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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왕따시킨 건 아니잖아”

극단 살뮈 청소년극 <지수가 누구야>

권나은

제240호

2023.08.24

“연예인 학교폭력 논란 터질 때마다, 어떻게 인두겁을 쓴 자가 그럴 수 있냐는 댓글 다는 사람들 있지. 웃긴다는 생각도 들어. 내 입장에선 가해자 아닌 아이가 없었는데”. 학창 시절 따돌림을 심하게 당한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이다.2)

종종 언론에서 학교폭력이나 따돌림 사건을 접한다. 뭇사람들이 가해자를 한목소리로 질타하고, 피해자에게 이입하는 광경을 본다. 얼굴도 모르는 피해자를 향해 온정적인 위로를 건네는 사람도 있고, 별안간 자신의 20년 전 경험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다. 속계의 윤리가 급격히 붕괴하고 있다지만, 여전히 세상엔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선량한 사람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나 역시 그와 같은 범상한 태도를 숨기지 못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그렇지만 우리 대다수는 살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이를 은근히 소외시키거나, 튀거나 모난 구석이 있는 동료를 탐탁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본 전적을 공유하고 있다. 구태여 인정하거나 기억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인지하는 순간 자기검열의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저는 대인 관계가 원만해요. 누군가를 괴롭혀 본 적도 없고요”라고 반문하는 이가 있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는 한국 사회에서 생애주기별 소속집단을 충실히 거친 구성원이, 친구 관계가 언제나 즐거웠다고 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라고 생각한다. 학교, 학원, 회사 다녀보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지 않나. 어디를 가든 분위기를 주도하는 무리가 존재하며, 유달리 미움을 받는 사람이 생긴다는 사실을.

<지수가 누구야>의 공연 사진. 녹청색 아노락 상하의를 맞춰 입은 세 명의 배우들이 노란색 플라스틱 수납함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 왼쪽을 바라본다. 
            가장 왼쪽에 있는 배우는 약간의 컬이 들어간 검은 단발머리이고, 중앙에 선 배우는 검은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렸으며, 
            오른쪽의 배우는 붉은 기가 도는 갈색의 머리를 양갈래로 땋았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박연진 수준으로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은 드물지만, 집단 내에서 낙오되고 배제당하는 동료를 멀리하는 사람은 흔하다. 그런 태도가 생존에 유리하기도 하고, 딱히 ‘잘못’도 아니기 때문이다. 유튜버들과 작가들이 입을 모아 말하지 않던가. “모두에게 친절해지려고 애쓰지 마세요. 마음이 맞는 친구하고만 잘 지내면 돼요”. 이러한 조언은 얼핏 합리적으로 들린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유명한’ 조언처럼, 나는 이 말 역시 오용될 여지가 크다고 본다. 집단 내에서의 소외나 차별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말이다. 누군가가 조직 내에서 겉돌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잘해주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저이를 따돌린 게 아니라, 결이 맞지 않아 친밀하게 교류하지 않았을 뿐이니까.

범부는 안면부지의 누군가가 타인과의 불화에서 비롯된 고통을 호소하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따스한 위로를 건넨다. 그렇지만 정작 자신의 주변에서 실제로 고립되는 이에게는 냉혹한 낯빛으로 대응하는 경향이 있다. 저이가 타당한 사유로 소외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단점이 없는 사람은 없으니, 사유는 언제든 만들 수 있다. 그러니 집단 따돌림이 발생해도 이를 지적하기가 어렵다. 분위기를 주도한 사람이 “저는 걔한테 관심 없어요. 배제한 게 아니라 안 친한 건데요”라고 상황을 종결해버리면 그만이다. 다들 나름의 논리적인 입장이 있으므로 시시비비를 가리기란 쉽지 않다.

길지 않은 삶을 살면서, 여러 입장을 경험해 보았다. 관찰자,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어쩌면 관계 맺기나 무리 짓기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연극은 아닐까? 어디까지가 단순한 친목이고, 어디서부터가 따돌림일까? 여태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창작물에서 따돌림은 흔한 소재이지만, 기실 인물의 동기를 유발하는 장치로만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따돌림이라는 현상 자체를 내러티브 안에 녹여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세속의 인물들은 누군가를 구박하는 순간에도 저마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자신이 악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데, 대체 누구를 악역으로 지목할 수 있단 말인가?

