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

국립극단 [창작공감: 작가] 보존과학자

김민조

제235호

2023.06.15

“아마 최초의 문화적 장치는 그릇이었으리라… 많은 이론가들이 가장 이른 문화 발명품은 분명 채집물을 담을 용기와 멜빵이나 그물 형태의 운반 수단이었으리라 생각한다.” SF 소설가 어슐러 르 귄은 엘리자베스 피셔가 『여자들의 창조』(1975)에서 썼던 문장을 인용하면서 물건을 집어넣어 운반하는 ‘가방’이라는 발명품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한다. 때리고, 찌르고, 두들기는 온갖 도구들이나 그것을 손에 쥐고 휘두르는 남성 영웅의 신화보다 오래된 최초의 발명품으로서의 가방에 주목해보자고 하는 것이다. 르 귄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온갖 잡스러운 물건이 뒤섞여서 덜그럭대는 가방이야말로 ‘SF란 무엇인가’라는 곤혹스런 질문에 대한 가장 멋진 대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자루 속에는 오롯이 영웅을 노래하기 위해 짜인 서사에 결코 담길 수 없었던 모든 이질적인 존재들이 담길 수 있다. “결국, 가방 속에서는 영웅이 멋있어 보이지 않는다. 영웅에게는 무대나 연단이나 첨탑이 필요하다. 가방 속에 집어넣으면 영웅도 토끼처럼 보이고, 감자처럼 보일 것이다.1)
<보존과학자>에 대한 글에서 르 귄의 SF-가방론을 인용한 까닭은 이 작품이 부분적으로 SF적 상상력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버지를 가방에 집어넣는 작품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록 이 작품에 다양한 시간대가 혼합·병렬되어 있긴 하지만, <보존과학자>의 감성적 뿌리는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2)라는 말장난이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던 1990년대 무렵에 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 앨범에는 누가 찍어서 넣어두었는지 모를 두 장의 사진이 간직되어 있으리라. 하나는 양복을 입은 아빠가 한 손에는 서류 가방을, 한 손에는 치킨 봉지를 들고 귀가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 다른 하나는 난닝구를 입은 아빠가 소주병을 놓고 테레비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 정상 가족―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파탄을 맞은 IMF 전후의 풍경을 대변하는 이 사진적 기억들은 기묘하게도 앞서 언급한 말장난의 의미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아버지는 월급봉투가 든 가방을 들고 당당히 현관에 들어서는 영웅이 아니라 가방 속에 들어가버릴 것 같은 존재, “토끼나 감자”처럼 작아진 우화적 존재가 되어갔던 것이다.

<보존과학자>의 공연 사진. 무대 앞쪽에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앞뒤가 뚫린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다. 텔레비전을 마주 보고 앉은 아버지는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다. 두 손은 허벅지 위에 올려두고 있는데, 오른손에는 리모콘을 쥐고 있다. 아버지의 왼편으로 의자 위에 올라 서 두 손을 어깨 높이로 올리고 집중하는 표정의 셋째 딸이 보이고, 그의 왼편 책상에 앉아 셋째를 바라보는 둘째 딸이 보인다. 아버지의 오른편에는 점프수트를 입고 팔짱을 낀 채 정면을 응시하는 제제(‘문 앞에 있는 존재들’)가 있다. 점프 수트에는 모자가 달렸고, 민소매에 바지는 발목까지 오는 길이다. 무대 뒤편에는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종이상자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상자의 왼쪽 하단에는 파란 스티커가 붙어있으며 흰색 태그가 달린 상자도 보인다. 불규칙하게 쌓인 상자 사이사이로 갓등과 의자, 초록 식물이 자라는 화분이 놓여 있다. 그 앞쪽으로 철 전문가(‘미래에 있는 존재들’)의 옆모습이 조금 보인다.

