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사랑의 대화를 위한 거의 모든 것이 주는 넓고 얇음에 대하여

극단 ETS <욕조연극: 사랑이야기>

이지현

제225호

2022.11.10

욕조가
삶이
된다.

이 문장은 연극 <욕조연극: 사랑이야기>(이하 <욕조연극>)에서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있는 존재로 등장하는 여자3이 선언적으로 외치는 대사이다. 그의 몸속 텅 빈 우물에는 거인이 두 발을 딛고 서 있고, 그 거인의 존재가 자신을 짓누른다. 욕조가 삶이 된다. 욕조가 삶이 된다는 것을 선언한 뒤, 여자3은 욕조에서 방독면 같은 헬멧과 오리발을 꺼내 머리에 쓰고 두 발에 끼우고 물 밖으로 나온다. 이따금 세계와 접속하지만 아무래도 그 세계에 속하지는 않는 호기심 가득한 존재로서 등장하는 여자3이 안내하는 바로 그 세계에는 사랑을 갈망하는 인물들이 있다. 두 연인과 한 명의 외로운 남자, 그리고 여자3. 이들은 사랑에 대해, 관계에 대해, 끊임없는 갈등에 대해 철학적이고도 교양과학적이며, 에세이적이면서 동시에 자기계발서적인 이야기들을 무대 위에 쏟아낸다.

<욕조연극>의 공연 사진이다. 빈 무대에 밑이 좁은 사다리꼴 모양의 투명한 욕조가 놓여 있고 물이 절반 정도 담겨 있다. 욕조 앞에 파란 옷을 입은 남자3이 두 손바닥을 눈에 댄 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욕조의 뒤 오른편에는 흰 치마 위로 잠수 헬멧과 노란 구명조끼, 오리발을 신은 여자 3이 비스듬히 허공을 응시한다.

나, 너, 보고 싶어, 미안해, 기억할게, 내 안의 거인, 사랑해, 여기, 지금, 엄마…….

사랑과 관계에 대한 언어들이 무대를 가득 채우리라는 것은, 공연 시작 전부터 사각형 무대 테두리를 둘러싸고 있던 위 단어와 문장들을 통해서도 유추할 수 있다. 매 순간 삶의 실존에 대해 질문하기를 좋아하는 여자1은 자신의 연인 남자1을 피상적이라고 비난하고, 삶에 치여 감정이 무뎌진 남자1은 그런 여자1의 끊임없는 질문에 피곤해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놓지 못한다. 한편 ‘행복한 삶을 위한 사랑법’과 같은 제목의 책을 집필한 행복전도사이지만 정작 자신은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고 연인을 제대로 안아본 적조차 없는 남자2는, 실연의 고통과 외로움에 발버둥 치다 그의 품을 잠시 스쳐 간 여자2에게 강렬한 이끌림을 느껴 그녀를 계속 붙잡는다. 또한 궁핍함 속에서도 배우의 꿈을 놓지 않고 살아가려 애쓰는 남자3의 곁에는 환상인 듯 실재인 듯 여자3이 맴돈다.
사랑을 갈망하는 인물들은 이따금 괴로움을 표출하는 반복적인 몸동작을 통해, 때로는 격렬한 동작에 격렬한 대사를 더해 고통스러운 정서를 신체적 감각으로 드러내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그 고통의 표출 방법은 전통적인 배우의 연기 연습과 연극 무대에서 너무 오랫동안 사용되어온 익숙한 장면을 연상하게 만들어서, 다시 말해 이것은 명확한 클리셰로 보여서, 표현된 정서를 생생하게 체감하기보다는 오히려 땀 흘리는 배우가 수행하는 노고에 더 집중하게 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욕조연극>의 공연 사진이다. 보라색 원피스와 가디건을 입은 여자2가 격정적으로 팔다리를 휘젓고, 여자의 뒤쪽에서 붉은 상의를 입은 남자2가 여자2의 허리를 감싸 들어 올리고 있다.

<욕조연극>에서 클리셰는 움직임을 비롯하여 대사와 음악에서도 나타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철학적이고도 교양과학적이며 에세이적이면서 동시에 자기계발서적인 속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매우 선언적인데, 이를테면 다음과 같다.

