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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실패할 방법

DAC Artist 강현주 <잘못된 성장의 사례>

권나은

제242호

2023.09.21

연극은 실패가 예정된 실험이다. 실험이 끝날 때까지 우리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극작가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가설을 설계하는 자다. 그는 가설을 방해할 징후를 여기저기서 감지하지만, 미지의 영역에 그것을 숨긴다. (우리는 햄릿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잘 알지 못한다. 어딘가에 미상의 역사가 묻혀 있겠지만, 어떤 고고학자도 그 장소에 닿을 수 없다.) 연출가와 배우는 텍스트 안에서 인물을 해독하고, 인물의 메소드를 규격화한다. 이들은 인물에게 적지 않은 의문을 느끼지만, 그 신호를 무시한다.

한때 연기나 극작을 전공한 동료들 사이에서 ‘에니어그램’이라는 유사 심리검사가 유행했다. 인물 성격 창조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였다. 한 동료 연기자는 에니어그램만 알면 모든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의구심이 들었다. 에니어그램의 출처와 기원에 대한 논쟁을 떠나, 지구상의 어떤 인간도 ‘N번 유형, M번 날개’ 따위의 용어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도구를 활용하는 창작자들의 마음이 이해는 됐다. 현실의 인간은 절대 단순하지 않지만, 연극의 인간은 대개 기능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 공연 사진. 무대의 가운데에 검은 책상을 가로 두 개 세로 세 개 이어 붙여두었고, 그 위에는 스탠드, 노트북, 달력, 책, 노트 등이 어지럽게 놓여있다. 
            네 사람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데, 가장 상석에 앉은 은주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말하고 있고, 그의 왼편에 앉은 혜경과 오른편 가장 끝에 앉은 도윤이 각자 노트를 하고 있다. 
            은주와 도윤의 사이에 앉은 지연은 앞에 놓인 자료를 살피는 듯하다. 은주의 뒤로 벽에는 문이 하나 나 있고, 벽 너머의 공간이 보이도록 큰 창이 나 있다. 문에 붙은 ‘관계자외출입금지’라는 문구가 눈에 띈다. 
            그 창 너머로 붉은 조명을 받고 있는 분재 식물들이 보인다. 사진의 가장 왼쪽 상단에 걸린 스크린에는 ‘고염 스트레스 식물 반응 체계’를 정리한 도표가 영사되고 있다.

식물 실험을 소재로 한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에는 “실험은 못 하면 다시 하면 돼. 결과를 빨리 내려고만 하면 가설에 갇혀. 느려도 끝까지 정확하게 하는 게 중요해”라는 대사가 나온다. 맞는 말이지만, 연극인들에게 ‘느려도 정확하게 할’ 여유 같은 건 주어지지 않는다. 연극인들은 서둘러 실험 결과를 내고 표준화된 모델을 창조해야 한다. 이들은 가설에 자발적으로 갇힌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전통에 따라, 국내 대학과 극단들이 적극적으로 믿고 계승해 온 메소드를 소환한다. 인물의 성격은 유형화가 가능해야 하고, 서사는 인과적인 방식에 따라 배치돼야 하며, 공간은 오브제 중심으로 구성돼야 한다는….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그런 점에서 기존의 연극과 달랐다. 보편적인 리얼리즘 연극의 외관을 취하고 있었으나, 양식 면에서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있었다. 나는 이를 이 작업의 미덕으로 느꼈기에 지면을 통해 짧게 기록해 두려고 한다.

연극 <잘못된 성장의 사례>의 배경은 지방 소도시 국립대학 응용생명과학부 식물분자생물학 연구소 실험실이다. 실험실 멤버들은 교수 은주의 지도하에 식물 속에 존재하는 저항성 유전자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이들은 가설에 따라 한 가지 실험을 지겹게 반복하며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하는 중이다. 당신이 연출가라면 이 연극의 공간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보통의’ 연출가들은 무대를 미니멀하게 만들 것이다. 차갑고 푸르스름한 느낌의 검은색 바닥과 벽. 의자와 책상들. 행거에 걸린 실험 가운. 식물을 포함한 오브제들. 핀 조명. 그것이 진정 ‘연극적인 공간’이라 믿기 때문이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 공연 사진. 실험 가운을 입고 라텍스 장갑을 낀 예지가 저울 위에 놓인 플라스크에 가루를 섞고 있다. 저울과 플라스크가 놓인 책상은 실험도구들로 가득하다. 
            실험 가운을 입고 한 손에 매스실린더를 든 인범이 유심히 이를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펜을 쥔 채 무언가를 기록하려 한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연극적 공간’에 대한 기대를 과감하게 배격한다. 무대 위에 드라마 세트장을 방불케 하는, 아주 사실적인 실험실이 나타난다. 배양실, 저온 배양기, 전화기, 달력, 텀블러, 연필꽂이, 노트북, 메모지, 전공 서적, 서랍, 콘센트, 구글 클라우드, 쓰레기통, 세제, 물뿌리개, 오토클레이브, 클린벤치…. 평생 관람한 어떤 연극보다도 사물이 많았다. 신기하게도 ‘오브제 과잉’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그곳이 ‘연극적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연극에는 이 연극이 연극임을 알려주는 장치들이 존재한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에는 그런 장치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우선 인물들이 객석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이 연극에는 정면 객석과 측면 객석 두 개가 존재하는데, 인물들은 이중 어느 객석도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즉 무대에 머물지 않는 사람들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앞에 관객이 있든 말든 책상에 앉아 노트북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등을 보이며’ 전화한다. 공간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다. 연극 하수에 실험실 출입문이 있다. 인물들은 이 문을 통해 무대에 진입한다. 창문 커튼 사이로 인물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까지의 모습(무대에 진입하기 전까지의 모습)이 전부 노출이 된다. ‘연극적 공간’을 구획하는 필수 조건과 경계가 점차 흐려진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 공연 사진. 배양 플레이트가 켜켜이 쌓여있는 인큐베이터 앞에 단발머리를 한 사람이 서 있다. 
            창문 너머의 주황색 빛과 인큐베이터에서 나오는 빛이 합쳐져 그를 비추지만, 등을 지고 서 있어 실루엣만 보일 뿐이다.

