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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찾는다: 용납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창작집단 양산박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

조혜인

제226호

2022.11.24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은 근대문학사 최초의 여성 소설가인 ‘김명순’의 문장으로 가득 채워진다. 다운스테이지에는 흰색의 직사각형 카펫이 깔려 있으며, 흰색의 불투명한 커튼이 무대 중심부와 업스테이지에 각각 펼쳐져 있다. 배우들이 손전등을 들고 등장한다. 빙글빙글 돌며 흰색 바닥을 비춘다.
본 공연에서 필자는 이렇게 공연의 시간 동안 저 밑바닥을 비추며 ‘무언가를 찾는 행위’에 주목한다. 하얀 바닥은 마치 김명순의 내면처럼 상징된다. 김명순은 자기 삶에서 무엇을 찾으려고 했던 것일까? 어쩌면, 하얀 바닥처럼 김명순은 때 묻지 않은 고결하고 꺾을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진 인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김명순의 내면을 깊이 탐색하고자 하는 행위로서 배우들은 공연의 순간 동안 손전등을 비춘다. 이는 김명순이 자신의 수치―첩의 딸이라는 사실―를 감추기보다는, 치열한 배움으로써 극복하려 하고, 자전적 글쓰기를 통해 오히려 자기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려 했던 삶과 연결된다.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의 공연 사진이다. 푸른 조명이 무대를 비추고, 흰색 얇은 재질의 커튼 앞에 다섯 명의 화자(배우)가 정면을 보고 일렬로 나란히 서 있다. 배우들은 좌측부터 각각 남색 개량한복, 흰색 셔링 블라우스와 초록색 롱 스커트, 흰 와이셔츠와 갈색 바지, 검은 쓰리피스 정장, 베이지색 블라우스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다.

“나의 말, 나의 언어, 나의 세계, 쓴다.” 가부장적 조선 사회에서 ‘용납할 수 없는 신체’였던 김명순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말을 찾고자 했다. 이러한 김명순에게 당대의 문인들은 공개장을 잡지에 게재하며 비판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김명순은 이에 굴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찾을 권리가 박탈된 사회에서 여전히 자기증언적 삶을 이어 나간다. 김명순은 왜 스스로에 대해 뜨겁게 증언을 해야만 했을까? 이에 관해 자크 랑시에르(J. Rancière)의 저서 『해방된 관객』 속 한 대목을 살펴본다.

“진정한 증인은 증언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이다. 이것이 증인의 말에 특권이 주어지는 이유이다. 이 특권은 증인의 것이 아니다. 그 특권은 증인으로 하여금 억지로 말을 하도록 강제하는 말의 것이다. […] 그의 말은 이야기해야 할 사건이 용납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빼앗긴 사람의 말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1)

어쩌면, 김명순은 ‘증언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였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나만 미친년이면 되지?” 조금만 다른 사람과 달라도 가십이 되는 시대에서, 김명순은 달랐다. 김명순은 자전적 증언으로써 ‘쓰기’를 통해 자기 삶을 재분배한다. 이 지점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동시대의 여성들은 과연 용납할 수 있는 신체로서 살아가는가?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온전히 가진 채 말을 하고 있는가? 김명순이 가지고 있는 ‘용납될 수 없음’과 얼마만큼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가? 왜 동시대 여성들은 구태여 증언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때로는 온화하게, 때로는 격렬하게 증언하고 있는가? 그들은 이를 통해 무엇을 찾고 있는가?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의 공연 사진. 개화기 정장 복식의 두 남성이 책 한 권을 들고 들여다보고 있다. 오른편에서 마찬가지로 남성 복식을 한 여성 배우가 두 사람이 보고 있는 책을 유심히 바라본다. 무대 뒤편 커튼에는 ‘누가 죽였느냐’는 헤드라인의 기사가 담긴 옛 신문이 영사되고 있다.

