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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착한 사람들 눈에만 보이는 기묘한 예술

수유연극실험실 개관공연 <쇼 팔다 미친 유령 극단>

배선애

제242호

2023.09.21

언제부터인가 동화(가 되어버린 오래된 이야기들)를 보는 시선이 배배 꼬이기 시작했다. 흥부가 정말 착한 걸까? 무능력함과 착함이 어떻게 등가가 되나? 신데렐라는 요정의 든든한 뒷배로 왕국을 세웠어야 했다. 백설공주를 순순히 왕자에게 내어준 일곱 난쟁이는 뭐냐? 연극을 공부하면서부터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꼬마를 나무라게 되었다. 허위와 허영에 찌든 어른들에게 던지는 꼬마의 돌직구가 매력적임에도 불구하고, 연극에 한해서, 꼬마는 좋은 관객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연극 놀이를 하고 있는데, 착한 사람 눈에는 보인다는 약속을 걸고 나름대로 재미나게 놀고 있었는데, 꼬마의 한마디 때문에 그 약속이 깨져버렸다. “꼬마야, 너는 연극적 약속을 깼어. 너 때문에 연극 놀이가 멈췄어”. 아동극 공연에서 종종 꼬마의 후예들을 현실로 만날 때마다 연극적 약속을 거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지속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래 묵은 동화 이야기를 꺼낸 것은 <쇼 팔다 미친 유령 극단>(이하 <쇼 팔다>)을 보면서 「벌거벗은 임금님」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많은 약속을 걸고 봐야 보이는, 돌직구 꼬마는 절대 걸릴 수 없는 약속으로 가득한 공연이었다. 그렇게 약속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 작품이 매우, 몹시 소박했기 때문이다. ‘수유연극실험실 개관공연’인 이 작품은 도발적이면서도 당찬 포부를 내걸고 공연 제목과 그에 어울리는 내용으로 수유연극실험실의 문을 열었다.

<쇼 팔다>의 공연 사진. 벽면에는 흰 페인트가, 바닥에는 시멘트가 칠해진 공간이 몇 개의 기둥을 기준으로 둘로 나뉘어 있다. 
            한쪽 공간에 네 명의 배우가 서 있는데, 이곳을 밝히고 있는 것은 바닥에 놓인 주황색 램프뿐이다. 
            이들은 모두 기둥 너머 불이 밝혀진 또 다른 공간을 바라보고 있다. 램프에 비친 배우들의 그림자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너무 소박해서 잘 안 걸리는 연극적 약속

일단 공간부터 보자. 수유역 근처 새로운 연극 공간을 만들었고, 그 공간을 통해 다양한 연극을 실험해보겠다는 의지가 읽히는 이름이다. 이미 익숙한 또 다른 연극실험실이 떠올랐다. 혜화 로터리에 있는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그 공간의 낡음, 좁음, 여러 불편함, 그럼에도 친근하고 새로우면서도 무한히 확장되고 넓어지는 마술이 펼쳐지는 곳. 수유연극실험실도 같은 목적과 의도였을 터, 새로 만들어진 공간은 말 그대로 ‘가난한 연극’의 가난한 공간이었다. 극장 한 벽면에 객석만 놓여있을 뿐, 무대 장치도, 조명 설비도 없는 하얗고 텅 빈 공간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연극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극한의 실험을 하는 곳으로 보였다. 객석에 앉아 마주 본 곳은 그냥 하얀 바닥과 하얀 벽이 전부. 천장에는 조명기를 움직일 수 있는 레일이 설치되어 있지만, 거기에 매달린 조명은 일명 알전구 14개. 세 개를 뺀 전구는 까만 종이 고깔을 쓰고 있었다. 흔하디 흔한 LED조명 하나 없이 천장의 조명 몇 개와 배우가 손으로 움직이는 스탠드 하나만으로 작품 전체의 조명을 소화해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작품의 이야기도 소박하다. <쇼 팔다>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세르비아 작가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쇼팔로비치 유랑극단」을 기본 모티프로 삼았다. 원작에서는 유랑극단의 공연예정 작품이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도적떼」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아침부터 자정까지」를 공연하고자 한다. 그러니 <쇼 팔다>는 「쇼팔로비치 유랑극단」과 「아침부터 자정까지」를 모티프로 삼아 재창작 작업을 한 작품이다. 원작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세 명의 배우와 연출이 유랑극단 단원의 성격을 이어받았다는 점, 그들의 대사 몇 가지가 원작 그대로인 점이다. 재창작의 포인트는 두 가지로 정리된다. 전쟁 중에도 연극을 하기 위해 유랑하는 연극인들, 그리고 탈일상의 욕망. 이 두 가지가 현재 공연 연습 중인 연극인들에 의해 실현된다. 저녁 공연을 앞두고 홍보차 거리로 나섰던 단원들이 극장으로 돌아왔을 때 극장엔 모든 것이 사라졌다. 신고하느냐 연극하느냐 고민하다가 극장이 아닌 길거리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한 단원들. 한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리허설을 하다가 배우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결국은 유령이 된 그들과 함께 공연 홍보를 하며 끝이 난다. <쇼 팔다 미친 유령 극단>은 극한의 조건 속 유령이 되어서도 연극을 올리는 연극쟁이들의 이야기였다.

