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너메뉴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본문 바로가기 하단메뉴 바로가기

퀴어가 시공간과 불화하지 않을 때

페미씨어터&플레이포라이프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권나은

제238호

2023.07.27

중학교 때였나, 무명작가가 쓴 인터넷 소설에서 이런 장면을 본 기억이 있다. 주말 아침 이른 시각, 여자 주인공이 교복 차림으로 번화가를 쏘다닌다. 길에 있는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지만, 주인공은 사람들 시선이 따갑다고 느낀다. 작가는 그 상황의 공기를 일인칭 시점으로 묘사한다. 최대한 기억을 살려, 그 단락 문장을 비슷하게 적어보겠다.

‘일요일 아침에 교복을 입고 거리를 걷는 여자애. 아무리 주변을 두리번거려도 교복을 입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는 누가 보아도 가출한 고등학생이다-_-!’ 1)

잡문에 가까운 글이었지만, 위 문장을 읽고 잠시나마 ‘문리가 트이는’ 경험을 했다. 위 문장이 ‘수치스러운’ 인간의 내면을 비교적 적확하게 묘사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희곡이나 소설의 등장인물, 시의 화자들이 대체로 ‘아픈’ 상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연유를 궁금해하는 중이었다. TV 드라마와는 다르게, 문학은 유독 ‘멋지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인물을 조명하는 것 같았다. 가만히 있는 자신이 수치스러워 견디지 못하고, 뭐라도 쏟아내야 안심이 될 것 같은 마음. 그런 마음을 가진 인물들이 모여 허구의 세계를 호령하고 있었다. 미흡한 지식으로 추론해 보건대, 이들을 움직이는 핵심적인 정서는 수치심이었다. 수치심은 인간을 병들게 하지만, 동시에 인간을 떠들게 만들기도 한다. 이상한 사람들의 언어는 웬만하면 문학이 된다. 주위에서 이상하다는 평가를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은, 대부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한다.

수치심의 출발

수치는 시공간과의 불화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어떤 인물이 수치를 자주 경험한다면, 그는 이미 시공간을 이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자신이 지금, 여기, 이 시간에, 이 공간에 있으면 안 된다고 느낀다. 주말 아침에 교복을 입고 번화가를 쏘다니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괴로워하는 고등학생처럼.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지금, 여기, 이 시간, 이 공간이 아닌 ‘어딘가’를 희구한다. 그러므로 문학에서 수치심은 필수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이야기는 인물과 세계가 ‘불일치’하는 지점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퀴어는 자신과 세계의 ‘불일치’를 선뜻 인정해 버린 이다. 이제 ‘퀴어(queer)’는 멸칭이 아니지만, ‘퀴어함’은 여전히 멸시받기 좋은 속성이다. 퀴어 친구들과 교류하고, 나 역시 퀴어 스펙트럼에 속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후에야 이 사실을 이해했다. 미디어에는 ‘멋지고 당당한’ 퀴어들이 제법 많이 나오지만, 미디어 밖 퀴어들은 언제나 멋지지는 않다. 그들은 대체로 자신과 세계가 어긋나 있다고 느끼며, 이 문제로 자기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우울증을 앓기도 한다. 헤테로 친구 중에도 병약한 이들이 있지만, 퀴어 친구들은 차원이 다르게 아프다.

퀴어(한) 친구들은 언제나 뾰족하고 모나고 뒤틀린 자신을 견디며 살아간다. 굳이 성소수자로 정체화하지 않더라도, 퀴어(한) 속성을 지닌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도 이 범주에 포함된다. 자신을 퀴어로 범주화하는 과정은, 언제나 일정한 수준의 수치를 유발한다. 이러한 수치심이 이들을 가장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따라서 퀴어는 태생적으로 문학의 재료가 되기에 적합하다.

그런 점에서 최근에 본 연극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다소 독특했다. 나는 이 연극을 두 번 봤다. 재미있고, 에너지가 밝은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수치심이 들지 않았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공연 사진. 옅은 회색 맨투맨과 밝은 회색 청바지를 입고 주황색 모자를 쓴 어린 윤경과 흰 반소매 티와 검은색에 가까운 청바지를 입고 
            분홍색 머리띠를 한 어린 재은이 나란히 서 두 눈을 크게 뜨고 정면을 바라본다. 윤경은 두 손을 망원경 모양으로 모아 눈앞에 대고 있다. 두 사람의 목에는 폴더식 구형 핸드폰이 걸려있다. 
            그들의 뒤편으로 검은 계단에 앉은 재윤이 고개를 살짝 쳐들고 정면을 바라보는 모습이 보인다. 재윤은 옅은 회색 맨투맨과 짙은 회색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다.

