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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거 (말)하러 가자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23
Team OOOD <홀리섹스데이> & 녹로수(轆轤首) <녹로수(轆轤首)>

팔도

제240호

2023.08.24

하고 많은 프린지페스티벌의 공연 중 굳이 <홀리섹스데이>와 <녹로수>를 엮어 보기로 결정한 건 이 극들이 섹슈얼리티를 중점적으로 다루려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이 리뷰 직전에는 낭독극 <맥베스>에 대한 리뷰를 썼는데, 의도하지 않았지만 <녹로수>는 낭독 퍼포먼스, <홀리섹스데이>는 입체낭독극이었다. 결과적으로 낭독극만 세 차례를 연달아 보게 된 것이다. 기왕 보게 된 극이 모두 낭독극이니만큼 나는 그 특유의 형식과 섹슈얼리티라는 주제가 지저분하게 얽혀지는 광경을 기대하게 되었다.
고리타분하게 말하자면 두 연극 모두에서 형식과 주제의 상관관계에 대한 고민이 별로 드러나지 않았다. <홀리섹스데이>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가장 먼저 던져진 질문 중 하나는 ‘왜 입체낭독극이라는 형식을 선택했는지’였는데, ‘연극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의 한 단계로서 선보이기 위해서’ 그리고 ‘각본 내용을 빠짐없이 관객에게 전달하고 싶어서’라는 정도의 답변이 돌아오는 데 그쳤다. 한 배우는 노골적인 제목과 달리 극중에는 섹스 신이 없어서 관객들이 ‘낚였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된다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녹로수>의 경우 전시와 흩어져 있는 소품들, 낭독, 퍼포먼스 사이사이의 연결고리가 헐겁고 어색해 보였다. 게다가 ‘퍼포먼스 중 관객이 함께 무화과를 먹는 요소가 있습니다’라는 주의 사항과 달리 관객들에게 무화과를 내어 주지도 않았고 퍼포먼스는 고지된 60분의 러닝타임보다 훨씬 일찍 끝났는데, 무화과 먹는 차례를 깜빡했거나 그것이 모종의 이유로 생략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퍼포머가 긴장했는지 너무 빠른 속도로 낭독해버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 건 사실 각각의 극이 무의식적으로나마 낭독(말)과 섹슈얼리티(몸)의 상호침투적인 관계를 지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웃자고 한 농담에 뻔한 딴지를 걸자면 직접적인 섹스 행위가 재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말’뿐이라고 해서 섹스/섹슈얼리티에 대한 연극이 아니게 되지도 않고 연극이 야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서 <홀리섹스데이>와 <녹로수>가 슬쩍 말하고 보여주었던 ‘야함’에 대해, 구체적으로는 말하기 혹은 낭독하기가 내포하는 ‘야함’에 대해 주절거려보고자 한다. 이것은 연극 리뷰나 비평의 가장자리 혹은 주변부(프린지)에서만 허락되어 온 일이기도 하다.

<녹로수>의 전시 사진. ‘약물을 복용하고 살 찐 경험이 있나요?’라는 질문 아래 다양한 약물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보인다. 
            누군가의 손이 한 약물의 이름 옆에 곰돌이 스티커를 붙인다. 
            카메라의 초점이 맞지 않아 약물의 이름은 정확히 보이지 않고, 종이곳곳에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반짝거리는 스티커들이 이미 붙어있다.
<녹로수>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김성일)

소문

곗돈을 모아 야한 영화나 팬픽을 공유해 보는 친척 여자애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홀리섹스데이>에서 가장 야한 대목은 이들이 열중하는 야한 콘텐츠들의 장면, 제목, 플랫폼이 구체적으로 호명되던 때도 아니었고 무리 중에서 가장 ‘범생이’인 슬아가 남자친구와 섹스를 시도하는 장면이 낭독되던 순간도 아니었다. 써보지도 못한 콘돔을 아버지에게 들킨 이후 행적이 묘연해진 슬아에 대해 친척 여자애들이 돌아가며 회상하는 대목이야말로 가장 야했다. 이 회상의 순간마다 사실 슬아는 ‘거기에 없다’. 슬아에 대한 질투, 시기, 미움, 동경으로 어지러운 마음의 여자애들이 슬아를 가상으로 소환해 입방아를 찧을 때마다 아이패드를 보며 지문을 낭독하던 강수연 배우는 안경을 쓰고 잠시 슬아의 환영으로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부정확한, 그래서 더 매혹적인 갖가지 소문들을 달고 다니는 슬아. 그런 슬아에 대해 망상하고 추측하고 말하기를 멈출 수 없는 여자애들의 광경. 이게 야하지 않다면 나는 뭐가 야한 건지 모르겠다.

