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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돌봄의 윤회 지옥

혜화동1번지 7기동인 2022 가을페스티벌
래빗홀씨어터 <정희정>

영이

제223호

2022.10.13

연극 <정희정>은 마치 우리 주변의 공기가 언제 그렇게 더웠냐는 듯이 하루아침에 차가워진 10월의 날씨처럼 예고 없이 싸늘해지는 인생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어머니 길정희와 그녀의 딸 양희정을 주인공으로 하는 <정희정>은 인간의 삶에 넝쿨처럼 얽혀 있는 돌봄에 관해 다룬다. 한 인간은 어느 순간 아이를 기르는 보호자의 입장에 있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노인으로서 자신이 돌봄 받는 피보호자의 입장으로 옮겨 간다. <정희정>에서 두 배우가 길정희와 양희정을 서로 번갈아 가며 뒤섞어 연기해 두 인물 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이처럼 하나의 생애주기 안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돌봄과 관계 맺으며 변해가는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하나로 통합해 보고자 하는 시도처럼 보인다.

<정희정>의 공연 사진이다. 검은 상하의에 보라색 가디건을 걸친 여성 배우가 의자에 앉아 있다. 두 손을 턱 아래로 모아 지팡이 손잡이를 쥐고 있으며, 상반신을 구부린 채 지팡이로 몸을 지탱하고 있다.

돌보고 돌봐지는 우로보로스 우로보로스1)

조명이 켜졌을 때 무대 위에 보이는 것은 엠보싱 처리된 하얀색 천으로 덮여 있는 휠체어와 간이침대/의자이다. 울퉁불퉁 부풀어 있는 담요와도 같은 천은 곧장 요양 시설의 쿰쿰한 공기를 떠올리게 한다. 휠체어와 침대/의자가 놓여있는 사각형 무대는 반시계방향으로 대략 30°가량 비틀어진 채 극장 바닥으로부터 살짝 떠 있다. 뜬 공간 사이에는 바구니를 포함한 몇몇 소품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다. 마치 지지할 곳 없이 공중에 떠 위태로운 인간의 삶처럼. 이렇듯 불안하고 취약한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돌봄이 필요하다.
극이 시작됐을 때 여러 시간대를 오가며 나이를 밝히는 길정희와 양희정은 둘 다 아이를 낳아 기른다. 이때 길정희가 딸 양희정을 기르는 과정과 양희정 자신이 또 아이를 낳아 기르는 과정은 서로 구분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즉, 길정희와 양희정, 그리고 양희정과 양희정의 딸은 두 배우 간의 인물 교체 사이에서 어지러이 뒤섞인다. 어린 양희정과 양희정의 딸이라는 두 아이의 모습은 무대 위에서 인형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배우는 얼굴 아래로 유아복을 매달고 그 유아복만을 아이의 형상대로 움직이며 인형극을 펼친다. 마치 인형처럼 스스로의 의지로는 몸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아이의 시기에 인간은 돌봄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러나 육아라는 돌봄의 과정에 투입되는 개인은 그 자신의 삶에서 너무 많은 부분을 소모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양희정과 그녀의 남편은 서로 교대해 가면서 아이를 돌봤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함께 바닥에 주저앉아 “이게 맞아?”라고 자문한다. 단순히 육아에만 매진할 수도 없고 직업과 사회생활까지 더불어 병행해야 하는 하루 일과 속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자는 시간을 줄여야만 한다. 양희정은 요가 자세를 취하며 “이렇게… 매일…”이라고 읊조린다. 가장 고통스럽고 막막한 지점은 이러한 삶이 언제까지 지속되어야 할 것인지 그 기약을 알 수 없다는 끔찍한 악몽과도 같은 현실일 것이다.

눈 밑에 검은 칠을 한 두 배우가 침대에 걸터앉아 휠체어에 각각 한 손을 얹고 있다. 휠체어에는 두 개의 인형이 나란히 놓여 있다.

