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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내 이야기가 끝난 후

<큰 가슴의 발레리나>

김민조

제243호

2023.10.12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내 이야기는 어디쯤에서 끝나게 될까? 아직은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저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그렇지만 언젠가 그런 가능성이 모두 소진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가 주인공으로서 탐험해야 할 미지의 영역은 남아 있지 않고, 앞으로는 지루한 반복과 연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피할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내 이야기가 비로소 끝났다고 느끼게 되지 않을까. 그날이 오면 나는 슬퍼할까. 아니면 이제 좀 홀가분해졌다고 웃을 수 있을까. 그런데 내 이야기가 끝난 다음에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게 될까.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아 모든 이들이 언젠가 피할 수 없이 맞이하게 될 미래의 그날을 향해 간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가슴’들이다. ‘왼쪽이’와 ‘오른쪽이’로 불리는 두 가슴들은 바르브린이라는 여성과 함께 무에서 태어나 첫 호흡을 들이쉬고, 뒤집고, 직립하고, “세상에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내려온 천사” 같은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여정을 함께한다. 왼쪽이와 오른쪽이는 그들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리적 변화와 성장을 관찰하면서 바르브린이라는 본체의 정신적 삶과 구분되는 가슴들만의 서사를 구축해나간다. 가슴이들은 고양되어 있고, 그들 자신이 성숙해가는 과정에 기뻐하며, 극장에 모여 앉은 관객들에게 그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발레리나에게 요구되는 “마르고 납작한 몸”이라는 규범에 부딪히는 순간 바르브린과 가슴이들 사이의 갈등이 시작된다. 가슴이들은 이제 바르브린이 우아하게 턴을 돌거나 높이 점프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거추장스러운 살덩이로 취급받게 되는 것이다. 가슴이들은 끊임없이 바르브린에게 말을 걸지만, 바르브린은 가슴이들을 자신에게 딸린 일부로만 생각하기에 둘 사이의 갈등은 다소 일방적이다. 무대에서 “천 개의 삶”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기를 꿈꾸는 소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뛰어난 발레리나가 되기를 원하는 소녀에게 크게 부풀어 오르는 가슴은 그저 고약한 저주에 지나지 않는다. 한 여성과 그의 신체 사이에 마법처럼 걸려 있는 모순을 도대체 어떻게 해주(解呪)할 수 있을까.

<큰 가슴의 발레리나>의 공연 사진. 하얀색의 홀터넥 반소매 티셔츠에 하얀색의 긴 랩스커트를 입은 단발머리의 바르브린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양옆에 바짝 붙어 선 왼쪽이와 오른쪽이는 상체를 조금 숙인 채 함께 정면을 바라본다. 
            오른쪽이는 하얀색 반소매 셔츠에 하얀색 바지를, 오른쪽이는 하얀색 라운드 티셔츠에 하얀색 바지를 입고, 이마에 하얀색 밴드를 두르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모순을 극복하지 않는다. 바르브린이 가슴들과 화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몸을 긍정하는 어떤 방향의 페미니즘 플로우를 따라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순을 극복하지 않는 것, 아니 모순을 극복할 수 없음을 직시하는 것 또한 다른 의미에서 페미니즘이 열어온 선택지이기도 하다. 예컨대 이 공연은 제3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이었던 윤상은의 <죽는 장면>(2020)과 중요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데, 고전 발레를 사랑해 마지않았던 발레리나가 자신이 헌신해 온 예술이 ‘여성’으로서의 몸을 가진 자신과 근본적으로 불화한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윤상은은 <라 실피드>나 <라 바야데르> 같은 고전 발레 레퍼토리에서 발레리나가 연기하는 여성이 ‘아름답고 우아하게’ 죽어서 쓰러지는 결말 장면을 관객들 앞에서 반복적으로 수행하여 보여준다. 여성 인물이 죽는 장면이 반복될수록 발레리나 윤상은은 여성을 미적으로 착취하는 결말의 부당함에 의해, “발레의 역사에 기입된 여성혐오”1)로 의해 정신적으로 마모되어간다. 결국 윤상은은 관객 앞에 직접 걸어나와 발레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내가 사랑해온 예술이 나를 인류사의 무게로 혐오해왔다는 걸 깨달았는데, 이 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이 정녕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바르브린은 윤상은과 다른 길을 선택하지만 그 길은 동일한 모순에 얽혀 있는 더블일 뿐이다. 오디션에 떨어진 바르브린은 끝내 유방축소수술을 받음으로써 청소년기부터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었던 저주받은 역사”와의 결별을 꾀한다. 나는 가볍다, 수직이다, 살아있다, 자유다, 라고 읊조리는 바르브린과 무기력하게 바닥에 쓰러진 채 유방과 유두와 유륜의 이름으로 바르브린을 저주하는 가슴이들의 모습이 서늘한 대비를 이룬다. 수술 이후 바르브린이 걸어가는 삶도 가슴이들과의 화해를 재탐색하는 여정과는 거리가 멀다. 남자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젖을 물리며 육아를 하는 평범하고 ‘정상적인’ 여성의 삶이라 할 수 있다. 가슴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발레를 위해 그들을 희생시킨 본체와 더 이상 공존하기를 거부하는, 그런 가슴이들이 되었을까.