<홀리섹스데이> 공연 사진. 다영, 해지, 다빈이 바닥에 모여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은 모두 트레이닝 팬츠와 흰 티셔츠를 입은 편안한 차림이다. 
            세 사람의 앞에 태블릿PC 두 대가 놓여 있고, 사진의 우측으로는 의자에 앉은 누군가의 무릎과 그 위에 올린 손이 흐릿하게 보인다.
<홀리섹스데이>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우주동물)

『BL진화론』에서 미조구치 아키코는 BL(Boy’s Love) 콘텐츠를 함께 향유하는 애호가 여성들이 일종의 ‘버추얼 레즈비언’이며 이들이 서로 망상과 섹슈얼 판타지를 교환할 때는 ‘버추얼 섹스’를 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1). BL 소재의 창작, 공급, 교환은 애호가 동지들 사이에서 행해지기 때문에 사실상 이들이 필요로 하는 건 ‘서로’라고도 말한다. 야한 콘텐츠들이 그것을 함께 즐기는 “여성들이 ‘교합하는’ 포럼”으로 기능한다면 해지, 다영, 다빈, 슬아 모두 ‘버추얼 레즈비언’이라고 감히 주장해볼 수 있겠다. 게다가 슬아가 없는 자리에서 해지, 다영, 다빈에게 가장 ‘핫’한 것은 모니터 안에 있는 야한 콘텐츠가 아니라 바로 슬아의 성적 경험에 대한 이야기들이요 소문들이니, 한술 더 떠서 슬아라는 기표는 레즈비언 팔루스2)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더 던져보자면, 이 여자애들이 ‘근친’이나 ‘백합’ 같은 키워드를 몰랐을 리도 없지 않나? 이렇게 볼 때 낭독은 ‘완성된 연극’으로 갈 때 거쳐가는 과도기적인 것이기보다는 퀴어한 여자 아이들의 중요한 유희 형식이 된다.
어른들의 등쌀에 떠밀린 해지와 다빈이 동태전을 부치러 간 사이에 다영이 홀로 방에서 남자 아이돌의 안무를 열심히 따라 하던 장면도 문득 떠오른다. 다영이 이때 소리 내어 부르고 따라 추는 곡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홀리 걸’이다. 다빈에 의하면 분명 다영은 남성 아이돌 ‘자하’의 팬픽을 읽을 때 ‘자하’가 욕망하는 여자 주인공에 스스로를 이입한다고 했는데(‘나페스물’3)을 봤던 모양이다) 정작 다영은 은밀히 ‘자하’의 몸짓을 따라하며 ‘홀리 걸’을 부르는 거다. 그런 다영이가 해지, 다빈과 함께 ‘홀리 걸’과 슬아(슬아는 독실한 목사 집안 외동딸이다)의 남자친구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는 장면에 이르게 되면 이 연극은 슬아에 대한 ‘나페스’같기도 하고 슬아에 의해 쓰인 ‘나페스’ 같기까지 하다. 모든 게 소리 내어 울려 퍼지는 슬아에 대한 말, 슬아에게 건네지는 말, 슬아가 하는 말들 때문이고 이 말들을 체현하는 몸들 때문이다. 이것들은 이미 섹스/섹슈얼리티에 대한 온갖 불온한 함의들로 빼곡히 뒤덮여 있다.