<쇼 팔다>의 공연 사진. 어두운 공간, 천장에는 종이로 만든 갓을 씌운 전구 네 개가 걸려 있다. 
            공간에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직사각형으로 잘린 신문지들이 휘날리는데 세 인물이 두 팔을 들고 그 사이를 걸어간다. 
            맨 앞쪽에 선 인물은 노란 단발머리에 앞머리를 내리고, 화려한 무늬의 재킷과, 재킷의 무늬와 유사한 천들을 듬성듬성 덧댄 노란 치마를 입었다. 
            그 뒤로 손가락장갑을 끼고 검은 옷을 입은 짧은 머리의 인물이 보이는데, 작업 조끼에는 줄자를, 허리춤에는 테이프와 케이블타이 등을 매달고 있다. 
            그 옆의 인물은 갈색의 곱슬머리 가발을 쓰고, 은색 망토를 두르고 있지만 어두워 의상이 잘 보이지 않는다.

소박한 공간 속 소박한 이야기. 이렇게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실제로 이 극단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약속이 필요했다. 극장의 모든 것들을 도둑맞은 절망, 배우들이 하나씩 사라진 충격 등이 쌓여 유령 극단의 절실함이 다가와야 하는데, 소박한 공간 속에서는 이 약속들이 걸리기 어려웠다. 원래부터도 텅 비어 있는 공간이기에, 도둑맞아 극장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웠다. 길거리와 극장의 경계도 명확하지 않은 데다가 극장에 무엇이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 그저 처음부터 비어 있던 공간을 어떻게 상실과 절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다. 배우들이 사라졌다(살해당한 배우, 그 범인을 폭행해 응급실에 간 배우)는 것 역시, 구분되지 않은 공간 속에 등장하는 배우들로 인해 유령인지 인간인지 부상당한 건지 멀쩡한 건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정전이 된 상황, 스탠드의 한정된 불빛 속에 펼쳐진 공연으로는 공연의 내용도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았고, 유일한 관객으로 등장하는 여자는 그 역할이 무엇인지 끝까지 애매할 정도로 모호했다. 카이저의 작품이니 그런가 보다 하고 알고 있던 대사들을 찾아내려고 했을 뿐, 만약 시모비치나 카이저를 모르는 관객이 보았다면 어떤 정보들을 수집해서 어떤 주제를 찾아낼지 궁금할 정도였다. 한마디로, 나는 충분히 착한 사람이 되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왕의 의상에 극찬을 보낼 준비가 되었는데, 재단사가 별다른 설명을 해주지 않아 구체적으로 상상하지 못한 채 그저 벌거벗은 왕만 보이는 상황이었다.
무대 위에서 배우들은 이른바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아주 사소한 무대 장치나 작은 소품 하나라도 연기에 보탬이 된다면 그것이 비빌 언덕이 되고 거기에 비비면서 연기를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객에게도 적용된다. 관객도 공연을 볼 때 비빌 언덕이 필요하다. 마음 붙일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연극실험실의 공간이 실험을 위해 단순화되어 있다면 이야기라도 조금 더 자세하고 친절할 필요가 있다. 재단사가 지어낸 화려하면서도 매우 구체적인 거짓말처럼. 아니면 공간의 경계와 동선을 명확히 구분해 표현했다면 약속도 잘 걸렸을 것이고 유령 극단 단원들의 상황에 훨씬 많은 것을 공감했을 것이다.

