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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하마티아를 찾아서

2023 SPAF 구자하/캄포
하마티아 삼부작: <한국 연극의 역사>, <롤링 앤 롤링>, <쿠쿠>

권나은

제244호

2023.10.26

방송인 타일러 라쉬(Tyler Rasch)가 출연하여 화제가 된 영어 플랫폼 광고를 떠올려 보자. 말끔한 옷차림의 백인 남성 타일러 라쉬가, 특정한 한국어 문장을 영어로 어떻게 표현하는지 묻는다. 3초간 정적이 흐른다. 한국인은 최선을 다해 자신이 배운 영어 표현을 떠올린다. 한국인의 답은 매번 오답/어색한 답으로 귀결된다. 타일러는 친절한 말투로 문장을 교정한다. 나는 이 광고가 한국인의 콤플렉스를 영리하게 겨냥했다고 느꼈다. 한국인은 오랜 시간 영어를 배우지만 왜인지 자신의 영어를 수치스럽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영어로 의사소통을 유창하게 하는 사람조차 자신이 영어를 잘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영어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 큰 사회이기 때문일까. 한국에서 영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이 아니며 화자의 계급이나 학력, 배경 등을 은근히 가늠할 수 있는 평가 척도에 가깝다. 평가 기준은 생각보다 세밀하다. 우리는 어법에 맞게 말하고, 어휘를 세련되게 사용해야 한다. 동시에 원어민처럼 자연스러운 태도까지 보여주어야 한다. 최근 ‘슬랭’ 등을 알려주는 콘텐츠가 늘어난 이유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한국인은 외부 승인을 중요하게 여긴다. 여기서 외부는 서구 사회, 구체적으로는 미국과 서유럽 일부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적 선망은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므로, 케이팝이 해외에서 아무리 인기를 얻어도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한국은 선진국이지만 한국인의 ‘집단 기억’에는 가난, 전쟁, 식민지의 경험이 각인돼 있다. 한국인은 자신의 나라를 좋아하면서도 어떤 부분을 지긋지긋하게 느낀다. 이런 정서는 ‘탈조선’이라는 밈, 집단 자조로 이어진다. 한국을 의인화하면, ‘역경을 딛고 성공했으며, 성실하고 재능도 넘치지만, 알 수 없는 자기혐오에 시달리는 친구’가 아닐까?

<쿠쿠>의 공연 사진. 검은 무대에 검은색 가로로 긴 직육면체 모양의 테이블이 하나 놓여있고, 그 위에 전기밥솥 세 개가 놓여있다. 
            제일 왼쪽에는 빨간색 구형 밥솥이 놓여있고, 우측 두 개는 흰색 신형 밥솥이다. 신형 밥솥 사이로 테이블 뒤에 앉은 구자하가 보인다. 
            검은 반소매 티셔츠를 입은 그는 얇은 뿔테 안경을 썼다. 
            무대 상단에는 ‘그렇게 시작된 저의 리서치는, 결국 뉴욕에 사는 한 남자에게 도달하게 됩니다’라는 한글 자막이 띄워져 있고, 테이블의 앞면에는 영문 자막이 영사되고 있다.
<쿠쿠>

구자하의 하마티아 삼부작은 한국인의 자기혐오를 관통하는 작업이다. <쿠쿠>는 쌀밥을 매개로 IMF와 경제 주권을, <롤링 앤 롤링>은 L/R 발음 논란을 매개로 영어 제일주의와 문화제국주의를, <한국 연극의 역사>는 서양 연극사를 수용하며 발전한 한국 연극의 비애를 논하는 작품이다. 구자하는 삼부작을 통해 한국인의 삶이, 서구라는 ‘스탠다드’를 의식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는 사실을 짚어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구자하는 한국/한국인/한국 사회에 대한 편집자적 논평을 지양한다. 오히려 그는 한국이라는 테마를 빌려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데 몰두한다. 이 작업은 사적 에세이에 가깝다. 구자하는 과거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식적으로 세 작업 모두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해서 큰 이야기로 확장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처음부터 내 정체성에 대한 테마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작업의 맥락을 스스로 검증하면서 점차 정체성 정치학(identity politics)이 발현된 것 같다. 해외에 있다 보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어떤 곳인지 등.” 1)

