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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짙은 사랑과 생이 이어지는 소리

국악브라스밴드 시도 X Tory X 민수민정 <연희하는 여자들>

김유경

제222호

2022.09.29

나는 무사히 살아남아서 언니가 되고 싶다. 내가 사랑해왔던 수많은 여성 작가들, 우리 엄마와 친척들, 축제에서 만난 기획자들과 인턴 시절 나를 이끌어준 팀장님처럼 멋진 언니가 되면 좋겠다. 새삼 언니라는 단어가 얼마나 다정하고 소중한지 생각해본다. 차별과 혐오라는 연기가 뿌연 세상에서 나보다 더 거친 과거의 세계를 살아냈던 언니들은 존재만으로도 큰 용기다.
그리고 또 다른 언니인 당신을 만났다(오늘 처음 만났는데 ‘언니’라고 불러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원래 멋있으면 ‘언니’라고 하지 않던가). 당신은 오늘 ‘연희하는 여자’로 이 자리에 섰다. 그리고 무대 위에 없는 당신의 언니와 대화를 나눈다. 몇 년을 같이 공연하다 결혼하고, 임신하고, 아이를 낳고, 또 아이를 낳은 언니들. 그들은 이 무대 위에 서지 않는다. 아니, 서지 못했다. 상모를 쓰고 북을 든 당신은, 장구와 꽹과리, 징을 든 당신들은 씩씩하고 힘차게 연주를 시작한다. 늘어진 하얀 천에 재생되는 익숙한 언니들의 목소리 아래에서.

<연희하는여자들>의 공연 사진. 상모를 쓰고 장구를 어깨에 멘 여성 연희자가 있다. 배경에는 드럼 세트가 놓여 있고, 드럼 세트 위쪽으로 천정에서부터 길이가 다른 흰 천들이 여러 장 늘어져 있다.

“언니 생각이 나 가끔. 사실은 내 생각을 하는 거겠지.”

당신은 덤덤히 이야기를 시작한다. 어떻게 연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얼마나 기뻤는지. 당신의 언니들도 영상으로 이야기한다. 흐릿한 화면 속 멀어서 잘 보이지 않는 당신의 얼굴에서도 빛이 인다. 그 기쁨을 보여주듯 당신은 <판굿>을 선보인다. 그러나 그 신명남은 잦아든다.
당신은 앞으로 잔인하고 가혹한 선택을 해야 한다. 당신의 언니들이 그러했듯이 연희라는 당신의 생과 일상, 그리고 앞으로 생겨날 가족 사이에서 말이다. “얼른 애기들 낳아서 크면 우리는 큰 연습실에서 연습하고 애기들은 작은 연습실에서 놀게 하자”라던 언니의 말은 단지 이루지 못할 꿈이었는지 편지를 읽어 내려가는 당신은 생각한다. 30대가, 40대가 넘은 여성 연희자는 출산을 기점으로 사라졌다. 나풀거리는 상모, 부서질 듯 힘이 넘치게 장구를 치며 무대 위를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 연희자들. 그를 위해 평생을 연습했던 실력이지만 몸을 쓸 수 없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공백기는 고스란히 경력 단절로 이어졌다. 그들은 임신 이전보다 떨어진 체력, 육아로 인한 연습량의 부족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없었다고 담담히 말했다. 나는 괜히 화가 났다. 임신과 출산, 육아를 선택한 언니들 때문이 아니라, 그건 그러한 여성 연희자를 무대에 세우지 않는 세상 때문이라고. 당신의 능력과 노력을 쉽게 대체하기로 결정해버리고 아무렇지 않게 무대를 지속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그러나 나의 분노와 다르게, 화면 속 목소리는 단지 무대가 너무 그립다고 말한다. 무대 위의 기쁨과 환희, 거기서 받는 에너지까지 연희는 그들의 매일이었고, 평생 해온 ‘일’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오래 공연하고 싶다는 꿈을 꾸며 연희는 자신이 죽을 때가 되어서야 그만둘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다.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해야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 가늠할 수 없는 연희에 대한 단단한 사랑에 분노는 사라지고 어떤 먹먹함만이 남았다.

<연희하는여자들>의 공연 사진. 드럼 세트와 흰 천들이 늘어진 벽 쪽으로 크기가 다양한 사진들이 조각조각 영사된다. 전통연희를 연습하거나 공연하는 사진들, 도심의 풍경을 담은 사진들이다.

그리고 임신과 출산, 육아를 최대한 뒤로 미뤄야 할 것만 같다고 말하는 당신에게서 어떤 두려움과 막막함을 본다. 탈진하듯 <Prayer>를 공연하는 당신의 마음을 짐작한다. 언니가 없어도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는 이곳, 아무렇지 않은 이곳이 당신에겐 고민이 아니었을까. 열심히 잘한다고 해서 평생 연희를 할 수 있는 게 아니었으며, 그 끝이 너무나도 명확해 보인다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당신은 고민한다. 그리고 그런 당신 곁에서 연희자가 아닌 나도, 내 생각을 한다. 단지 연희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나를 낳고 일로 돌아가지 못했던 엄마를 생각하고, 아빠가 일하는 회사에선 단 한 명뿐이었던 여성 부장님을 생각했다. 아이를 가짐과 동시에 일을 하지 못했거나, 많은 제약을 받았던 가까운 여성들을 떠올린다. 우리는 함께 고민하기 시작한다. 또 다른 음악이 시작된다.