1) 철학적이고도 교양과학적인 것: 여자1과 남자1이 나누는 대부분의 대화들. 여자1이 도파민이 작용하는 동안 지속되는 사랑에는 호르몬 작용이 끝나는 시점에 맞춰 유효기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러주며, 남자1에게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추궁하는 것.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모든 것을 기억하는 증후군의 의학적 명칭과 그것이 초래하는 불행에 관해 설파하고 자신들의 관계 속 기억에 대해 언급하는 것, 인물들이 고통의 몸짓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감정을 끌어올리는 행위가 나타내는 신체와 감정의 상호작용 사례.

2) 에세이적이면서 동시에 자기계발서적인 것: 남자2와 여자2가 나누는 많은 대화들. 남자2가 자신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정작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돌아가신 엄마를 제외하고는 초등학교 이후로 누구를 안아본 적도 없지만 여자2가 그에게 안겼을 때 강렬한 이끌림을 느꼈다는 끈질긴 고백과 외침. 공연의 초반부와 중반부에 두 번이나 강조했던 내 안의 거인이 사랑의 힘을 통해 치유되어 어느새 그 존재가 사라졌다는 여자3의 행복 가득한 대사. 그리고 연인의 사랑 장면을 뮤직비디오처럼 긴 호흡으로 장식하는 유명한 배경음악들, 예를 들면 콜드플레이의 ‘Fix You’, 쳇 베이커의 ‘I Fall In Love Too Easily’와 같은.

3) 매우 선언적인 것: 내 안의 뿌리 깊은 거인의 존재를 외치며 욕조가 삶이 된다고 비장하게 외치는 여자3의 독백. 쳇바퀴 도는 삶의 연속에서 커피를 손에 쥐는 순간 이유 모를 따뜻함을 느꼈다고 절규하듯 외치는 남자1의 갑작스러운 고백. 외로움을 잊고 싶어서, 자신이 살과 뼈가 있는 살아 있는 존재임을 느끼고 싶어서 섹스를 할 때가 있다고 소리치면서 동시에 신체를 격정적으로 발산하는 동작을 반복하는 여자2의 대사.

<욕조연극>의 공연 사진이다. 사다리꼴의 욕조 안에 남자1과 여자1이 두 손을 맞잡고 다리를 교차한 채 온몸을 물에 담그고 있다. 남자1은 몸에 딱 붙는 검은색 민소매 상의와 하의를 입었고, 여자1은 민소매의 분홍색 원피스를 입었다. 둘의 모양은 대칭을 이룬다.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인간의 근본적인 외로움과 진정한 사랑에 대한 끊임없는 갈증, 완벽하지 않지만 서로에게 의존하며 영혼을 채워가는 존재들, 이들의 대화에 논리를 보충해주는 검증된 연애의 과학, 장면을 풍성하게 채워주고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검증된 명곡들의 연속. 그리고 공연 내내 무대 뒤쪽 중앙에 위치하여 배우들이 그곳을 맴돌고, 때때로 몸을 담그며 물결과 감정이 함께 일렁이는 것이 표현되는 투명하고 커다란 욕조가 주는 시각적 효과까지. <욕조연극>은 풍성하고 세련된 포장과 내용물을 한데 갖춘 선물 세트 같은 공연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심미적인 요소들을 빠짐없이 골고루 차용하는 것과 그 작품이 고유한 심미성을 획득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When you get what you want but not what you need……

문득, 이 연극에서 연인의 사랑 장면을 감쌌던 콜드플레이의 명곡 ‘Fix You’의 가사가 떠오른다. 원하는 것을 얻었지만 정작 그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좋을까?

<욕조연극>의 공연 사진이다. 여자2가 욕조에 걸터앉아 환하게 웃고 있다. 욕조 안에 선 남자2는 활짝 웃는 얼굴로 발을 첨벙대며 물을 튀긴다.

[사진 제공: 극단 ETS]

극단 ETS <욕조연극: 사랑이야기>
  • 일자 2022.10.09 ~ 10.30
  • 장소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3관
  • 작·연출 김혜리 출연 김승기, 김태민, 권재은, 박지영, 오가현, 이찬용, 허진 조명 신성환 무대 이승희 영상디자인 류윤희 홍보디자인 김만재 조명프로그래머 배대두 음향 최우석,강건일 영상오퍼 이나은 조명오퍼 임효연 기획 권재은, 오가현, 김민지, 김태성, 이지은 제작 극단 ETS 후원 신태양종합건설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1764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이지현

이지현
연극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 illangs@naver.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