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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알 같은 슬픔을 위하여

신촌극장 <애 개 아파트 X 이오진>

진송

제241호

2023.09.07

<애 개 아파트>는 세 여자가 춤을 추고 노래하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옷을 훌훌 벗어 던지고 옷 안에 감춰 둔 색색의 수영복을 입은 채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세 사람의 표정은 정말이지 홀가분하고 자유로워 보였다. 관객들 역시 손뼉을 치며 흥을 돋우었고, 극장에는 ‘힐링’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아늑한 울림을 가진 박수 소리를 들으며 오진이 극 중에서 언급했던 ‘평화’와 ‘슬픔’, 그것도 ‘종기 같은 슬픔, 쌀알 같은 슬픔’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극장을 한가득 채우는 공감의 물결 어디에 나 자신을 기댈 수 있을지에 대한 적막한 고민 속에 잠시 잠겨 있었다.

<애 개 아파트>의 공연 사진. 신소우주, 오진, 복태가 책상 하나를 앞에 두고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옅은 체크 무늬가 들어간 셔츠를 입은 신소우주와 검은 블레이저를 입은 오진은 복태를 바라보고 있다. 
            복태는 핑크색으로 염색한 머리에 뿔테안경을 쓰고, 알록달록한 비즈로 만들어진 안경줄을 걸었다. 쇄골 근처와 팔의 곳곳에 손으로 그린 듯한 타투가 보인다. 
            세 사람 앞에는 각각 얇은 책이 펼쳐져 있고, 책상 가운데에는 에두아르 르베의 『자살』 책이 놓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극은 오진이 네팔에 다녀온 경험과 함께 평화를 의미하는 ‘샨티’라는 산스크리트어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오진은 ‘샨티’와 함께 ‘샨티’를 가져다줄 인생의 동반자를 마치 한 줄기 빛처럼, 혹은 성한 것인지 알 수 없는 동아줄을 욕망하듯이 소망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남편을 의미하는 단어 ‘사티’가 한국어로 음차했을 때 ‘샨티’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은 절묘하다. ‘사티’를 찾지 못하고 ‘샨티’를 갈망하는 오진의 하소연에 세 명의 인물 복태, 신소우주, 오진의 대화가 이어진다.
복태는 애와 개를 키우고, 신소우주는 고양이를 키우고 아파트에 살며, 오진은 애와 개와 아파트 다 없다. <애 개 아파트>의 팸플릿에 시놉시스 대신 적혀있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이 소개는 ‘한국의 젊은 여성’이라는 공통점으로 성기게 묶여 있는 세 사람 간의 차이를 보여준다. 한편 인물들 간의 차이를 나타낼 때 쓰인 앞선 문장의 (애와 개, 그리고 고양이를) ‘키우다’, 그리고 (아파트에) ‘살다’라는 동사에는 ‘가지다’라는 단어로 바꿔 쓰일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가지다’라는 단어의 관점에서 세 사람의 차이는 특권의 우열, 요즘 말로는 ‘소수자성의 우열’로 치환되기가 쉽다. 그러나 이 작품은 (애, 개, 아파트를) ‘가지다’라는 단어 대신 ‘키우다’, 그리고 ‘살다’라는 단어에 머무른다. 그리고 세 사람의 차이를 측량할 수 있는 슬픔으로서 맞대어 보지 않는다. 대신 한없이 미분적이기에 측량이 불가능한 ‘쌀알 같은 슬픔’으로서 서로 다른 그대로의 형태로 공유될 수 있게 한다.

