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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에 날개를

앤드씨어터 <유원>

권혜린

제237호

2023.07.13

소설 원작의 연극 <유원>은 포스터가 소설의 표지와 동일한 것처럼 내용도 원작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서사만큼 중요한 것은, 담배꽁초 때문에 불이 나자 자신을 이불에 감싸 11층에서 던진 언니 덕분에, 그리고 떨어진 자신을 받아 내느라 한쪽 다리가 부서진 아저씨 덕분에 생존하게 된 유원의 감정이다. 감정에 따라 붉은색과 푸른색 등으로 다채롭게 물드는 조명처럼, 죄책감을 기본으로 하지만 하나의 감정으로 환원되지 않는 재난 생존자의 복합적인 감정이 드러나는 것이다. 재난의 사건은 이후의 삶에서도 어두운 감정들을 말끔하게 제거하지 못하게 한다는 점에서 청소년의 성장이라는 편한 단어로 이 작품을 단언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대신 <유원>에서는 자신의 상황을 어떻게 겪어 낼지 그 방식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내밀한 마음들을 드러내면서 수많은 갈등 속에서도 그 상황을 돌파하고자 하는 과정은 재난 생존자에게 연민을 지니게 하거나, 재난 생존자가 위기를 극복하는 식의 단순한 구조를 탈피한다는 점에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재난을 겪은 이들을 얼마나 안일하게 대하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유원>의 공연사진. 무대 중앙엔 하나의 초와 여섯 개의 빨간 체리로 장식된 분홍색 2단 케이크가 나무 상자 위에 놓여 있다. 
            다섯 명의 사람들이 케이크를 향해 서로 거리를 두고 앉아 있다. 이들은 각자 케이크와 동일한 나무 상자 위에 앉아 성경책을 펼쳐 바라 본다. 
            케이크를 기준으로 왼편에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하늘색 원피스에 흰 가디건을 걸친 여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검은색 상하의를 입은 여자와 검은 아노락 상의를 입은 남자, 여름 교복을 입은 여자가 보인다. 
            우측의 검은 상하의의 여자와 교복 입은 여자 사이에는 빨간색 쇼핑백이 하나 놓여 있다.

고독을 여는 열쇠

극이 시작하면 어두운 음악 속에서 케이크를 들고 홀로 서 있는 유원이 등장한다. “작위적이고 더럽게 나쁜 일”과도 같은 그날을, 자신을 위해 희생한 언니의 생일과 기일을 기리는 케이크이다. 사정을 아는 주변 사람들은 유원을 다정하게 대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스스로의 상황을 의식하게 해 유원은 더욱 적극적으로 혼자 있는 편을 택한다. 화장품점이나 문구점에서 혼자 쇼핑을 하고, 친한 친구도 만들지 않는다. 언니를 추모하기 위해 언니의 친구 신아와 목사님, 아저씨가 방문하지만, 그들뿐만 아니라 부모까지도 유원의 고독을 해소해 주지 못한다. 언니의 그림자 안에서 살아왔기에 자신을 원해서 이름을 원이라고 지었던 언니의 바람대로 언니가 원했던 존재로서만 나타나는 것이다.
유원의 고독을 연 사람은 혼자만의 아지트라고 생각했던 학교 옥상에서 우연히 만난 수현이다.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지닌 수현은 유원의 고독도 거리낌 없이 연다. 아저씨를 증오하고, 언니를 싫어하는 등 남들에게 보이지 말아야 할 감정을 숨기느라 곪아 가는 유원과 달리 수현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밝히면서 유원에게 다가간다. 자신의 문제가 곧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던 유원과 달리 1인 시위를 하거나 유기견을 돕는 등,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도 관심을 두는 수현은 유원에게 낯선 존재이지만 그만큼 끌리는 대상이기도 하다. 수현이 아저씨의 딸이었다는 것을 알고 배신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집에 처음으로 초대한 친구였을 정도로 유원은 마음을 열면서 타인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어른들 사이에서 어른스러운 척 있었지만 겉돌고 있던 것에서 벗어나 당황하고, 화를 내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등 감정들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것이다.

<유원>의 공연 사진. 교복을 입고 검은 백팩을 멘 여자와 파란 체육복에 흰 백팩을 맨 여자가 정면을 보고 서서 고개만 돌려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머리를 귀 높이에서 하나로 묶고 있다. 
            오른편에 선 여자는 눈썹까지 오는 앞머리를 내렸고 체육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렸으며, 왼편의 여자는 양손으로 백팩의 어깨끈을 잡았다.