인물 역시 ‘연극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 유형화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이 작품에는 악인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다. 그나마 교수 은주가 (악인까지는 아니고) 비밀과 의혹이 많은 ‘기득권’ 정도로 묘사되는 상황인데, 연극은 가장 문제적인 인물인 은주를 ‘처리하지’ 않는다. 연극 내내 은주는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는 불길한 표정으로 전화를 받거나, 불이 꺼진 실험실에 급하게 들어와 문서를 처리하거나, 몰래 메일을 읽는다. 제자들이 흘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은주는 동료 남자 교수와의 관계, 아이의 죽음, 논문 조작 등 여러 의혹과 구설수를 가진 사람이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는 의혹들을 해소해 주지 않는다. 은주는 연극의 인물이라기보다는 현실의 인물로 보인다. 우리가 끝내 전부 알아내고 진단할 수 없다는 점에서.

환경 스트레스 연구가 별다른 결과를 내지 못하자, 혜경은 교수 은주에게 실험 조건을 바꾸거나 다른 주제를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은주는 무척 단호하게 “실수한 거 없나 하나씩 되짚어봐. 머터리얼에 문제없는지. 크리티컬 포인트도 확인하고”라고 말한다. 은주의 태도는 연극에 암묵적인 메소드가 존재하며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믿는 이들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은주조차 과거에 논문을 위해 데이터를 조작한 적 있다는 사실이 극 후반부에 드러난다. 우리가 연극에서 믿는 신화들은 얼마나 불완전한가?

혜경은 자신의 실험체를 하나씩 쓰레기통에 넣는다. 동기가 놀란 기색을 보이자, 혜경은 쓸쓸히 고백한다. 실험이 실패했다고. 자기가 설정한 환경에서는 제대로 못 자랐어야 했는데 식물이 잘 자랐다고. 심각한 장면이었는데, 이 대사를 듣고 옅은 위안을 얻었다. 어차피 연극은 태생적으로 실패가 예정된 실험이니, 연극을 만들 때 남들이 하지 말라는 짓만 골라서 해도 괜찮겠다는 위안. 그런 환경에서도 ‘잘 자랄’ 작업이 어딘가엔 존재하지 않을까. 그런 작업을 찾고 싶다.

<잘못된 성장의 사례> 공연 사진. 혜경이 다부진 표정으로 앞에 선 사람을 바라보며 서 있다. 혜경은 흰 티 위에 단추를 모두 채운 빨간색 가디건과 긴 검은색 A라인 치마를 입었다. 
            혜경의 뒤로 놀란 얼굴의 인범이 보인다. 인범은 흰 티 위에 단추를 모두 풀어헤친 연보라색 셔츠를 걸치고 있으며 청바지를 입고, 한 손에는 배양 플레이트를 들었다. 
            그들의 뒷벽에는 블라인드가 달린 창문 세 개가 있고, 싱크대와 기구 거치대, 빗자루, 폐수 통, 라텍스 장갑 박스 등이 놓여있다.

[사진 제공: 두산아트센터]

DAC Artist 강현주 <잘못된 성장의 사례>
  • 일자 2023.9.5 ~ 9.23
  • 장소 두산아트센터 Space111
  • 작·연출 강현주 출연 공예지, 류혜린, 박인지, 이지현, 이휘종, 황상경 조연출 나수경 프로덕션 무대감독 김영주 무대디자인 정승준 무대제작 에스테이지(s_TAGe) (대표: 이윤중 / 제작팀: 김세진, 차승호, 정우근, 이종민, 이범용, 이승용, 정병문, 정재현) 작화 작화공간 (대표: 이남련 / 작화팀: 박지원, 김미경, 조정숙, 김용선) 소품디자인·제작 권민희 소품어시스턴트 박선주 조명디자인 정유석 조명어시스턴트 정우원 조명크루 김휘수, 한성민, 이현직, 조은성, 김은빈, 정주연, 유보민, 강민지 음악 옴브레 음향디자인 B.P 음향·영상오퍼레이터 박하은 영상디자인·작업 정혜지 영상어시스턴트 정경은 의상디자인·제작 팩토리 88 (대표: 오현희) 분장디자인 정지윤 분장팀 박주디 무대크루 이정희 그래픽디자인 박연주 영상기록·촬영 업플레이스 (대표: 오득영) 사진 정희승(포스터, 프로필) 만나 사진작업실(대표 김신중)(연습, 공연) SNS컨텐츠제작 필루미에르(대표 이화승) 인쇄 으뜸프로세스 도움주신 분 장세정 김규리 신우근(국립종자원), 고효림(피플바이오), 이효준(한국생명공학연구원 식물시스템공학연구센터), 안선영(생명다양성재단) 기획·제작 두산아트센터
  • 관련정보 https://www.doosanartcenter.com/ko/performance/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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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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