이상적인, 너무나 이상적인 로맨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퀴어 커플이 구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삶을 제시하는 연극이다. 재은과 윤경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고, 동성 결혼을 결심한다. 재은과 윤경은 관공서에 혼인신고서를 제출한 후 ‘불수리’ 통지서를 받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레즈비언 신혼부부로 가정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결혼 이후에도 재은과 윤경은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 나간다. 재은은 스타트업 컨설턴트로, 윤경은 보육교사로. 두 사람은 충분한 토론 끝에 딸을 입양하고, 키워낸다. 중년이 된 이후에는 성격 차이로 이혼하지만, 이혼하는 와중에도 서로를 응원하며, 이혼 후에도 아이의 상견례 자리에서 만나 농담을 주고받는다. 100살 무렵엔 딸의 도움을 받아 우주정거장 여행도 다녀온다. 재은과 윤경의 삶은, 퀴어라는 정체성만 소거하면, 성공한 이성애자 부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사회가 개인에게 생애주기별로 기대하는 일들을 충실하게 해내기 때문이다.

재은과 윤경은 성인군자는 아니지만, 따뜻하고 인간미가 넘친다. 재은은 주말마다 ‘권리를 옹호하는 시위’에 나갈 정도로 정의롭고, 중년이 된 후에도 컨설턴트로 활발히 활동할 정도로 열정적인 인물이다. 윤경은 기질이 낭만적이며, 어린아이들과 교감할 만큼 감수성이 풍부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딸 재윤을 입양할 정도의 재력과 여유, 윤리 의식을 갖추고 있다. 재윤은 자라서 이성애 결혼을 하고, 정상적인 직업을 갖는다. 아마 이 집, 계급상 중산층에 가깝지 않을까.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에서, 계급 이슈는 희석돼 있다. 멘탈 이슈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두 사람의 삶은, 가난, 빚, 콤플렉스, 조현병, BPD, 나르시시즘, 강박, 섭식장애, 피해의식 따위의 단어와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두 사람의 복잡한 삶을 겨우 80분 안에 단정해 버린 것 같아 미안하다. 연극에 나온 장면만 놓고 보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연극에는 ‘방해꾼’이 없다. 재은과 윤경이 연애하는 2020년대는 동성혼이 법제화된 시대가 아니기에, 어딘가에서 차별적이거나 모멸적인 언사를 들을 법도 한데, 그런 에피소드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혼인신고 ‘불수리’ 장면은, 분명히 ‘실패’의 경험을 다루는 장면인데도, 배우들의 유쾌한 연기로 인해 담대하게 느껴질 정도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공연 사진. 검은 무대에 보라색 조명이 비추고, 윤경과 재은이 마주 보고 앉아 얼굴을 가까이 하고 있다. 윤경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으며, 재은은 셔츠와 재킷을 입었다. 
            윤경이 왼손으로는 무릎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재은의 목덜미를 감싼다. 윤경의 목뒤로 걸린 빨간색 산타 모자가 눈에 띈다.

이 연극은 전체적으로 무해하고 편안한 느낌으로 가득하며, 그런 점에서 ‘헤테로섹슈얼 로맨스―상업극 서사’와 닮은 면이 있다. 나는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를 무척 즐겁게 보았다. 연극을 보고 나오는 길에, (연극을 거의 모르는) 엄마와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이 연극 예매해주고 싶은데 관람하러 오지 않겠냐고 물어보았을 정도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마음에 걸릴 게 없는 작품이었다. 관객의 심연을 건드리는, 어딘가 낯설고 불쾌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그 점이 유일하게 불만이었다. 이 문제를 ‘대중성’ 등의 언어로 환원하고 싶지는 않다. 이 연극의 문제는, 퀴어(한) 인물의 수치심을 최대한 소거한다는 것이다. 무대 위에서, 재은과 윤경의 수치심은 아주 옅은 농도로 표현된다.