<홀리섹스데이> 공연 사진. 깜깜한 무대에 각자 태블릿PC를 가슴팍에 받쳐 든 해지, 다빈, 다영의 얼굴이 보인다. 태블릿PC의 화면 빛이 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홀리섹스데이>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우주동물)

가면

<홀리섹스데이>가 표면적으로는 발칙 상큼한 퀴어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다룬다면 <녹로수>는 우울하고 오락가락하는 여자들의 섹슈얼리티를 다룬다. 극 중에서 성적 쾌락은 피학과 관련된다. 이 쾌락은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 학대에 가까운 신체 단련에 대한 일화, 세바스티아누스의 에로틱한 순교 장면, 유니콘이 죽을 때 흘리는 핫핑크색 피, 니플 피어싱 같은 것들을 징검다리 삼아, 그리고 전시 작품으로 흩어져 있는 텍스트 더미들을 힌트 삼아 에둘러 말해진다.
<녹로수>는 미시마 유키오와 다자이 오사무의 일화로부터 출발하는데, 낭독자들은 다자이와 달리 미시마는 혹독한 신체 훈련을 쾌락으로 승화할 수 있는, 피학에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리라고 말한다. 나는 이때부터 극이 ‘주(인)님’에 대한 찬송가로 마무리될 때까지 <녹로수>가 왜 내내 마조히스트 되기에 집착하는지 궁금했다. 피학의 쾌락에 대해 말하는 퍼포머들의 모습은 썩 즐거워 보이지도 않았고, 낭독되는 일화들은 뜯어보면 피학에의 ‘후천적인’ 능력을 갈고 닦으려고 노력하다가 분열해버리는 사람의 이야기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녹로수>의 정체성은 세상에 한 마리 남은 진짜 유니콘보다는 유니콘 탈을 쓰는 체험을 했다가 사냥꾼에게 죽임당한 가짜 유니콘에 차라리 가까워 보인다. 실은 여기가 속된 말로 ‘모에’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녹로수>를 피학적 쾌락에 빈틈없이 통달해 있는 미친년의 이야기가 아니라, 심오하게 미학적으로 보이고 싶어 하지만 사실은 ‘말하는 것을 두려워’4)하고 가면증후군을 앓는 ‘가짜’ 미친년의 이야기라고 보게 되면 말이다.

<녹로수> 퍼포먼스 사진. 천장에서부터 늘어뜨린 실에 묶인 비닐장갑에 핑크색 액체가 담겨 있다. 장갑에 작은 구멍이 나 물이 방울방울 떨어진다. 
            그 뒤로 보면대에 대본을 놓고 연기하는 퍼포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그는 가슴까지 오는 생머리에 한쪽만 앞머리를 내렸고, 검은 반소매 재킷과 검은 티, 검은 바지를 입었다.
<녹로수>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김성일)

성폭력 상황이 암시되는 극의 마지막 일화에서 낭독자는 이 폭력을 견뎌서 쾌락으로 승화해내고야 말겠다고 말하는데, 이 언술은 거꾸로 일화 속 주인공이 폭력과 쾌락을 등치시키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그래서 의식적이고 강박적으로 자신에게 피학의 쾌락을 성취해내라고 주문해야만 한다는 점, 이 모든 과정을 거치는 주인공이 분열되고 있다는 점들을 암시하게 된다. ‘견뎌서 마조 되자’라는 문장은 미래를 향해 있기에 현재의 마조 되지 못한, 불안하고 분열해 있는 상태를 가리키고 자학한다. 극 마지막에 울려 퍼지는 찬송가는 주(인)님의 도래를 반기며 왜 이제야 오셨냐는 내용의 가사를 담았지만 <녹로수> 전반에 흐르는 불안함, ‘가짜됨’에 대한 인식을 감안하면 이 찬송가까지도 거꾸로 주(인)님의 부재에 대한 위장처럼 느껴진다. <녹로수>의 말들은 그렇게 계속해서 위장하고, 자학하고 불안해한다. 사실 자기 처벌이야말로 극도의 나르시시즘적인 행위이니 <녹로수>가 ‘가짜’ 마조라는 내 문장은 반만 맞는 셈인지도 모른다.

