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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卒의 기술

작당모의 〈싸움의 기술, <졸>〉

팔도

제236호

2023.06.29

“친절하라.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라는 플라톤의 ‘명언’이 있다는데 나는 이 말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다. 소위 ‘불행 배틀’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각자가 마주한 싸움의 성질은 말할 것도 없고 주어진 무기나 기술의 양과 질도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내가 식곤증과 벌이는 사투와 어머니들의 육아 전쟁은 다른 층위의 싸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라톤을 좀 순화시켜서 이렇게 말해볼 수는 있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사춘기 애들 연애놀음이나 노인의 소일거리에 불과할 것 안에서도 실은 하나의 세계가 무너져 내리거나 창조되곤 한다고, 이건 종종 ‘연극의 기술’로도 증명되곤 한다고. <싸움의 기술, 졸>이 그렇게 해내듯이 말이다.

놀이의 기술

연극은 무대 구석에서 기봉과 양씨가 플라스틱 의자를 탁자 삼곤 장기를 두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굼뜬 속도로 몇 수가 오가고, 대화가 오간다.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어르신들의 장기 승부는 기봉의 승리로 싱겁게 끝나고 둘은 다음 승부를 기약하며 헤어진다. 이어지는 적막 속에서 기봉은 무어라 혼잣말을 한다. 사별한 아내가 알려준 무이징게국 끓이는 법, 명절, 뒷방 늙은이, 그런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대사들을. 그러면서 자리를 정리하는 듯 혼자 몇 수를 또 둔다. 정말이지 이게 전부다. 그런데 기봉의 읊조림과 함께 휑하던 무대는 장기판 위 전장(戰場)으로 신명 나게 탈바꿈한다. 가상의 “설맞이 동네 대잔치”가 시작되고 대국이 무대의 옷을 입는 것이다.
천장에 달린 줄자는 장기판 위에 놓인 기물이다. 배우들 또한 기물이 되어 줄자를 뽑아내 칼질한다. 줄자가 갈리고 부딪치는 소리와 금속이 조명을 받아 번쩍이는 모습이 현란하다. 배우들은 각각 장기판 위의 장, 차, 포, 마, 상, 사, 졸 등의 역할을 소화하다가도 “설맞이 동네 대잔치”의 진행을 위해 순식간에 동네 노인과 아나운서, 관중으로 변모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행마법을 몸으로 펼쳐 보인 후 천연덕스럽게 “설맞이 동네 대잔치” 해설을 이어나가고, 대국 복기를 위해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몇 배속 빠르게 무대를 횡단하다가도 라벨의 볼레로에 맞춰 리듬을 타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잘 논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을 수 없다.

<싸움의 기술, 졸>의 공연사진. 검은 무대에 줄자가 사방으로 어지러이 얽혀있다. 사진 중앙엔 차렷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 검은 옷의 배우가 보인다.

연출은 기발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이다. 화려한 무대 구성은 극의 끝에 이르러 최초의 장면으로 복귀한다. 기봉과 양씨가 대국을 마치고 흘리듯 내뱉었던, 다음 승부에 대한 약속의 장소로 말이다. 이때 왁자지껄했던 관객의 웃음소리도 잦아들고 무대가 비워지면서 그 공백의 밀도가 더 짙어진다. 또 한 판 붙자는 인사, 작별, 기봉의 반복되는 읊조림. 마침내 여기에 이르면 싸움의 기술이란 오직 더 치열하게 상대와 놀기 위해서, 또 한 판 붙자는 그 말 한마디를 나누기 위해서 연마할 가치가 있다고 느껴질 정도다. 이때 ‘상대’는 물론 기봉과 양씨 두 사람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것은 장기인 만큼이나 연극이며 이 대결에는 관객이라는 제3자 또한 끌어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극은 사실 “왜”, “어떻게 싸울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싸움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같은 질문들에 자신만의 행마법으로 이미 답을 찾아낸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극장 안에서, ‘싸움의 기술’이란 ‘놀이의 기술’의 다른 표현이 된다.

<싸움의 기술, 졸>의 공연사진. 두 명의 배우가 복기를 위한 커다란 장기판을 가운데 두고 양옆으로 서 있다. 
            장기판의 상단 중앙에는 ‘한’ 말이 놓여있고, 그 아래로 파란색과 붉은색의 ‘포’, ‘차’ 말이 보인다. 두 배우 모두 한 발에는 롤러스케이트를 신고, 다른 한 발에는 양말을 신고 있다. 
            오른편의 배우는 정자세로 장기판을 바라보고 있고, 왼편의 배우는 오른손을 장기판을 향해 펼치고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서로 다른 길이로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려진 줄자 세 개가 보인다.