앞서 언급하였듯, 수치심이란 시공간과 불화하는 감각을 말한다. 자신이 이 공간과 어울리지 않고, 이 시간과 어긋난다고 느끼기에 생겨나는 좌절감 말이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에도 나름의 어긋남이 존재하지만, 농도가 짙다고 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2017년, 고등학생 재은이 친구 윤경에게 “나 레즈비언이야”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윤경은 살짝 당황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먼 훗날, 두 사람은 이혼하게 되지만, 퀴어로서의 정체감에 손상을 입게 되지는 않는다.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당당하고 존엄하다. 이 연극을 보며 누군가는 은근한 소외를 경험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세계와 불화하는 느낌에 시달리는 퀴어라면,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재은과 윤경은 레즈비언이지만, 사회의 기준에서 아주 ‘어긋난’ 인물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는 내내 친구들을 떠올렸다. 애인과 안정적으로 교제 중인 퀴어 친구들 말고, 화려한 외모와 유창한 화술로 인플루언서가 된 퀴어 친구들 말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을 다니는 퀴어 친구들 말고, 그렇게 살지 않는(못하는) 친구들을 생각했다. 정신과 약을 챙겨 먹지 않으면 일상을 지속할 수 없는 친구들. 퀴어 커뮤니티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친구들. 퀴어인데 퀴어 섹스를 ‘할 수 없는’ 친구들. 하도 자살이나 자해 이야기를 많이 꺼내서, 사람들이 슬슬 피하는 친구들. 불법 약물에 손을 대다가 경찰서에 간 친구들. 말끝마다 피해의식을 드러내서 대화하다 보면 신경질이 나는 친구들. 그다지 멋지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친구들. 이 친구들에 비해 재은이나 윤경이는 상당히 건강해 보였다. 그래서 다행이었지만.

퀴어는 항상 시공간과 불화하는 존재인가? 퀴어의 이야기는 반드시 슬픈 정동으로 수렴해야 하는가? 그건 아니다. 퀴어들의 이야기가 반드시 어떠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렇지만 나는, (멋지지 않고, 트렌디하지 않고, 건강하지 않은) 친구들을 잠시 잊은 채 이 연극을 감상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했다. 이건 개인적인 문제일까, 사회적인 문제일까?

선의를 가지고 해석하자면,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를 ‘헤테로섹슈얼 로맨스―상업극 서사’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서사는 이미 세상에 차고 넘치는데, 똑같은 서사를 가져와 굳이 ‘사랑이야기가 아니라고’ 강조하여 부정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무대 위의 시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퀴어하게’ 배치한다. 나는 이 연극에서 ‘인물’보다도 ‘시간’이 훨씬 퀴어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공연 사진. 재윤과 재은, 윤정이 나란히 몸을 포개고 붙어 서 있다. 재윤은 맨투맨, 재은은 셔츠, 윤경은 후드티를 입고 있는데, 모두 옅은 회색빛이다. 
            가장 앞에 선 윤경은 두 손을 합장하듯 가슴에 모았으며, 재은과 재윤은 각각 앞 사람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오른손에 자신의 고개를 가볍게 얹고 있다. 세 사람 모두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뒤틀린 시간, 퀴어의 시간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직선적인 시간에 갇힌다. 직선적인 시간은 인간을 체제에 순응하도록 종용한다. 직선적인 시간은 순서와 질서로 가득하다. 1교시부터 6교시, 월요일에서 금요일, 봄에서 겨울, 소년에서 중년. 직선적인 시간은 인간에게 ‘과업’을 부여한다. 모범생 되기. 좋은 대학 진학하기. 좋은 직장 입사하기. 좋은 배우자 만나기. 자식 낳기. 커리어 잘 쌓기. 자산 증식. 실버타운 탐색.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 일은, 선학이나 수행자의 일로 여겨진다. ‘무소유’를 이야기한 법정 스님은 입적 전에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법정 스님 정도는 되어야 시간을 버릴 수 있는 것일까?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직선적인 시간을 호기롭게 탈주한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이야기는 2099년 우주정거장에서 시작하며, 2007년 크라운베이커리 앞에서 끝난다. 주인공 재은과 윤경은 이 사이를 끊임없이 오간다. 2013년, 중학생인 재은과 윤경이, 점심시간에 생일 파티를 한다. 2048년, 재은과 윤경은 중학생이 된 딸 재윤의 생일을 준비한다. 윤경이 일이 있어서 늦자, 재은은 서운해한다. 2017년, 고등학생 재은과 윤경이 음악을 듣는다. 재은이 윤경에게 느닷없이 커밍아웃한다. 윤경은 못 들은 척 다른 이야기를 이어간다. 2052년, 고등학생 재윤이 엄마들에게 반항한다. 이런 식으로 딸과 엄마들의 시간은 마구 뒤섞인다.

