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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 서사를 운전하기

제10회 대한민국 신진연출가전 경연작
극단 문지방 <하붑>

김민조

제237호

2023.07.13

‘주인공들이 잃어버린 아이를 찾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애리조나의 황량한 사막을 종횡무진 누비는 작품’. 얼른 보면 신작 영화의 시놉시스로 착각될 수 있는 이 문장은 사실 <하붑>이라는 연극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간추린 것이다. <하붑>은 연극과 영화의 장르 차에 대해서는 별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이 이름만 들으면 알 법한 유명한 영화들을 기꺼이 레퍼런스로 끌어들인다. 이를테면 <역마차>(1939)나 <석양의 무법자>(1966) 같은 고전적인 웨스턴 영화들, <델마와 루이스>(1991) 같은 로드 무비, 심지어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처럼 포스트 아포칼립스 계열로 분류되는 영화에 이르기까지.
<하붑>의 주인공 ‘영원’과 ‘영하’의 여정이 펼쳐지는 사막은 장르화된 세계이자 클리셰들의 접합으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애리조나 유일의 비디오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영하는 그들이 작중에서 처하게 되는 상황들이 영화적 클리셰들과 닮아있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아이를 찾기 위해 빌리지 주민의 단독주택에 침입했을 때는 <기생충>(2019)의 한 장면을 언급하고, 성난 주인이 날려대는 총알을 피해 질주할 때는 영원에게 델마와 루이스처럼 손을 잡고 달리자고 제안하는 식이다. 그러나 <하붑>이 지속적으로 클리셰를 난입시키고 클리셰를 가리키는 이유는 단지 주인공들이 벌이는 소동에 장르적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삶이 클리셰를 모방하게 되는 마법 같은 전도에 대해, 혹은 결말이 정해진 상황극에 스스로를 가두게 되는 불행한 자기암시의 위력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한 장치로도 읽힌다.

<하붑>의 공연 사진. 석양의 붉은 색을 닮은 조명이 무대 뒤편을 비추고 있다. 
            무대의 뒷벽을 덮는 천은 갈색과 주황색 톤의 여러 천을 덧대어 미국 서부의 사막 느낌을 준다. 
            무대에는 왼쪽부터 의자에 멍하니 앉은 영원과 서 있는 영하, 손에 휴대용 위스키 술병을 들고 앉은 웨스트우드가 있다. 
            영원은 갈색 인디언풍의 치마와 올리브색 민소매, 흰색 레이스 가디건을 입고 짧은 머리를 아래로 묶었다. 
            영하는 카키색 워커와 청바지, 남색 셔츠에 가죽 조끼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다. 
            웨스트우드는 카우보이모자에 판초를 걸치고, 검은 바지에 구두를 신었다.

<하붑>이 ‘불행 서사’를 메타적으로 응시하는 작품이라는 점은 연극이 중반부로 넘어갈 무렵에 이루어지는 반전을 거치며 점점 분명해지기 시작한다. 영하의 진술에 따르면 영원은 두 종류의 망상에 시달리고 있는데, 하나는 애초에 있지도 않은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아버지인 자신을 오래전에 떠나버린 남편으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애리조나 전역을 뒤지며 아이의 행방을 수색하는 로드 무비처럼 보였던 연극은 이제 영원의 무의식을 탐조하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운 장르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이 연극에서 발견되어야 할 것은 아이가 아니라 영원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관객은 영원이 아이가 있을 법한 장소로 지목하는 놀이공원이나 수영장 같은 장소들에서 그가 품게 된 망상의 원인을, 혹은 불행 서사의 기원을 조심스럽게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영원이 들려주는 이야기에는 이른바 ‘IMF 키드’가 경험한 불행한 가정과 반복 강박의 문제가 스며들어 있다. 부모에게 방치되었던 경험, 회사가 부도나자 사라져버린 아버지, 불행한 가정을 자기 아이에게 똑같이 물려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강박적인 피임과 이혼. 그러니까 영원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영원이 유년 시절에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경험들이 투사되어 만들어진 “먼지덩이”와 같은 존재였다고 할 수 있다. 영원의 망상이 상연될 수 있도록 돕는 배우이자 그 연극을 지켜보는 하나뿐인 관객으로서 영하는 그의 딸이 스스로를 복제하며 증식하는 가족 삼각형의 저주에 갇혀 있음을 직감한다. 비디오광인 영하의 시선으로 보자면, 영원은 망상을 통해 자신의 인생이 불행 서사의 클리셰를 답습하도록 몰아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하
너희 엄마가 널 가두고 있었던 게 아니라 네가 널 가두고 있다고. 클리셰처럼. 3류 영화감독처럼 우울한 전형적인 캐릭터를 네가 만들었다고, 똑같은 이야기,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하다 못해 궁금하지도 않은, 아무도 흥미로워하지도 않는 방식으로. 결말을 만들고 있다고.

