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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부터 살아남기

극단 이와삼 <증발>

진송

제243호

2023.10.12

극단 이와삼의 연극 <증발>은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의 기사 「40대에 사라졌던 동생, 6년 만에 낯선 노인으로…[히어로콘텐츠/증발]」1)을 소재로 하여 ‘증발자’의 존재를 다룬다. ‘증발자’란 경제적 어려움 및 정서적 고통 등을 이유로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를 모두 단절하고 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리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자발적인 실종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증발>의 전개는 실종자 양재준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을 따른다. 이는 미스터리물이나 스릴러물의 전개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기자 윤노을은 실종자 양재준의 동생 양정원으로부터 양재준을 추적하는 기사를 써줄 것을 요청받는다. 윤노을은 마치 형사 혹은 탐정처럼 양재준의 행방을 알려줄 증거를 수집하기 시작한다.
연극은 그 역시도 미스터리물의 성격을 띠고 있었던 영화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을 연상케 하며 스마트폰의 녹음 기능을 연출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윤노을이 녹음한 증인들의 음성은 마치 <헤어질 결심>의 형사 장해준의 칠판에 고정된 증거사진들처럼 기능하며 파편적인 사건의 전말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한다.

<증발>의 공연 사진. 검은색 프레임을 제외하면 아무 대소도구가 없는 검은 빈 무대에 세 사람이 서 있다. 
            가장 왼쪽부터 연한 보라색 티셔츠 위에 연한 하늘색 셔츠를 입은 해준, 태양 그림이 그려진 화려한 티셔츠와 군복색 반바지를 입은 집주인, 
            하늘색 셔츠와 청바지 위에 연한 갈색 재킷을 입고 회색 노트북 가방을 멘 윤기자다. 
            윤기자는 손바닥만 한 노트에 무언가를 쓰며 정면을 바라보고, 집주인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윤기자를 바라보고 있으며, 해준은 그런 집주인을 바라보고 있다.

산발적으로 흩어진 증언의 조각들은 순차적으로 늘어선 헨젤과 그레텔의 빵조각처럼 윤노을과 관객들을 진실로 이끄는 길의 기능을 하지 않는다. 그보다 증인들을 모두 무대 위에 세운 채 녹음파일의 재생과 중지를 활용하여 무대 곳곳에서 진실을 둘러싼 사건이 입체적으로 재현될 수 있게 한다. 양재준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기도, 서로 어긋나기도 하는 증언들 사이에서 진실은 쉽사리 포착되지 않는다. 대신 진실이 도사리고 있다고 추정되는 곳 - 진실의 핵과 같은 곳에서, 그것은 광기로 경험된다.
실종자 양재준은 대기업에서 근무하다 동료들의 정리해고에서 부당함을 느끼고 자진 퇴사한다. 이후 새로운 출발을 꿈꾸며 치킨집을 창업하지만 영업난으로 가족 간의 불화와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고, 이혼 후 건설노동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전에 근무하던 기업에서도 부조리를 견디지 못했던 그는 고심 끝에 청렴하기로 유명한 은하건설의 하청업체에 취업하지만, 그곳에서 건설 현장의 벽이 무너져 한쪽 팔을 다치는 큰 사고를 겪은 후 고작 8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하는 하청업체의 부당함에 또 한 번 부딪힌다.
하청업체 측은 양재준의 동료 김해준이 벽을 밀어 사고가 발생했으니 김해준에게 보상금을 지불받으라고 주장하고, 김해준은 벽이 흔들리다가 저절로 무너졌다고 주장한다. 팔을 다쳐 더 이상 노동을 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인 양재준은 자신의 팔을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인지, 보상의 주체가 누구여야 하는지에 대한 두 가지 반대되는 증언 앞에서 진실을 좇기를 중단한다. 어느 쪽이 사실인지와 무관하게 거대 건설업체를 대상으로 소송을 할 수도, 가난한 김해준에게 보상금을 얻어낼 수도 없는 양재준의 상황은 그 자체로 취약한 노동자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실을 보여준다.

<증발>의 공연 사진. 세로로 긴 직사각형의 검은 프레임이 객석을 향해 넘어지고, 정면을 본 채 프레임 안에 선 윤기자가 한쪽 무릎을 꺾고 
            허리를 숙인 자세로 몸을 낮춰 앞으로 오른손을 뻗고 있다. 
            윤기자 뒤로 프레임 바깥에서 양손을 애매하게 앞으로 뻗은 해준이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무표정하게 정면을 바라본다.