<녹로수> 퍼포먼스 사진. 바닥에 카펫이 깔려 있고, 여러 장의 구겨진 종이조각들과 흑백의 이미지 한 장, 생일 고깔이 흩어져 있다. 
            흑백의 이미지 속에는 머리 위로 팔이 들려 양 손목이 묶인 채, 상반신을 탈의한 몸에 화살이 꽂힌 인물이 보인다.
<녹로수> 퍼포먼스 사진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김성일)

(말)하러 가자

쓰고 있으려니까 나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홀리섹스데이>와 <녹로수>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치솟는 것만 같다. 언어의 본성이 “인플레이션적(은유적)”5)인 것이라면, 언어만큼 괴상하고 위장하고 틀렸고 매혹적이고 변화하며 그래서 섹슈얼리티와도 깊이 연관되는 건 없다. 말/글은 이렇게 나도 몰랐던 장소로 나를 데려다 놓곤 한다. 그런 점에서도 몸을 둘러싼 욕망과 쾌락과도 닮았다.
나는 마지막으로 <홀리섹스데이>의 결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홀리섹스데이>는 ‘분신사바’를 하던 해지, 다영, 다빈이 덜컹거리는 집 문을 열고 더 이상 교복을 입지 않은, 편안한 얼굴의 슬아를 만나면서 끝난다. 이때 귀신인지 사람인지 모를 슬아는 ‘뭐해? 야한 거 보러 가자’라고 말하며 짓궂게 웃는다.
막이 내리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다. 야한 걸 보는 것은 곧 야한 걸 하러 가는 것이며, 야한 걸 말하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그리고 슬아의 말 속에6) 담긴 이 진실을 리뷰의 제목 삼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단숨에 직감했다. 그러니 결국 이 글은 슬아의 말로부터 출발해 좀 과하게 멀리 나간 글이요, 몸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홀리섹스데이> 공연 사진. 안경을 쓴 단발의 슬아가 정면을 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그는 흰 티셔츠와 청바지, 베이지색 가디건을 입었다. 
            슬아의 뒤로는, 정자세로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홀리섹스데이>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 우주동물)
서울프린지페스티벌 2023
Team OOOD <홀리섹스데이>
녹로수(轆轤首) <녹로수(轆轤首)>
  1. 미조구치 아키코, 김효진 옮김, 『BL진화론』, 길찾기, 2018 참조.
  2. 주디스 버틀러는 라캉의 ‘팔루스(Phallus)’ 개념을 전유해 ‘레즈비언 팔루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버틀러는 팔루스를 페니스와 동일하지 않은 무(無)의 기표이자 “의미화 연쇄의 효과”라고 보고 이것이 육체의 다른 부분들(손가락, 팔, 혀 등)로도 대치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치환된 팔루스를 ‘레즈비언 팔루스’라고 제시한다. Judith Butler, 『Bodies that Matter』, 1993, Taylor & Francis, pp. 51-91 참조. 제인 갤럽은 버틀러의 레즈비언 팔루스 개념이 ‘오류이지만 오류이기에 매혹적이며, 섹시’한 이론적 렌즈라고 쓰기도 했다. 제인 갤럽, 김미연 옮김, 『퀴어 시간성에 관하여』, 현실문화, 2023, 46-49쪽 참조.
  3. 독자가 본인과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연예인이 사귄다는 설정으로 쓰이고 읽히는 팬픽의 종류. ‘나’와 ‘알페스’(Real Person Slash)의 합성어다.
  4. 연극의 작품 내용 소개 글에 쓰인 표현이다. https://www.seoulfringefestival.net:5632/load.asp?subPage=270.view&search_gubun=&orb=%B0%F8%BF%AC%B8%ED&search_section=&search_category=&search_idx=4822&search_day=&page=2.
  5. 프랑코 베라르디 [비포], 『봉기』, 갈무리, 2012 참조. 언어의 “인플레이션적” 역량에 대해서는 진송의 논의에서 배웠음을 밝힌다.
  6. 관객과의 대화에서 밝혀지기로, 이 마지막 대사는 원래 각본에는 없었다고 한다. 강수연 배우의 애드리브로, 추후에 삽입되기로 결정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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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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