<보존과학자>에서 그 가방에 해당하는 것은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다. 무기력하게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고 있는 아버지(지춘성 분)의 축 늘어진 몸과 생동감 있게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비추는 기계가 대비되는 풍경 속에서 사물과 인간의 경계는 점차 모호해진다. 텔레비전은 바깥 세상으로 문을 열고 나갈 수 없는 아버지에게 남은 유일한 ‘문’이며, 결국 오래된 농담처럼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한 아버지는 텔레비전 그 자체가 되어 인류가 사멸한 천년 뒤의 미래로 보내진다. 연극이 상연되는 무대 후면에는 텔레비전 사이즈의 보존 상자들이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다다익선>(1988)을 일부 패러디한 것처럼 보이는 형상으로 층층이 쌓여 있는데, 이러한 무대 디자인은 아버지가 텔레비전이 되어 최후의 인간, 보존과학자(김서연 분)가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수장고에 도착하게 될 것임을 자연스럽게 암시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텔레비전 세상을 헤매는 동안 자녀들은 바깥 세상에서 비를 맞으며 그들이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찾아 헤매고 있다. 안 봐도 비디오겠지만, 딸들은 ‘인정’과 ‘진입’의 경쟁에서 반복적으로 실패한다. 무대 정중앙에 놓인 거대한 문틀은 마치 누구라도 통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더욱 잔혹한 상징이 된다. 그러나 연극은 아버지에 대한 환멸과 사회에 대한 분노를 약자를 향한 폭력의 에너지로 전환시키는 <청춘예찬>(1999)과 같은 쌍구 년도 청춘극과는 사뭇 다른 길을 간다. 첫째(김시영 분)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서성거리며 모놀로그를 연습하듯이, 랩을 하듯이 있는 힘껏 주정을 부린다. 청춘극의 한 장면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잔뜩 허세를 부리다가 제풀에 고꾸라지는 김시영의 위트 넘치는 연기는 냉혹한 현실에 대해 패러디적 거리를 벌린다. 셋째(백혜경 분)는 “들여보내고 내보낼 뿐/결코 열리지 않는”3) 세상의 원리를 따라잡으려는 듯이 문틀의 주위를 끊임없이 달리고 달린다. 문을 부수고 남은 재료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혼자 문을 만들어보는 셋째의 엉뚱한 건강성 또한 이들이 실패한 잡동사니들이 될지언정 성공과 타협한 괴물이 되진 않으리라는 믿음을 준다. 결정적으로, 이들은 텔레비전 속으로 도피해버린 아버지에게 울분을 터뜨리는 대신 다 함께 웃어버린다. 그래, 마침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구나. 그럼 아버지를 그 세상으로 보내드리자.

<보존과학자>의 공연 사진. 사진 중앙에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앞뒤가 뚫린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다. 텔레비전과 마주한 빈 의자를 두고 세 딸이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다. 의자의 왼편에 가부좌 자세로 앉은 셋째 딸은 연한 분홍색 체크 셔츠에 멜빵 청바지를 입은 단발이며, 의자 뒤편에 선 첫째 딸은 갈색 후드 티 위에 연한 갈색 항공점퍼를 입고 머리를 거칠게 땋아 내렸다. 의자 오른편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둘째 딸은 연한 갈색 셔츠와 고동색 코트에 검은 바지를 입고 가슴께까지 오는 히피펌 머리를 하고 있다. 세 사람의 뒤쪽으로 틀만 남은 문이 보인다. 문이 위치한 무대 중앙에는 주변보다 두 계단 낮은 직사각형 공간이 있으며, 계단의 가장자리에는 톱밥이 쌓여 있다.

둘째(김수아 분)는 백남준의 미디어아트 작품에 텔레비전이 된 아버지를 올려둔 장본인으로, 미래의 보존과학자와 시간의 틈을 두고 마주 보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소 만화적 과장이 섞인 톤으로 표현되는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둘째는 유일하게 정극 스타일 연기로 표현되는 인물인데, 그래서 그에게는 웃음으로 날려 보낼 수 없는 현재의 절박한 고민을 미래에 전달하는 역할이 주어지기도 한다. 텔레비전이 된 아버지가 거장이 남긴 ‘예술 작품’일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던 보존과학자와 자기만의 예술 작품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져 있던 둘째가 서로를 마주하게 되는 장면에 다다르면 이 연극에 복류해 온 진정한 주제가 전면화된다. 예술에 미달하는 삶, 평범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어서 인류의 일부를 대표할 수 있는 어떤 탁월성도 독특성도 없는 삶도 보존될 가치가 있는가. 어떤 삶이 기억되고 전시될 자격을 가지게 되는가. 기계와 예술을 위계적으로 구분했던 보존과학자의 관점에 따르면 “올리고 내리고 쌓고”를 반복하며 살아온 첫째, 둘째, 셋째의 삶 또한 예술에 미달하는 기계의 영역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보존과학자는 인류의 종막에 도착한 텔레비전―아버지의 사물화된 신체를 손으로 만져보며 자신의 관점을 수정한다. 의미의 그물을 던져 사물을 분류하기 이전에 지금 여기에 도착한 그대로의 사물을 촉각하는 일. 보존과학자가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 품고 있는 온기를 대면하게 되는 과정은 ‘보존’의 진정한 의미에 접근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존과학자>의 공연 사진. 무대 중앙에 검은 철제 프레임과 하얀 상판으로 된 트레이가 있고, 그 위에 화면이 꺼진 텔레비전이 놓여 있다. 오른손엔 돋보기를 들고, 왼손은 텔레비전 위에 얹은채 정면을 바라보는 보존과학자1의 옆모습이 보인다. 차가운 푸른 조명이 그를 비추고 있다. 긴 머리를 뒤로 낮게 묶었으며, 흰 실험 가운을 입었는데, 가슴에는 1이라는 숫자와 바코드가 인쇄된 명찰을 달고 있다. 한편 텔레비전 뒤쪽으로는 빨간 점프 수트를 입은 제제와 파란 점프 수트를 입은 림, 노란 점프 수트를 입은 송의 모습이 보인다. 제제는 뒤를 돌아 서있고, 림과 송은 서로 마주 보는 방향으로, 송은 앉아 있으며 림은 서서 그를 내려다본다.