한편 마침내 양재준이 진실을 찾기를 중단했던 그 지점이면서, 그의 행방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된 증발의 지점에 도달한 윤노을은 양재준이 경험했던 것과 같은 정신이상 증세를 경험한다. 양재준과 윤노을은 충돌하는 두 가지 증언 중 무엇이 사실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나아갈 수 없는 지점에 이르러 환청을 경험한다. 환청은 기업의 부당한 횡포로부터 야기된 양재준의 숱한 실패들, 그리고 은하건설과 언론사 측의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실을 좇는 데 자꾸 좌절하고 마는 윤노을의 실패를 비난한다. 양재준과 윤노을이 완전히 다른 지점에서 출발한, 사회적 위치와 환경이 전혀 다른 이들임에도 불구하고 같은 진실의 주변부에 도달했을 때 같은 광기의 증상을 경험했다는 것은 특정 상황이 아니라 진실을 포착할 수 없게 하는 사회적 힘, 혹은 진실을 포착하는 것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사회적 힘이야말로 진실을 발화할 수 없게 만드는 조건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양재준의 증발을, 진실을 대면한 자의 선택이 아니라 선택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힘의 강한 압박에 내몰린 결과로서 재현한다. 끝내 진실을 좇기를 포기하는 윤노을의 경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재현은 부당한 현실이 만들어낸 비극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고 사회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사유할 수 있게 하는 효과를 가진다. 이 연극의 전개 방식을 따른다면 양재준의 자리에 윤노을이 위치했어도, 혹은 윤노을이 아닌 다른 인물이 위치했어도 결말은 같았을 것이며 개인의 문제를 사회적인 조건의 문제로 재현해낸 것이야말로 이 연극의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증발>의 공연 사진. 넘어진 프레임 안에 흰 셔츠를 입은 채 쪼그리고 앉은 한 사람의 뒷모습이 보이고, 
            그를 바라보며 마주보고 선 현장소장과 해준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 
            남색 작업조끼와 검은 바지를 입고 서류철을 왼손에 든 현장소장은 오른손을 악수하듯 뻗으며 단호한 표정이고, 
            그의 오른편에 선 해준은 설득하는 듯한 표정이다. 이들의 오른편, 객석과 가까운 위치에 정원이 고개를 돌린 채 서있다. 
            정원에게는 조명이 직접 닿지 않아 얼굴이 어둡지만 그가 다소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이 성취 앞에서 나는 섣불리 감탄하는 대신 잠깐 멈춰 서게 된다. 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적 현실을 개인의 문제로 축소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그 비극적 현실로부터 살아남은 누군가가 가진 삶의 역량을 생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 않은지를 의문하게 된다. 증발자를 다룬 동아일보의 기사 「40대에 사라졌던 동생, 6년 만에 낯선 노인으로…[히어로콘텐츠/증발]」은 마지막 문장에서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당신, 정말 벼랑 끝까지 밀려나 본 적이 있나요?” 양재준은 이에 당당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양재준은 벼랑 끝에서 밀려난 이후 단순히 ‘증발’하는 것을 선택한 사람에 그치지는 않는다. 그는 사회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집으로, 공원으로, 하늘에서 환청이 쏟아지는 공원을 떠나 또 다른 어딘가로 계속해서 나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니 그를, 진실을 무력하게 하는 힘을 마주하고 미쳐버린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힘을 목격하고도 진실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말해봐도 좋겠다.
증발자가 기존의 사회적 관계 밖에서 모색하기로 결심한 삶, 그 역시 비극적 연극의 결말에 그치지 않는 현재 진행 중인 누군가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증발한 이들, 노숙자, 홈리스, 부랑자 등 다양한 단어로 일컬어지는 그들이 죽음의 위험과 유혹에 등을 맞댄 채로도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며 노숙인의 복지와 인권을 위해 힘쓰고 있음을 새삼스럽게 환기하고자 한다.

<증발>의 공연 사진. 사진의 오른편에는 어두운 하늘색 반소매 셔츠를 입은 윤기자가 오른쪽 어깨에 멘 노트북 가방의 끈을 왼손으로 잡은 채 허공을 보고 서 있다. 
            사진의 왼편 뒤쪽으로는 투명한 비닐우산을 쓴 정원이 눈을 감고 벤치에 앉아 있다. 
            검은 계열의 슬랙스와 카키색 반소매 재킷을 입은 정원은 오른쪽 어깨에 에코백을 메고, 무릎 위에는 서류 봉투를 올려두었다.

[사진 촬영: 김명집 @myungjib]

극단 이와삼 <증발>
  • 일자 2023.9.15 ~ 9.24
  • 장소 예술공간 혜화
  • 예술감독 장우재 이수영, 김동규 연출 김동규 출연 이성재, 황윤지, 조형락, 오승현, 안준호, 신정연, 양믿음, 라소영 조연출 김대근 조명 손정은 의상 김지연 분장 장경숙 음악 김진희 기획 박서우 그래픽 라소영 음향오퍼 이영우 조명오퍼 김대근 주최·주관 극단 이와삼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중장기창작지원사업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2428
  1. 「40대에 사라졌던 동생, 6년 만에 낯선 노인으로…[히어로콘텐츠/증발]」, 『동아일보』,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20201005/103237557/1, 2020.10.5. 입력, 2023.1.18.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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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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