<쇼 팔다>의 공연 사진. 어두운 공간에 네 명의 인물이 일렬로 줄지어 서 있다. 제일 앞의 사람은 두 손으로 직육면체 모양의 조명을 들어 머리 위에 얹고 신나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뒤로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몽롱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의 얼굴이 환하게 보인다. 
            뒤쪽으로 서 있는 두 사람에게는 조명이 잘 닿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제일 앞선 사람이 들고 있는 조명에서 이어진 배선을 손에 붙잡고 있다.

새로운 연극실험실, 기대가 되는 이유

<쇼 팔다>는 수유연극실험실의 첫 작품이다. 수유연극실험실의 모토가 ‘연극의 독창성 찾기’라고 밝히고 있다.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기에 이 공간은 매우 적합해 보였다. <쇼 팔다>의 아쉬움은 연극실험실의 첫 작품이기에, 공간에 적응하고 맞춰가는 처음이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실제로 배우들은 관객 입장 출구만이 아니라 화장실 출입구인 객석 왼편의 계단, 그리고 기둥으로 구분된 무대공간 왼편의 다른 단층도 충분히 활용했다.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 관객의 사각지대가 많다는 것 등 현실적인 문제들은 앞으로 점점 찾아가며 개선하면 될 일이다. 중요한 것은 관객에게 어떻게 상상하게 할 것인가, 어떻게 약속을 걸고, 또 어떻게 그것을 유지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아무것도 없어도 연극이 되고 그게 또 재미난 것은 연극 장르 자체가 착한 사람들(연극적 약속에 쉽게 걸리는 사람들)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보이는 신묘한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연극의 독창성을 찾겠다는 수유연극실험실은 앞으로도 엄청난 실험들을 통해 연극성의 정체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배우들 모두 화술과 발음이 좋고 몸을 쓰는 것도 매우 유연했다. 매우 좋은 기량을 갖춘 배우들이 소박하고 단순한 무대를 다채롭게 만들었다. 다만, 소리가 너무 울려서 좋은 발음인데도 대사 전달이 잘 안 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극장의 소리 울림은 연극실험 이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근 너무나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는 공연들을 봐서 그런가, 너무나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아무것도 없이 연극을 하는 모습에 가슴이 찌르르했다. 왜 연극을 할까? 왜 연극을 끊지 못할까? 그 대답은 앞으로의 수유연극실험실의 작업을 통해 찾을 수 있을 듯하다. 극한의 조건에서도, 극한의 조건이면 더욱더 적극적으로 창의성이 발휘되는 것이 연극이니까. 쇼를 팔다가 미친 유령 극단은 아무것도 없지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실험실에 조금씩 정착하게 될 것 같다.

<쇼 팔다>의 공연 사진. 흰 페인트가 칠해진 콘크리트 벽면이 보인다. 
            왼쪽으로 두 개의 기둥이 있고, 그 사이에 스탠드형 에어컨이 놓여 있으며, 기둥의 오른쪽 벽면에는 흰색으로 칠해진 문이 설치되어 있다. 
            그 앞쪽으로 검은 상·하의를 입고 구두를 신은 한 사람이 발을 구르며 뛰어가듯 두 팔을 앞뒤로 들어 올린 채 빠르게 움직인다. 
            그의 그림자가 벽면에 길게 드리워졌다.

[사진 제공: 수유연극실험실 / 촬영: 황준영 작가]

수유연극실험실 개관공연 <쇼팔다 미친 극단>
  • 일자 2023.9.1 ~ 10.15
  • 장소 수유연극실험실
  • 원작 류보미르 시모비치 「쇼팔로비치 유랑 극단」, 게오르크 카이저 「아침부터 자정까지」 대표 안보리 출연 김민지, 백승우, 박지호, 정진아, 서베로니카, 김하영, 신도연, 이원법 무대 안보리 음향 안보리 조명 안보리 포스터디자인 안보리, 김민지 의상 안보리, 김민지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0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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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애

배선애
연극평론가, 드라마투르그, 전 공이모 회장. 연극으로 수다 떠는 게 세상에서 제일 재밌고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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