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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없는 것으로 역사를 쓰기

2023 SPAF 데드센터 <베케트의 방>

진송

제245호

2023.11.09

모두의 기억에서 잊힌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모든 기록을 불태우고 사라진 소수 민족의 언어를 보존할 수 있을까? 거의 없는 것에 대한 역사를 쓸 수 있을까? 보이지 않는 잉크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딱히 모순적일 것 없어 보이는 거의 없는 것과 역사의 관계는 불가사의하다. 역사가 배제하고 누락시켜 온 것, 그리하여 진정으로 치열하게 복원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야말로 바로 ‘거의 없는 것들의 역사’, 즉 소수자들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거의 없음을 강요받은 존재’로서의 소수자가 아니라, ‘거의 없음을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는 존재’로서의 소수자라면 어떨까? 사회적 지위와 계급을 뛰어넘는 난잡하고 익명적인 친밀성을 가능케 하는 퀴어들의 크루징(Crusing)1) 역시 간밤의 만남을 ‘거의 없던’ 일로 하고 휘발되어 버린다. 그러나 난잡함을 가능하게 하는 급진성은 바로 그 ‘거의 없음’에 있다. 서로에 대한 정보가 없기에 사회적인 벽을 넘을 수 있는 것이고, 앞으로에 대한 기약이 없기에 현재에 충실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어반복적으로, 거의 없음을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고 있는 존재로서의 이들은 역사에 쉽사리 기입되지 못한다. 거의 없음을 강요받는 것을 넘어 역사에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지워버리기까지 한다. 거의 없음과 역사의 관계는 이토록 난감하다.
넉넉하지 않은 지면을 감안하고서라도 연극과는 무관한 김종삼의 시에 대한 황인찬의 글 일부를 인용하고자 한다. 산문 「세 번 부정하기」2)에서 황인찬은 김종삼의 「무슨 요일일까」를 비평한다. 그에 따르면 수풀이 무성한 폐병원에 빈 유모차 한 대가 놓여있는 시의 풍경은 “인간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세계를 강렬하게 상징한다”. 페미니즘 리부트를 전후로 한 2010년대 중후반의 강렬한 정치적 변화를 겪은 이후 어떠한 의미로도 환원되지 않는 초월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을 가졌던 황인찬은, 김종삼이 “한국전쟁의 상흔을 평생 짊어져 온 시인은 그 지독한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초월성을 희구했으리라”며 “이 아름다운 세계를 현실도피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고 되묻는다. 김종삼의 시는 처절하게 슬프고 아름답지만, 이 시에서 없음은 역사를 초월함을 통해서만 간신히 역사와 관계를 맺는다. 또한 황인찬의 산문은 시에서 없음(또는 무의미)이 그 자체로 고유한 아름다움을 보장하던 유구한 맥락을 환기시킨다.

<베케트의 방> 공연 사진. 초록빛이 은은하게 도는 벽지와 나무 재질의 책장, 의자, 책상이 있는 가정집의 모습이다. 
            책상 위에는 회색 타자기 하나와 스탠드, 흰색 머그잔이 하나 놓여있다. 타자기 바로 옆에는 재떨이가 놓여 있는데, 그 위쪽 허공에 반쯤 타들어 간 담배 한 대가 떠 있다. 
            책상 위에 있는 이 모든 소품들에는 천장과 좌측 벽에서부터 이어지는 와이어들이 연결되어 있다. 
            책상의 뒤편에는 2층으로 이어지는 목재 계단 난간이 있고, 좌측 벽의 직사각형 프레임 속에 한 여성의 이미지가 드러나 있다.

데드센터의 연극 <베케트의 방>은 거의 없는 것과 역사의 이러한 난감한 관계 속에서 용감하게 ‘없음’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사회적 상황을 재현했다. 연극의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사무엘 베케트와 그의 부인 수잔 뒤메닐이 살고 있던 작은 아파트이다. 데드센터는 2023년 10월 27일 오후 7시 연극 상연이 끝난 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있었던 관객과의 대화에서 사무엘 베케트가 그의 희곡에서 주된 주제의식으로 삼았던 ‘없음(nothingness)’을 구현하기 위해 배우를 무대에서 모두 제거하고 연극을 인형극의 형식으로 구현했다고 밝혔다. 배우를 대신해 사람의 형상을 한 인형(人形)이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유령처럼 비어 있는 배우의 빈자리에 맞추어 커피잔이나 담배, 타자기, 의자 따위의 사물들이 움직이도록 인형극을 구성한 것이다.

<베케트의 방> 공연의 무대 전경을 전면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3면의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은 2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1층 우측에 흰색 출입문이 하나 있고, 출입문의 바로 앞에 초록 벽의 주방이 마련되어 있다. 
            1층의 중앙에는 꽃무늬 벽지 앞에 갈색 가죽 소파와 작은 원형 테이블이 놓여있고, 소파의 왼편으로 등받이 의자 하나가 있어 거실 역할을 한다. 
            이 꽃무늬 벽지에 두 인물의 그림자가 비친다. 하나의 그림자는 의자에 앉은 사람의 형태이며, 다른 그림자는 이보다 더 큰 사이즈인데, 경찰모자를 쓰고 한 손에 총을 들고 있다. 
            총구는 소파를 겨냥하고 있으며, 그림자의 얼굴 옆으로 SCUM PIGS라는 글자가 붉게 영사된다. 
            이 공간의 좌측으로는 책장과 책상이 놓여있는 서재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서재 뒤편으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계단으로 이어진 2층에는 침실공간이 있는데, 그 우측에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화장실 공간이 있다.