“내일도 우리가 무대에 설 수 있을까?”

당신이 선택한 건 지금 연희하는 것이다. “연희하는 여자들”을 모아서 당신의 모습과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팀 여성 연희단 Tory에, ‘국악브라스밴드 시도’와 미디어아트팀 ‘민수민정’이 고민을 함께해 이번 공연을 만들었다. 지금 당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방법인 연희를 풍성하게 선보이고, 다큐멘터리 씨어터와 프로젝션 맵핑으로 언니들을 불러온다.
당신의 음악은 때로 애절하고 단호하며, 신이 나고 화려하다. 그 모든 곡을 관통하는 건 힘이다. 당신과 언니들의 말 사이사이에 들리는 음악은 어떤 선언 같다. 이렇게 좋은 음악을 하고 있다고, 이렇게나 잘하고 있다고 증명해 보이듯 연주한다. 추임새를 넣거나, 뒤에서 훌쩍이기도 하는 관객들의 소리를 들으며 이곳에 앉아 있는 모두가 당신의 음악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연은 많은 이야기를 담은 듯하면서도 사실 단순했다. 여성 연희자인 당신의 팬이 되게 만드는 것, 그래서 당신이 음악을 계속 이어 나갈 수 있길 바라게 하는 것이다. 공연은 관객이 있기에 존재할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당신의 연희를 기다리고 있다면, 어떤 세상과 상황이 그를 배제할지언정 그 신명 나는 소리와 움직임은 멈출 수 없을 것이다.
공연의 마지막 부분, 무대 위 하얀 천에는 언니들이 아닌 당신의 동생이 있다. 10대의 여성 연희자가 죽을 때까지 연희를 하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마지막 곡 <아리아리>는 가장 화려한 소리로 대답한다. 너희들이 평생 연희할 수 있도록, 우리가 계속 좋은 연희를 해나가겠다며 시선을 주고받는다. 그게 얼마나 든든한 소리인지 객석의 동생인 나도 힘을 얻는다.

<연희하는여자들>의 공연 사진. 전통 연희자들이 징, 장구, 꽹과리, 북 등의 악기를 앞에 두고 앉아 있다. 그 뒤로 색소폰, 드럼, 수자폰, 트럼본 연주자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있다.

공연 중간중간 당신이 보내던 편지를 잇는 “소리 없이 벼꽃이 지고”라는 문장은 그 끝에서 잊힌다. 여름에 아주 잠깐 피고 지는 아주 작은 벼꽃. 세상은, 여성의 연희는 벼꽃처럼 잠시 피고 지는 것이라고, 그 일생 속 아주 작은 부분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언니와 당신의 연희는 벼꽃이 아닌 벼 그 자체, 생을 잇게 하는 쌀알에 가깝다. 당신의 경쾌한 소리는 “소리 없이 지고” 있다는 목소리를 가리고선 외친다. 짙은 사랑과 생이 가득 채워진 나의 연희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공연을 본 여성 관객 중 한 명이 당신에게 말하는 걸 본다. 꼭 그만두지 말고 계속하라고. 아주 오래 전에 연희를 했다던 어느 관객이 당신에게 꼭, 손을 잡는 눈빛으로 말하는 걸 지켜본다. 눈물이 나는데 자꾸만 미소가 번진다. 아, 나도 힘을 내어 언니가 되어야겠다.

[사진제공: ⓒ 안수민]

국악브라스밴드 시도 X Tory X 민수민정 <연희하는 여자들>
  • 일자 2022.8.27
  • 장소 서울돈화문국악당
  • 기획·연출 김민수, 박원진, 우성희, 최은영 작·구성 김민수 출연 우성희(꽹과리), 임채현(징), 은구(장구), 박은경(북), Shi-ne(태평소·피리·생황), 손성목(테너색소폰), 용균(트럼본), 남택윤(수자폰), 박원진(드럼) 음악감독·편곡 추명호 미술감독·그래픽디자인 이민정 음향감독 김용현 음향크루 오승관 사진촬영 안수민 영상촬영 XOBOO(정지헌) 편지낭독 이상희 리뷰 김유경 자문 김원민 연희하는 여자들 구윤아, 김라영, 김성현, 김시은, 김태현, 김혜진, 류수민, 이초혜, 이한이, 조예영, 한경욱 주최·주관 국악브라스밴드 시도, Tory, 민수민정
  • 관련정보 https://sdtt.or.kr/user/program/2022/8/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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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경

김유경
쉼표가 많은 글을 씁니다. 한 권의 책을 만들고 잠시 에디터로 일하는 중입니다. 다정하게 읽는 눈을 가지고 싶어 공연을 열심히 보고 있어요.
lucy764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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