<지수가 누구야>의 공연 사진. 무대 전반에 파란 조명이 내리쬐고, 머리를 양갈래로 땋은 배우가 왼편을 보고 앉아있다. 
            무릎을 세워 양팔로 끌어안은 그는 아노락 상하의에 분홍 니삭스와 흰 운동화를 신고 손에 남색 캡모자를 들고 있다. 
            그 뒤쪽으로 빨간색과 노란색, 파란색, 흰색의 플라스틱 수납함과 원통형의 쓰레기통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그런 점에서 연극 <지수가 누구야>는 청소년기 관계 이슈의 불가해한 지점을 비교적 섬세하게 돌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지수가 누구야>는 잘 지내던 무리에서 낙오된 중학생 지수와, 지수를 외면한 친구들 이야기다. 이 연극은 악인과 선자를 대비하여 묘사하는 데 몰두하거나, 관객의 가치판단을 억지로 유도하지 않는다. 대신 배우가 하나의 몸으로 관찰자,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의 역할을 모두 수행하게 만든다.

무대 곳곳에 색색의 플라스틱 상자들이 배치돼 있다. 그 사이로 중학교 1학년 지수의 친구들이 나타난다. 희지, 민지, 예은, 예서. 이들은 지수를 주축으로 결성된 5인방 멤버들이다. 지수가 친구들을 소개한다. 희지, 민지, 예은, 예서가 대사를 나누어 읊는다. “희지와는 오랜 친구야. 민지는 손이 많이 가. 예은이랑 버스 타고 집에 같이 가는 게 좋아. 예서네 집 떡볶이가 제일 맛있어!” 아이들의 경쾌한 목소리가 화음처럼 섞인다.

다음 장면에서, 극의 배경은 중학교 3학년 교실로 바뀐다. 그런데 어쩐지 기류가 심상치 않다. 지수와 친구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것 같다. 체험 활동 시간, 선생님은 사이가 소원해진 지수와 희지에게 짝을 시킨다. 희지는 대놓고 불쾌한 티를 낸다. 지수가 입을 열 때마다 교실은 적막에 휩싸인다. 쉬는 시간, 지수는 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하필 아이들도 화장실로 따라 들어온다. 아이들은 지수를 험담하기 시작한다. 지수는 화장실 구석 칸에 조용히 앉아 모든 이야기를 듣는다.

이 연극에는 네 명의 배우가 나온다. 이들은 희지, 민지, 예은, 예서를 각각 도맡아 연기한다. 반면 주인공 지수를 전담하여 연기하는 배우는 없다. 장면마다 배우들이 자신의 신체를 할애하여 지수 흉내를 낼 뿐이다. 배우들은 지수의 몸으로 변할 때,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등장한다. 관객은 넷 중 모자를 쓴 사람이 지수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챈다. 이처럼 <지수가 누구야>에서는 모자가 중요한 기호로 사용된다. 일반적인 연극에서, 모자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 소품이다. 배우의 얼굴을 다 가리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신체를 많이 가리는 소품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지수가 누구야>에서는 배우들이 모자를 작정하고 눌러써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기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 연극은 지수라는 인물에서 개별적 특성을 완전히 소거한다. 우리 중 누구든 지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함일까.

<지수가 누구야>의 공연 사진. 무대 전반에 푸른 조명이 가득하고 한가운데에 놓인 초록색 수납함에 모자를 쓴 단발의 배우가 앉아있다. 
            그 양옆으로 객석을 등지고 아노락 후드를 뒤집어쓴 두 인물이 그를 향해 상체를 약간 숙인 채 서 있다. 
            조명이 닿지 않는 무대의 양 끝에는 색색의 수납함이 층층이 쌓여 있거나 줄지어 늘어서 있다.

