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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위에서

극단 비밀기지 <소년대로>

팔도

제232호

2023.04.27

<라이더>, <환한 밤> 등 청소년의 현실과 미래를 주제로 한 연극을 꾸준히 선보여 온 극단 비밀기지의 <소년대로>는 “청소년과 성인의 경계에 선 퇴소 보호종결아동, 가출 청소년들의 아픔과 홀로서기를 그린”1) “청소년극”을 표방한다. 그러니 내가 청소년이라면 <소년대로>를 봤을지, 봤다면 어떤 감상을 느꼈을지 자문해 보게 된다. 물론 아무 생각 없었을 수도 있다. 어릴 때 또래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런저런 텍스트를 접하며 무엇이 나 같은 아동·청소년을 위한 것인지 분별해 본 기억도 없고, 그렇게 분별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깊이 고민한 적도 없었으니까. 사실 이 극의 리뷰 지면은 청소년 관객에게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당사자에게 이 연극이 어떻게 가닿았을지가 더 궁금하고 그 감상에 귀 기울이는 게 더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이제 청소년도 아니면서 굳이 “청소년극”을 보았고 리뷰를 쓰기로 했으니 기억을 되짚어보기로 한다.

<소년대로> 공연 사진.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배우 둘이 앉아 있다. 남성 배우는 푸른색과 무채색 계열의 긴소매 티셔츠에 반소매 티셔츠, 조끼를 겹쳐 입고 있으며, 앞에 영수증 뭉치와 계산기를 두고 오른손에 펜을 들고 있다. 여성 배우는 앞면에 17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녹색 반소매 티셔츠에 빨간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어깨 정도까지 오는 머리를 뒤로 묶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이야기

<소년대로>의 중심인물은 자칭 가출 팸의 ‘대장’이자 생활비 관리 담당인 세훈이다. 세훈의 혼란과 방황에 힘을 주는 이 극의 영제가 괜히 “Boy’s Highway”가 아니다. 그는 주식 관련 유튜브를 끼고 살고 ‘근검절약’을 입버릇으로 달고 다니며 경선, 민, 철수에게 미래 설계를 위해 현재의 행복을 지연하라는 훈계를 일삼지만, 정작 본인은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 부대끼며 같이 살 사람은 짜증 날지 몰라도 관객에게, 적어도 나에게 이런 세훈의 모습 자체는 별문제가 안 된다(그닥 생산적이지 못하다는 점에서 나는 세훈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오히려 연극의 문제는 세훈과의 관계 속에서 나머지 등장인물을 턱없이 단순하게 그린다는 점에 있다. 극은 성실하게 마트 알바를 하며 팸의 생계를 책임지고 포우까지 돌보려 애쓰는 경선의 맞은편에 세훈의 ‘발정기’의 발단으로서 은아를 데려다 놓는다. 세훈처럼 길고양이와 유비되는 은아2)가 언급될 때 경선이 불편해하는 이유는 단지 은아가 세훈의 첫사랑이자 ‘바람’ 상대이기 때문인 것처럼 축소되고, 세훈은 성녀(경선)와 창녀(은아) 사이에서 흔들리는 철없는 가부장처럼 보인다. 세훈은 은아가 여행 경비랍시고 시설 교사들의 돈을 훔쳐 오자 예상치 못한 비도덕성(!)에 난감해하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다.

<소년대로> 공연 사진. 사람 머리를 간신히 들이밀 수 있는 정도의 창 안쪽에서 창턱을 손으로 짚고 바깥을 바라보는 여성 배우가 있다. 그 시선은 45도 각도로 위쪽을 향하고 있으며, 배우의 뒤쪽으로는 어깨에서 무릎까지 다른 인물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경선에게 이별을 선고받고 팸 아지트에서 쫓겨난 세훈은 은아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철수와 민을 대면한다. 세훈과 경선이 보호 기간 종료 후 시설을 나온 자립준비청년이라면 철수와 민은 탈가정 청소년이다. 검정고시를 보고 의사가 되겠다던 철수는 누군가와 칼부림한 모습으로 나타나 돌연 가정폭력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읊고 제 손목을 긋는다.3) 한편 경선이 과로로 입원하면서 생계유지가 버거워진 민은 추측건대 조건만남을 한다. 세훈은 그 현장을 목격한다. 세훈은 ‘그까짓 더러운 돈’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경악하고(그 뻔한 반응과 대사가 더 경악스럽다) 어쨌거나 은아와 떠나 숙소에서 잠든다. 잠에서 깬 세훈은 은아가 자신의 돈도 훔쳐 사라진 것을 깨닫고 ‘좋아한다더니…’라며 고개를 떨군다.
극의 막바지에서 세훈은 후회하며 팸 아이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모습을 상상한다. 연극이 무대에 올려 둔 대안 가족의 풍경은 결국 가부장의 한순간 ‘바람’과 함께 풍비박산 나는, 어디서 질리도록 본 서사 구조를 따라 기운다. 그러다 보니 세훈에게 ‘스스로 행복할 줄 알아야 진짜 어른’이라고, 대단히 의미심장한 양 전해지는 메시지도 공허할 뿐이다. 이 메시지를 진지하게 믿는 것이든 비판하고 싶은 것이든 문장 자체도 낡았고 그것이 극에서 위치 지어지는 방식도 낡았다.4) 이러기 전에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어떤 역사를 체화해 왔고 극 안팎에서 어떤 변화를 겪거나 그러지 않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왜, 연극이라는 특정한 형식을 통해 형상화되어야 한다고 믿는지를 집요하게 자문해야 했다. 고작 아프니까 청춘이고 스스로 행복할 줄 알아야 어른이라는 말을 반복하기 위해서 자립준비청년과 탈가정 청소년의 존재가 피상적으로 동원되어야 하나? “보호종결아동”의 “아픔”과 “홀로서기”에 관해 허구의 이야기를 무대 위에 올리겠다면 비좁은 반지하 방, 밀린 월세, 비정규직 노동, 길고양이 같은 기호를 한데 모아두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년대로> 공연 사진.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동그랗게 하얀 조명이 들어와 있다. 그 조명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두 배우가 보인다. 여성 배우는 누런빛의 플리스 재질의 인형 옷을 입고 있으며, 품에 인형탈을 안고 허리를 굽힌 자세이고, 남성 배우는 쭈그려 앉아 두 손을 앞으로 뻗고 있다.

