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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어지지 않는 선

큰새프로젝트 <윙키>

장지영

제225호

2022.11.10

코로나에 (또) 걸렸다. 두 번째 격리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집에 있자니,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기만 해도 하루가 가는구나, 하는 단순한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혼자 몸을 돌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타인을 돌보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래서 우리는 도비에게 좀처럼 양말을 주지 않는다.

노동과 사랑 사이

인터넷에 ‘윙키’를 검색하였더니, 해리포터 이야기가 맨 먼저 나왔다. 크라우치의 집에서 일하던 집요정 윙키. 해리포터 시리즈에는 집요정이 나온다. 각종 집안일을 맡아 하고 주인을 섬기는 것을 기쁨으로 여겨, 해방을 원하지 않는 종족들. 이 작품의 가정용 AI로봇의 이름이 ‘도비’가 아니라 ‘윙키’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윙키는 도비처럼 ‘해방’된 것이 아니라 ‘해고’되었으니까.
큰새프로젝트의 <윙키>는 가정용 AI로봇 윙키가 돌보던 5개월 된 아이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생기는 이야기이다. 휴머노이드 AI가 보편화된 어떤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이 연극은, 아이의 사망을 둘러싸고 전개된다는 점에서 일견 추리극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극이 전개될수록, 역설적으로 아이의 죽음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죽인 것이 윙키인지 혹은 아이의 엄마인지, 아이의 죽음을 윙키가 방치한 이유는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를 ‘둘러싼’ 존재들이다. 감정이 없으므로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아이를 돌보는 윙키, 아이의 엄마이지만 아이를 사랑하기 어려워하는 아이의 엄마, 엄마와 윙키 사이에서 갈피를 잃은 아빠. 믿음이 사라져 서로를 의심하는 관계와 그들 사이에 숨겨진 이야기가 <윙키>의 진짜 이야기이다.

<윙키>의 공연 사진이다. 무대 왼쪽에 긴 테이블이 놓여있고, 테이블의 좁은 면에 윙키가, 넓은 면에는 남편이 앉아 있다. 윙키의 오른편에는 윙키의 알고리즘이, 남편의 오른편에는 형사가 서 있다. 윙키와 알고리즘, 남편은 허공을 응시하고, 형사는 남편을 보며 무언가 말하고 있다. 윙키의 반대편에 앉아 객석 쪽을 향한 부인은 절망한 듯,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있다.

타인을 돌보는 일을 우리는 이제 ‘돌봄 노동’이라 부른다. 힘과 시간을 들여 애써야 한다는 점에서 이 말은 돌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다. 인간은 삶의 많은 시간을 타인에 대한 의존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고, 그 과정은 오롯이 누군가의 돌봄으로 채워진다. 그 돌봄이 ‘노동’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닌 로봇이 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가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간과된 사실이 있다. 돌봄 노동을 다른 노동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사랑의 문제라는 것이다. 돌봄 안에는 여전히 사랑이 전제된다. 돌봄의 주체와 대상이 모두 가족일 때는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그것은 단순히 ‘노동’이 될 수 있는가? 돌봄 노동에서 ‘노동’과 ‘사랑’의 경계는 어디인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서 모성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말은 이제 신화로 드러났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이를 사랑하지 않는 엄마가 느끼는 죄책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윙키는 엄마에게 “사랑만 주세요”라는 말을 반복한다. 노동의 자리를 비우더라도, 여전히 맡길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아이를 사랑할 수 없는 엄마는 돌봄이 완벽해질수록 죄책감에 시달린다.
윙키가 젊은 여성의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점 또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봄의 ‘노동’을 담당하는 윙키는 ‘사랑’을 주지 못하는 엄마와 대립적인 존재이다. (아이)돌봄의 본질을 이루는 두 요소를 나눠 가져야 하는 주체가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은, 돌봄이 자연스럽게 여성의 것이 된다는 것을 시사하는 듯하다. ‘사랑만 주면 되는’ 아빠는 좋은 사람이 되어 이 그림에서 손쉽게 빠져나지만, 엄마는 그렇지 못하다. 사랑을 주지 못하고 돌봄을 제공하지 않는 부모의 마음을 우리는 목도한 경험이 없다. 아이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죽어버린 아이 앞에서 엄마가 행복할 리 없다. 아이에게 아무것도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엄마의 남은 삶을 더 크게 지배할지도 모른다.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가 돌봄에 전제되는 한, 돌봄을 주고받는 인간은 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니 돌봄에 ‘노동’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그것이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닌 보편의 노동임을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이 노동이 다른 노동과 완전히 동일한 것을 요구하지 않는 특수한 것임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집요정들이 해방을 바라지 않았던 것이 단순히 그들의 ‘노예기질’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듯, 돌봄 노동에 얽혀 있는 두 개의 측면을 우리는 동시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윙키>는 그 점을 보여준다.