그러나 <베케트의 방>은 극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그 자신이 작품의 가장 큰 특색으로 내세운 배우들의 부재와 그 부재가 지닌 ‘없음(nothingness)’을 의미의 ‘있음’으로 코드화해버렸다. <베케트의 방>은 총 3막(순서대로 ‘끝’, ‘중간’, ‘처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장인 ‘처음’에 이르러 막이 오르기 전 무대에 잠시 전쟁이 끝나기 전 프랑스 파리의 이미지를 영사해 보여준다. 그 이미지는 사람이 가득한 파리의 이미지에서 사람이 없는 한산한 파리의 이미지로 변한다. 3막에는 시골로 피난을 갔다 돌아온 베케트와 그의 친구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이 죽어 도시가 한산해진 것에 대한 대화를 나눈다. 이 대화로 인해 사람이 서서히 사라지는 파리의 이미지는 사람이 죽어 한산해진 파리에 대한 코드가 된다. 또한 3막의 수잔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에게 고문 살해당한 한 청년의 죽음에 대해 언급한다. 그런데 연극의 시간상 수잔은 그때 피난을 가 있었으므로 물리적으로 그 청년의 죽음에 대해 알 수 없다. 이 모순으로 인해 연극은 전쟁을 통한 (알려지지 못한) 죽음, 죽음을 통한 사라짐에 대한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게 된다. 3막의 이 모든 급격한 마무리는 인형극의 형식을 통한 부재의 구현을 없음(nothing)의 구현이라는 탈코드화가 아니라 죽음의 구현, 유령의 구현이라는 아주 단순한 코드화로 탈바꿈시킨다.
물론 이 모든 아쉬움은 내가 2023년 10월 27일, 데드센터와 함께하는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하여 배우의 부재가 ‘없음(nothingness)의 구현’을 위한 거라는 언급을 들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 것은 데드센터가 사무엘 베케트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을 연극의 소재로 삼았다는 바로 그 지점에 있다. 사무엘 베케트는 말마따나 없음을 가지고 희곡을 쓰려고 했던 작가이다. 그의 문법을 오마주하여 역사에 대해서 연극을 제대로 만들었다면, 역사의 슬픔을 단순하게 코드화하지 않고 ‘거의 없는 것으로 역사를 쓰기’라는 불가능한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었을까?

<베케트의 방> 무대 전경을 좌측 앞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2층 공간과 1층 서재공간에는 불이 꺼져있고, 1층의 출입문이 열려있다. 
            문의 앞뒤로 밝은 빛이 들어오고, 출입구를 통해 소파 팔걸이 정도 높이의 인형 하나가 들어온다. 
            인형은 풍성한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으며, 검은 머리에 콧날이 오똑하고 광대뼈 아래가 움푹 들어간 생김새이다.

[사진 제공: ⓒ 2023 SPAF 사진 옥상훈]

2023 SPAF 데드센터 <베케트의 방>
  • 일자 2023.10.27 ~ 10.29
  •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 퍼페티어 유제니아 게눈치, 킬리언 오도나차다, 네사 니 추아나이, 한나 오라일리 목소리 샘/브라이언 글리슨, 수잔/바바라 프롭스트, 칼/비비안 드 무잉크, 장교/크리스토프 가웬다, 군인/모리츠 고트발트, 기어/발렌틴 다넨스, 리슬/로렌스 루트후프트 세트 및 인형 디자인 앤드류 클랜시 인형 제작 시아란 보너, 유제니아 게눈치, 제이슨 램버트 조명디자인 스티븐 도드 영상디자인 호세 미겔 히메네스 사운드디자인·음악 케빈 글리슨 사운드디자인 어시스턴트 제니 오말리 의상디자인 샬롯 오할로란 무대감독 올리비아 드레넌 무대감독 어시스턴트 무이리안 니 라갈라이 제작감독 개빈 케네디 비디오테크니션 세바스티안 피사로 세트테크니션 시아란 머피, 조 맥 니콜라스 모션그래픽디자인 에반 에이켄 무대디자인 어시스턴트 플로렌티나 부르세아 드라마터그 니콜라스 존슨 번역/어시스턴트 드라마터그 셀린느 토부아, 피터 크라우치 악센트 코치 안드레아 에인스워스 텍스트 데드센터와 마크 오할로란 프로듀서 틸리 테일러 연출 부시 무카젤과 벤 키드
  • <베케트의 방>은 더블린 게이트 극장과 공동 제작한 작품으로 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더블린 연극 축제에서 발표되었습니다.
    아일랜드 아트센터, 워릭아트센터가 공동으로 커미션 하였습니다.
    괴테인스티투트와 더블린 시의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작품 개발은 National Theatre Studio와 Trinity College Creative Challenge Award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투어지원 컬처아일랜드
  • 관련정보 https://theater.arko.or.kr/product/performance/257944
  1. 길거리나 화장실, 극장, 공원 등의 공공장소 혹은 게이 대상 업소 등을 돌아다니며 데이트 상대를 찾는 일. 한국게이인권단체 친구사이 용어사전. https://chingusai.net/xe/term/116324
  2. 황인찬, 『여기까지가 미래입니다』, 아시아, 65-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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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송

진송
2020년 7월 『문장웹진』에 「남자 없는 여자들」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했다.
비평 콜렉티브 ‘누워있기협동조합’에서 재미있는 기획들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의 구성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블로그 ‘진진송의 블로그(blog.naver.com/zinsongzin)’를 운영 중이다.
zinsongzi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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