과연 영하의 말대로 존재한 적 없는 아이를 찾아 나섰던 영원의 여정은 스스로를 ‘전형적으로 불행한 캐릭터’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불행을 재현하는 모든 실천은 불행을 물신화하는 효과로만 귀결되는 것일까. 영원의 망상이 중단되고 영하가 남편의 가면을 벗게 되는 시점에 도달하면 관객은 여태껏 지켜봐온 ‘연극’의 효력이 무엇이었는지를 자문하게 된다. 영하는, 어쩌면 이 연극이 영원에게 거울의 역할을 해주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이 세상이 영화적 클리셰로 포화되어 있는 것처럼 너의 불행 또한 네가 만든 클리셰에 지나지 않는다고. 메마른 사막에서 자라나는 애리조나 선인장처럼 21미터씩 뻗어나가서 그 거울을 부수고 나오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하붑>의 공연 사진. 어두운 무대에 창문 모양으로 밝은 하늘빛 조명이 비추어 무대 공간이 실내임을 알려준다. 
            무대 중앙엔 옆으로 누운 사다리꼴 모양의 울퉁불퉁한 대도구가 보이고, 영원과 영화는 이를 바라보며 잔뜩 움츠려있다. 
            영원은 상체를 숙이고 영원의 팔뚝을 움켜잡고 영하는 쪼그리고 앉아 몸을 잔뜩 움츠렸다. 그들의 뒤로 장총을 어깨에 걸친 채 반쯤 가려진 웨스트 우드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영하의 한계는 뚜렷하다. 영하는 아내와 딸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피함으로써 영원의 불행이 시작되는 계기를 제공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입장에서 영하는 거울 속에서 빠져나오라고 강변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연극을 진정으로 종결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영원 자신밖에 남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영원은 밀폐된 자동차 안을 배기가스로 가득 채워 자살을 시도하지만 죽음이 눈앞에 닥쳐온 상황에서 살아나가는 쪽으로 “핸들을 돌”려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장면은 아버지에게 운전을 맡겨 왔던 영원이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는 장면이기도 하다.
영원이 불행과 죽음에 대한 강박을 끊어내기에 이르는 과정이 매끄럽게 설득된다고 할 수는 없다. 비판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하붑>의 결말부는 ‘바닥을 치면, 올라오고 싶어지게 마련’으로 요약될 수 있는 드라마적인 감정역학에 일정 부분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거슬러 올라가보면 이 문제는 영원의 불행 서사가 부모와 아이로 구성된 가족 삼각형 내에 단단히 밀봉되어 있다는 점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페미니즘 연극의 발달사에서 우리가 얻어온 교훈 중에 하나는 어떤 여성의 삶이 가족, 남편, 아이와의 관계 속에서만 설명될 경우 그 여성이 밀폐된 구조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서사적 가능성 또한 희박해진다는 사실이다. <하붑>의 경우에도 영원이 다시금 삶을 욕망하게 될 구체적인 동기들이 드라마 내에서 뚜렷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 그래서 ‘부모와 연결된 탯줄을 끊는’ 상징적인 퍼포먼스가 그 역할을 대신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는다.

<하붑>의 공연 사진. 푸른 조명이 무대 뒷벽을 비추고, 영원은 자동차 배기구 호스를 어깨에 걸쳐 두 손으로 끌어안고 있다. 그는 슬픔과 멍함이 섞여 있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다른 해석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상상해보자. 앞서 던졌던 질문이지만, 존재하지 않는 아이를 찾아나섰던 여정-영하와 함께한 연극은 영원에게 무엇을 남겼던 것일까? 어쩌면 영원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투영한 가상의 아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통해 비로소 자신과 불행을 ‘분리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영원은 6살짜리 아이를 분리해서 자기 밖으로 내보냈고, 그 아이를 찾아 애리조나 전역을 뒤지는 과정을 통해 자기혐오를 죄책감으로 전치시킬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영원의 망상이 결코 사랑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반드시 되찾아야 할 아이로 대체하기 위한 무의식적인 시도였다면, 영원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 이르러서야 삶을 욕망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 여자는 연극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었던 것이다, 라고.
<하붑>은 우리를 강박적으로 옭아매는 불행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어떻게 운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남기는 연극이기도 하다. 이번 공연 버전에서 이 질문은 아버지와 딸 사이의 지연된 결별과 쌍방구원이라는 가족극적 구도로 다시금 수렴된 측면이 있지만, 모래폭풍을 지나 홈타운으로 돌아가는 영원이 앞으로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가 보다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이다. 주인공을 태운 차가 지평선을 향해 멀어지는 낭만적인 엔딩씬과 정확한 타이밍에 올라가는 크레딧 이후에 남겨진 삶, 머지않아 뿌연 먼지로 다시 뒤덮일 그 삶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붑>의 공연 사진. 석양빛의 조명이 무대 전반을 비추고, 앉은 영원이 서 있는 영하의 허리춤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다. 
            영원의 어깨를 감싼 영하는 정면을 바라보며 결의에 찬 표정을 짓는다.

[사진 제공: (사)한국연출가협회 / ©이미지 작업장]

제10회 대한민국 신진연출가전 경연작
극단 문지방 <하붑>
  • 일자 2023.6.29 ~ 7.2
  • 장소 선돌극장
  • 공동창작 연출 박한별 출연 임태현, 표경빈, 정세영 프로듀서 임예지 무대디자인 조예나 조명디자인 배준서 의상디자인 김혜빈 음악 유자적 연출부 김서휘, 조지원, 정세영 무대제작 양정욱 자막OP 조휘령 사진/그래픽 이미지 작업장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07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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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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