하마티아 삼부작에는 구자하의 ‘죽은 지인(혹은 죽음의 문턱에 있는 지인)’들이 등장한다. <쿠쿠>에는 자살한 친구 제리가, <롤링 앤 롤링>에는 죽은 네덜란드인 영어 선생님이, <한국 연극의 역사>에는 할머니가 나온다. 망자들을 소환해서일까. 하마티아 삼부작 무대는 전체적으로 제의 현장에 가깝다. 구자하는 <한국 연극의 역사>에서 몇 가지 오브제만으로 한국식 제사를 구현한다. 무대 뒤의 영상은 제사 병풍과 유사하며, 밥솥은 제삿밥과 유사하다. 아기 두꺼비 오리가미는 질문하는 ‘후손’의 역할을 한다. 제단 앞 녹음기는 영혼의 목소리를 듣는 수단이다. <쿠쿠>에서 구자하는 밥솥으로 밥을 짓는다. 김이 무대 위로 피어오르는 광경은 제사의 향을 연상하게 한다. 제의는 <한국 연극의 역사>에서 고풀이(씻김굿 의례)로 마무리된다. 구자하는 연극 내내 바닥에서 매듭을 만들다가, 연극이 끝나기 전 매듭을 기둥에 고정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구자하는 연극이라는 형식을 이용하여, 한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경유하여 제사를 지내고 싶었던 걸까. 제사는 산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명제를 참고할 때, 구자하가 제사를 올리는 대상은 그의 자기혐오를 자극하는 총체이기도 하다. 이는 한국 사회의 상흔과 맞닿아 있다. <쿠쿠>에서 그는 죽은 친구 제리 이야기와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로 죽은 김군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병치한다. <한국 연극의 역사>에서 그는 할머니 이야기와 일제 강점기를 병치한다.

<한국 연극의 역사>의 공연 사진. 무대 바닥과 벽면에 한국의 전통 탈을 쓴 사람의 영상이 영사되는데, 전체적으로 붉은색과 노란색의 이미지다. 
            그 앞에서 검은 옷을 입은 구자하가 고풀이를 한다. 조명 때문에 그의 실루엣이 도드라진다. 매듭이 모두 풀린 긴 하얀 천이 둥글게 휘날린다. 
            무대 중앙에는 의자 높이의 가로로 긴 직육면체 대도구가 있고, 그 위에는 흰색 밥솥과 카세트 플레이어가 놓여 있다.
<한국 연극의 역사>

<롤링 앤 롤링>에서 그는 죽은 네덜란드인 영어 강사를 소환한다. 그는 종종 구자하의 꿈에 등장한다. 무대 뒤 영상을 통해 꿈 풍경이 드러난다. 영어 강사는 구자하와 대화를 나누다가 대뜸 “너 언제까지 한국어로 꿈을 꿀래?”라고 질문한다. 이 장면에서 적지 않은 관객이 폭소를 터뜨리는데, 이는 경쟁적인 분위기에서 영어를 학습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말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영어 학원/학습지 광고에는 언제나 ‘우리 아이는 해리포터를 영어로 읽어요’, ‘우리 아이는 꿈도 영어로 꾼답니다’ 따위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이 대사를 한국인의 극성(極盛)에 관한 은유로 읽었다. 극성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형성한 힘이지만, 한국인이 숨기고자 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어쩐지 억척스럽고 우아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인에게 우아함이란, 미디어에 노출되는 여유로운 서구 사회의 모습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렇지만 <쿠쿠>가 묘사하는 대로 한국은 ‘압력 사회’다. 여유와는 거리가 멀다.

구자하는 자신이 거쳐온 길, 하마티아, 외부에서 받아온 압력을 나름대로 담백하게 공개한다. <한국 연극의 역사>에서 그는 대뜸 자기가 연극을 시작한 계기를 털어놓는다. 그는 고등학교 때 밴드부에 가입하려고 했으나 그의 아버지는 연극부를 권했다. 아버지가 연극에 관한 대의를 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구자하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단지 연극부가 아들의 사투리를 고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구자하는 시골에서 자랐지만 아버지는 왜인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갖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아들에게 “너는 서울 사람”이라고 거듭 강조하여 말했다. 그렇지만 구자하는 무대 위에서, 수많은 관객 앞에서, 굳이 다시 시골로 돌아간다. 시골은 그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롤링 앤 롤링>의 공연 사진. 검은 무대의 뒷벽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나란히 두 개의 영상이 영사되고 있다. 
            두 정사각형 모두 흰 배경으로, 왼편 사각형의 상단에는 ‘and he like to tell me; I was there at that time’이라는 영문 자막이 띄워져 있고, 
            오른편 사각형에는 여러 대의 마이크가 설치된 테이블 앞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흑백의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 
            중앙에 앉은 이가 앞에 놓인 서류에 서명을 하고, 좌우에 앉은 이들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그 앞쪽으로 오디오 믹서를 올려둔 검은색 긴 직육면체 테이블이 놓여있다. 
            구자하는 오른손을 오디오 믹서에 올려두고 왼손을 들어 무대 뒷벽에 영사된 이미지를 가리킨다. 
            테이블 앞면에는 ““내가 그때 여기에 있었다니까.”라고 말하곤 했어요.”라는 자막이 나오고 있다.
<롤링 앤 롤링>

