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교란자들의 귀환

국립창극단 <정년이>

김민조

제232호

2023.04.27

웹툰에서 창극으로, 평면에서 입체로 일어난 <정년이>는 개막 장면부터 관객들에게 숨 막히는 흥분과 설렘을 선사했다. 이자람이 작창한 소리 넘버 ‘M1. 이 시대의 왕자들이 온다’를 부르며 매란국극단 단원들이 관객들을 향해 다가오는 도입부 장면은 반세기가 넘도록 창극사의 중심에서 사라져야 했던 여성국극이 내셔널 씨어터의 한복판에 화려하게 귀환했음을 알리는 개선식이나 다름없었다. 국립창극단의 <정년이> 공연을 하나의 사건으로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이 공연이 과거와 현재의 관객들이 공통으로 염원했던 바를 가로질러 우리에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소환이 아닌 귀환. 웹툰 원작과 마찬가지로 창극 <정년이>가 설행된 현장은 잊혔던 과거의 시공간을 불러내어 잠시 들여다보는 공간이 아니었다. 여성이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욕망하는 관객들에게 지금-여기와 여성국극의 천하는 겹쳐진다. 그러므로 매란국극단이 무대에 등장하는 장면은 지연된 역사의 연착을 상징하는 장면을 넘어, 우리의 현재가 뫼비우스의 띠를 돌아서 과거에 도착했음을 선포하는 장면이었던 셈이다.

창극 <정년이> 공연사진. 다섯 명의 매란국극단 단원들과 극단장이 남색 단복을 맞춰 입고 나란히 서 창을 한다. 단복은 남색 철릭 형태의 원피스에 케이프를 덮고, 분홍 허리띠를 두른 형태이며 남색 베레모를 맞추어 썼다. 단장은 단복과 같은 색상의 치마에 연한 하늘색 저고리를 입었다.

이러한 측면은 창극 <정년이>가 관객들에게 여성국극을 소개하는 공연인 동시에 ‘창극’을 소개하는 공연처럼 느껴졌다는 점에서도 간취된다. 여성국극이 창(무)극의 한 갈래라는 점은 분명하거니와, <정년이> 공연 자체를 메타극의 구조가 삽입된 현대적인 여성국극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을 선연히 구별하는 일은 더욱 어려워진다. 국립창극단 단원들은 매란국극단 단원들의 입을 빌려 이렇게 소리한다. “혼자 소리하는 판소리와 다르고 (다르지!) / 연기만 하는 연극과도 다르고 (다르지!) / 춤만 추는 무용 (다르지!) 말만 하는 재담 (다르지!) / 다르지 암만 (암만 암만!)” 이것은 여성국극에 대한 소개인 동시에 <정년이>를 통해 창극단의 공연을 처음 보게 된 관객들에게 창극이라는 장르가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지를 소개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정식 단원과 동료 연구생들이 정년이에게 연기하는 법과 소리하는 법을 가르쳐주는 장면들 또한 창극이 어떤 원리를 지닌 예술인지를 관객들에게 선언하는 장면이나 다름없다. 여성국극의 귀환이라는 사건을 경유하여, 역설적으로 국립창극단은 그들이 지켜온 창극이라는 예술이 무엇인지를 관객들에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즐거운 혼동을 통해 식민지 시대의 창극, 여성국극, 현대적으로 계승된 컨템포러리 창극을 비끄러매는 무언의 계보가 형성된다.
창극 <정년이>는 목포에서 무작정 상경한 정년이가 국극단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자명고> 공연을 올리는 시점까지를 다룬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국극이 전성기를 지나 쇠락에 이르는 시대적 흐름을 모두 묘사하고는 있으나, 원작에서는 중반부 무렵에 다루어졌던 <자명고>를 피날레 부분으로 끌어와 공연을 마무리 지은 것이다. 원작에서 정교하고 탄탄하게 묘사되었던 인물들 간의 관계성이 이 과정에서 단순하게 압축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원작을 알고 있는 관객들은 권부용, 허영서, 백도앵, 박초록 등의 매력적인 조연들이 윤정년의 성장을 돕는 기능적인 인물로 물러나게 된 측면에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년이>라는 IP가 내포하고 있는 가능성을 웹툰-드라마-공연이 각자에게 특화된 장르성에 맞게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창(唱)의 연행성과 극(劇)의 스펙터클에 집중한 제작진의 선택은 수긍할 만하다.

창극 <정년이> 공연사진. 극중 삽입된 매란국극단의 <자명고> 공연 장면이다. 무대 뒷벽에 크고 둥근 천을 걸어 자명고를 형상화하였고, 그 앞에 고구려 복식을 입은 낙랑공주가 양손에 북채를 쥐고 팔을 뒤로 젖혀 북을 치는 모습을 하고 있다.

