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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이라는 특권

임시극장 <이리의 땅>

팔도

제244호

2023.10.26

신화에 따르면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는 외조부를 만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반란을 일으켜 왕위를 탈환한다. 새로운 도시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는 로마로 불리게 된다.
연극에 따르면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는 수문지기에게 거둬들여지고 두 발로 걷는 연습을 한다. 인간 아버지의 뜻대로 이족보행 하는 로는 자신을 겁쟁이라 부르고 네발로 기어 이리들에게 돌아가고자 하는 렘을 죽이고 싶다. 하지만 쌍둥이는 외조부를 만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반란을 일으켜 수많은 인간을 살해한 끝에 왕위를 탈환한다. 쌍둥이는 피에 젖은 채 신탁을 기다리고, 용맹한 차기 왕으로 꼽히는 렘은 신탁을 오해해 ‘이리의 땅’으로 향한다. 그러나 더 이상 그곳에 이리는 없고 ‘이리역’을 떠도는 인간 홈리스들만이 있다. 이곳의 누구도 이리의 젖을 먹고 자란 쌍둥이의 신화 따위에 신경 쓰지 않건만 렘과 달리 영웅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로는 기어코 이리역에 폭탄을 터뜨려 렘을 포함해 이리역을 떠돌던 모든 존재를 죽인다. 곁에 있던 모든 존재가 사라진 후에 로의 후천적 장애에 얽힌 비밀도 드러난다. 로는 자신과 렘이 대치하던 똑같은 장면을 다른 배우가 연기하는 광경과 맞닥뜨리고, 그 로의 다리를 물어뜯는다. 미래 혹은 과거의 스스로를 멈추기 위해서다.

검은색 두건과 검은색 가디건, 긴 검은색 치마를 입은 인물이 손에 마이크를 들고 무대 중앙에 서 있다. 
            그 뒤에 일렬로 선 네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앞에 선 이에게 몸이 완전히 가려진 채 양팔을 각각 다른 방향으로 쫙 펴고 있다. 
            12시, 2시, 4시, 5시, 7시, 8시, 10시 방향으로 뻗은, 검은 옷을 입은 팔들만 드러나 있다. 
            무대는 전체적으로 어둡고 이들에게 푸른빛 조명이 들어오는 가운데, 무대 뒷벽에 영문과 한글 자막, 사운드 정보가 영사되고 있다. 
            말하는 이는 여직공이며, 그 대사는 “난 이 기찻길에서 죽으려는 사람을 발견했다.”이다.

이리에게 배운 것

로는 피가 철철 나도록 살점을 물어뜯는 법을 이리에게 배웠을 것이다. 사족보행 하는 법, 다른 존재의 울음에 귀 기울이고 헤아리는 법, 너무 어린 양은 사냥하지 않는 법 모두 사실 이리에게 배웠을 테다. 이것들을 처음처럼 연습하면서 로는 다시 시작하고 싶다. 연극은 바로 여기서 막을 내린다. 신화가 아닌 연극은 다시, 달리 반복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
예상 가능하게도 <이리의 땅>은 신화와 연극만이 아니라 인간과 짐승(타자)도 대비한다. 두 발로 걸어 인간의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로와 이리 떼의 울음소리를 잊지 못하고 산기슭처럼 설치된 객석 사이를 네 발로 오가며 우는 렘. 어린 양고기를 먹는 목동 주인이자 쌍둥이의 외조부, 그리고 너무 어린 양을 사냥하지도 버려진 인간 쌍둥이를 해치지도 않는 이리들. 최후의 유일한 영웅이 되길 욕망해 모두를 죽이는 로, 그런 로와 달라지고자 극의 막바지에서 다른 배우들과 사족보행 하는 로. 이렇듯 연극은 신화=영웅=유일자가 되고픈 욕망에 타인을 짓밟는 종류의 ‘인간성’을 어떤 ‘동물성’과 대조되는 것으로 구축하고서 후자를 옹호하고 싶은 듯하다.
그런데 연극이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내레이션이 있다. ‘두려움을 아는 것’이 ‘그들의 특권’이라는 대사다. ‘그들’이란 인간 쌍둥이를 지시하게 되는데, 두려움 많은 로를 타박하던 렘도 2막의 수문지기/여공을 통해 여태 자신을 살린 것이 다름 아닌 두려움이었음을 깨닫고, 쌍둥이는 3막에서 마침내 상생을 위해 두려움이라는 특권을 십분 발휘할 줄 알게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분명 쌍둥이는 사족보행 했는데 내 눈에는 그들이 더 괜찮은 인간으로 거듭난 것처럼, 다시 태어난 것처럼 보였다. 썩 기쁘지는 않았다.
쌍둥이는 이리에게 양육되는 14년의 세월 동안 과연 두려움을 몰랐을까? 당연히 아닐 것이다. 이리 무리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야생에서 살아가기 위해 쌍둥이는 진즉 두려움을 알았고 두려움을 적절히 활용하는 법도 터득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조금 명확히 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로가 이리역에 폭탄을 터뜨린 것은 신화=영웅=유일자가 되지 못한다는 두려움 내지는 열등감, 분노 때문이었고 그 후 로가 후회에 사무치고 환영을 보고 끝내 모두를 되살려 다른 시도를 하기로 결심하는 건 외로움과 죄책감에 관련되는 두려움 덕분이다.
결국 중요한 건 두려움을 안다는 게 인간의 특권이라는 지극히 인간중심주의적인 명제가 아니라, 누구 혹은 무엇에 대한 어떤 종류의 두려움을 우리가 특권으로, 또 역량으로 삼고 가꿔야 하냐는 물음인지도 모른다. 왕의 후계랍시고 온 마을을 몰살하거나 영웅이 되겠답시고 이리역에 폭탄을 터뜨리는 건 인간적인 발상이라고밖에 할 수 없지만, 다른 존재에게 기억되고 욕망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로의 두려움은 딱히 겁쟁이 ‘인간’만의 특권이 아니다. 자신의 생사 여부를 결정할지도 모를, 아마 불합리하고 착취적이기까지 할 그 인정의 구조를 파악하고 체득하는 데에는 거창한 ‘인간적 앎’이 요구되지 않는다.