육아에 필요한 돌봄의 끔찍함은 간병에 필요한 돌봄에서도 마찬가지로, 아니, 어쩌면 더욱더 냉정하고 잔혹한 형태로 나타난다. 길정희는 당뇨로 갑자기 쓰러지신 어머니를 병원으로 데려가야 했을 때 언니의 도움을 간신히 빌렸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고 만다. 육아 생활 때와 마찬가지로 간병과 사회생활을 병행해야 하는 길정희의 일상에서 휴식이란 찾아볼 수 없다. 더 나아가 길정희는 “아프지 않고 건강한 사람들”을 기준으로 구성된 사회 속에서 아픈 사람과 그 아픈 사람을 돌봐야 하는 사람의 일상은 더 이상 일상이 아니라 비일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나마 일상의 틀 안에 들어가 있기는 했던 육아 생활과 달리 비일상의 간병 생활에서는 환자와 보호자의 입장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병원의 행정 시스템과 싸워야만 한다. 진료 한 번을 받기 위해 필요한 서류들은 너무나도 많고, 보호자가 그 복잡한 서류 중에 하나라도 미비했을 때 환자는 누울 자리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어머니를 간신히 의자에 눕혀놓고 순번을 기다리며 허공을 응시하는 길정희의 눈에는 허무와 절망이 역력히 서려 있다. 그리고 간병 생활을 육아 생활보다 힘겹게 만드는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육아 생활 동안에 자신의 아이를 바라봤을 때 최소한 소중함과 즐거움이라도 느낄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간병 생활 동안에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봤을 때 느껴지는 감정은 죄책감과 후회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렇듯 물리적으로도 심정적으로도 견디기 힘든 간병의 현실에 길정희는 결국 자신의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기기로 한다.
요양원에 맡겨지는 길정희의 어머니 또한 육아 시기에 등장했던 아이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인형의 모습을 하고 무대 위에 올려진다. 잔뜩 오그라든 노인의 인형 얼굴 아래 드리워진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배우는 간병 받는 노인과 그 노인을 간병하는 요양보호사의 역할 둘 모두를 동시에 연기한다.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거동과 생활이 불가능한 어린 아이와 마찬가지로 노인 또한 인형처럼 스스로의 의지로는 제대로 움직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아이의 인형이 양희정이자 양희정의 딸이었던 것과 같이 노인의 인형도 길정희의 어머니이자 길정희 그 자신이다. 길정희는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낸 후에도 비를 맞으며 눈물을 흘릴 정도로 무거운 책임감에 짓눌려 결국 어머니가 있는 요양원에 요양보호사로 취직하게 된다. 이때 무대 위에 노인 인형과 길정희가 함께 등장하게 되는 장면은, 마치 그 전에 양희정이 그녀의 딸이자 그 자신인 아이 인형을 안고 있었던 것처럼, 하나의 커다란 생애주기 과정 속에서 개인 간의 구분을 무너뜨리고 흐릿하게 만들어 놓는다. 결국 인간은 태어나서 죽음으로 다가가며 보호자로서만 살지도 않고 피보호자로서만 살지도 않는다. 돌보는 위치에 서 있었다가도 거꾸로 돌봄 받는 위치에 눕게 되는 것이 삶이라는 잔혹한 우로보로스인 것이다.

할머니의 모습을 한 네 개의 인형이 각각 휠체어에 앉아 있다. 휠체어는 일렬로 객석을 마주 보게 놓여 있다.

자본주의의 요르문간드2)

개개인의 삶이 우로보로스라면 개개인들이 모인 사회는 요르문간드이다. 이렇게 잔인한 인생의 순환을 사회는 유지하고 반복하고 재생산해 나간다. 개인이 짊어지기에는 너무나도 무거운 과업인 간병이라는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사회의 필수 인력으로서 요양보호사가 존재한다. 공연은 그러한 요양보호사의 입지가 그 필요의 중요성과 얼마나 배치되는지를 날카롭게 꼬집는다. 작중에서 길정희의 어머니, 혹은 길정희를 돌보는 요양보호사는 단 두 명이서 열 명이 넘는 노인들의 밥을 차리고 또 그 밥을 먹여야 하는 현실에 대해서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이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똥 치우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너무나도 빈약한 월급을 받는다는 것을 고발한다.
분명히 황혼기에 접어든 인간이 삶을 영위하고, 또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요양보호사의 입지가 이처럼 낮은 차원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은 자본주의적 사회 구성의 논리 때문일 것이다. 노동을 자본 생산 행위로 규정하게 된다면 노인 간병 노동은 노동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같은 돌봄 노동에 속한다고 해도 육아 노동은 아이라는 미래의 인적 자원 생산 가능성에 일조하는 행위라고 자본주의 체제는 인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면을 앞둔 노인은 요양과 간병을 통해서도 앞으로 자본 생산 가능성을 획득하지 못하므로 자본주의적 논리 아래서는 그들을 지원하고 양성할 근거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요양보호사들은 분명 노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의 시각 아래 자신들의 행위를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일찍이 요절하지 않는 이상 반드시 맞게 되는 노년 시기의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 체제 그 근본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국가는 끊임없이 저출산을 부르짖지만, 지금 이 사회는 출산된 개인의 끝을 돌봐줄 그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 개인이 생의 동기나 목적 따위는 의문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오로지 맹목적으로 재생산만을 강요하는 국가가 아닌, 대안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인간과 노동을 판단하는 준거를 자본과 생산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할 터이다.

가슴에 실버케어센터라고 쓰인 주황색 앞치마를 입은 배우가 수건을 접고 있다. 배우의 뒤편으로 휠체어에 앉아 담요를 덮은 할머니 인형이 보인다.

[사진 제공: 제공 래빗홀씨어터 ⓒ이지수]

혜화동1번지 7기동인 2022 가을페스티벌
래빗홀씨어터 <정희정>
  • 일자 2022.10.3 ~ 10.9
  •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 구성 공동구성 연출 윤혜숙 출연 이유주, 허진 인터뷰이 강문영, 성애연, 윤주영, 이수가, 임가연 무대 김혜림 조명 성미림 의상 김미나 음향 임서진 음악 박소연 기획 나희경 기록사진 이지수 기록영상 태휘원 오퍼레이터 김다임, 김예지 수어통역 백성희, 이지선 가면협력 팜시어터, 서울괴담 제작 래빗홀씨어터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2081
  1. 우로보로스(οὐροβόρος)는 고대 그리스어로 스스로의 꼬리를 삼키는 뱀을 뜻한다.
  2. 요르문간드(Jǫrmungandr)는 북유럽 신화에서 인간 세계를 빙 둘러싼 채 자신의 꼬리를 삼키고 있는 거대한 뱀을 일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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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이

영이
폭력과 고통, 그리고 분열의 상관 관계에 관심을 갖고 글을 쓴다. 『정서 지도 그리기』, 『밑 빠진 독(毒)에 물 붓기』, 『월간 종이』 등 제작. 제2회 <게임제너레이션> 게임비평공모전 수상.
https://twitter.com/monthly_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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