<큰 가슴의 발레리나>의 공연 사진. 왼쪽이와 오른쪽이가 나란히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움직이고 있다. 왼쪽이는 무릎을 접은 두 다리를 허공으로 들어 올리고 두 손은 쇄골 쪽에 모은 자세다. 
            머리를 바닥에서 든 채 크게 놀라는 표정이다. 그의 상반신에 몸이 살짝 가려진 오른쪽이는 두 다리와 두 팔, 머리를 모두 바닥에서 땐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누워 있는 두 사람 뒤로 크기가 같은 하얀색의 육각형 구조물이 올록볼록 쌓여 있다.

왼쪽이와 오른쪽이는 신체 기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시종일관 노력한다는 점에서 성실한 노동자들과도 같다. 가슴이들을 연기한 신문영과 김찰리는 등퇴장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무대에서 끊임없이 다양한 움직임 노동을 수행하는데, 앙상블을 형성하기보다는 서로 다른 스코어로 변화무쌍하게 움직여가는 두 연기자의 신체는 일견 바르브린의 서사를 압도할 정도로 에너제틱하다. 축소수술 때문에 다소 무기력해진 와중에도 가슴이들은 아기가 태어나자 다시 젖을 생산하고 ‘발사’하는 노동에 몰입한다. 그들이 천진난만하거나 충성스럽기 때문은 아니다. 가슴이들은 인간을 이루는 일부로서 각자의 위치에 맞는 소임을 다하려 노력한다는 점에서는 웹툰 『유미의 세포들』(2015~2020)에 나오는 다양한 세포들과도 유사해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본체/주인인 유미를 위해 헌신하는 세포들과는 달리 가슴이들은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찾기 위해 진력한다는 점에서 일정한 차이를 지닌다. 유미가 오롯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유미의 세포들』과는 달리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바르브린이 아니라 본체와 협력하고 갈등하면서 본체와 함께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들이 주인공이 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브린이 추방하려 해도 가슴이들은 거기에, 자기들의 이야기 속에 살아 있다.
그러나 유축기로 젖을 짜내던 가슴이들은 문득 이렇게 질문한다. “이 아기에게 젖을 다 먹이면, 우린 이제 존재할 이유가 없어지는 거야. 우리가 삶으로부터 더 이상 기대할 게 남은 걸까?” 이 질문은 말 그대로 가슴 아프다. 바르브린이 이상적인 발레리나의 몸에 대한 규범에 갇혀 있었듯이, 가슴이들은 그들의 유일무이한 규범인 ‘기능’이 정지되는 순간 그들의 존재 의의도 마감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기능 없는 신체라는 아름다운 말은 가슴이들에게 일종의 자기종언일 뿐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왼쪽이와 오른쪽이가 이야기의 끝을 상상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면 바르브린의 서사와 가슴이들의 서사는 서로를 마주보게 된다. 예술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발레리나와 쓸모없어진 가슴들은 앞으로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데 ‘예술’과 ‘기능’이라는 규범이 본래 나의 것이 아니었다면, 그 모든 것이 물러난 후에야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나의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큰 가슴의 발레리나>의 공연 사진. 바르브린이 양팔을 몸통에서 조금 뗀 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랩스커트의 허리끈이 풀려 안쪽의 하얀색 바지가 드러나 있다. 
            뒤쪽에 쌓인 육각형의 구조물들 사이로 희미하게 오른쪽이와 왼쪽이가 보인다. 
            오른쪽이는 구조물 위쪽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고, 왼쪽이는 엎드린 자세로 구조물 아래쪽 빈 공간으로 상반신을 내밀고 있다.