검은 두건과 검은 망토를 입은 두 인물 사이에, 커다란 그물 속에 갇힌 두 인물이 있다. 
            그물 속 이들은 쪼그려 엎드린 자세로 한 사람은 고개를 숙여 얼굴이 보이지 않고, 다른 한 사람은 고개를 들어 그물 밖 인물을 쳐다본다. 
            그물 밖 인물은 쪼그려 앉은 자세로 그를 쳐다보고 있다. 
            또 다른 그물 밖 인물은 자신의 키보다도 긴 창을 들고 있는데, 뾰족한 창날을 바닥으로 향하게 하고 있다.

유머에게 배운 것

2막에 건너와 이리의 땅도 없어졌고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렘은 차마 자살할 용기가 없어 이리역 사람들에게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진지한 렘의 호소에 돌아오는 건 깔깔대는 웃음소리다. 이리역에 뛰어드는 사람들을 구출하는 일에 은밀한 쾌감, 심지어 삶의 활력을 느끼는 수문지기/여공, 열차에서 태어나 평생을 역에서 살면서 로와 렘의 비극을 유튜브 10분 요약 영상처럼 읊어주는 목동주인/아이, 이들에게 터무니없는 통행료를 요구하면서도 같이 노래하고 투닥거리는 목동/역무원……. 언제 1막의 신화 속 인물을 연기했냐는 듯 능청맞게 움직이는 배우들은 화려한 빌딩 숲을 짓고 살고 싶다고 말만 하고 영원히 황량한 이리역에 머무를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로와 렘의 심각한 이야기를 우스갯소리처럼 넘겨버리는 2막을 저항 없이 즐겼다. 죽고 죽이고 전설이 되네 마네 하는 녀석들을 놀리고 비웃어도 구해주고, 죽여 달라고 부탁해도 죽여주지 않고 웃겨주는 이들이야말로 이 연극에서 가장 많은 걸, 가장 중요한 걸 해낸다. 1막의 이리, 수문지기 아버지, 목동주인 할아버지도, 3막의 (또 심각하고 진지해진) 사족보행 하는 존재들도 아니라 2막의 이상한 어른과 아이들과 계속 살았더라면, ‘다른’ 신화 만들기에 착수하기보다 이리역에 눌러앉았더라면, 쌍둥이는 어떤 밀도와 크기, 모양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갔을까. 이런 질문은 깔깔대는 웃음소리로 답할지도 모른다.

짧은 커트 머리에 위아래로 모두 검은 옷을 입은 인물이 분노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그 뒤로 네 인물이 그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들은 모두 서로 다른 종류의 검은색 모자와 의상을 입고 있다.

[사진 촬영: 김동재]

임시극장 <이리의 땅>
  • 일자 2023.10.6 ~ 10.8
  • 장소 CKL스테이지
  • 작·연출 최현비 배우 권겸민, 김현빈, 김현재, 김효진, 이유라, 장요훈 연출부 김수려, 정한별 음악·연주 동녘 조명 신동선 의상 이윤진 의상어시스턴트 방예원 분장 원진주 그래픽 김나영 무대감독 이라임 무대감독보 박승훤 음향감독 이규원 기획 손서정 기획보조 문채영 조명오퍼레이터 장슬민 음향오퍼레이터 윤수빈 플라잉자문 황성탁(창작중심 단디) 움직임자문 김용빈 접근성매니징 (주)조금다른 음성해설 대본 제작 소재용, 이충현, 최현비 음성해설 오퍼레이터 소재용 자막제작 소재용, 한서연 자막 오퍼레이터 한서연 수어통역 남진영, 백수진, 김보석, 이성실 제작 임시극장
  •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3013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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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팔도
누워있기협동조합의 조합원. 비평과 번역, 아카이빙 행위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연극과 공연에도 관심이 생겼다.
트위터 및 블로그 @todkdlel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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