 혹시 그건 이제는 이 ‘지긋지긋한’ 학교를 떠나는 사람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랬던 게 아닐까? 그렇다면 그 ‘지옥’에 계속 남아 있는 사람들은, 남겨진 학생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대학과 연극>의 공연 사진. 한 배우가 꽃다발과 상패를 들고 스탠드형 마이크 앞에 서 있다. 배우 뒤쪽 영상에는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보인다.

졸업식 날 연기예술학과에서 시상하는 ‘오늘의 예술가 상’을 받게 된 학생은 수상소감을 말하다가 오열한다. 나 이제 연기 안 할 거라고,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서 이제 그만둘 거라고 엄마한테 말하고 짐 다 싸놨는데, 그런데 상을 주면 어떡하냐고. 이 더럽고 열악한 ‘대학’과 ‘연극’이라는 현실 속에서 질릴 대로 질린 사람들은(우리는) 왜 그 “돈을 제대로 안 주면서 일 시키는” 연극을 또다시 하게 될까.
마지막 장면 성기린의 말대로 <대학과 연극>에 D대학 졸업생들도 출연했다면, 이 공연을 그들의 이야기라고 볼 수도 있나? 학과 내에서 자신이 경험한 위계폭력과 부조리를 꾹꾹 눌러 고백하던 그 학생들은, 배우를 꿈꾸는 학생으로서 자신이 갖고 있는 질문과 혼란을 거칠게 뱉어내던 그 학생은, 다시는 연극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는데 상을 주면 어떡하냐고 울던 그 학생은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궁금하다.

[사진제공: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이자경]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대학과 연극>
  • 일자 2022.9.16 ~ 9.25
  • 장소 서강대 메리홀 소극장
  • 작·연출 성기웅 출연 선명균, 이종무, 이윤재, 서나영, 마두영, 백종승, 전수지, 김현숙, 강희제, 이수현, 임병수, 임진성, 양윤소, 성기웅, 정상현, 김동원, 차재명, 김남희, 김지연, 김지현, 박세동 무대디자인 서지영 조명디자인 서가영 의상디자인 김지연 소품·분장디자인 장경숙 기술감독·음향디자인 강경호 영상연출 정상현 음악감독 김윤형 연기지도 김동완 조연출 김동원, 오세현 무대감독 박진아 그래픽·사진 김솔 영상기록 플레이슈터 기획 스텝서울 제작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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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준원

정준원
대학에서 연극학을 전공했고, 여전히 연극 주변을 맴돌고 있다. junwon1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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