연극이 무관심한 이야기

극은 아이러니하게도 소년이 후경화될 때에야 희미하게나마 반짝인다. 경선, 은아, 민, 철수, 캣맘의 관계망을 다시 들여다보자.
시설에서 꽤 오랜 기간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추측되는 경선과 은아 사이에 감도는 긴장은 세훈이 은아를 경선의 일터에 데리고 오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발한다. 은아는 늘 경선의 안부가 궁금했다고, 앞으로도 연락하고 지내자며 손을 내밀지만, 경선은 싸늘하게 묻는다. ‘내가 왜?’ 이때 둘은 단지 세훈을 두고 신경전을 벌이는 게 아니다. 경선은 자신이 고되게 일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심에 휩싸여서 그 상처를 은아에게 되돌려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경선의 날 선 반응에 무대 밖으로 뛰쳐나간 은아는 어디로 가서 울었을까, 웃었을까? 쿵쿵 발을 굴리며 마찬가지로 무대에서 사라진 경선은 후회했을까? 세훈이 없는 무대에서 경선과 은아가 나누는 침묵, 시선을 보고 있자면 세훈은 사실 이 소녀들이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상처 입히기 위한 계기나 소품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영화 <칠월과 안생>을 떠올려 보자). ‘왜 나는 늘 혼자가 되는 걸까’라며 질문하던 은아가 세훈을 두고 또다시 홀로 길에 오른 것은 아마 은아 나름의 답을 찾아냈거나, 내심 답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은아는 소리죽여 울다가 얼마 타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끄고 사라졌다. 미련하고 묵묵하게 일하는 경선에게 민이 바락바락 화를 내다 사라졌듯이, 경선이 언제 어딘지도 모를 병원으로 자취를 감추었듯이, 민이 조건만남을 ‘들킨’ 후 떠났듯이 말이다. 이들이 엇갈리는 대로(大路)의 풍경에 대해 극은 함구한다. 아니, 무관심하다.

<소년대로> 공연 사진. 가슴팍에 “두꺼비마트”라는 이름이 붙은 조끼를 입은 배우가, 종이 상자와 플라스틱 상자를 앞에 두고 바닥에 쪼그려 앉아있다. 손가락이 드러나는 장갑을 낀 손은 상자에 걸쳐두고 있지만,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다. 그 뒤로 흐릿한 초점 속에 같은 자세로 일하고 있는 다른 인물이 보인다.