나아가 <정년이>를 둘러싼 담론 지형과 관련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여성국극이라는 장르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퀴어/트랜스적 정동이 창극 <정년이>에서 어떻게 표현되었느냐는 점이다. 여성이 무엇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장르란 필연적으로 여성이라는 범주, 나아가 성별이라는 범주를 횡단하는 실천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 여성국극단 단원들의 생활공동체와 여성 팬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한 동성친밀성을 연구한 김지혜1), 니마이-바지씨-부치-트랜스를 가로지르는 공통된 퀴어 정동을 탐구한 나영정2), 아울러 웹툰 <정년이>가 초기에는 “퀴어물에 국극을 끼얹은 느낌”의 작품으로 기획되었음을 진술한 서이레와 나몬3)에 이르기까지 여성국극이라는 장르가 근본적으로 퀴어/트랜스적 정동에 근거해 향유되어 왔음을 보고하는 사례는 이미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다.
선택과 집중이란 무엇이 우선적으로 중요한지와 그렇지 않은지를 판별해내는 정치적 과정이기도 한데, 여성 단원들 간의 서사가 약화된 창극 <정년이>에서 퀴어적 친밀성이 다소 희석된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분명히 아쉽게 새길 만하다. 그러나 권부용에 대한 감정이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는 윤정년의 마음이 독립된 창으로 표현되었다는 점, 고사장이 윤정년 앞에 머리를 풀고 남장 여성임을 드러내는 대목이 한 편의 드랙킹 쇼를 방불케 하는 정성스러운 연출로 표현되었다는 점은 값지게 기억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창극 <정년이> 공연 사진. 검은색과 갈색이 조합된 체크 무늬 자켓과 바지, 갈색의 조끼로 이루어진 쓰리피스 정장을 입은 고 사장이 왼손을 주먹 쥐어 가슴 위에 얹고 진지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다. 오른손엔 검은 페도라 모자를 쥐고 있다. 고 사장의 뒤편에 그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정년이의 모습이 보인다. 정년이는 흰 저고리와 파란색 치마로 이루어진 매란국극단의 생활복을 입고 있다.

나아가 이 글에서 꼭 언급하고 싶은 것은, 창극 <정년이> 개막 이전에 불거졌던 젠더 프리 캐스팅 논란이다. “원작의 여성 역을 남성 단원이 맡음으로써 원작과 관련된 젠더 담론을 상기”하고자 했다는 인터뷰 내용을 둘러싸고 불거진 이 논란은 여성국극이라는 퀴어/트랜스 친화적인 장르의 팬덤 내에서도 경직된 성별 이분법이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기실 여성국극을 시스젠더/헤테로 여성들의 장으로 이해하는 시각은 웹툰 <정년이>가 연재되던 시기부터 꾸준히 존재해왔다. 매란국극단 소속 배우들의 관계성을 GL의 문법으로 해석하는 것에 반발 심리나, 윤정년과 권부용이 키스했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공들여 암시된(!) 연재분에서조차 두 사람의 키스 여부를 부정하는 반응은 댓글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자매애를 환영하고 레즈비어니즘을 거절하는 태도는 웹툰 <정년이>가 연재될 당시에는 그다지 지배적인 목소리를 얻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작이 연재되던 시점부터 복류해오던 문제는 창극 <정년이>의 젠더 프리 캐스팅을 계기로 다시금 수면 위로 터져 나오게 되었다. 인터뷰 내용에 대응하는 것은 원작에 등장하는 여성 가수 패트리샤에 모티브를 두고 만들어진 배역을 남성 단원이 맡아 연기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는데, 이 가수가 전형적인 남성의 모습이 아니라 트랜스젠더 마담을 연상시키는 젠더 교란자적인 형상으로 등장한다는 것은 제작진이 여성국극에 내포된 트랜스적 정동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계승하려 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여성들만의 공간에 남성이 침입한다’는 문장으로 손쉽게 틀 지워진 상상력은 실제로 여성들의 자리를 빼앗아가는 남성 중심적 문화산업의 메커니즘과 성별 이분법 너머를 지향하는 트랜스적 실천 사이에 가로놓인 질적 차이를 섬세하게 식별해내지 않는다.

창극 <정년이> 공연사진. 공연중 삽입된 매란국극단의 <자명고> 합창장면이다. 흰색과 붉은색이 조합된 고구려 무인의 복장을 한 다섯 명의 국극단원이 일렬로 서 있고, 그들의 머리 위에는 수직으로 긴 LED 등이 켜져 있다. 각 등은 무지개의 일곱 색상으로 빛을 내고 있다.

모든 문화적 유산이 그러하듯이, 여성국극 또한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아니라 지금-여기의 욕망과 맞닿는 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변용되었을 때 비로소 현재적 가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정은영의 <변칙 판타지>(2016)나 드랙킹 콘테스트 올헤일의 <DRAGx여성국극>(2019)과 같은 공연들이 여성국극을 끊임없이 동시대에 형성되고 있는 퀴어/트랜스적 맥락과 대질시켜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여성국극은 기어이 교란되어야만 하며, 그러한 교란을 통해 ‘여성’이 위축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넓은 무대를 갖게 될 수 있다는 신념 속에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창극 <정년이>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사건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진 제공: 국립극장]

국립창극단 <정년이>
  • 일자 2023.3.17 ~ 3.29
  • 장소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 원작 네이버웹툰 <정년이> 서이레 그림 나몬 극본 김민정, 남인우 연출 남인우 작창·음악감독 이자람 출연 이소연, 조유아, 김미진, 왕윤정, 김우정, 서정금, 민은경, 김금미, 이연주, 정미정, 허애선, 최용석, 박성우, 김수인, 한아윤, 이나경, 김기진 연주 조용수, 박희정, 이성도, 최영훈, 이원왕, 황소라, 박찬희, 이종민, 이혜리 편곡 손다혜 안무 이윤정 무대디자인 정민선 조명디자인 이유진 음향디자인 지영 의상·장신구디자인 유미양 소품디자인 박현이 분장디자인 김종한 외
  • 관련정보 https://www.ntok.go.kr/kr/Ticket/Performance/Details?performanceId=266239
  1. 김지혜, 「1950년대 여성국극공동체의 동성친밀성에 관한 연구」, 《한국여성학》 26호, 2010.
  2. 나영정, 「부적절한 존재들의 계보」, 정은영·양효실·김영옥·나영정·방혜진·안소현, 『전환극장』, 포럼에이, 2016.
  3. 서이레·나몬, 웹툰 <정년이> 후기, 2022. 5. 16.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