<윙키>의 공연 사진이다. 긴 테이블 앞에 갈색 코트를 입은 부인이 앉아 객석을 바라본다. 테이블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고 중앙에 하얀 다기 세트가 놓인 쟁반이 있다. 부인의 뒤쪽으로는 나무로 된 블라인드가 있고, 블라인드 사이로 흰옷을 입은 윙키가 어렴풋이 보인다.

인간의 존재에 관하여

AI의 존재는 이제 낯설지 않다. 여전히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고 해도, 윙키 같은 로봇 존재의 출현은 이제 상상 속의 일만은 아니다. 더 이상 즉자존재와 대자존재라는 도식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존재들의 출현 앞에서, 우리는 인간을 무엇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가?
기후위기 시대가 되면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사물과 자연에 대해 인간이 지배적이고 특권적인 위치를 점유한다는 생각은 폭력적 결과를 낳아왔다. 인간은 지구상에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고, 무엇인가를 착취하거나 지배할 수 없다는 주장은 점차 보편적인 것이 되고 있다. AI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니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것과 완전히 동일한 윤리를 적용할 수는 없겠지만, 생명체가 아닌 존재를 마주하는 새로운 윤리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의 맨 밑바탕에 있는 것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의 문제가 될 것이다. 인간이란 인간 아닌 존재에 대하여 얼마나 특별한가, 무엇이 인간을 다른 것이 아닌 인간으로 만드는가, 인간과 인간 아닌 종은 어떻게 관계 맺을 수 있는가?

<윙키>의 공연 사진이다. 갓 전등 아래 두툼한 이불에 싸인 아기를 안은 윙키가 아기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윙키의 뒤로 아기침대가 보인다.

작품의 후반부 윙키는 자신의 ‘신체’ 밖으로 나온 알고리즘과 마주한다. 윙키는 알고리즘 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 끊임없이 “나는 너”라고 말하는 알고리즘과 윙키는 그러나 같은 존재로 보이지 않는다. 알고리즘과 분리된 윙키는 ‘의식’이 있는 인간 – 따라서 특권적인 – 이라는 생각을 비웃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가능한 하나의 생각을 「사이보그 선언」에서 발견한다. 해러웨이는 사이보그를 “남성이나 여성, 인간, 인공물, 인종 구성원, 개체적 실체, 몸이 지위를 매우 문제적인 것으로”1) 만드는 존재로 보았다. 그것은 우리를 지배하는 이원론을 해체하는 존재이다.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이원론에 윙키는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윙키와의 만남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일 수 있다. 노동을 대신하는, 나에게서 ‘가사’와 ‘돌봄’을 나누어 가져가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삶을 살아가는 어떤 존재로 그것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인간 아닌 존재와 살아가는 방법, 나아가 인간을 ‘의식을 가진 특권적 존재’의 지위에서 내려와 그 자체 인간으로서 존재하게 하는 방법을 배울 수도 있다.
그러나 주인 부부에게 윙키는, 아무리 가깝다 해도 자신들의 소유물이다. 꺼버릴 수도 있고, 버릴 수도 있다. 윙키는 그들을 ‘가족’이라 부르지만, 그들은 윙키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남자는 윙키를 해고한다. 윙키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윙키를 해고한 인간에게, 인간이 아닌 존재와의 연대는 그 가능성이 닫힌다. 아이의 죽음을 개인의 실책, 하나의 기계 결함으로 결론짓는 이들에게 윙키와 함께하는 월드는 없다.

<윙키>의 공연 사진이다. 테이블 위에 윙키의 알고리즘이 누워 두 팔과 두 다리를 들고 물속으로 빠지는 듯한 동작을 취하고 있다. 알고리즘의 뒤에 선 윙키는 망원경을 들고 있는 듯 손을 둥그렇게 모아 두 눈앞에 대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제공: 큰새프로젝트, 촬영: 박태양]

큰새프로젝트 <윙키>
  • 일자 2022.10.20 ~ 10.23
  • 장소 나온씨어터
  • 김도영 연출 장한새 출연 하지은, 윤일식, 차승욱, 김슬기, 심보람 조연출·무대감독 오태광 무대 신승렬 조명 김지우 음향 이현석 영상 신민승 일러스트·그래픽 문준수 기록사진 박태양 프로듀서 임예지 주최·주관 큰새프로젝트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포르쉐코리아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2884
  1. 도나 해러웨이, 「사이보그 선언」, 『해러웨이 선언문』, 황희선 옮김, 책세상, 2019, 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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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

장지영
드라마터그.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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