지수가 친구 무리에서 ‘탈락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지수는 민지의 애인 민준에게 느닷없이 고백을 받는다. 이 장면은 연극에 직접 나오지 않으며 예서의 진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묘사된다. 친구들은 예서만 믿고 지수가 민지를 배신했다고 생각한다. 지수를 괘씸하게 여긴 희지와 예은이는 평소 지수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을 하나씩 털어놓기 시작한다. 지수는 급격한 속도로 친구 무리와 단절된다. 지수는 친구들과 대화를 시도한다. 지수는 예은이에게, 모든 게 오해이니 민지에게 말을 잘 전해달라고 부탁한다. 예은이는 지수에게 말을 전해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지수는 희지에게 도움을 청한다. 희지의 반응은 냉랭하다.

어느 날 지수가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다는 소문이 퍼진다. 줄곧 지수를 피하던 친구들은 다소 놀란 기색을 보인다. 다들 담담한 척하지만 자신들 때문에 지수가 그런 선택을 한 건 아닌지 신경을 쓰는 눈치다. 이때 예은이가, 반 친구들이 지수가 왕따냐고 물어보았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예은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간다. “우리 왕따시킨 건 아니잖아. 그건 오해잖아”.

아이들은 바로 몇 분 전까지 관객 앞에서 한 친구를 명백하게 외면했다. 이 시점부터 관객은 현상의 목격자로 변하며, 거리의 행인으로 머물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자신들이 가해를 저지른 건 아니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목격자인 당신이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이제 당신은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따돌림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다. 따돌림을 당했다고 호소하는 이는 많은데, 그 반대는 거의 없다. 물론 희지, 민지, 예서, 예은도 할 말은 있다. 희지에겐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이 있는데, 우연히 지수가 그 비밀을 알아버렸다. 희지 입장에서 지수는 자기 비밀을 아는 ‘불편한’ 존재다. 민지에게 지수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빼앗아 간 ‘간교한’ 아이다. 예서나 예은이는 지수를 피하긴 했지만, 지수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금전을 갈취한 적은 없다. 그러니 “우리 왕따시킨 건 아니잖아”가 아예 틀린 표현은 아니다. 지수 역시 친구들을 ‘가해자’ 등으로 호명하지 않는다.

<지수가 누구야>의 공연 사진. 무대 중앙에 성인 허리 높이까지 올라오는 원통형의 남색 플라스틱 쓰레기통이 놓여있다. 
            아노락 상하의와 흰 운동화를 맞춰 입은 네 명의 배우가 쓰레기통 뒤에 나란히 일렬로 서 있다. 
            가장 왼편에 머리를 하나로 땋아 내린 배우가 인사하듯 오른손을 들고 있고, 나머지 세 배우는 밝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인사하듯 양손을 흔든다. 
            그들의 뒤편으로 색색의 쓰레기통과 수납함들이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프로그램북에 따르면 <지수가 누구야>는 팀원 전원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고 한다. 창작 과정에서 팀원들이 자신의 청소년기와 만나는 경험을 했다는 문장을 읽었다. 짐작하건대 이 과정이 매번 유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누군가는 수치심을 느꼈으리라. 인간의 과거가 무해하거나 무결한 일화로만 구성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불편함은, 세심한 작품을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희지와 지수, 민지와 지수, 예은이와 지수, 예서와 지수. 배우들은 1시간 동안 하나의 신체로 두 인물을 연기하며, 정동의 낙차를 표현한다. 이들의 신체 안에서, 지수와 친구들은 화해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화해하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다. 그저 지수의 평안을 바랄 뿐이다.

[사진 제공: 극단 살뮈]

극단 살뮈 청소년극 <지수가 누구야>
  • 일자 2023.7.20 ~ 7.30
  • 장소 대학로 선돌극장
  • 출연 김치몽, 육지환, 임예린, 최유진 연출 서경원 기획 이호정 무대감독 김해웅 무대 김혜지 조명 한종엽 음악 인지혜 그래픽디자인 최지원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09056
  1. 극 중 예은이의 대사.
  2. 친구의 동의를 받고 인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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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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