제4회 페미니즘 연극제 참가작 <밑낯>에서 성희주는 빈 장구통을 자궁으로 삼고 장구끈을 생리혈로 삼아 월경에 관한 퍼포먼스를 펼친 적이 있다. 이 공연에서 성희주는 월경을 조롱하고 터부시하는 외부의 시선과 신체 내부에서 치밀어오르는 고통이라는 이중의 압력 속에서 흔들리고 좌절하는 여성의 몸을 춤새로 표현한다. 성희주의 어깨에 둘러 매인 장구통은 마치 바르브린이 그토록 떼어내고 싶어했던 “저주받은 역사”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밑낯>의 마지막 장면에서 성희주는 빈 장구통을 들어서 그 너머로 세상을 바라본다. 결별과 공존의 욕망 사이에서 어찌할 수 없이 서로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신체와 ‘나’는 함께 어떤 이야기의 길을 낸다. 비관도 낙관도 의미 없어지는 고요한 시선의 길을.
<큰 가슴의 발레리나>라는 이야기가 도달한 결말은 <밑낯>의 결말과 유사한 질감을 느끼게 한다. 뉴욕의 즉흥 무용 아뜰리에로 간 바르브린은 어떤 공연의 콘셉트를 스케치하듯이 나직하게 말한다. 무용수들이 무대에서 날아다니다가 풍선이 뻥, 하고 터지면 추락과 착지, 그리고 도약을 반복하는 공연.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나를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마술 같은 도약보다 지상으로 맥없이 떨어지고, 매번 다른 동작으로 착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공연. 바르브린이 가슴이들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등장하지 않지만, 그가 상상하고 있는 이 공연은 무대에서 퇴장하고 없는 가슴이들에게 헌정하는 공연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화해일까. 아니면 이야기도 아닌 이야기를 살아가게 될 존재들의 파장이 잠시 맞닿은 것일까. <큰 가슴의 발레리나>는 객석에 앉은 모든 ‘나’의 이야기를 여생(餘生)으로 열어놓으며 그렇게 암전 속으로 사라진다.

<큰 가슴의 발레리나>의 공연 사진. 왼쪽이와 오른쪽이가 서로 등을 돌린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오른쪽이는 왼쪽 다리를 접고 오른쪽 무릎을 세워 고개를 기대고 있고, 왼쪽이는 오른쪽 다리를 쭉 펴고 왼쪽 무릎을 세운 채다. 
            모두 상심한 표정으로 바닥을 바라본다. 그들의 옆으로 육각형의 구조물이 누워 있거나 세워져 있다.

[사진 촬영: ⓒ장호]

<큰 가슴의 발레리나>
  • 일자 2023.8.31 ~ 9.10
  • 장소 예술공간 혜화
  • 원안 베로니크 셀 출연 김찰리, 신문영, 원채리 기획 박은호 각색·연출 심지후 연출부·자막 김수려 드라마터그 장지영 움직임 연출 손지민 액팅코치 장재키 무대 장호 음향 임서진 조명 박유진 그래픽 황가림 음향 오퍼레이터 한새롬 조명 오퍼레이터 김태령 티켓매니저 김섬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서울시 서울형 창작극장
    Adapted from La Ballerine aux gros seins ⓒArthaud, 2018 ⓒMunhakSeGyeSa for the Korean Translation
    2023년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 선정 프로젝트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1070
  1. 유연주, 「자기 목소리를 찾기까지: 윤상은, <죽는 장면>」, 『연극in』, 2020. 7. 23. https://www.sfac.or.kr/theater/WZ020400/webzine_view.do?wtIdx=1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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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조

김민조
협단체에 소속되지 않은 프리랜서 비평가를 지향합니다.
동시대 퀴어, 페미니즘, 장애, 포스트휴먼 연극의 흐름에 대한 반응과 아카이빙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 밖으로 나오기와 공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를 잘 못해서 큰일입니다.
wingmn1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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