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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것은 사이에 있다

프로젝트날다 X 컴퍼니 InVivo <녹색지능>

장지영

제243호

2023.10.12

아름다운 것들

보라매공원의 플라타너스길. 푸르고 높게 뻗은 나무에 줄이 매여 있다.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단단히 매인 줄에, 다섯 명의 퍼포머가 오른다. 비닐에 싸인 채 바닥을 구르거나, 줄에 매달려 오르기를 반복하던 퍼포머는, 이윽고 비닐을 벗어난다. 나무의 형상을 한 오브제가 바닥에 놓여 있고, 퍼포머는 오브제를 활용해 움직인다. 나무 오브제에 몸을 의지했다가, 나무 오브제를 몸으로 지탱하기도 한다. 마치 나무와 유기적으로 이어진 것 같은 퍼포머의 움직임은 이내 플라타너스에 매인 줄로 이어진다. 퍼포머는 오브제를 줄에 매달고, 오브제와 따로 또 함께 줄에 매달린다. 오브제가 올라가면 퍼포머가 나무에서 멀어지고, 오브제가 내려오면 퍼포머가 가까워지는 균형을 유지하다가, 나무의 형상을 한 오브제에 몸을 완전히 의지하기도 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퍼포머를 단단하게 잡아주고 있는 것은, 보라매공원의 말 없는 플라타너스이다.

<녹색지능>의 공연사진. 플라타너스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나무 사이사이 흙바닥에는 반투명한 흰 비닐에 얽힌 퍼포머들이 누워 있다. 
            벤치와 정자 등에 앉거나 선 시민들이 퍼포머들을 바라본다. 
            퍼포머들의 주변으로 사람 키보다 큰, 줄기와 가지로 이루어진 나무 모양의 회갈색 오브제가 곳곳에 놓여 있고, 플라타너스 나무에는 검은색 로프가 묶여 있다.

중력. 질량이 있는 물체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는 크기로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중력이 작용하는 공간 안에서 나는 내 무게에 비례하는 만큼의 힘으로 지지된다. 내가 서 있는 공간이 나를 받쳐줘야만 나는 떠다니지 않고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은 자명한 진리이지만, 우리는 좀처럼 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믿을 만한 것에는 소홀해지기 마련이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기후 위기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우리 옆에 있는 자연이 당연하지 않다는 느낌은 도무지 들지 않는다. 올여름이 제일 시원한 여름이래, 빙하가 녹고 있대, 그런 말을 들으면 당장 위기감이 닥쳐오지만, 그것이 지금 내가 지나가고 있는 거리의 나무들, 꽃들, 비인간 동물들의 위기로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거기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모든 것들에 삶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 쉽게 잊힌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자명한 진실이다. 공연 내내 여러 그루의 플라타너스는 퍼포머의 몸을 지탱하고, 그들이 완전히 몸을 맡기고 있음에도 아슬아슬하지 않다. 나무가 나무로 인간의 몸을 받쳐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무가 인간의 무게를 감당하듯 우리도 나무의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가을의 공원은 아름답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나뭇잎 사이로 빛나는 햇살, 사람들의 박수 소리, 아이들의 웃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카메라에는 다 담기지 않는 꽃의 색, 가볍게 움직이는 퍼포머들의 몸은 모두 아름답다. 그리고 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배경 속에 있다. 아름다움을 느끼는 인간의 감각에는 비슷한 데가 있다. 여름과 겨울 사이 짧은 가을이, 청명한 하늘과 맑은 공기가,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변해 갈 나뭇잎을 바라보면 행복해진다는 것은 보편적인 감각이다.

<녹색지능>의 공연사진. 줄기와 가지로 이루어진 나무 모양의 회갈색 오브제가 바닥에 놓여 있고, 골반을 오브제에 걸친 채 움직이는 퍼포머가 보인다. 
            아이보리색 상하의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퍼포머는 로프 연결을 위한 회색 하네스를 착용한 채 머리를 바닥에 대고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오른발이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있고, 발끝에서 나뭇잎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빛난다. 
            그 뒤로 핑크색 상의와 아이보리색 바지를 입은 퍼포머가 허리를 숙인 모습과, 이를 바라보는 관람객의 모습, 초점이 흐릿한 나무들이 보인다.