<보존과학자>는 SF 연극으로서는 아쉬운 면이 많은 작품이다. SF적인 설정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작품 내에서 제안된 가상의 세계가 스스로 자율적인 현실을 구성하면서 지금―우리의 세계에 포섭되지 않는 독립적인 행위력을 발휘하게 될 때일 것이다. 인류가 사멸하고 보존과학자 1인만이 남은 세계란 정녕 어떤 세계인지, 그런 상황에서 기획전시를 열고자 하는 보존과학자의 욕망은 무엇이고 ‘예술’의 보존에 집착해야 할 당위성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등등. 치밀하고 단단한 묘사가 필요한 부분들이 다소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는 점은 이 작품에서 SF의 장르성 자체가 다소 도구적으로 활용된 측면이 있다는 아쉬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가상의 미래가 대등한 힘을 가지고 현재를 마주 보지 않을 경우, 우리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이 투사된 메아리 이상의 선물을 돌려받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만남, 접촉, 온기는 분명 우리가 연극에서 찾고 싶어 하는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연극에서 정말 ‘텔레비전’으로 상징되는 사물의 세계를 만났는가. 아니면 그 안에 투사된 인간을 다시 쓰다듬어본 것인가. 기술과 사물이라는 비인간적 타자의 세계로 손짓하는 SF 장르와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표현을 오랫동안 구사해온 연극 장르의 결합은 마냥 행복한 순간들만을 약속하지는 않는다. 기실 SF는 종종 연극을 재활용하기 위해 휴머니즘을 뜯어낼 것을 요구하곤 한다. “재활용 또한 보존”이라는 전제 하에.

<보존과학자>의 공연 사진. 무대 중앙에 보존과학자1과 아버지가 마주 보고 서 있다. 왼편에 선 아버지는 두 개의 안테나가 달린 은색 머리띠를 착용하였으며 은색의 사이버틱한 가운을 입고 있다. 그는 왼 손바닥을 펼쳐 내밀고 있으며, 오른편의 보존과학자1이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뻗어 아버지의 손끝에 가볍게 올렸다. 아버지의 뒤편에서는 림과 제제가, 보존과학자1의 뒤편에서는 송과 아누가 각각 앉고 선 자세로 그들을 유심히 바라본다. 그들의 뒤로 틀만 남은 문이 보인다.

[사진 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창작공감: 작가] 보존과학자
  • 일자 2023.5.25 ~ 6.18
  • 장소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 윤미희 연출 이인수 출연 김도원, 김서연, 김수아, 김시영, 박보현, 백혜경, 송인성, 신재환, 이상은, 임태섭, 조승연, 지춘성 무대·조명 남경식 의상 이윤진 영상 고동욱 소품·분장 장경숙 음악·음향 이승호 움직임 이윤정 조연출 송은혜
  • 관련정보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7140
  1. 어슐러 르 귄, 이수현 역, 「소설판 장바구니론」, 『세상 끝에서 춤추다: 언어, 여자, 장소에 대한 사색』, 황금가지, 2021, 295-299쪽 참조 및 인용.
  2.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라는 문장을 변형한 말장난으로, 정확히 언제부터 유행했는지는 알 수 없다.
  3. 라디오헤드, <Pulk/Pull Revolving Doors>(2001)의 가사.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