퀴어한 시간은 인간을 송구하게 만든다. 2022년 크리스마스, 재은의 집. 재은과 윤경은 술김에 키스하며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창문 바깥에서 낭만적인 캐럴이 들린다. 그다음, 장면이 바뀌고 2050년대의 재은과 윤경이 등장한다. 두 사람은 굳은 표정으로 현관 앞에 서 있다. 그들의 손에는 각자의 짐이 들려 있다. 집 밖에서 비바람이 불고, 천둥이 치는 소리가 들린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중이다. 두 장면의 간극은, 관객에게 미묘한 수치심을 안긴다.

퀴어는 시공간과 반목하는 자이기에, 퀴어(한) 이야기일수록 뒤틀리고 굴곡이 진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굴곡을 대놓고 긍정한다. 재은과 윤경의 이야기는, 직선으로 표현하는 순간 클리셰 덩어리로 변할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에서는 개별 사건보다 ‘퀴어한’ 시간성이 더 중요하다. 반듯하고 정돈된 시간이 아닌, 구겨지고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시간 말이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공연 사진. 옅은 회색 셔츠 위에 짙은 회색의 엉덩이를 덮는 조끼를 입은 재은이 마이크를 들고 서 있다. 
            무대 뒤편으로 파란 조명이 깔려 있고, 공간을 가득 채운 포그가 조명에 일렁거린다. 밝은 푸른 조명 두 개가 재은의 뒤에서 위로 뻗어 나간다.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의 막이 오를 때, 민해경의 노래 <서기 2000년>이 극장에 울려퍼진다. <서기 2000년>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서기 2000년이 오면 / 우주로 향하는 시대 / 우리는 로케트 타고 / 멀리 저 별 사이로 날으리 / 그때는 전쟁도 없고 / 끝없이 즐거운 세상 / 그대가 부르는 노래 소리 / 세상을 수놓으리’.

1980년대에 발매된 이 노래에서, 21세기는 전쟁도 가난도 없고, 모두가 우주로 향하고, 함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유토피아적 시대로 묘사된다. 이 노래는 낙관의 불가능(성)을 다룬다. 2023년을 사는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2023년이 보기 좋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래가 더 암울해질 수 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서기 2000년>의 작곡가와 작사가와 가수가,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오히려 미래를 마냥 낙관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다. 노래를 부르면 두려움이 달아나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는 <서기 2000년>과 성질이 비슷한 작품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낙관의 불가능(성)과 직면하기 위해, 낙관을 제시하는 작품이라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왕 욕심을 내보자면,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에 조금 더 비천한 낯빛의 인간들이 등장해도 좋았을 것 같다. 서기 몇 년이 되든, 우주도 갈 수 없고, 마냥 노래를 부를 수도 없는 처지의 사람들 말이다. 이것은 퀴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국립정동극장]

국립정동극장_세실 창작ing-Stage on
페미씨어터&플레이포라이프 <이것은 사랑이야기가 아니다>
  • 일자 2023.7.6 ~ 7.21
  • 장소 국립정동극장_세실(서울)
  • 기획 나희경 도은 연출 이래은 출연 김시영, 김효진, 정다함 조연출 하은빈 무대감독 김태령 액팅코칭 장재키 움직임 손지민 무대 장호 의상 김미나 음향 임서진 조명 신동선 자막해설 이청 영상기술 김석기 주최·주관 (재)국립정동극장 작품개발 페미씨어터&플레이포라이프
  • 관련정보 https://www.jeongdong.or.kr/portal/bbs/B0000252/view.do?nttId=7649&menuNo=200002
  1. 출처를 밝히고 싶지만 소설 제목도, 작가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 소설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개인적으로 연락을 부탁한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선택 버튼

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