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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날 수 없는 열망

영화 <장기자랑>

정혜린

제233호

2023.05.11

영화 <장기자랑>의 세로 포스터. 도화지에 색연필로 그린 듯한 질감의 일러스트다. 하늘색의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4.16 가족극단 노란리본 소속 일곱 배우의 얼굴과 상반신이 그려져 있다. 인물 그림은 흑백이지만, 이들의 머리, 조끼와 모자, 수첩, 머리끈과 팔찌 등은 노란색이다. 포스터 하단 중앙에는 노란 글씨로 ‘장기자랑’이 쓰여 있으며, 그 좌측으로는 ㈔4.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의 로고가, 오른쪽에는 ‘막이 오르면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는 글귀에, 두 아이가 웃고 있는 모양의 동그란 도장이 찍혀 있다. 제일 하단에는 개봉일과 크레딧이 적혀있다.

“목소리는 바깥(외부)에 있는 동시에 안(내밀)에 있어서 그 위치를 특정할 수가 없다. 목소리는 단순히 타자의 그것이 주체의 그것으로 내면화된 것이 아니라 주체와 타자를 뒤엉키게 만든다. 다른 사람의 말이 외부로부터 나에게로 묵직한 덩어리처럼 던져지는 것 같지만 동시에 그것은 내 안에서 나만이 느낄 수 있으며 아무런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공백과 같다. 그래서 목소리는 안팎이 뒤얽힌 공백의 덩어리 같은 특이한 대상이다.”1)

지난 겨울, 죽은 친구를 만나러 납골당에 가기 전날 밤이었다. 으레 그날이 다가오면 나는 머릿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재생시킨다. 녹음을 해놓거나 비디오라도 찍어놨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그런 것들을 찾지 못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이밖에 없다. 기억 속에서 그는 계속해서 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런데 그것은 내가 그를 부르는 것이기도 하다. 오직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이소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장기자랑>을 보고 나왔을 때 그때의 경험이 떠올랐다. 4.16가족극단 노란리본(이하 노란리본)의 배우들은 자신을 OO엄마 OOO라고 부른다. 영화에서는 여러 형태의 부르기가 등장한다. 본 글에서는 연극과 영화에서 등장하는 부르기의 행위들을 살펴보고 그리하여 같은 제목을 공유하고 있는 이 연극과 영화가 함께 꿈꾸는 것은 무엇인지 따라가 보고자 한다.

영화 <장기자랑>의 스틸 사진. 단원고 교복을 입은 극단 노란리본의 일곱  배우들이 서로 손을 잡고 나란히 일렬로 선 뒷모습이 보인다. 그들의 머리 위로 밝은 조명들이 빛난다.

연극이 상연되고 있는 극장을 한번 떠올려 보자. 무대가 있고, 무대 위에는 배우가 있다. 배우의 앞에는 관객이 있다. 배우는 말을 하고, 관객은 듣는다. 극장에서 들리는 소리의 대부분은 배우의 목소리다. 그때 무대 위의 배우가 누군가를 부른다. 부르는 대상은 무대 위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부르기는 무대 안에서와 무대 밖에서 차이를 지닌다. 길을 걷다 누군가 어떤 사람을 부르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부르는 행위는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언제나 정확한 대상을 향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부름의 대상이 나와 같은 이름이라면 혹은 내가 아는 이름이라면, 아니면 바로 나라면 우린 주위를 살피고 누가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지 확인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상이 내가 아니라면 그저 가던 길을 갈 뿐이다. 그러나 무대에서는 그렇지 않다. 그곳에서 목적지가 없는 부름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 목적지는 바로 관객이다. 극장에는 대상이 없어도 무대에서의 부름을 듣는 관객이 존재한다. 배우의 몸이 자신의 힘을 사용해 만들어 낸 공기의 떨림이 관객의 몸에 가 닿는다. 목소리의 출발과 도착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다. 그 사이에서 부르기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연극은 실체 없는 목소리로서 존재를 기억해낸다. 붙잡는다. 기입한다.

노란리본의 배우들이 애초에 연극을 하려고 모인 것은 아니었다. 긴 세월 죽은 자식들의 방을 닦고, 그들이 썼던 글을 찾아 읽으면서 엄마들은 끊임없이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고통이 쉽게 고립되는 것처럼 목소리도 쉽게 고립된다. 고통도 목소리도 철저히 자신 몸의 영역 안에 있기 때문이다. 엄마들은 목소리를 꺼내기 위해서 무대에 서야만 했고 동시에 무대에 서기 위해 목소리를 끄집어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OOO가 아닌 OO엄마로서 자연스럽게 배우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은 OOO의 몸으로 있기에 OOO를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다. 배우의 음성도 몸짓도 모두 누군가를 부르는 행위라고 한다면 노란리본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교복을 입고 춤을 추고 제주도에 도착하는 것 또한 그들이 한 명 한 명의 존재로서 죽은 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은 기꺼이 그 부름의 도착지가 된다. 비켜서지 않고, 자신도 그곳에 존재함으로써. 연극은 존재자와 존재자가 만나는 일이고, 만나야만이 성사되는 일이다.