<녹색지능>은 발전하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환경이라는, 그 환경을 바라볼 수 있는 능력에 이름을 붙이자면 ‘녹색지능’일 것이라는 착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녹색지능은 아름다움을 감각할 수 있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일상에서 만나는 이 모든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며, 영원하지 않을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 이 지능을 가진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녹색지능을 이미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부지불식간에 일상에 깊게 침투해 있는 인공지능처럼 녹색지능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우리 모두의 감각에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필요한 것은 그 지능을 깨우고 개발하여 사용하는 능력일 뿐일 테다. 지구는 미래 세대에게서 빌려온 것이라느니, 인간과 비인간이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라느니 하는 윤리적인 레토릭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우리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우리 안의 녹색지능을 깨울 수 있다면, 인간만 존재해서는 아름다울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사이에서

사람들은 오고 간다. 가을의 공원, 처음부터 끝까지 정자세로 앉아 핸드폰을 끄고 공연을 보는 사람은 없다. 아이들은 뛰어다니고, 강아지는 이곳저곳 냄새를 맡고, 어른들은 공연장 주위를 지나간다. 공연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는 거리예술이, 인간과 가장 가까운 자연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지 모른다. 이 공연에서 관객은 퍼포머를 보는 동시에 주위를 바라봐야 한다. 퍼포머가 몸을 의지하는 나무를 함께 바라봐야 한다. 퍼포머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렇게 공연을 보고 있자면 다른 사람들, 동물들과 식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 나와 함께 이 공간에 존재하는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이 모두 공연의 한 장면에 담긴다. 극장 안에서 체험하지 못했던 것들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서 있는 공간을 온몸으로 느낀다. 감각으로 다가온다. 그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보세요, 이런 걸 잃어버리고 있어요. 이 사이에 있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녹색지능>의 공연사진. 플라타너스 나무들을 배경으로, 줄기와 가지로 이루어진 나무 모양의 회갈색 오브제 두 개가 로프에 걸려 허공에 떠 있다. 
            흡사 나무가 거꾸로 매달려 있는 모습이다. 각각의 오브제에는 퍼포머가 한 명씩 올라 앉아있다. 
            이들은 오브제에 엉덩이를 걸치고, 머리를 기대 몸의 무게를 모두 오브제에 싣지만, 편안한 모습이다. 
            한편 오브제의 오른편으로 탄성이 있는 굵은 로프에 매달린 채 남색 산악로프를 잡아당겨 움직이는 퍼포머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카키색 상의를 입었으며, 오브제에 기댄 두 명의 퍼포머보다 높은 위치에 매달려 있다.

객석과 무대가 분리된, 갇힌 공간인 극장 안에서는 환상이 만들어진다. 무대에 현존하는 배우의 몸과 무대장치들이 만들어낸 환상으로 공연은 실재한다. 나는 거리예술에서 연극의 실재를 만난다. 일방적인 교훈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고도, 또 직접적인 선전선동을 활용하지 않고도,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타인을 바라보고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사회를 바꾸는 데 기여할 수 있1)는 것을 실재의 연극이라 부를 때, 이 작품이야말로 실재의 연극이지 않을까.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들의 눈과 귀, 피부로 느껴지는 감각에는 퍼포머 이외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녹색지능>은 거리라는 공간을 무대로,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에 현존하는 모든 것을 호흡하고 느끼게 한다. 어떠한 말이나 직접적 메시지 없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말한다. 그것은 거리예술만이 가진 고유의 힘이다. 내 주변에서 살아 움직이는 인간과 비인간이 모두 함께 공연의 주체가 되는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녹색지능>은 관객들의 마음 깊은 곳의 녹색지능을 깨운다. 이 모든 아름다운 존재들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여, 우리가 무엇을 잃고 있으며 또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전한다.
이 공연이 기후 위기를 말하는 어떤 공연보다도 더 깊게 다가왔던 것은 그날의 공기, 바람, 나무, 사람들이 공연에 포함되어 있어서일 것이다. 우리는 땅을 딛고, 지구를 이루는 모든 것들 사이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공연을 하는 일도, 공연을 보는 일도 그 사이에서만 가능하다. 모든 것은 사이에 있다.

<녹색지능>의 공연사진. 나무들 사이로 세 개의 나무 오브제와 각각의 오브제에 기대어 앉은 세 명의 퍼포머가 보인다. 
            오른편에는 탄성이 있는 줄에 매달린 퍼포머가, 나무의 꼭대기쯤에는 나무들 사이로 연결된 로프에 거꾸로 매달린 퍼포머가 보인다. 
            주변을 둘러싼 관객들의 시선이 높은 곳을 향해 있다.

[사진 제공: 프로젝트 날다 / 촬영: 이미지작업장_박태양]

프로젝트날다 X 컴퍼니 InVivo <녹색지능>
  1. 김슬기, 「이야기 당사자가 등장하는 연극 무대에서의 실재 -네지 피진 <모티베이션 대행>(2012)과 크리에이티브 바키 <몇 가지 방식의 대화들>(2014)을 중심으로」, 『드라마연구』 29쪽,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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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영

장지영
드라마터그.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많다.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것은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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