그는 근원과 거리를 두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영어 말하기에서도 드러난다. <롤링 앤 롤링>에서 구자하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보여준다. 영어로 한국시를 낭송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는 전형적인 아시안처럼 말한다. 한국에서는 사람들이 자신의 발음을 자조하는 의미로 ‘발음이 정직한’이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는데, 굳이 따지면 구자하의 발음은 이와 비슷하다. 원어민처럼 말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예를 들어 구자하는 ‘understanding’을 ‘언더스탠딩’이라고 발음한다. 대신 그는 의미를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LOLLING & ROLLING”이 한국인의 편집적인 발음 집착을 드러내는 제목임을 감안할 때, 그의 발음은 퍼포머의 정직한 태도를 부각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나는 구자하 이야기를 예전부터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다. 본인은 어떻게 인식할지 몰라도, 그는 유럽에서 인정받은 한국 연극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구자하 작품을 보기도 전에 그에 관한 상을 먼저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잔상을 걷어내고 작품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문득 그에 관한 부수적인 정보들이 연극 주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극이 끝나고 ‘유럽 백인이 좋아할 작품’이라는 악평을 복수의 동료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혹평이 어떤 맥락에서 비롯되었는지 이해가 되기도 하지만, 나는 이러한 발화에 등장하는 ‘유럽 백인’ 역시 유령 같은 존재라고 여긴다. 서구는 추상적 기표이기에, 물질적 공간과 실체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서구 사회의 한국인은 어떤 태도로 자기 나라 이야기를 해야 할까? 자랑해야 할까? 혹은 자조해야 할까? 백인의 반응은 어떤 척도가 될 수 있을까? 백인이 좋아해야/불쾌해해야 좋은 공연일까? 그는 누구인가? 우리는 서구의 시선을 깊이 의식하지만, 그에 비해 서구를 잘 모른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구자하의 미덕에 더 주목하고 싶다. 한국인의 하마티아에도 불구하고 그는 정직한 ‘KOREAN theater maker’였다.

<롤링 앤 롤링>의 공연 사진. 검은 옷을 입은 구자하가 양손으로 오디오 믹서를 조종하고 있다. 
            그는 얇은 뿔테 안경을 쓰고 검은색 긴소매 셔츠를 입고 있으며, 검은색 헤드셋을 목에 걸었다.
<롤링 앤 롤링>

* <롤링 앤 롤링>, <한국 연극의 역사>는 극장에서 관람하였고, <쿠쿠>는 개인 사정으로 영상으로 관람하였습니다. 영상은 극장의 환경과 맥락을 모두 반영하지 못하기에, 영상을 보고 리뷰를 쓰는 행위를 평소 엄격히 지양하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에는 <하마티아 삼부작> 전체를 아우르는 리뷰를 써야 하는 상황이었으므로 예외적으로 영상을 참고했습니다. 평론 윤리를 지키기 위해 해당 사실을 밝힙니다.

[사진 제공: 2023 서울국제공연예술제 / 촬영: 옥상훈]

2023 SPAF 구자하/캄포 <하마티아 3부작>
  • 일자 2023.10.12 ~ 10.15
  •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 <롤링 앤 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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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쿠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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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주영, 구자하, 「[연극인이 만난 사람] 구자하X고주영 그럼에도 ‘연극’하는 사람」, 『연극in』, 2019.8.8., sfac.or.kr/theater/WZ020200/webzine_view.do?wtIdx=1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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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나은

권나은
의심을 동력으로 글을 쓴다. 가끔 재미있는 결론에 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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