영화 <장기자랑>의 스틸 사진. 극단 노란리본의 배우들이 연습실에 둥글게 모여 앉아 있다. 이들은 각자 의자에 앉아 대본을 바라보고 있다. 연습실의 한쪽 벽면에는 세월호 희생 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영화 <장기자랑>은 노란리본의 연극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따라간다. 이 과정에서 연극과 마찬가지로 영화의 부르기가 작동한다. 무대 안의 부름을 이어받아 무대 밖의 인간을 호명한다. 호명의 주체는 바로 카메라의 시선이다. 카메라는 정확히 행위자로서 삶의 자리에 서 있는 이들이 생계를 이어가고, 질투하고, 감정을 표출하고, 화해하는 모습들을 불러낸다. 카메라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도록 여겨졌던, 한없이 인간적인 욕망을 가진 이들을 호명한다. 이것이 영화가 주체적으로 부르기를 수행하는 방식이다. 카메라의 눈은 부르기를 통해 한 존재자로 거듭난다. 개인에게 한정된 ‘눈’으로써의 시각 기관과는 달리, 집단적인 눈으로써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영화의 눈(kinoglaz)2)으로 <장기자랑>은 자신이 기록하고 있던 연극 만들기에 일조한다. 이 영화에서 연극 만들기와 영화 만들기는 부르기라는 행위를 두고 끊임없이 상호작용한다. 무대에서 부르는 사람이었던 엄마들은 카메라 앞에서 부름의 대상이 된다. 주체와 대상을 오가면서 OO엄마는 OOO가 되기도 하고 OOO에서 OO엄마가 되기도 한다. 이중의 부르기를 목격하고 있는 관객에게 이제 OO엄마와 OOO는 하나의 존재로 통합된다. 수인 엄마 김명임, 동수 엄마 김도현, 애진 엄마 김순덕, 예진 엄마 박유신, 영만 엄마 이미경, 순범 엄마 최지영, 윤민 엄마 박혜영으로.

개별적인 존재들 앞에 개별적인 존재들이 있다. 연극과 영화는 이념적으로도 실재적으로도 많은 부분이 다르지만 한 가지 공유하고 있는 그것은 바로 극장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서 느꼈던 관람 경험이 완전히 영화의 것도 그렇다고 연극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마 극장 자체의 경험이 더 컸기 때문이었으리라. 극장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바로 그곳을 극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모인다. 모이면 이야기가 발생한다. 발생한 이야기를 두고 한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는 화자와 청자는 일시적으로나마 공동체를 구성한다. 연극과 영화는 그들의 부르기를 통해, 그들이 부르는 이름들을 통해, 그들 자신을 통해 기꺼이 말하고 기꺼이 듣기 위한 점유의 행위에 사람들을 동참시킨다. 그리고 극장은 그 점유를 위해 기꺼이 자리를 내어준다. 공동체의 장소가 되는 것은 극장의 끝날 수 없는 열망이다. 아마 두 <장기자랑>도 극장과 함께 이것을 꿈꾸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장기자랑>의 스틸 사진. 연습실에서 배우들이 연극 <장기자랑>의 한 장면을 연습하고 있다. 박유신(예진 엄마) 배우와 김명임(수인 엄마) 배우가 백팩을 매고 웃는 얼굴로 두 손을 입 옆에 모아 큰 소리로 무언가를 외치고 있다. 이들의 뒤로 여행용 캐리어 손잡이와 우쿨렐레를 양손에 각각 쥐고, 헤드셋을 목에 걸친 이미경(영만 엄마) 배우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제공: ㈜영화사진진]

영화 <장기자랑>
  • 일자 2023.4.5
  • 감독 이소현 출연 수인 엄마(김명임), 동수 엄마(김도현), 애진 엄마(김순덕), 예진 엄마(박유신), 영만 엄마(이미경), 순범 엄마(최지영), 윤민 엄마(박혜영), 김태현 제공/제작 영화사 연필 공동제공/배급 ㈜영화사 진진
  • 관련정보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62787
  1. 박영진, 「목소리」, 『불가능한 목소리』, 림보프레스, 2021, 15쪽.
  2. 기이 고티에, 김원중·이호은 옮김, 『다큐멘터리, 또 하나의 영화』, 커뮤니케이션북스, 2006, 297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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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린

정혜린
주로 연출을 한다. 이야기의 앞과 뒤에서 발생하는 연극적 현상들에 관심을 가지고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번둥천개같은 공연을 만들고자 lunder&thightning이라는 팀을 만들었다. <오차의 범위> 연작을 계속하고 있으며 <오차의 범위:픽션들>, <오차의 범위:OST>를 만들었다.
lunderthightning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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