복기의 기술

극 중 관객들의 호응이 가장 열렬했던 순간은 분명 기봉의 승리에 석연찮은 구석이 있어 몇 배속으로 대국이 복기 되던 때였다. 복기 후 밝혀지는 바는 초나라 장기 말에 흘리듯 쓰인 초서체 때문에 포(包)와 차(車)가 뒤바뀐 채 대국이 진행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졸 하나로 어떻게 이길까. 하지만 그 실수가 없었더라면 대국을 복기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복기할 필요가 없었더라면 이 놀이는 진작 일찍 끝났을 것이고 놀이가 진작 일찍 끝났더라면 우리가 웃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기봉은 차포 떼고 붙어도 기어코 졸 하나로 한왕 앞까지 진격한다. 그래 놓고는 졸의 특성상 한 번에 한 칸밖에 움직이질 못해서, 곧 질까 봐 심약해진 장군을 개운치 못하게 쫓아다녔다. 이때 졸도 마음 편해 보이지 않았던 건 기분 탓일까. 기봉은 상여소리를 부르며 졸로써 나아갔다. “물가 가재는 뒷걸음질 치고, 다람쥐 앉아서 밤을 줍는데 먼 산 호랭이 술주정하네 그려”. 끝을 이미 아는 싸움을 앞두고 내는 상여소리는 무슨 의미였을까? 분명한 건 그게 결코 상대의 예견된 패배에 대한 장난이나 농담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혼자 두는 장기는 몇 번이고 복기할 수 있고 실수를 바로잡을 수도 있다. 기봉이 극 막바지에 읊는 대사처럼 장기는 ‘김이나 냄새가 나지 않’고, ‘죽지 않는 것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그가 떠나보낸 사람의 모습과 정반대다. 기봉이 극 초반에 언급한 사별한 아내 말이다. 기봉이 사랑하는 이와 함께 했던 시간에서는 김도 나고 무이징게국 내음도 난다. 싸움과 놀이, 나아가 생을 애초에 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자꾸만 그 안팎을 넘실거리는, 김 나고 냄새나고 시들고 또 죽기도 하는 것. 분명 떠났는데 자꾸만 돌아오고 늘 곁에 있는 것 같은데 없는 그것, 그것 없이는 싸울 수도 놀 수도 없는 것. 거대한 실수였다고 치고 되풀이하거나 되돌려 받을 수는 없는 그것. 점점 옅어지겠지만 복기할 수는 있는 그것. 아니, 의식과 상관없이 복기되는 그것.

<싸움의 기술, 졸>의 공연 사진. 커다란 사각 장기판의 각 면을 각각의 배우가 들고 있다. 배우들은 흰색에 초록 줄무늬가 있는 하얀 목장갑을 끼고, 검은 긴소매 상의를 입고 있다. 
            한 배우가 손을 뻗어 장기 말을 옮기는 중이다. 보라색 조명이 장기판을 비추고, 뒤편으로 노란색 조명이 보인다.

애도의 기술

<싸움의 기술, 졸>이 굳이 실수를 거쳐 대국을 복기하고 그 끝에 양 씨와의 작별 인사만이 아니라 상여소리로도 돌아와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면, 앞서 썼듯 싸움의 기술이란 곧 놀이의 기술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삶이든 김 나고 냄새나고 죽는 그것에 빚지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프로이트는 떠나보낸 자에 대한 애착을 끊고 리비도를 새로운 대상에 재투자하는 애도 작업이 ‘성공’해야지만 우울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했단다. 나는 이 사람 말도 썩 좋아하지 않는데 떠나보낸 것들에 대한 복기를 ‘비정상’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를 따르면 기봉도 상여소리를 그치고 리비도를 장기판 위의 승리에만 고스란히 재투자해야 한다. 하지만 기봉은 그러지 않는다. 그러니 이 졸은 애도에 실패함으로써 애도를 지속하는 이상하고 우울한 졸이다.
연극 소개 글에서도 명시되듯이 장기판 안팎의 세계는 이미 그리고 늘 전쟁 중이라 솔직히 복기할 것도, 애도할 일도 한둘이 아니다. 인생은 원래 싸움의 연속이고 세상 사람들 다 나름대로 힘드니까 친절하라는 말도 싫지만 상여소리도 더는 듣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한 졸의 이런 기술들에는 전염성이 있어서 더 싫은 것에 덜 싫은 것으로 맞서고 싶게 만든다. 그만 잊으라는 말에 대고 상여소리를 내고 싶게 만들고 싸우든지 놀든지 간에 상실과 애착에 대해서, 김 나고 냄새나고 시들고 죽는 것들에 대해서 노래하는 편이 낫겠다고 믿게 만든다. 연극이 엿보게 해주는 한 줌의 기봉의 세계, 어떤 면에서 상실되고 무너졌으나 복기되며 끝끝내 존재하는 세계에는 그런 힘이 있다. 어쩌면 무엇보다도 이것이, 이것만이 졸의 기술이다.

<싸움의 기술, 졸>의 공연사진. 검은 긴팔 상의에 초록 줄무늬가 들어간 하얀 목장갑을 낀 네 명의 배우가 양손을 자신의 가슴과 배에 올리고 나란히 서 있다. 
            이들은 각자 재치 넘치는 표정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네 배우들 사이로 천장에서 뻗쳐 내려온 여러 개의 줄자가 보인다.

[사진 제공: 작당모의 Ⓒ박태준]

작당모의 <싸움의 기술, 졸>
  • 일자 2023.6.1 ~ 6.11
  •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작·연출 김풍년 출연 이미숙, 노희석, 김계남, 김솔빈, 최필규 의상 김지연 포스터 노승환 사진 박태준 도움 박효진 프로듀서 신재윤 음악 옴브레 분장 장경숙 인쇄 주용빈 안무 금배섭 음향 김경남 무대감독 원소미 협력PD 이효정 조명 탁형선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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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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