돌출하는 이야기

한편 텅 빈 유아차를 끌고 머리에는 괴상한 장식을 꽂고 이따금 무대를 배회하는 캣맘은 일견 ‘미친 여자’ 같다. 대학에 진학해 시설에 잔류할 수 있지만 고양이 탈을 쓰고 일하면서 생활비나 학비를 메꾸어야 하는 은아를, 캣맘은 ‘진짜’ 고양이로 착각한 듯 붙잡는다. 그런 캣맘에게 거칠 것 없이 먼저 다가가는 건 민이고, 그 뒤를 쫓는 건 언젠가 의사가 되어 민을 찾아가겠다는 꿈을 품은 철수다. 캣맘과 민, 민과 철수의 관계 역시 극의 초점에서 빗나가 있다. 민은 그저 해맑고 솔직한 여자애라서 캣맘에게 친근하게 굴 수 있는 걸까? 철수는 대체 언제 민을 좋아하게 되었고 둘은 그 감정을 어떻게 다뤄 온 건가? 알 길이 없다.
다만 경선과 세훈이 사귄다는 말에 놀란 철수에게, ‘우리가 없을 때 방에서 둘이 어련히 알아서 애정 행각을 하지 않겠냐’고 민이 툭 던진 순간을 떠올려본다. 그건 뒤집으면 타인에게 자신을 쏟아부을 수 있는 ― 그 형식이 다툼이 되었든, 연인 간의 섹스가 되었든, 반려동물과의 교류가 되었든 ― 사적 공간의 필요성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것 또한 닳고 닳은 문장일 테다. 하지만 이 말을 민이 던질 때 그것은 변화구가 된다. 고양이들이 거리에 있으니까 자신도 여기 있다는 캣맘에게 민은, 그렇다면 당신의 집이 우리 집보다 훨씬 큰 셈이라며 웃었다. 연극이 무관심한 이야기를 더 가늠해보고 상상하도록 만들고,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게 하는 건 ‘스스로 행복할 줄 알아야 진짜 어른’이라는 캣맘의 말보다도, 이렇게 민에게서 돌출하는 말들이다. 민을 경유할 때 캣맘은 그저 ‘미친 여자’의 전형, ‘덜 큰’ 어른, 아니면 뭔가 그럴듯한 교훈을 남기기 위한 극의 도구가 아니라, 오랜 시간 거리를 집 삼고 고양이를 자식처럼 여겨 온 여성 홈리스로 읽힐 수 있다. 경선은 과거에 자신이 사랑했던 세훈은 질문을 던질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회상한다. 그렇다. 차라리 오래되고 낡은 이야기와 문장들 위에서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좀 다른 질문을 던져보는 편이 낫다

<소년대로> 공연 사진. 네 배우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일렬로 보인다. 왼쪽에서 두 번째에 있는 배우만 뒷모습으로 서 있고, 다른 배우들은 모두 각자의 속도대로 앞을 향해 걷는 듯하다. 바닥에는 각 배우들의 앞쪽과 뒤쪽으로 모두 그림자가 늘어져 있고, 배우들 사이에 길고 굵은 선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어, 모두 각자의 길 위에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사진 제공: 극단 비밀기지, 촬영 황호규]

극단 비밀기지 <소년대로>
  • 일자 2023.4.8 ~ 4.16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 작가 고정민 연출 신진호 출연 이은지, 우윤구, 조수연, 조하나, 조혜안, 최호영, 한성현 무대디자인 Shine_od 조명디자인 곽태준 작곡·음악감독 공한식 의상 김미나 분장 장경숙 그래픽디자인 유디니크 무대감독 김혜지 음향감독 김경남 접근성 콘텐츠 제작·운영 ㈜한국콘텐츠접근성연구센터 베리어프리 운영협력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음성해설 대본·낭독 서수연 자막해설 제작·운용 구태훈 조연출 방윤선 프로듀서 김예은 홍보 황예선 조명오퍼레이터 염진혁 촬영 R2D2 MEDIA 홍보영상 박준규, 옥상훈 주최/주관 극단 비밀기지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894
  1. 2021년부터 ‘보호종료아동’이라는 명칭은 ‘자립준비청년’으로 변경되었으나 여전히 ‘보호종료아동’이라는 표현이 쓰이고 있고 연극 〈소년대로〉의 홍보물에서도 마찬가지다. 명칭의 변경은 당사자, 관련 종사자를 대상으로 아동권리보장원이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하에서는 ‘자립준비청년’으로 표기한다.
  2. 기실 연극은 드러내놓고 “길거리에서 어른이 되는 고양이와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소개되며, 가출 팸이 돌보는 길고양이 포우는 몇 번이고 세훈과 동일시된다. 포우의 ‘발정기’는 세훈의 ‘바람’과 연결되고 세훈은 포우에게 중성화 수술을 시켜야 한다는 팸의 의견에 포우의 의사는 물어본 거냐며 발끈한다. 그런가 하면 은아는 고양이 탈을 쓰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탈을 쓴 은아를 목격하는 인물은 캣맘과 세훈뿐이다. 그러나 은아가 세훈을 유혹하는 ‘못된’ 고양이라는 걸 암시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극중 캣맘은 다른 고양이를 대할 때와 다르게 은아의 꼬리를 냅다 움켜잡고 빙빙 돌린다. 은아는 나중에 혼자가 된 세훈에게 다가가 고양이 탈을 쓰고 손을 내민다. 지면의 한계로 청소년을 고양이에 단순히 빗대는 문제와 민의 조건만남 상대인 윗집 남자이자 건물주의 아들이 고양이 코스튬을 하고 야옹대던 장면에 대해서는 더 부연하지 않겠다.
  3. 이 연극은 만 7세 이상 관람가다.
  4. 그렇다고 행복이 뭐고 어른은 뭐냐는 질문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질문은 그 가치를 퇴색시키는 방식으로 지겹도록 제기되어 왔고 극에서도 그렇게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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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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