배우들은 계속해서 공허한 흰 바닥을 손전등으로 비추며 무언가를 찾고 또 찾는다. 김명순이 길거리에서 만주를 팔던 시절에 만났던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최종일. 최종일과의 만남은 김명순에게 있어 처음이라는 사실이자 마지막이라는 여지를 둔 순간이었다. 김명순은 일본으로 유학하러 갔고, 서병호와 결혼을 했다. 결혼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다. 김명순이 하얀 마음에 시종일관 그리고(draw/miss) 있었던 것은 최종일이다. 최종일과의 재회가 이뤄지는 장면에서 김명순이 찾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가 선명히 나타난다. 사랑에 대한 자신의 선택마저도 용납할 수 없었던 김명순의 삶이다.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의 공연 사진. 흰 보자기를 뒤집어쓰고 김명순 역할을 연기하는 화자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텅 빈 나무 상자에 왼손을 얹고, 다른 손을 오른쪽 옆통수에 댄 채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다. 나무 상자에서 떨어진 작은 조각들이 바닥에 흐트러져 있고, 정장을 입은 다른 화자가 그 중 하나의 조각을 집어 김명순을 향해 내밀고 무언가 말하고 있다.

김명순의 문장이 막을 관통하고, 막 뒤의 막을 관통한다. 이러한 연출은 김명순의 시대와 동시대를 관통하게끔 만들고자 하는 시도였을까? 각기 다른 시대가 가진 겹이 무대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 김명순이라는 문인의 삶이 위치한다. 필자는 이러한 무대 전략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공연예술을 통해 동시대를 투영하기 위해 왜 김명순이라는 여성 문인을 택하였는가?’, ‘창작자는 어떠한 아이덴티티와 신념을 가지고 사는 사람인가?‘, ‘창작 동기는 무엇인가?’ 본 공연에서는 김명순의 어떠한 기구한 서사와 아름다운 문장과 동시에 창작자의 내면이 수면 위로 드러났어야 한다. 하지만, 오직 김명순의 서사에만 집중하였고 그러한 집중도를 무색하게 하는 형식으로 세 명의 여성 배우들이 그 언어를 분산 발화한다. 관객으로서 무엇보다도 ‘대화’를 바랐던 공연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대화가 공연의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면, 김명순이 찾고자 했던 무언가에 관해 더욱 다양한 여지가 창출되었을 것이다. 또한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책을 읽는 듯한 방식의 발화를 수행한다. 마치 김명순의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어 읽어내는 듯한 발화 방식은 배우가 모두 동일한 보이스 톤을 가지게 해 템포가 상실되는 측면이 있다. 김명순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에 관한 장면에는 톤의 변주가 있었다면 전체적으로 입체감이 형성될 것이라 사료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은 김명순에게 있어서 ‘용납할 수 있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한 일련의 과정들로 포착되기 때문에 의의가 있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나 자신,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사회,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에 대한 성찰의 시간으로 작용한다. ‘나는 무엇을 증언하기 싫어하면서도, 그것에 대해 반드시 증언하며 살아가야만 할까?’ 싫고, 또 싫지만, 이를 악물 수밖에 없는 삶의 몇 가지 사항들에 대해 떠올리며 본고를 마무리한다.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의 공연 사진. 개화기 시대의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를 입은 두 여성이 정면을 보며 차려자세로 서 있고, 무대 뒤편 중앙에 실제 김명순 시인의 초상이 영사된다. 영사된 영상 옆에는 쓰리피스 정장의 남성이 차려자세로 서 있다.

[사진 제공: fotobee studio(양동민)]

제12회 서울미래연극제 초청공연작
창작집단 양산박 <나는 사랑한다: 김명순전>
  • 일자 2022.11.10 ~ 11.12
  • 장소 씨어터쿰
  • 작·연출 장진웅 출연 이수임, 전원희, 전성욱, 서영진, 김나은, 이혜주 PD 이성철 조연출 김다인 그래픽·사진 김솔 기술감독 김의태 안무감독 이다현 연습감독 박진형 진행 김민서 음향오퍼 이성철 조명·영상오퍼 박진현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2012577
  1. J. Rancière, 양창렬 옮김, 『해방된 관객』, 현실문화, 2017, 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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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혜인

조혜인
퍼포먼스와디자인사이언스연구소 연구원. 울보다. 나이 먹으면서 사람 앞에서는 잘 안 운다. 신 앞에서, 공연 보면서는 잘 운다. 아, 웃음도 많다. 무언가를 느끼고 받아들이는 게 좋다. 연결되는 그 느낌이 참 좋다. https://brunch.co.kr/@hichothea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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