<애 개 아파트>의 공연 사진. 검은 블레이저와 풍성한 주름이 잡힌 보라색 치마를 입은 오진이 무대 가운데 서서 책을 펼쳐 보고 있다. 
            그의 뒤로 하얀 침구가 덮인 일인용 침대가 보이고 침대의 뒤편으로 침대와 폭이 같은 목재 책상이 보인다. 
            침대 위에는 돌돌이 테이프 클리너 하나가 놓여 있고, 책상에는 두 사람이 앉아 책을 펼치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오진은 독백을 통해 종기처럼, 쌀알처럼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처럼 보여서 타인과 공유하기 어렵고 스스로 외로이 다스려야만 할 것 같은 슬픔을 가진 이의 쓸쓸함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직진하는 굵직한 서사 대신 좁고 아늑한 공간을 맴도는 대화 속에 드러난 세 사람의 슬픔과 혼란은 그것을 측량하거나 그 슬픔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압도하기는 어려운 작은 것이기에, 그것을 포착하고 발화하는 용기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는 가운데 한 땀 한 땀 말 그대로 실낱같은 선을 이어 나가며 느리게 진행되는 복태의 바느질, 가만히 누운 채 고양이를 쓰다듬듯 자신의 몸을 다독이는 신소우주의 다정한 리듬, 그리고 조그만 무대 위를 빙글빙글 맴돌던 오진의 제자리걸음은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기에 비로소 슬픔을 위해 슬픔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몸짓처럼 보였다.
그러나 제자리를 맴도는 쌀알 같은 슬픔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연극은 제자리를 맴돌기를 중단하고 한참을 나아가야 존재할 평화와 희망을 애타게 바라보고 있었다. 오진은 저 멀리 네팔로부터 온 ‘샨티’라는 단어와 또 그 단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동반자 없는 자기 자신’ 사이의 간극을 곱씹는다. 그는 미래의 남편으로 대변되는 안정적인 관계를 통해 그 간극이 화해하기를 희구하는 듯하다. 한편 복태와 신소우주는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머니를 통해서는 충족시킬 수 없었던 자신을 온전히 사랑해 줄 어떤 존재 혹은 그런 존재와의 (기억을 소망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라면, 불가능한) 기억을 소망한다. 이는 ‘어머니가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기를 바랐다’는 복태의 대사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잔인한 얘기일지 모르겠지만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 엄마’ 같은 건 없다. 중요한 것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과 어떻게 조우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애 개 아파트>의 공연 사진. 캠핑용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쳐든 복태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하늘색 끈 나시 아래에 꽃무늬 치마를 입었다.

극의 말미에서 연극이 바라보는 곳과 연극이 머무는 곳 사이의 간극이, 노래하고 춤추는 배우들의 몸이 그리는 가볍고 산뜻한 리듬과 그에 장단을 맞추는 관객들의 손뼉 소리로 해소되는 것처럼 보였을 때, 나는 극장을 가득 채운 공감의 물결 어디에 나를 맡길 수 있을지 몰라 고인 물처럼 정지한 채 연극이 바라보는 곳과 연극이 머무는 곳 그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객석의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희망이 삶을 가능하게 하는 몹시 중요한 역량임을, 그리고 먼 곳을 향하는 것이야말로 희망이 가진 주요한 특성 중 하나임을 잘 알고 있다. 때로는 그 먼 거리로부터 발생하는 슬픔이 희망을 더 슬프도록 아름답게, 강렬히 욕구할 만큼 가치 있게 만든다고도 느낀다. 내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는 불가능함에만 존재하는 안락한 정지의 순간이 나를 기분 좋게 주무르는 것은 도무지 버릴 수 없는 즐거운 체험이다. 슬픔을 즐기는 습관은 나의 자랑스러운 생명력이며, 아마 앞으로도 나는 종종 쓸쓸함에 잠겨 나를 위로할 수 있는 희망과 슬픔을 동시에 만들어 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따금 ‘종기 같은 슬픔, 쌀알 같은 슬픔’들이 사무치게 그 존재를 알리는 순간들에 오로지 쌀알 같은 슬픔을 위해서 쌀알 같은 슬픔을 지키고 싶다는, 쌀알 같은 그것들을 위해서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고 쌀알 같은 모습인 그대로 비참함과 혼란을 묵묵히 견디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이 충동은 삶의 혼란과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쌀알 같은 이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충동과 다를 바가 없다. 혼란스러운 삶의 슬픔 가운데 있는 이들을 버리고 언젠가 ‘더 좋은 삶’으로 나아갔을 때의 외로움이 혼란스러운 삶의 슬픔 한가운데 남겨진 외로움보다 더 클 것이라는 나의 무모한 예측을 어떻게 설득해 낼 수 있을까? 우리가 슬픔을 만들어 내는 세상을 바꿀 수 없을 때, 슬픈 세상에 함께 계속 머무르자는 주장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붙잡을 수 있을까? 다만 제자리를 한참이나 꿰매는 것 같던 복태의 느린 바느질과 실의 궤적 위로 덧대어지던 슬픔에 대한 이야기들을 곱씹어 본다.

<애 개 아파트>의 공연 사진. 침대 위에 누워 한 손으로 책을 들고 있는 신소우주의 모습이다. 그는 다른 손을 침대 밖으로 늘어뜨린 채 바닥 쪽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 제공: ⓒ본드]

신촌극장 <애 개 아파트 X 이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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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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