재난 계산법

유원을 어른스럽게 만들었던 재난은 두 번째 삶을 선사한 계기로서 닻이자 덫이다. 그 뒤의 삶은 재난을 기준으로 계산되는 것으로서 재난의 사칙 연산과도 같은 삶이었기 때문이다. 먼저 재난의 곱셈은 유원이 언니의 몫까지 두 배로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언니의 목숨을 아까워하고 크게 될 사람, 그렇게 갈 사람이 아니라고 할 때 대신 살아남은 존재로 치부된 유원은 언니의 몫까지 행복해져야 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덧셈은 아저씨가 ‘해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혜를 입었기에 내치지 못하고 유원의 가족이 꾸며 낸 행복을 덧붙이는 모습에서 나타난다. “웃음 없는 웃음소리”로 화목한 분위기를 가장하고,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고 당시에 사례금과 모금액으로 보상을 했지만 부채감은 계속 남아 수현이 유원의 ‘목숨값이 비싸다’라고 했던 것처럼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십 년 넘게 이어진다. 그다음으로 뺄셈은 아이러니하게도, 두 배로 행복해져야 하지만 재난을 겪었기에 행복한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것은 소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원은 웅크린 자세를, 불안해하거나 우울해하는 표정을, 자신 없어 하는 목소리를 드러낸다. 이는 동작이 크고 표정과 목소리에서 활기가 넘치는 수현과 대조된다. 그러나 수현도 진지한 태도를 보여주는 순간이 있는데, 나눗셈으로서 ‘감정의 할당량’을 이야기하는 부분에서다. 모든 감정을 한 명의 개인이 짊어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수현은 아버지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부끄러움과 증오, 미안함 등을 이야기하지만 자신과 동생 정현, 어머니가 그 부분을 담당했기에 유원은 거기에서 제하려고 한다. 대신 유원의 존재가 아버지에 대한 증오의 할당량을 줄여 주었다고 말하면서 부채감을 덜어 주는 나눗셈을 보여준다.

<유원>의 공연 사진. 사진의 우측 3분의 1정도를 가리는 기둥 뒤로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밀착하고 다급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교복을 입고 한 손을 땅에 짚은 여자는 등 뒤로 검정 백팩을 메고 있고, 흰 반소매티에 빨간 바지를 입은 여자는 두 손으로 흰 백팩을 가슴에 안고 
            두 눈을 똥그랗게 떠 앞을 살피고 있다.

자유롭게 추락하도록

<유원>은 재난의 무게로 추락했을 때, 상승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더 자유롭게 추락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각별하다. 이는 저절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서려면 용기가 필요했다”라고 했던 것처럼 용기를 추가했기에 가능하다. 유원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과, 마음과 겹쳐지면서 위축되고 경계하던 몸짓과 표정 대신 바깥으로 열리는 동작과 생동감 있는 표정이 나타난다. 사업을 위해 방송 출연을 강요했던 아저씨에게는 당당해지고 편해지고 싶다고 말하며, 친언니처럼 챙겨 주었던 신아에게도 자신에게서 언니를 찾았던 부담감을 토로하며 자신감을 찾을 때까지 만남을 보류하자고 이야기한다. 그들이 유원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유원으로 인해 얻을 이득이나 유원의 언니를 원했다는 것을 전달한 것이다. 이와 같은 솔직함을 직면했을 때 아저씨 역시 유원이 무겁지 않았다고, 인간이 원래 약하다고 하면서 유원의 가족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을 그만둔다. 유원의 엄마도 비로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면서 아저씨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게 된다.
또한 11층을 “절망적인 높이”라고 하면서 3층에 살았다면 언니도 죽지 않았을 거라는 괴로운 가정을 하던 유원은 패러글라이딩을 하면서 자신에게 날개가 돋았음을 느낀다. ‘감히 행복할 수 없었던’ 부자유를 떨치고 추락에 날개를 단 것이다. 그리고 언니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원래 계속 자는 애”라고 했던 동급생을 외면하지 않고 수현처럼 깨워 주는 것으로 이어진다. 소설에서도, 연극에서도 두 장면에서만 등장하는 이 인물은 중요해 보인다. 첫 등장에서 그를 깨웠던 수현과 달리 유원은 ‘원래’라는 부사를 덧붙이며 자신이 행동하지 않는 이유를 내세우고 거리를 둔다. 그러나 ‘원래’ 거리가 있는 것 같았던 수현이 자신에게 다가오면서 거리를 좁혔던 것에서 영향을 받아 유원도 변화하게 된다. 이는 대화가 부재했던 사이에서 ‘원래부터’ 친했던 것처럼 일상적인 대화가 오가게 한다. 날개를 달고 추락했을 때 유원 역시 비로소 자신을, 자신의 삶을 원할 수 있게 되었다. 자던 아이가 웅크려 있다가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드는 것처럼, 유원도 자신의 삶에서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드는 순간 깨달았다. 그 장면을 연극을 보는 내내 원했다는 것을 말이다.

<유원>의 공연 사진. 주황색 밝은 빛이 뒷벽을 모두 물들였다. 벽 앞으로 가슴 높이까지 오는 검은색 철망과 마주 보고 있는 두 인물의 실루엣이 보인다. 
            반바지에 백팩을 멘 인물이 주먹 쥔 오른손을 곧게 뻗어 교복을 입은 인물에게 무언가를 건네주고 있다.
ⓒ박태양

[사진 제공: 앤드씨어터]

앤드씨어터 <유원>
  • 일자 2023.6.16 ~ 6.25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 연출 전윤환 원작 백온유 『유원』 (창비, 2017) 각색 신재훈 출연 강민지, 김계림, 민재원, 윤일식, 이도준, 이윤하, 이지향, 홍재이 PD 권근영 드라마투르그 장우재 무대 송지인 조명 박진수 움직임 송주원 음악/사운드 정혜수 표지그림 우지현 사진/그래픽 박태양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 공동기획협력 PD 이효정 무대감독 유창대 음악감독 정하윤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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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린

권혜린
문학 연구자, 강사,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더 자유롭게 읽고 쓰기를 꿈꿉니다.
lingi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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